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4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새로 보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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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새로 보기

기사승인 2022.06.25 


-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새로 보기 ⑴




참(至誠)과 대공(大公)의 삶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익히 많이 들어서 지금 다시 말하는 것이 그렇게 새롭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거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도산대로), 그를 기념하는 공원(도산공원)이 있으며, 그가 했다는 여러 말들이 우리 삶에서 종종 회자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다시 그의 삶과 인격, 그가 1878년 평양 대동강 도롱섬에서 태어나서 1938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길을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2019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이어서, 2020년에는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9 혁명,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20세기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주, 민주와 통일을 위해 있었던 기축 사건의 대표적 기념일들이 줄줄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큰 전환기에 태어나서 대한민국 20세기 전반기 역사 전개에서 선생은 여러 중층적 역할과 활동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근본적 토대를 놓으신 분 중의 하나이고, 거기에 더해서 특히 그의 ‘참’과 ‘진실’, ‘정직’과 인간 말의 ‘약속’에 대한 강조가 오늘 21세기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의 현실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정황은 ‘참(truth)’이 무엇이고, ‘진실(誠)’이 무엇이며, 왜 역사와 ‘사실(fact)’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끌어내어서 특정 의견(opinion)과 입장과 관점을 사실과 진실로 포장하고 왜곡시키는 일이 빈번하고, 그것으로써 현실과 실제를 호도하는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되었다. 올해 대선과 지방선거가 모두 끝났지만 요사이 영화 ‘그대가 조국’으로 다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는 ‘조국 또는 윤석열 사태’나 지금은 영부인이 되었지만, 이전의 주가조작이나 학력위조 사건, 더 오래되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사태, 또는 N번방 사건 등이 모두 적나라한 증거이다. 문재인 정부 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관련해서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속내를 폭로한 존 볼턴이나 그 한 당사자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21세기 세계 정치가 어느 정도로 거짓과 왜곡, 자기 이익의 전쟁터로 전락했는가를 실감했었다.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코로나 19 팬데믹까지 겪고 있는 인류의 미래가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한반도의 현실은 거짓과 권모술수, 핵무기 등의 물리적 힘만을 내세우는 세계 강대국들의 횡포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16세 때 평양에서 겪은 청일전쟁에서 나라에 힘이 없으므로 남이 들어와서 마구 전쟁을 저지르는 것을 목도한 안창호 선생은 우선 나라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로 와서 구세학당(救世學堂, 오늘의 경신학교)에 들어가고, 기독교인이 된다. 이후 그의 삶의 여정은 우리가 익히 들었듯이, 미국과 상해, 만주와 유럽 등, 온 세계를 거치면서 어떻게든 나라의 독립과 자주, 주체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노선을 달리하면서 분쟁하는 그룹들을 연결하여 하나 되게 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간 조정자와 조직가, 화해자의 그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1세기를 사는 본인에게 특히 다가온 주제와 개념은 그의 “진실”과 “거짓 없음”에 대한 강조이고, 특히 오늘날 극도의 개인주의와 자아 중심주의가 판치는 시대에서 선생의 일관된 “대공주의(大公主義)”(1),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으로 택한 “점진(漸進)”의 방식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간략하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통합적 영성가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은 일생 3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그중 1899년 22세의 나이로 고향 평남 강서에 설립한 ‘점진학교(漸進學校)’가 있다. 이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는 대로 선생은 민중의 계몽에서도 그렇고,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방식에서도 국민(民)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과 그들의 바른 인격 확립과 고양을 제일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리고, 스스로 지도자로 나서는 것보다는 철저히 지공무사(至公無私)의 방식으로 민중 속에서 지도자를 발견하면서 거기서 민심을 일구게 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선생의 원칙과 방식은 그가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활동에서 배우고, 당시 행한 유명한 쾌재정의 연설에서부터 생애 마지막 활동에까지 고수되었다.