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이라는 사람이 회자되기에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일찍부터 나를 여러번 비난했던 사람. 그에 따르면 나는 아부와 폭력의 아이콘이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 주고 우산을 씌워 주는 국민들의 마음에 무심한 냉혈녀다. 이로써 나도 천하의 김경율/진중권 선생과 동급? 나 때문에 엉뚱하게 욕 먹은 아사히와 마이니치신문. 대신 무려 “인물탐구” 대상으로 존경심을 담아 취재된 건 백은종 “서울의 소리” 대표.
그는 2016년 <경향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저자’였다. 그는 자신의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대한민국 입국이 거부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외교부 장관과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에게 그의 입국을 요청했지만 불허됐다. 2016년 7월 1일 민변 정연순 변호사,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학 교수, 김창록 경북대 교수 등이 그의 입국 불허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재일교포로 역사학 특히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교수다. 그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가 쓴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를 썼다. 박근혜 정권에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을 쓴 것이 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됐을까. 그는 먼저 <경향신문>이 2016년 올해의 저자로 선정한 것에 대해 “처음으로 그런 대우를 받았고, 매우 감사하고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2016년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했는데 거부당했다. 사유는 ‘국가안보상의 위협’이었다. 민변에서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지만, 고등법원·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이번에 민변에서 재일 조선적 문제로 강연하기 위해 입국했는데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왔다.”
2013년 위안부 할머니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지만 지난해 12월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원의 실형이 선고됐다. 아직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지만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논란이 큰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 혹은 ‘학문의 자유’와 관련해 논란이 컸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저자 정영환 주간경향인터뷰./우철훈 선임기자
‘가치판단’ 아닌 학자의 자격 문제 제기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한창 논란이 될 때인 2016년 7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이라는 책을 냈다. 사실 일본문학 전공자가 일본에서 취재와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어판(최종판)으로 쓴 <제국의 위안부>를 국내 학자나 언론이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특히 박 교수가 인용한 근거를 검증하기 위해선 일본 현대사와 전쟁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실 국내 많은 학자나 언론인·작가들은 <제국의 위안부>는 일단 ‘사실’을 기록했고, 단지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책에서 박 교수가 인용한 사실 상당 부분이 왜곡됐거나 선행연구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 ‘팩트’(사실)의 왜곡문제는 <제국의 위안부> 논란이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닌 학자의 자격에 대한 문제임을 의미한다. 이는 <제국의 위안부>가 표현·학문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아닌,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기본적인 팩트(사실) 왜곡은 어떤 대목인가.
“조선 위안부는 중국·대만 위안부 즉 ‘적국의 위안부’와 다른 일본 제국주의와 동지적인 ‘제국의 위안부’라는 관점을 만든 것이다. 박 교수는 그 근거로 일본 병사였던 후루야마(古山高麗雄)의 소설 <하얀 논밭>, <프레오 8시 새벽>을 들고 있다.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닌 소설을 인용했다. 그런데 인용 근거도 일본인 병사의 관점에서 ‘동지적’ 혹은 ‘자발적’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일본 병사의 관점에서 조선 여성의 내면을 보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박 교수는 조선 위안부가 아닌, 일본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설 속 내용을 역사적 근거로 삼았다는 것인가. 실체적 증언이나 문헌적 근거가 없다는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저널리스트 센다 가코오(千田夏光)가 쓴 <종군위안부>를 다시 읽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박 교수는 센다가 전쟁위안부를 ‘일본에 애국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센다의 책 어디에도 그런 주장이 없다. 센다는 원래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박 교수는 센다의 책에 나오는 일본 위안부 증언을 통해 조선 위안부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해 ‘애국적 위안부’라는 담론을 만들었다. 이것은 자신의 구도와 논리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추측·왜곡한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여러 학술논문도 인용되고 있다.
“박 교수는 한일회담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론됐고, 한국정부가 개인보상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경북대 김창록 교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것인데 이는 김 교수의 논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선행연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잘못된 비약이다.”(김 교수는 ‘박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학문적 엄격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그렇게 기본 사실에 문제가 있는 <제국의 위안부>가 어떻게 일본에서 높이 평가됐나. 특히 일본의 보수세력뿐 아니라 중도세력까지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일본의 지성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나.
“박 교수의 책에 대해 일본인 비판자들이 많았다. 특히 전쟁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내용을 알기 때문에 즉각 비판했다. 아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고 상대를 안했다. 그러나 이 책이 다시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번역 출판됐고, 와세다대학에서 상을 받았다. 문제는 일본의 보수파가 아닌 중도 심지어 진보적 성향까지 <제국의 위안부>를 평가한 배경을 잘 봐야 한다.”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소위 ‘뜨게’ 된 일본의 분위기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무라야마(村山富市) 전 총리는 1995년 아시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위로하는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추진했다. 일본 중도적인 인사들이 추진했던 이 사업은 한국에서만큼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중도적 인사들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너무 강하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의 책은 바로 이 ‘한국 민족주의가 문제’라는 담론을 한국인이 만들어 줘 좋아했다는 것이다.
