2020-08-02

이병철 ‘소확행’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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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소확행’ 유감(有感)/


페북을 통해서도 자주 소통하는 몇 분 지인들의 글에서 ‘소확행’이란 단어를 접하고 궁금해서 그 뜻을 물었더니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벌써 가슴이 따스해지고 설렌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말인가.
날로 불확실성이 높아 가는 세상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

삶의 목표가 결국 행복하기라면 이처럼 확실한 행복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으리라. 모든 수행과 공부, 종교의 목적 또한 이 행복하기에 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불교수행의 목적이 이고득낙(離苦得樂)이라는 것에도 이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런 말이 어찌하여 ‘소확행’이란 용어?로 되었을까. 내가 ‘소확행’이란 단어를 접했을 때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소확행이란 내게 암호나 부호처럼 들린다. 그 의미를 알았을 때도 그런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슴으로 바로 전달되지 않고 머리로 해석되기 때문이라 싶다.

이런 용어들이 주로 젊은 세대들이 즐겨 쓰는 약칭들이고 그런 말이 한둘이 아님을 나도 알고 있다. 세태의 흐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건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런 생각과 태도를 꼰대 짓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하나의 문장이고 그것은 말(언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확행’도 말(언어)일까. 약칭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말일까. 내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으로는 직접적인 의미와 의사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별도의 해석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어나 은어 등과도 비슷한 측면이 없지 않다. 흔히 범죄 집단이나 이른바 조직 등에서 보안이나 동류의식을 누리기 위해 그런 말들을 만들어 쓴다. 빵간(교도소)이나 뒷골목 또는 그늘진 집단에서 즐겨 쓴다. 거기에선 그런 말을 써야 소통이 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도 그런 식으로 쓰여야 하는 말일까.

이와는 좀 다르지만 나는 선생님을 샘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못마땅한 마음이 든다. 선생님은 그냥 호칭이 아니다. ‘아무개 씨’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싶다. 선생님이라 부르기 마땅하지 않으면 아무개 씨, 아무개 님 하면 문제 될 게 없다. 선생이란 말이 사장이란 말처럼 너무 흔해져서 생기는 것일 수도 있는데 선생이라는 말을 쓴다면 ‘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리라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관련해서 생각이 나서 몇 마디 덧붙인다.
무엇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 곧, 사는 것,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그렇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가치가 모든 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가치들은 생명가치에서 파생하는 부차적 가치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것,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먹은 밥을 소화해서 똥오줌을 누는 것,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존재와 관계하는 것, 이 모두가 생명활동 곧 생활이다. 이런 생활을 우리는 삶이라고도 부른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말 그대로 큰일이 난다. 아침에 눈을 뜨고 깨어날 수 없다면, 들이쉰 숨을 내쉴 수 없다면, 먹은 밥을 똥으로 내보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이런 상태로는 확실한 행복은커녕 살아남기에도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고(苦)의 바다에 허우적대는 모습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이 가장 크고 중요한 대사인 것이다. 이는 전혀 소소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해월께서 일용행사 가운데 도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한 것이 이런 의미라 싶다. 이 모두 지극정성으로 마음 모아야 하는 일인 대사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나 공부 또한 일상의 삶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깨어있음이란 생명활동인 일상의 행위에 마음 모으는 것, 곧 거기에 주의(注意)를 오롯이 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참으로 대사이며 중요하고 우선하는 일들이다.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마음을 모아 하는 것이 ‘크고 중요하며 확실한 행복’을 위한 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흔히 나라를 구한다고 함부로 나서거나, 정의를 세우겠다면서 다른 이들을 심판하거나 또는 바른 정치를 하겠다며 나대며 집권욕에 사로잡혀서 편갈라 하는 짓들은 모두 소인배들의 짓거리로 자신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란 생각이 날로 더해간다. 노자께서 불감위 천하선(不敢爲 天下先)을 자신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로 내세운 까닭이 공감된다.

‘소확행’과 관련한 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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