(2)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주권을 잃자 돌아와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1907년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한일병탄으로 완전히 독립을 잃어버리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기한 흥사단(興士團) 운동, 3.1운동 후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의 분열과 해체를 막기 위해 소집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또한 1924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이상촌 건설을 위해 북만주 등을 탐사하며 남경에 세운 동명학원(東明學園)과 1928년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상해에서 결성한 한국독립당 등,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 사건 때 한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외출했다가 체포되어 고국의 감옥에 살았고, 다시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재수감되어 1938년 순국하기까지 지속해서 수행된 것을 말한다. 그가 말년의 2년여를 평양 근처 대보산 기슭에 송태산장을 일구어 민족정신의 고취와 수양을 도모한 것도 모두 같은 기초 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이 힘을 잃고 도탄에 빠진 가장 큰 요인이 참을 잃고 거짓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실(眞實)을 잃고 공담공론(空談空論)으로 분쟁에 빠지고,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쉽게 낙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을 멀리서 찾지 말고 “먼저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속임을 버리고서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모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강변한다.(3) 그가 세운 학교의 생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는데, 그는 적 앞에서라도 “침묵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당시 포악한 일제의 침략과 찬탈 앞에서 어쩌면 아주 순진하게 들리고, 이것이야말로 공리공담처럼 보일 수 있고, 오늘 참과 진실이 더 고려되지 않는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는 더더욱이 그 의미가 다 한 것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강조하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이 이야기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오늘 우리 시대야말로 그와 같은 진실 고수가 더욱 긴요하다고 강조하며 다시 가져오고자 하는가? 본인은 그 대답이 다름 아니라 곧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공부 환경과 오래 축적된 ‘참(誠)’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삶 자체 안에 들어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선생에 관한 연구는 그를 주로 한 사람의 기독인으로 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당시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서울로 올라와서 예수교 장로교회 교인이 되었고, 1902년 선교사 밀러 목사의 주례로 지금의 세브란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가서 영어와 신학을 배운 배경이 그를 주로 기독인으로 규정해온 배경이다. 하지만 본인은 사실 그 기독교 신앙보다도 그의 삶과 사고를 더 근본적으로 기초 놓고 지지한 것은, 그 이전에 그가 받은 오랜 집안 내력의 유교적 가르침과 무실역행의 실행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려말 충신 안향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 <천자문>을 공부하다 9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4세부터 16세까지 당시 성리학자 김현진(金鉉鎭) 문하에서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거기서 함께 공부하던 연상의 청년 선각자 필대은(畢大殷, 1875-1902)을 만나 시국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4)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있었던 1894년 전후 서당에서 만난 선배 필대은은 중국 고전과 중국 당대 신서들을 많이 읽은 “선각적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청년”이었는데, 동학당의 참모가 되기도 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되었다.(5) 본인은 이처럼 도산이 근대 서구 개신교 신앙을 접하기 이전 체득하고 있던 유교 공부의 ‘위기지학적(爲己之學的)’ 성격과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만인의 것)’, 빈한한 집안 형편으로 15세까지 목동 생활을 하며 실제의 삶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공부한 것 등이 그의 지성일관(至誠一貫)과 무실역행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이해한다.