정영환 교수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서 호평 받은 이유
정 교수는 “일본 <아사히신문>은 2000년대 들어 일본 보수파로부터 심각한 공격을 받아 전쟁범죄에 대한 시각이 보수적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이 맥락을 이해하려면 일본에서 전쟁위안부에 대한 인식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대까지 일본에서 전쟁위안부는 일종의 전쟁 추억 혹은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고발로 전쟁위안부 문제가 전쟁범죄로 옮아갔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으로선 당연히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무라야마 전 총리의 정부 차원 사과와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등의 치유책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전쟁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을 80년대 ‘추억’이나 ‘동지’로 보는 시각으로 시계바늘을 되돌려 놓은 것이다. <아사히신문>이 이 책을 출판하고 일본 언론에서 호평 받은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 내 호평은 “일본 우경화와 일본의 지적 퇴락의 종착점”이라고 힐난했다. 이러한 일본 분위기를 이해해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박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사법심사 대상이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 혹은 ‘학문의 자유’라는 이유로 그를 옹호했다. 일본은 물론 국내 유명 인사들도 적잖이 이에 동조했다. 그중 상당수는 박근혜 정권에서 뉴라이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유명 작가도 있었다. 아마 그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확실한 증언과 객관적 인용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조총련계 민족학교 다녀
박근혜 정권은 친일 묘사가 가득한 교학사 교과서에 실패하자 아예 국정 역사교과서를 도입하려 했다. 특히 한·일 위안부 문제를 10억 엔에 ‘불가역적’으로 재론 않겠다고 일본과 합의했다. 이 졸속협상은 국민을 분노케 했고, 결국 촛불혁명에서 적잖은 동인이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에서 호평을 받으며 출간됐고, 거꾸로 이를 비판하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를 쓴 정 교수의 국내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그 입국 거부 사유를 ‘국가안보상 위협’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박 정권의 역사왜곡에 걸림돌’이라는 것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와 한·일 위안부 합의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베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 언론 모두 호평을 했다. 이를 반대하는 한국인은 비이성적 태도라고 보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일본 시각과 구도에 딱 맞는 책이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지난해 12월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원의 유죄가 선고됐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음~. 어려운 질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 책을 통해서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형법상 명예훼손이 되는지는 내가 판단하기 어렵다. 역사학자의 견해와 실정법은 다르기 때문에 일단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문학 전공자로서 박유하의 일본에서의 학문적 평가는 어떤가.
“문학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겠지만 높게 평가 받는다. 아마 박 교수는 일본 출판·언론계에서 한국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정 교수는 1980년 일본 지바(千葉)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남 고성이 고향으로 1930년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는 조선인 여성을 만나 8남매를 낳았다. 아버지 역시 조선인 여성과 결혼했다. 정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열렬한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조총련계 커뮤니티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정 교수 역시 고등학교까지 조총련의 민족학교를 다녔다. 1999년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히토쓰바시(一橋)대학원에서 재일조선인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재일교포는 60만명이다. 법적으로 외국인 등록 국적란에 조선으로 쓰면 조선적, 한국이라고 쓰면 한국국적이다. 이 중 조선적은 3만명 정도라고 한다. 그는 “재일 조선적은 외국인으로 차별을 받고, 여권이 없어 또 차별 받는 2중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기자가 1994년 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을 읽고 만나고 싶다고 했다. 기자가 쓴 평전은 재일교포 조용수의 1950년대 일본과 한국 관계에 대해 언급돼 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앞선 경제력으로 일본 교포사회에 학교와 직장을 제공했고, 심지어 집과 직장을 제공한다며 북한 이주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남한 재일공사 유태하는 귀국하려는 재일교포를 상대로 여권장사를 해 비난을 받았다. 이 유태하 공사는 5·16 쿠데타 후 처벌 받았지만 나중에 한·일 국교정상화에 역할을 했다.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남한 출신이었지만 조선적으로 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 교수는 기자의 이런 서술에 “정확한 사실이며 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북의 경제력이 역전돼 조총련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는 형편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귀화하거나, 한국 국적을 얻기 싫다고 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그는 “조선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심경은 바로 ‘굴복하기 싫다’는 것”이라며 “특히 지금까지 삶과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싫고, 국적 취득은 허가가 아닌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
일본우익과 싸우는 기자 우에무라
“한·일관계 역사 바탕 위 미래로 가야”
2019.06.15 원희복 선임기자 ·
기자는 운명적으로 거짓을 폭로하고 부정과 싸울 수밖에 없다. 폭로하고 싸우는 대상이 거대할수록 기자 평가도 높아진다. 특종의 등급은 얼마나 큰 거짓과 부정과 맞섰느냐로 결정된다. 개인 간 문제보다 집단이나 세력, 나아가 정부가 자행한 부정을 폭로하는 보도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기자에게 가장 큰 특종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고발하고 싸우는 것이다.
우에무라 다카시<슈칸킨요비> 발행인/사진 서성일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슈칸킨요비> 발행인/사진 서성일 기자
한 기자가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발행인이다. 일본인인 그는 일본 우익세력과 아베 정권과 싸운다. 민간세력과 권력이 결합한 거대한 상대다.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그는 1991년 8월 11일 한국인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사례를 처음 보도했다. 이 보도는 그때까지 일종의 ‘에피소드’로 여기던 일제하 종군위안부 문제를 인륜을 거스르는 전쟁범죄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우에무라 기자는 국익을 해친 ‘날조기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우익세력은 그의 고등학생 딸의 신상을 털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다른 취업길도 막혔다. 하지만 그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참담한 현대사가 일본 기자에 의해, 일본 언론에 의해 의제화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이부영)이 주최하는 강연회(6월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관 오후 6시)를 갖는다. 지난 6월 7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종군위안부 사례 처음 보도
-일본 우익과 법정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명예훼손 소송은 두 군데서 하고 있다. 도쿄에서 니시오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하고 있고, 삿포로에서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우파 저널리스트를 상대로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삿포로에서 내린 1심 판결에서는 내가 졌다. 판결은 사쿠라이가 나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쿠라이가 인신매매로 위안부가 됐다는 것을 믿은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사쿠라이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도쿄에서 1심 재판은 6월 26일 선고된다.”
-법정싸움에서 중요한 쟁점은 무엇인가.