익히 들었듯이 그는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다가 그곳 한인 동포의 불결하고 비인간적인 생활의 모습을 보고서 공부를 접어두고 몸소 청소부가 되어서 동포들의 생활 개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청소 인부로 일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그곳 사람들의 한인에 대한 의식을 바꾸어 나갔다. 도산은 그렇게 민족 각 사람의 인격과 삶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고, 그들을 참된 선비로 기르는 일, 즉 ‘흥사(興士)’의 일이야말로 진정한 구국 운동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보듯이 도산 스스로가 삶과 배움을 직접 몸과 마음으로 실행하면서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인간 공동체 삶에서 토대가 되며, 만약 그것이 오늘 포스트 트루스 시대처럼 무시된다면 이 세상 삶은 지지대 없이 온통 만인 대 만인의 싸움과 투쟁으로 전락할 것을 직관한 것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실(實)과 진실(誠), 정직(正)과 약속이 중한 것을 알았고, 이후 매일의 생활에서 그것을 올바른 예의범절로 습관화해서 체화하며 살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는 항상 정결한 삶과 깨끗한 주변 환경을 유지했고, 성경뿐 아니라 유교 경전을 읽고서 아침 일찍 일어나 참선하고 반복해서 좌선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6) 도산 연구가 박재순 박사는 최근 도산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생명철학의 “계보”의 시작을 안창호 선생으로 보면서, 그것이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7) 거기서의 정신적 후예 함석헌(1901-1989)은 그의 글 「남강(南崗)·도산(島山)·고당(古堂) 1959」에서 자신이 큰 스승으로 생각하는 도산이 평생 좋아한 글귀가 “오직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능히 물건에 움직이지 않고, 오직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능히 물건을 움직인다(有至誠不能動於物 有至誠能動物)”였다고 밝혔다.(8) 이것은 유교 『중용』의 ‘誠’을 도산의 핵심 사상으로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도산은 자신이 기도하는 모든 일을 오로지 ‘참(誠)’을 따르고 ‘거짓’을 버리고 허(虛)와 위(僞)가 아닌 진(眞)과 정(正)으로 기초로 삼는 일로 보았다.(9) 그러는 가운데 그는 스스로가 더욱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라고 믿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와 같은 흥사단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단원을 뽑는 인터뷰에서 비유하기를, 지금 수억 명이 되는 예수교도 처음 예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건전한 한 사람의 인격자로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재생과 부흥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흥사단은 정치 단체도 아니고 혁명 단체도 아닌 “수양 단체”로서 일종의 “신성 단결(神聖 團結)”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0) 즉 도산의 참과 진실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통상의 예수교 교리처럼 어떤 십자가의 공로로 속죄받는다는 속죄 신학 등을 믿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깊은 내재신적 초월 신앙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11) 그리하여 자신의 일생 사업이 된 흥사단이나 동우회(同友會)의 일을 일종의 “성인(聖人)을 목적으로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12) 즉 ‘성인지도(聖人之道, To become a sage)’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고마우시고 크신 선생님”이라고 평할 뿐이었다고 하고, “그의 사랑론과 평화론도 그가 스스로 생각해내고 스스로 믿는 것이지 누구의 설이나 어느 신앙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평을 들었다.(13)

여기서 본인은 다시 앞서 언급한 함석헌의 경우가 생각난다. 함석헌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찍부터 그곳에 유입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크게 주체가 일깨워지고 인격적 하나님 신앙을 얻게 되었지만, 그는 또다시 보수화된 기독교회가 강조하는 ‘대속(代贖)’의 교리가 다시 우리 인격을 억압하고, 교권적 중개자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밝히기를, 인격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하고 생각하는 인격에게 대속은 고마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으로 들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참으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예수의 그리스도가 “예수에게서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밝히면서 “중보(中保) 소리 많이 하는 종교”는 “협잡 종교”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미래의 종교는 “노력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본인은 이와 같은 함석헌이 그의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와 함께 일군 씨ᄋᆞᆯ 사상이 바로 우리의 전통적 언어로 ‘仁’의 사유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고, 그를 한 사람의 “仁의 사도”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시원이 안창호 선생의 인격에 있는 것을 본다.(14)

선생은 1925년 미주 여자애국단 설립 기념식 강연에서 자신이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학사였던 서재필(1864-1951) 박사와 특히 『서유견문』의 유길준(1856-1914)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은 유길준이 한일병탄 전에 민족 고유의 ‘사(士)’ 정신에 주목하여 전 국민을 교육하고 계몽하여 모두 ‘선비’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만든 ‘흥사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재창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도산은 청나라 말기 변법자강(變法自疆)운동의 개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저서를 애독하였다고 하는데, 선생이 1907년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의 한문 교제로 그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 사용되었고, 도산 스스로가 그에 대해서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15) 양계초는 청말의 개혁사상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서양 과학 문명의 한계를 뚜렷이 깨달았으며, 그러면서 다시 동양적 자긍심의 회복을 강조하며 동서융화의 입장(“내적 인성을 완성하고 외적 변화에 참여한다盡性贊化”)으로 나아간 것이 지적되는데,(16) 도산이 그렇게 중국 인민의 주체성을 강조한 양계초 사고를 중시했다면, 도산의 기독교 신앙도 결코 단순한 서구 가치 일변도의 그것이 아니었고, 배타적인 무사유의 독존적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보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야말로 동아시아 전통의 유교 문명과 서구 근대 기독교 문명이 함께 탄생시킨 참된 인간성(仁/誠)의 영성적 지도자라고 보고 싶고, 그의 진실과 무실역행의 가르침은 오늘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우리에게 다시 참(實)과 정(正)과 선(善)의 깊은 의미를 새롭게 지시해 준다고 여긴다. 즉 그는 『맹자』 진심하장(盡心下 25)의 언술대로 “선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내 몸에 있는 것(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이라는 언술대로, 선과 의란 인간 누구나가 참으로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가 원해서 참과 진실, 정의를 믿는 믿음이란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의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독립 운동의 순국자일 뿐 아니라 앞으로 인류가 더욱 필요로 하는 인류 ‘보편종교(religio catholica)’의 진정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포스트 트루스와 탈종교화 시대를 다시 새롭게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느라고 인류가 고통하고 있는데, 도산의 참의 정신은 좋은 길라잡이가 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겉모습은 아주 적게 종교적이지만 내면은 풍성하게 영적인’ 참된 ‘진교(眞敎)’로서의 흥사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17)

미주


(1) 島山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안병욱 엮음, 지성문화사, 2016, 296쪽.

(2) 최근의 도산 사상 연구는 선생의 이와 같은 삶과 사고가 후대에 특히 이광수 등에 의해서 많이 굴절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선생의 점진주의는 결코 간디 등의 평화 절대주의가 아니고, 단순한 준비론자, 민족개량주의자나 좁은 의미의 교육사상가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한국혁명”의 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였으며, 그래서 “민족혁명의 영수”로서 그의 점진주의는 “점진혁명론”이라는 것이다. 선생 사고의 혁명성과 급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경석, “도산의 점진혁명론과 그 현재성”, 백영서 엮음, 『개벽의 사상사』, 창비 2202, 171-194.

(3) 같은 책, 201쪽.

(4) http://www.ahnchangho.or.kr/site/main/b02_01.php; 유한준, 『안창호 리더십』 , 북스타, 2013.

(5) 신용하, 『민족독립혁명가 도산 안창호 평전』, 지식산업사 2021, 18~19쪽, 강경석, 같은 글, 183쪽 재인용.

(6)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 도서출판 청포도, 22, 222~223쪽.

(7) 박재순,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동연 2021, 451쪽 이하.

(8) 함석헌, 「남강(南崗)·도산(島山)·고당(古堂) 1959」,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책과함께 2011, 248, 254쪽.

(9) 島山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212쪽.

(10)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 285쪽.

(11) 같은 책, 325~326쪽.

(12) 같은 책, 234쪽.

(13) 같은 책, 325~326쪽.

(14) 이은선, “인(仁)의 사도 함석헌의 삶과 사상”,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203~229쪽.

(15) 강경석, 같은 글, 181쪽.

(16) 이규성, 『중국현대철학사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672~673쪽.

(17)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22쪽 이하.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한국信연구소장)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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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2.07.02 15: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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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 선생


강유겸전(剛柔兼全)의 도산 삶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인정(仁情)

이상에서처럼 동아시아 전통과 서구 기독교 문명의 샘물을 동시에 마시면서 온 생애 동안 지속해서 진실과 선, 의를 추구했던 선생이 자신의 구체적인 몸과 삶으로 제시했던 ‘사랑(仁愛)’의 의미가 오늘 또한 크게 다가온다. 그의 신앙과 사상이 결코 어떤 추상적인 이론이나 원리, 교리나 도덕적 강제의 방식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마음과 정서, 그들의 일상의 삶에서 감각으로 일깨워지고, 몸과 감정으로 깨달아질 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오늘 N번 방 사태나 성 소수자 인권문제 등에 관한 논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전(全)문화의 성애화’(sexualization)가 가져오는 혼돈 속에서 우리 몸과 감정의 실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당황하고 있다. 선생은 명철한 인식과 정확한 추리, 그리고 “백(百)의 논설(論說)보다 일(一)의 실물(實物)이 더 유효”하다는 무실역행의 사람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인정(人情)’과 ‘사랑’임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정의돈수(情誼敦修)”라는 말로 서로 사랑하기 공부를 끊임없이 말씀했다. 그는 서로 사랑하기가 우리 삶의 습관이 되도록 하자고 하면서 우리 마음의 인정과 사랑을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1)