“1991년 8월 11일 내가 쓴 기사는 한국정신대협의회가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증언을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쟁점은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이다. 강제로 끌고 갔다는 할머니 증언만 있고 증거문서는 없다. 나는 보도에서 ‘강제’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일본 재판소가 우경화됐기 때문이다.”
-왜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1990년 일본 국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질의했다. 이에 정부가 ‘민간이 했고 정부는 관계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한국에서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사회부 민권·재일한국인 담당기자였다. 재일한국인은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참정권도 없고, 취업은 물론 아파트 입주에도 차별을 받는다. 나는 ‘이웃사람’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이런 차별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문제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와세다대 다닐 때 재일한국인 선배를 만났다. 광주 민주화운동 다음해인 1981년 한국 여러 곳을 여행했고, <아사히신문>에 ‘김대중 무죄다’라는 기고를 하는 등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가했다.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1987년부터 1년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참, 아내가 한국인이다. 장모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이고, 아내는 그 유족회 직원이었다.”
2016년 쓴 책의 한국어판.
2016년 쓴 책의 한국어판.
일본 우익과 법정싸움 아직도 진행 중
-한국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일본 언론이 먼저 기사화했다. 이 보도는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였던 위안부 문제를 전쟁범죄로 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다. 내가 보도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가 증언한다는 얘기뿐이다. 나중에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 얘기했고, 이것이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록 내가 기자회견 3일 전에 기사를 썼지만 김 할머니가 용기 있게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면 내 기사는 그냥 묻혔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우에무라는 거듭 자신의 보도에 대한 과대평가를 우려했다.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도 이유겠지만, 진행되는 재판에 대한 영향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김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며 기자회견을 했고, 1991년 12월 6일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문제는 한·일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1992년 1월 17일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특히 1993년 8월 4일 일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부 모집과 이동, 관리 등 전체적으로 강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하는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하기까지 이른다. 1995년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만들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도 사과하는 등 위안부 문제는 수습단계에 들어선다. 1996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도 여성 폭력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1997년 일본 자민당 아베 신조 의원에 의해 상황은 거꾸로 간다. 위안부 문제가 기술된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 결성되고 아베 의원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우에무라는 “그때부터 우익들이 고노 담화를 폐기하려는 공격을 시작했고, <아사히신문>도 그 공격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도 보수화가 됐고, 결국 우에무라 기자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나.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제주도에서 한 여성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증언을 보도한 기사를 취소했다. 이것을 빌미로 우익들이 ‘위안부 문제에 <아사히신문>이 거짓 보도했다’고 주장하면서 내 문제까지 거론했다. <아사히신문>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회사를 중도에 그만두지 않았나. 해직기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나는 해직기자가 아니다. 대학교수가 좌절됐을 때 <아사히신문>에서 복직, ‘돌아오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거부했다. 내가 복직하면 우익들과 계속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에무라 다카시 <슈칸킨요비> 발행인이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 <슈칸킨요비> 발행인이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2013년 한국인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위안부는 자발적이고 오히려 일본군과 동지적이라는 관점의 책이다. 그런 책을 낼 정도라면 보수화됐다는 증거 아닌가.
“<아사히신문> 출판부의 판단일 것이다. 계열사이긴 하지만 돈 벌기 위해 아무 책이나 출판하니까. 일본에는 박유하 같은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지식인도 있지만 보통은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비교적 리버럴한 <마이니치신문>이 ‘아시아태평양상’을 주고, 학술상까지 줬다. 일본 교수와 학자, 비평가, 언론인 등 지성의 수준이 매우 깊고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도 아베 총리의 극우정책에 속수무책으로 있는 이유는 뭔가.
“일본 지성 수준이 높지 않다.(웃음) 사상의 뿌리가 없어서 그렇다. 우익들이 ‘죽인다’고 하면 두려워한다. 좋을 때는 말하지만 탄압국면이면 말을 못한다. 심지어 어제까지 친구였지만 갑자기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한때 NHK가 이상적인 공영방송의 롤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NHK도 완전 친정부 방송이 됐다. 이젠 공영방송의 롤모델이 아니다.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월급받는 ‘회사원 기자’들이 많아졌다. 요즘 그런 후배 기자들이 많다. 나도 소시민적 기자인지도 모른다.(웃음) 그러나 이런 시련이 있어서 오히려 많은 공부를 하고 세계가 넓어졌다.”
우에무라는 1958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오사카 본사 사회부를 거쳐 테헤란특파원, 서울특파원, 베이징 총국에서 근무하다 2013년 4월 조기 퇴직했다. 2010년 와세다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2012년 4월부터 호쿠세이학원대학 강사를 하다 2016년 3월부터 한국가톨릭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동아시아 평화’를 강의한다.