하지만 선생은 그 사랑에는 ‘구별’이 있음을 밝히고, 평생 누구에게든 성내는 일이나 남을 공격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그였지만, 그 구별을 지키는 일에는 단호하고 일관되었던 것을 본다. 선생은 매우 온화하고 따뜻한 인물이어서 그를 큰 어른으로 존경하면서도 이성으로 사모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고향에서 가족의 주선으로 만난 이혜련(李惠鍊) 여사와 25세 때 결혼한 이후로 행위로써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린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남경에 있을 때 어떤 여성이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밤에 그의 침실로 들어온 일이 있었지만, 도산은 그녀의 이름을 옆방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크게 부른 후 ‘초와 성냥을 찾는 것 같은데 그것이 책상 위에 있으니 불을 켜고 보라’고 천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내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녀 스스로가 매우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도록 하였고, 나중에 넌지시 말하기를, “그 정열을 조국에 바치라”라고 했는데, 그녀는 유학을 떠나며 조국을 애인과 남편으로 삼겠다며 하며 그렇게 한 사람의 감정을 다치지 않도록 하면서 소중하게 존중해준 도산에게 깊이 감사했다고 한다.(2)

도산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일은 기쁜 일이지만 곁눈으로 엿보지 말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주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다시 유교 수기(修己) 공부의 정수인 신독(愼獨)의 가르침을 보는데, 곧 누가 보지 않더라도, 오늘날처럼 한편으로 나의 다른 이름인 아바타의 삶에서도 진실과 정직이 어떻게 중요한지를 밝히신 것이다. 선생은 그러면서 “비록 신(神)과 같이 존경하던 사람이라도 한번 육적(肉的)으로 맺으면 부부 이외에는 동물적 결합으로 저락”된다고 하면서 그렇게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 구별과 차이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며 일생 이성을 대할 때 그러한 원칙을 지속하여 실수가 없었다고 전한다.(3)

우리가 오늘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모두 따를 수는 없지만, 21세기 우리 삶의 현실에서 많은 인물과 대상과의 관계가 일종의 저급한 성적 관계로 전락한 상황에서 여러 생각 거리를 준다. 도산은 인간의 사랑에는 세계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고,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있으며,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우정이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호의와 화기, 웃음과 기쁨을 주는 농담과 담소가 있어야 함을 말했다. 그는 “화기 있고 온기 있는 민족”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어의 ‘스마일(smile)’이라는 말을 즐겨 했는데, 도산이 식후에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담화할 때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모든 긴장을 풀어버려서 평소에 그를 두려워하던 사람도 마음 놓고 대화하였다고 한다. 그는 각 사람이 남을 즐겁게 할 오락거리 한두 가지 재주를 닦아두라고 했고, 아무리 이론적으로 동지라 하더라도 피차에 애정이 없으면 진정한 동지가 못 된다고 역설했다.(4)

이렇게 도산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사랑과 인정으로 자신의 인격을 채운 남편이고, 아버지, 선생과 동지, 친구와 정 많은 이웃의 따뜻한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삶은 바로 나라의 독립과 회복을 위해서 희생되었는데, 1935년 3년여를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위장병으로 대전 감옥에서 가출소하면서도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했다. 내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독립운동을 하겠다”라고 한 말 속에서 그가 어떻게 큰 대의와 공(公)을 위해서 자신을 내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59년 4개월의 생애 동안 아내와 자식과 같이 지낸 시간은 고작 18년밖에 안 되고,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라고 한 고백이 전해진다. 선생이 그처럼 대한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공적 삶을 살기까지 그와 가족의 고뇌와 희생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이해해볼 수 있겠다.(5)

동포와 함께 세계를 품은 송태산장의 선인(仙人) 도산 안창호

우리는 이렇게 참으로 몸과 정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이성과 감성, 애정과 우정 등을 모두 아울러서 한 인격 안에서 분별하면서도 통합시킨 안창호 선생이 그 일을 자신 동포뿐 아니라 세계 인류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날을 깊이 소망하신 것을 본다. 그는 먼저 말하기를,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하여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天)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제 민족을 두고 단순히 세계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제 국토를 잃어버린 유랑 민족이나 할 일이라고 일갈했다.(6) 도산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전 감옥에서 출옥한 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기까지 2년여를 자신의 고향 평양 대동강 변에 송태산장이라는 것을 마련하고서 그곳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회복하고 단군과 고구려의 민족정신으로 동지들을 수양하기 위한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평양은 자신의 고향일 뿐 아니라 민족국가, 민족정신, 민족문화의 발생지로서 우리 민족의 고향이다. 그에 따르면 지난 역사에서의 한국 민족의 수도 가운데 외세에 의해서 국혼을 잃지 않고 치욕을 당하지 않은 두 개의 수도가 있는데, 곧 평양과 부여(扶餘)이고, 그중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다른 민족과 싸워서 국위를 선양한 적극적인 영광을 가진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7) 그래서 그는 시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미술품이었던 평양을 교육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고, 주변의 명산과 사찰의 은거지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여러 선인의 ‘고신도(古神道)’를 잘 이어받아서 다시 민족의 기운을 북돋우고, 세계 민족 중에서의 한민족의 사명을 고취하고자 했다.

여기서 본인은 또다시 한번 선생의 삶과 사유가 결코 서구적 기독교 신앙이나 서양 민주주의, 또는 과학주의로는 다 설명되거나 포괄될 수 없는 것을 본다. 앞에서 도산의 흥사단 의식이 21세기 인류 미래를 위한 참된 보편종교로서의 ‘진교(眞敎)’로 역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이 진교라는 말은 한민족 고기(古記)와 시원(始原)을 말하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저술가들이나 관계자들이 중시여기는 언어이다.(8) 안창호 선생도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이나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등과도 소통하면서 당시 본토에서 일제의 극심한 핍박을 피해 간도로 넘어간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대종교의 창시자는 홍암 나철(羅喆, 1863-1916)이다. 그 나철이 1909년 ‘단군교’의 ‘중광’을 선포할 수 있도록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함께 했던 유학자가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인데, 이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 중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은 고려 후기 문정공 행촌 이암(李嵒, 1297-1364)과 「천부경天符經」이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포함하고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전한 조선 초기 이맥(李陌, 1455-1528)의 가계 후손이다. 그는 집안에서 오래전부터 간직되어 내려오던 이러한 고(古) 저술들의 사유를 나철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기는 말년에 손수 『진교태백경眞敎太白經』을 저술했는데, 젊은 시절 위기에 빠져있던 나라를 구할 길을 찾으러 영호남을 구유하며 만난 대구의 천주교 선교사 로베르와 논쟁하면서 『천주육변天主六辯』을 저술하기도 한 그는 홍암의 대종교보다도 훨씬 더 “천하 보편의 가르침(天下之公論)”을 찾고자 하는 추구에서 그 단군교도 넘어서 ‘진교’를 표방한 것으로 본인은 이해한다.(9) 해학 이기의 제자로서 만주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아래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계연수(桂延壽, ?-1920)는 자신의 스승 해학으로부터 전해 받고 그가 모두 감수했다고 밝히면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라는 이름의 책을 처음으로 펴냈다(“신시개천 5808년, 광무 15년”). 그 서언에서 계연수는 “과연 태백의 ‘진정한 가르침(眞敎)’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밝혀졌다고 크게 기뻐하는 마음을 밝혔다(果太白眞敎 中興之基歟!).(10)