가톨릭대학 초빙교수로 강의
우에무라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의 진보적 시사주간지 <슈칸킨요비> 발행인 겸 사장을 맡고 있다. 일주일에 3일은 서울에서, 4일은 일본에서 보낸다. 그는 “<슈칸킨요비>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이 창간한 25년 된 리버럴·진보적 잡지”라며 “광고가 거의 없고 정기구독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한때 정기구독자가 5만명까지 됐으나 요즘에는 1만3000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슈칸킨요비>에 재일교포로 1961년 한국에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관련한 기획기사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사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지만 이런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는 것은 양국 모두의 불행이다. 재일교포에게도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베 총리가 바뀐다고 일본의 우경화가 멈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일본과 한국 국민의 감정이 나빠진 것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젊은이, 젊은 기자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 더 복잡해진다”면서 “한·일관계는 역사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17년 7월 한·일학생포럼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기자 지망생이 함께 숙식을 하며 취재와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첫 포럼은 한국 ‘나눔의 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두 번째, 세 번째 포럼은 일본 히로시마와 오키나와에서 열렸다. 네 번째 포럼은 한국 5·18 광주에서 열렸고, 서울 남영동 인권기념관도 둘러봤다. 그는 30년 넘는 언론생활에서 자신이 추구한 것은 ‘인권과 평화’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1991년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던 한국 기자는 모두 언론계를 떠났고, 한국 기자들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조각 하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이 조각은 원래 단테의 <신곡> 에 나오는 ‘지옥의 문’ 앞에서 고뇌하는 한 시인의 모습이다. 이 로뎅의 조각품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적 평론과 해석이 있지만 기자가 볼 때는 매우 단순하다. 쭈그리고 바닥을 보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왜냐고? 만약 그가 좋은 시(글)를 썼다면 애당초 지옥에 오지 않고 천국에 갔을 것이며, 좋은 시를 썼는데도 지옥에 왔다면 억울해 하거나 항의했을 것이다. 당연히 로뎅은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든 모습을 조각했을 것이다. 누구도 유추할 수 있는 간단한 이치 아닐까.
민족 자존심 걸린 외교 상징이 된 소녀상
이에 비해 ‘평화의 소녀상’은 훨씬 의미가 깊다. 빈 의자를 옆에 두고 앉은 소녀의 모습이 시사하는 것은 복합적이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인연을, 왼쪽 어깨에 앉은 새는 하늘과 교감하는 영매다. 뒤꿈치를 내리지 못한 발은 늘 불안했던 소녀의 힘든 삶이다. 소녀상에는 이런 함축적 상징이 12개나 된다.
<제국의 위안부> 를 쓴 박유하는 이 소녀상에 대해 “소녀상은 성 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204쪽)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205쪽) “소녀상은 ‘그 때의 조선인 위안부’라기보다는 ‘20여년의 데모’와 운동가가 된 위안부이다”라고 말했다.
박유하가 예술작품에 자신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자유다. 이에 김서경은 “그러면 소녀상을 매춘부 이미지로 만들라는 것인가”라며 “피해자 마음에서 소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유하의 소녀상 느낌에 기자는 “강자를 옹호하는 것은 ‘아부’이고, 약자를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소녀상에 대해 180도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작품이 복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소녀상은 단순한 청동 금속의 존재를 뛰어넘었다. 추울까봐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준다. 이렇게 인간적 정서를 동일시하는 조각품이 또 있을까. 과문하지만 벌거벗은 로뎅의 조각품이 추워보여 옷을 입혀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박유하는 이런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뭘 느낄까.
최근 김서경·김윤성 부부가 출간한 「빈 의자에 새긴 약속」
이제 소녀상은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외교적 상징이 됐다. 정부 차원에서 ‘철거하기로 약속됐다’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는 외교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한겨울 같이 노숙했다. 게다가 소녀상은 시간이 갈수록 세우려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국민의 자발적 성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김운성 부부를 만났다. 7월 22일부터 3일간 서울 시청앞에서 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라는 전시회가 너무 좋아 인사동에서 연장 실내 전시가 마련된 것이다. 부부는 주한미군이 사격장으로 쓴 경기도 매향리에서 구해 온 포탄과 탄피에 철골을 붙이고, 꽃을 새겨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물론 이 전시 외에도 그의 상징작 평화의 소녀상도 전시하고 있다.
여리지만 당당하고 순수한 소녀 표현
위안부 문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2011년 12월 14일 세운 첫 ‘평화의 소녀상’ 이후 소녀상은 전국, 전 세계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부부는 매우 바쁘다. 전시도 많지만 소녀상 제막식이 지방과 해외에서도 열리기 때문이다. 부부를 한 곳에 모아 얘기를 듣는 것도 빠듯했다.
“지금까지(8월 12일) 우리나라에 29점을 세웠고, 해외에도 4점이 있다. 제막식까지 마친 것만 그렇다. 그런데 요청이 들어오는 곳도 많고 또 당장 내일 제막식 하는 것도 있다.”
원래 비석 형태에서 시작한 디자인은 일본 정부의 반대에 분노, 할머니 형상으로 바뀌었다. 김서경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처참한 상처를 받았던 당시 나이대의 소녀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원래 소녀상을 제작하기 전 ‘소녀의 꿈’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꿈 많은 소녀가 봄의 향기를 맡으며 예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착안해 할머니들이 끌려가기 전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소녀상의 바탕이 된 흙 붙임 작업은 김서경 혼자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소녀상에 남자 손이 닿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처음 만든 소녀상 미니어처(모형)를 보면 매우 토속적이고, 또 소박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 만들어진 소녀상은 조금 세련된 미인이다.
“하하. 그런가? 토속적으로 만들었는데. 소녀상 얼굴은 소박한 조선의 소녀여야 하고, 또 얼굴이 밉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소녀상에서 잘린 머리카락, 새, 빈 의자 등 12가지 강조 포인트가 있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어디인가.
“역시 소녀의 얼굴 표정이다. 제일 신경 쓴 것은 어리지만 어리지 않게, 여리지만 당당한 의지를 표현하고, 순수한 소녀지만 살아온 역사와 미래를 보이는 그런 얼굴을 나타내려 했다. 얼굴만 백 번 정도 고쳤다.”