도산은 자기 소유의 재산은 하나도 없었고, 있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결코 생활을 남에게 의뢰하지 말고 자작자활하라”라는 신조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일인 일능, 각인 일업(一人一能 各人一業)”을 우리 동포 전체에 퍼지게 하는 것을 간절히 바랐으며, 그렇게 먼저 우리 민족을 서로 깊이 사랑하고, 거짓이 없고, 화평하여 분열이 없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 곧 세계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1)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결코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자가 아니었고, 그 마음과 사랑의 대상에 전 세계 인류를 품은 진정한 대인(大人)과 성인(聖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휴전된 후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종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북이 서로 나누어져 갈등하고 있고, 우리 주변을 둘러싼 외세가 큰 힘을 휘두르는 가운데 우왕좌왕하고 있다. 더군다나 오늘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는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우리 외교나 정치는 자립과 자주와는 거리가 멀어서 더욱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무엇이 진실과 정의의 길인가를 잘 살펴 나아가면서 도산의 마지막 언어처럼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잡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 길이 열리리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늘 남한과 북한 모두가 따를 수 있는 참된 선생이라고 여긴다. 그는 20세기 전반기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외교에서 한국인의 참과 진실, 사랑과 인정, 자기희생과 책임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 문화와 민족이 낳은, 앞으로의 시대를 위한 인류의 큰 리더로서 소개될 수 있다. 진실을 고수하고 붙드는 ‘무실역행(務實力行)’과 모든 사람을 참사람으로 키우는 ‘흥사(興士)’의 일이 그 핵심이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포스트 트루스와 메타버스 시대 참된 스승으로서의 도산 안창호

오늘 우리 시대는 온통 가상화폐, 메타버스, NFT 등 가상현실(virtual world)과 디지털 문명혁명 이야기로 시끄럽다. 이러한 현실은 앞에서 지적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가상현실과 메타버스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먼저 긍정의 측면에서 보면, 이제 우리 각자는 누구나 ‘신인(神人)’, 호모 데우스(homo-deus)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예전처럼 어느 하나의 신앙이나 교리가 절대가 될 수 없으며, 특정한 한 곳에 고정된 중심이라거나 권위, 과거로부터의 전통이 크게 약화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정의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오늘 새롭게 등장하는 디지털 문명의 가상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여전히 여기 지금의 우리이고, 그 우리는 한편 ‘몸’이기도 하고, 우리의 사유와 상상은 여전히 이 세상의 사건(事)과 사물(物)의 ‘사실(fact)’로부터 시작하고 내용을 받는다는 것과 관련 있다. 즉 오늘의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그러한 사실들과 세계를 모두 거부하는 ‘사실 저항(fact resistance)’이 우리 삶을 온통 사로잡는다면 마침내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더 좋은 이상의 세계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12) 그리고 그에 더해서 사실들을 선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엮어서 파악하는(즉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진실(truth)’에 대한 어떤 기준이나 토대가 없으므로 거기서 야기되는 무제한의 혼동과 혼란은 결국 끝없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전쟁만의 삶을 기다리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13)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예전 신과 인간, 정신과 몸, 개인과 사회 등, 동아시아 언어로 하면 리(理)와 기(氣)가 서로 오묘하게 불이(不二)적으로 함께 서로 조건 지어진 것(理氣妙合)을 인정하면서 같이 가면 거기서 생명이 탄생하고, 삶의 열매가 맺어지고, 그것이 지속 가능했던 것처럼, 그렇게 여기 지금의 세계와 가상세계, 여기 우리 몸과 사유의 세계와 메타버스의 세계 등이 서로 ‘조건 지어진(conditioned)’ 것을 인정하면서 함께 해야만 세계와 우주의 놀라운 확장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에 더해서 그러한 길만이 거기서의 삶이 사멸이 아닌 새로운 생명적 탄생과 성숙으로의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또 다시 밝혀보면, 여전히 우리 삶에는 그 두 차원을 함께 포괄하면서 ‘말’이 ‘사실’에 근거하고, 말과 행위가 일치하며 ‘일관성(恒)’이 있고, 그래서 우리 삶과 판단에서 그 근거가 되고 기준이 되는 진실의 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류 각자가 참된 ‘신인(神人)’과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되려고 하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은 그래서 여전히 세계의 다양성과 사물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긴요함을 말해준다. 또한 그 관계의 진실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우리 판단의 지축과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되어주는 진실과 그것을 서로 말과 담론으로 함께 찾아가고 논하는 ‘정치’가 우리 생명과 공동체 삶의 ‘생명뿌리(生身命根)’이고, ‘생명줄(lifeblood)’라는 것이다.(14) 생명과 삶의 운동인 易에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이 있고, 원심력과 구심력이 함께 하듯이 메타버스의 세계를 위해서 사실과 진실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은 그래서 이러한 시기일수록 그렇게 삶 자체가 진실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예시가 긴요하고, 그 진실의 체현을 위해서 온몸을 바쳐 지속하는 믿음(誠)과 신뢰(信)의 삶을 보여주셨던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실 저항과 진실 허무주의 앞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과 진실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해주실 수 있다고 보고, 그래서 그의 큰 보편신앙과 믿음의 삶을 더욱 널리 알려야 한다고 본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진정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나는 진정 무엇을 믿는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그는 우리 속마음 깊은 곳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실(誠)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신적 목소리가 있고, 그래서 매일의 삶에서 그 진실을 듣고자 하는 우리의 세심한 노력, 감정과 감각과 사유와 상상으로 그것을 체현해야 함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한 우리 마음과 몸 안의 거룩한 생명적 씨알로서의 하늘 원리를 그는 마지막으로 참으로 보편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인간적으로 ‘사랑(仁愛)’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인간이 이제 할 일이 ‘사랑’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1933년 가장 고통스러운 감옥의 삶에서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사랑 이것이 인생의 밟아나갈 최고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 간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그런즉 내나 당신이 앞에 남아 있는 시간에 우리 몸이 어떤 곳에 어떤 경우에 있던지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합시다.”(15)

이미 시대를 앞서서 이런 큰 진실과 사랑, 믿음과 판단의 인격을 배출한 대한민국이지만, 요즈음 한국사회에서는 그 인격적 큰 사랑의 ‘덕’은커녕, 사람들 사이에서 말과 행위, 약속과 용서 등의 인간적 일로 서로 타협하고,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정치’는 실종되었다. 오직 냉정한 ‘법’만을 외치고, 그 법도 한참 사적으로, 특정한 개인의 욕심과 욕망으로 불의하게 시행되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지 않다. 우려가 크고 답답하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이 세계는 모두를 위한 것이고, ‘덕(virtue)’이란 민주공화국에서 서로의 평등함과 다양한 고유함을 인정하면서 인간 행위의 근본 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몽테스키외나 한나 아렌트도 강조했는데, 오늘 ‘가상세계(virtual world)’야말로 그러한 ‘덕(virtue)’이 더욱 요청된다는 것을 그 가상세계를 지칭하는 ‘virtual’이라는 단어가 바로 ‘덕(virture)’에서 나왔다는 것도 그와 같은 정황을 잘 지시한다. 즉 누가 보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와는 다른 이름 아래서의 가상세계에서도 거기서의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의식(진실), 나와 같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에게 그가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감사로서 내가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인간적 태도(사랑), 그것을 안창호 선생의 삶이 강력하게 지시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미주


(1)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320쪽.

(2) 같은 책, 346쪽.

(3) 같은 책, 45, 348쪽.

(4) 같은 책, 354-355쪽.

(5) 같은 책, 25쪽.

(6) 같은 책, 226쪽.

(7) 같은 책, 247쪽.

(8) 이은선, “해학 이기의 신인(神人/眞君) 의식과 동북아 평화”, 『유학연구』 제50집, 2020.2., 182쪽 이하.

(9) 같은 글, 본인의 책,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동연 2020, 211-278쪽에 재수록 253쪽.

(10) 같은 책, 241쪽. 이기동·정창건 역해, 『환단고기』, 도서출판 행촌 2019, 16쪽.

(11) 같은 책, 328쪽.

(12) 오사 빅포르스, 『진실의 조건』, 박세연 옮김, 푸른숲 2022, 20쪽.

(13) 한나 아렌트, “진리와 정치Truth and Politics”, 『과거와 미래 사이』, 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5, 334쪽 이하; 이은선,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동연 2018, 049쪽 이하; 같은 저자,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20, 82쪽 이하.

(14) 이은선, “사실적 진리와 정의 그리고 용서의 관계에 대하여”,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54쪽.

(15)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평전』 , 72~73쪽.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한국信연구소장)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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