김서경(1965년 서울생) 김운성(1964년 춘천생) 부부는 대학(중앙대학교 예술대학 84학번)에서 만났다. 남편 김운성은 예술대 총학생회장이었고, 부인 김서경은 본인 말대로 ‘회장 밑에서 열심히 도와주던 사람’이었다. 사실 공과대학이나 예술대 학생들은 시국문제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김운성은 “우리 예술대학은 사진과·문예창작과도 그랬지만 풍토가 달랐다”면서 “우리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남들이 비켜가는 것에 대해 우리까지 비켜서지 말자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암울했던 1980년대 민주·통일을 형상화하는 민중미술운동을 같이 했다. 두 사람은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전시에 같이 출품하는 등 꾸준히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
결혼한 두 사람은 3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했지만 ‘추구했던 가치가 맞질 않아’ 그만두고 작품 작업에만 몰두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지만 작품활동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렵다. 김운성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래도 전시를 하면 아내 작품이 많이 팔렸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 궁핍함은 느끼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없어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화와 달리 조각은 브론즈 등 재료 값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브론즈가 비싸, 플라스틱으로 먼저 만들어 작품이 팔리면 브론즈로 다시 만들어 전달한다, 돈을 아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귀띔한다. 아직 형편이 안 돼 작품과 도구를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를 작업실로 쓰고 있다. 소녀상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최근 함께 작업하는 ‘베트남 피에타’ 열중
두 사람은 동학 100주년 무명 농민군 추모비(1994년), 민족시인 채광석 시비 조형물(2000년), 미선·효선 추모비(2012년),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기념비(2014년) 등 정치·사회·역사적으로 ‘의식화’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에 만든 ‘전차와 지각생’(2010)과 같이 서민의 토속적 삶도 형상화하기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각자 작품도 하고, 공동 작품도 한다. 남편 김운성이 개구쟁이, 말뚝박기 등 토속적 한국미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부인 김서경이 더 사회참여적이라는 느낌이다. 김서경의 대학 졸업 작품이 ‘통일이 오면’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에서는 포탄과 탄피로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서로의 예술적 감각은 어떻게 평가하나.
김서경- “남편은 은유적 방법을 많이 쓰고, 나는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 사람의 표정과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남편은 그런 얘기를 한 번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한다.”
그런가. 오히려 남녀의 스타일이 뒤바뀐 것 같다.
김운성- “그건 철학의 차이일 뿐이다.(허허)”
김서경·김운성 부부는 최근 소녀상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책 <빈 의자에 새긴 약속> (도서출판 말)을 펴냈다. ‘평화의 소녀상 작가 노트’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소녀상을 제작한 계기에서부터 제작과정, 건립 일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서경이 직접 단 책 제목에서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의미한다. 김서경은 이 빈 자리를 “할머니가 앉았던 곳,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빈 자리, 우리 아이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앉아야 할 약속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예술과학연구소장)는 이 책에서 “평화의 소녀상은 사회적 소통과정을 거쳐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점에서 사회예술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면서 “과거사 문제의 의제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요즘 ‘베트남 피에타’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학살된 베트남 피해자를 위로하는 상징물로, 어머니가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4월 한베평화재단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노화욱)가 만들어져 올해 안에 한국과 베트남에 ‘베트남 피에타’를 동시에 세우기로 했다. 월남전 참전단체에서 반대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제주 강정마을에 세우기로 했다. 베트남에서는 우리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에 대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주제는 계속 가져가야 할 것 같다”면서 “그래도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전쟁을 기념하는 아수라 같은 여건이지만, 통일에 대한 상징물만큼은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 원희복 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gnhyamg.com 기자>
==
‘응징’ 언론인 백은종 “응징 기준은 국민적 상식이다”
2019.12.28 19:49 입력
원희복 선임기자
2019년 12월 19일 여의도 국회 앞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자유한국당은 사흘 전인 16일 여야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의 선거법 국회 통과를 막겠다며 태극기부대를 동원해 국회를 ‘유린’했다.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태극기부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국회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경찰은 많은 인원을 동원해 이들을 저지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회 정문 앞에서는 정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 진보 유튜버연합 필리버스터 릴레이 단식’이라는 플래카드를 건 시위였다. 집회 참여자는 10명도 안 됐고, 그것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독립군가>를 틀어놓고 “설치하라 공수처”, “정치검찰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유튜브 중계를 하고 있었다. 경찰이 중간에 있었지만 대규모 태극기부대에 비하면 너무 소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극기부대 ‘지휘관(검은 베레모를 쓴 그는 극우 유튜버로 유명하다)’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 시위대에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검은 베레모에게 달려갔다. 시위대의 세로 보면 ‘무모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모함을 감행한 사람은 백은종 <서울의 소리> 대표(67)다. 그는 인터넷 언론사 발행·편집인이다. 게다가 그는 44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다.(방송사를 제외한 중앙언론사 유튜브 구독자를 보면 <한겨레> 23만 명, <한국일보> 19만 명, <서울신문> 1만 명 정도이고 시사주간지 유튜브 구독자는 수천~4만 명 수준이다·2019년 1월 기준) 국내 언론은 그를 외면하지만 오히려 외신이 그를 주목해 11월 6일 프레스센터에서 초청 기자회견까지 했다. 유튜브 중계를 마친 그와 인근 영등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44만 명 구독자 가진 유튜버
-오늘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교안 자한당 대표가 청와대 앞에서 7일간 단식농성을 할 때, 나는 하루 뒤 마주 보면서 단식농성을 했다. 그 농성을 이곳으로 옮겨 민주·진보 유튜버들이 교대로 농성하고 방송도 하고 있다. 우리는 공수처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거법은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유튜브는 보수·극우 인물이 장악하고 있다. 민주·진보 유튜버들이 많이 있는가.
“지금 유튜브에는 보수·극우 천지다. 진보진영이 팟캐스트를 장악했을 때 극우로 넘어갔다. 현재 우리 스튜디오에서 유튜버를 양성하고 있다. <서울의 소리>는 창간부터 유튜브를 했고, 특히 박근혜 탄핵과 요즘 ‘응징취재’로 구독자가 44만 명으로 늘었다. 페이스북도 4개, 트위터도 6개 계정으로 활동하고 있다. 홈페이지도 있지만 네이버나 다음에 올리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만 알려도 영향력이 크다고 자부한다.”
-SNS는 국가정보원 댓글공작에 대한 대선 무효 투쟁과 촛불혁명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기존 시민단체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규모 군중이 모이는 서초동 집회도 기성 시민단체가 아닌 SNS가 주도하고 있다.
“사실 요즘 시민단체가 집회를 하면 수백 명 수준이다.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민주노총도 수만, 많아야 10만여 명이다. 우리는 2016년 백남기 농민이 숨졌을 때 웹자보를 SNS를 통해 뿌렸다. 처음에는 1000명 모으기도 어려웠는데, 나중에 3만 명까지 모았다. 지금 15차까지 이어지는 서초동 집회도 처음 300명으로 시작해 1000명으로 불어나더니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 집회 참가자의 70%가 여성으로, 40~50대가 제일 많다.”
-물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가 언론의 의무이긴 하다. 그러나 ‘응징취재’라고 폭언과 폭력으로 직접 응징하는 것은 언론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나.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잘못을 깨달으라고 혼을 내는 것이다.”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상식이 기준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 ‘일제 위안부는 없었다’, ‘반민특위는 국론분열이다’, ‘제1야당 당수가 국회 폭력을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 등 국민 정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응징대상이다. 나는 사적으로 응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기준 역시 자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여론조사에서 공수처 설치를 70%가 찬성하지 않았나. 표현·학문의 자유와 매국행위는 구분해야 한다. 이를 빙자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나는 언론인이기 이전에 사회운동가”
그는 정식 등록된 인터넷 언론매체를 운영하는 발행·편집인이지만 실제는 사회운동가다. 그 역시 “나는 언론인이기 이전에 사회운동가”라며 “사회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언론을 보조로 활용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런 그에게 ‘언론의 본령’이나 ‘저널리즘의 기초’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히 ‘기레기’로 표현되는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심한 현실에서 그리 지적할 자격도 없다. 오히려 그는 기성 언론의 무책임한 기계적 중립을 비판했고, 기자는 그의 지적에 공감했다.
백 대표는 2009년 ‘안티 이명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명박심판행동운동본부’를 차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자 “그냥 우리가 쓰자”는 생각으로 <서울의 소리>를 창간했다. <서울의 소리>는 ‘입을 꿰매도 할 말은 하자’는 모토를 내걸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이명박근혜심판범국민행동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를 청산하고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자는 의미에서 다시 ‘적폐청산의열행동본부’로 바꿔 현재 대표로 있다.
의열단 이름이 들어간 것은 최근 발호하는 친일세력을 응징하기 위함이다. 그는 연세대 류석춘 교수가 강의 중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하자 학교 연구실로 찾아가 “일본 간첩이 분명하니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며 끌어내는 응징취재를 했다. 그 영상의 유튜브 조회수는 100만 회가 넘었다. 또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던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우연을 응징취재하기도 했다.
이를 보고 있으면 1965년부터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추적하며 응징했던 곽태영씨와 역시 1996년 10월 23일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씨가 생각난다. 백 대표는 박기서씨와 매년 광복절 백범 묘소에서 같이 참배하는 사이로 그에게 ‘정의봉’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런 친일행위 역시 이명박·박근혜가 낳은 적폐로 판단하고 있다. 그는 “<친북종족주의>를 써 북한을 찬양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는데 <반일종족주의>를 써 친일하는 사람을 처벌할 법이 없다”며 한탄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30여 건의 고소·고발을 당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된 똑같은 사안으로 검찰이 다시 구속영장 청구해 결국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하지만 응징취재로 인해 소송까지 간 경우는 10여 건이고 그중 내가 패소한 것은 딱 1번”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항소날짜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서울 영등포 사무실에는 스튜디오와 녹음실 등이 마련돼 있고 적잖은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 사무실은 한 독지가가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2년 전까지 유튜브 광고수입 50만~60만원에 자신의 돈을 합쳐 한 달 100만원으로 어렵게 <서울의 소리>를 운영했다고 한다. 직원 모두 자원봉사였고, 무료 기고였다. 하지만 지난해 이 사무실을 후원받아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하면서 광고수입이 월 1000만원, 후원자도 1500명이 넘으면서 경영이 안정됐다고 한다. “7~8명 직원도 채용하고 취재차량도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광고를 배정하지 않자 구글 본사에 찾아가 항의해 유료광고를 실을 수 있었다.
보수정권 비판, 30여 건 고소·고발 당해
1952년생인 그는 “박근혜와 동갑으로 생일까지 같다”고 말했다. 출신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지연·학연·혈연을 일절 따지지 않는다”면서 “사람은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백범 김구도 ‘고향을 묻지 말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개인정보를 독자에게 전하는 것도 기자의 임무라 맞섰다. 그는 “언론이 그런 것을 따지니 모두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점만 시인했다.
성격상 직장을 다니지 않았고 개인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식당도 해보고 공장도 경영해 봤다”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돈을 잘 써 많이 모으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기 의정부에서 양김씨 단일화 운동을 치열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을 알게 되고 노사모에 가입해 활동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시도되자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정의롭고 깨끗한 집단인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시도, 그는 세상이 주목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분신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뭐였나. 노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나.
“노사모 활동을 치열하게 했고, 직접 노 대통령을 만나도 봤다. 고졸 출신이라 대통령직 수행을 못 한다고 비난받으며 탄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전날 아내와 아들을 앉혀놓고 고민을 얘기했지만 가족은 분신하리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휘발유와 라이터를 사서 여의도 국회 앞으로 나갔다. 7시에 분신하면 저녁뉴스에 나올 것이라 계산했다. 화가 나 욱하는 심경으로 분신한 한 것이 아니라 탄핵의 부당함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노 대통령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나는 개인 노무현보다 그 사람의 정신을 좋아한다.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그 용기와 의지가 좋다. 노무현이 응징취재를 잘할 만한 성격 아닌가, 나와 성격이 비슷하다. (웃음) 나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에게도 빌어본 적이 없다. 달래야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한번 결심하면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가족이 이해하나.
“분신까지 한 나를 이해하기 쉽겠나. 게다가 매일 체포영장·소환장·테러위협까지 있는데 집에 있을 수 있나. 가족에게 위험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따로 생활한다. 다행히 아내가 생계를 맡고 아이들도 잘 키워 딸이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간다.”
그는 무서운 것이 없는 ‘집념의 인간’으로 보였다. 그는 “분신해 죽지 않았지만 노무현 탄핵 무효도 이루고, 이명박·박근혜 구속도 이뤘다”면서 “누가 대법원장이 구속될 것이라 생각했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자신의 행동이 돌출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사실 그 어떤 호소력을 가진 언론도, 매우 많은 정보력을 가진 정치분석가도 이들의 구속을 주장하고 또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이런 행동은 ‘좋아했던’ 노무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다. 그래서 그에게 추구하는 세상이 무엇인가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우리 아이들이 전쟁위험이 없는 한반도와 독재가 없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데 밀알이 되는 것”이라며 “나는 노령연금 25만원만 받고도 잘살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많은 전문가·교수들이 이번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말하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한 언론전문가는 “제발 일본을 아는 분들은 아베 정부가 왜 저러는지, 그리고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가 아닌 논변으로 말해달라”고 공개적으로 하소연할 정도다.(이준웅 서울대 교수·<경향신문> 8월 12일자)
이 중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 ‘국제통상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단 송기호 변호사(56)다. 한·일·대만 변호사들과 다중채무자 구제를 위한 국제공동체 작업을 해온 그는 일본 재계의 ‘작동체계’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정부·민간·언론 할 것 없이 자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그는 요즘 며칠째 밤을 새울 정도다. 8월 9일 인터뷰 도중에도 계속 전화가 울려 ‘코멘트’와 ‘보고서 독촉’이 이어졌다.
일본 재계 ‘작동체계’ 객관적 관찰자
-8월 초 직접 일본까지 간 것으로 알고 있다.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최근 일본이 포괄허가 취급품목을 지정하지 않고, 또 1개월 만에 수출허가를 내주는 등 조금 완화되는 분위기다.(한국은 8월 12일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맞대응을 했다.)
“이번 조치를 위반하면 10년 이하 징역, 법인에 3억 엔의 벌금, 3년간 수출을 못하는 등 일본 기업에는 엄격한 규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번 조치의 이유로 안보문제를 들고 있지만 정당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 수출기업에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 비판이 현재화되지 않았을 뿐 8월 말쯤이면 아베 정부에 부담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의 이번 조치가 저강도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아베의 이 조치로 국제 분업질서가 무너지거나 교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일본 가서 들은 것은 ‘지난번 방사능 수산물 문제를 놓고 WTO에서 패소하더니 이번에 또 지려 하나’였다. 아베는 이번 조치가 WTO에서 또 패소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가 WTO에 제소하는 것은 최대한 아베의 조치를 좁히자는 것이다.”
-우리도 맞대응해야 하는데 전문가들은 일본이 수입하는 품목 중 80% 이상 우리가 독점하는 품목은 장미나 파프리카 같은 꽃과 농산품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여행 자제나 일본상품 불매운동, 심지어 시멘트 원료인 연탄재 수입 규제 등의 대응카드밖에 없는 것 아닌가.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90% 이상 가져가는 것이 있다. 수출기업이 기꺼이 그런 정보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나.”
-한·일무역은 철저히 하청·조립 수출구조이다. 그래서 ‘가마우지 무역’이라는 비난도 있다. 재벌이 수백조 원의 사내보유금을 쌓아 놓으면서도 소재·부품 중소기업 육성을 게을리한 것도 문제다.
“일본 소재를 수입한 뒤 우리가 부가가치를 굉장히 높여 재수출하기 때문에 가마우지 수출구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과 산업생태계를 함께하려 했던 점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이 아무리 좋은 연구·개발(R&D) 실력을 가졌어도 제품을 납품해 수익을 올려야 한다. 우리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제품 테스트 기회도 주지 않은 점은 반성해야 한다.”
한·일 무역전쟁의 본질은 역사전쟁
송 변호사는 ‘의외로’ 이번 한·일 무역분쟁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깨는 우리의 조치도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영토(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지소미아를 체결했다”면서 “아베가 핑계대는 안보는 허구인데 그 허구 때문에 지소미아를 파기하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질문했지만 이번 한·일 경제전쟁은 안보문제라는 ‘외형’을 띠고 있지만 본질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양보할 수 없는 역사전쟁 요소가 강하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더해 박근혜가 10억 엔에 종군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끝내기로 합의한 것을 폐기한 것이 그것이다. 아베도 이 점을 시인했다.
게다가 한·일 과거사 문제의 시원인 1965년 한·일협정도 그렇지만, 위안부 합의나 지소미아 체결 등 모두 동북아 이익을 염두에 둔 미국의 ‘종용’으로 이뤄진 것이다. 결국 이 싸움에는 미국도 깊숙이 개입돼 있다. 심지어 남북의 급격한 접근에 민감한 일본·미국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간 무역갈등을 “남북경협으로 푼다”고 발언한 것은 이 같은 맥락을 반영한 것이다. 송 변호사 의견처럼 ‘쉬운 해결’에 기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도 이 한·일 무역전쟁의 본질은 역사전쟁이라는 것에 공감했다.
“그렇다. 이 싸움의 본질은 역사문제다. 그러면 역사문제가 왜 생겼느냐. 아베가 일본의 식민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아베는 이 평화헌법 체계를 깨려는 것이다. 일본 국민은 우리를 백색국가에서 배제한 것에는 찬성하지만 평화헌법을 깨려는 개헌에는 반대한다. 아베·일본 우익과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다수 일본인은 구별해야 한다. 식민지 지배의 잘못을 인정하고 평화헌법을 유지하려는 다수의 일본 사회와 우리가 함께 가야 한다.”
-우리는 일본의 양심이나 지성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과거 우리가 공영방송의 모델로 평가하던 NHK는 아베의 충실한 우익 대변인으로 전락했다. 리버럴 신문의 대명사였던 <아사히신문>조차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번역출판할 정도로 보수적으로 변했다. 결국 일본 사회 전체가 우경화한 것은 아닐까. 3연임에 성공해 2021년까지 집권하는 120여년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 아베를 만든 것이 일본 유권자다. 아베는 그런 유권자의 표를 바탕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미국 트럼프 대통령 역시 정치적 이해(연임 등) 때문에 중국과 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게 국제사회인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트럼프나 아베가 국제 룰을 깨뜨리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들은 정치인일 뿐이다.”
-정치인이니 표를 의식한다. 외교는 국내정치의 연장선이고 통상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무리 세계화를 얘기하지만 본질은 자신의 표인 자국의 이익,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
“우리의 대응이 민족주의여서는 안 된다. 표를 주는 주체들(국민)은 일시적으로 영향을 받겠지만 트럼프나 아베가 착근된 국제 분업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세계화에 부정적 영향도 있지만,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송기호 변호사가 국회에서 이번 한·일 경제전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송 변호사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세계 무역질서나 국제 분업질서는 자국의 이익보다 후순위다.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미국은 ‘혈맹’이라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을 요구하고, 무기를 판매한다. 그것이 냉혹한 국제사회 논리다. 이는 고민거리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경제구조에서 이를 내수시장을 키우는 계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한·일 갈등의 원인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배상하라는 일본 측과 한·일 기업을 통해 보상하자는 우리 측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일본은 국제중재기구의 판단을 받자는 주장을 했다. 송 변호사도 “아베가 우리 역사에 사과할 가능성은 제로이기 때문에 정부가 논의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면서 “일본 시민사회와 한국 시민사회가 피해자와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현 상황에서 이 방법이 그마나 현실적 해결책일 것이다.
송 변호사는 1963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모두 초등학교조차 나오지 않은 가난한 농부였다. 초등학교 때 광주로 유학해 광주일고 3학년 때 광주항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1981년 대학(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가자마자 운동권이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얼마 전 유시민·심재철 진술서 논란에서 ‘비밀조직’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 농촌법학회(농법회)가 바로 그가 몸담은 동아리다. 그는 “무학의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면서 “부모의 소망을 무시할 수 없어 적극적 운동권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그는 87년 농촌으로 내려갔다. 현장운동이 중시되던 시기였다. 노동·빈민운동은 많았지만 농촌운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하기야 힘들여 광주·서울로 유학을 보냈더니 시커먼 얼굴로 시골로 와 농사를 짓는 자식을 맘 편히 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할 수 없이 해남·영암을 전전하며 수박·배추·무 농사를 지었다. 1987년 수세투쟁에 참여하고, 영암지역 농민회(현 전농) 창립대의원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5년 만인 1992년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객지라 땅도 없는 한계 때문에 농민으로 정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실 80년대 노동·빈민현장에 뛰어든 학생운동가들은 90년대 초반 사회주의 몰락 이후 대거 철수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회사를 다니다 결혼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 1998년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한·EU, 한·미 FTA에서 발군의 실력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로펌에 취직해 맡은 소송이 2000년 중국과의 마늘 무역전쟁이다. 중국산 수입마늘 때문에 판로를 잃은 농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수입제한 관세 부과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월급쟁이 변호사여서 공짜로 변론해 줄 수 없었다”면서 “농민들이 준 마늘을 내가 서울에서 직거래로 현금화, 변호사 비용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운명적’으로 농업·무역 변론을 맡게 된 그는 아예 로펌을 그만두고 1년간 호주로 가서 농업법을 배웠다.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이다. 특히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국제통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유럽연합(EU),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국제통상 문제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잘못한 영문 번역을 지적, 외교통상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 당시 우리 농업에 대한 진실된 고려가 없었다”면서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S),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 모순 등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FTA 실무책임자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 부분은 지금 뭐라 말할 수 없다(웃음)”면서 “나는 여전히 농업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송파 청소년 공동체 ‘즐거운 家’ 운영위원, 사단법인 ‘위례’ 이사 등 지역활동을 하다 2017년 문재인 후보 중앙선대위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정치참여 이유로 “나는 남들이 많이 하지 않은 영역만 했는데 정치는 그렇지 않더라(웃음)”면서 “촛불혁명 이후 이제는 시민들이 더 주도적이고 더 민주적인 정당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6월 송파(을) 재선거에 나서려 했으나 최재성 의원에게 경선에 밀려 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 포용국가비전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정치는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어떤 것이 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느냐를 찾는 것”이라며 “시민운동에서는 배우지 못한, 책임감 있게 설득하는 법을 지금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