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① 전태일 정신이란? "사회 최하층 약자를 생각하는 정신"
입력2024.04.20.
윤영균 기자
"전태일 정신은 '연민'···사회 최하층의 약자를 생각했던 그 정신은 인류사에서도 위대한 연민 정신"
전태일 열사는 대구가 경북이던 시절인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대구로 내려온 뒤 다시 서울로 상경해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 노동청에 진정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면서 분신했고, 그날 밤 숨을 거뒀습니다.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대구의 옛집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추진됐는데요, 5년 만에 첫 삽을 떴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기억 공간이 만들어지는 건데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과 복원 작업에 참석한 시민들에게서 직접 들어봤습니다.
송필경 (사)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2019년, 2020년에 약 1년 반 동안 전태일 집, 전태일 서거 50주년을 맞아 전태일 집 매입을 했거든요.
그때 한 5억 원을 예상했는데 시민 모금이 5억 6천이나 모였습니다. 그만큼 시민의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게 대구에서. 그래서 그때 (돈을) 마련해서 이 집을 일단 매입하고 그다음에 이 집을 복원을 해야 해요.
이게 담장도 허물어지고 특히 기와는 거의 다 허물어졌어요.
이걸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복원 사업을 하는데 마침 코로나가 걸려가지고 한 2년 동안 아무 일도 못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23년도 초부터 이 집을 다시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 중요한 전태일 정신이 과연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가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이 집을 어떻게 활용해야 것인가, 이걸 1년 넘게 고민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른데 그래도 최종적으로 우리 건축위원회에서 최종으로 해서 원형을 최대한으로 보존을 하면서 전태일 정신을 담을 그 계획을 대충 마련했습니다.
혹시 부족한 것은 이게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몇 개월 내지는 더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니까 그때 각계 여러분께 의견을 들어서 그걸 조정해서 우리 나름대로 최선의 전태일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하려고 합니다.
Q. 전태일에게 이 집의 의미는?
첫째 전태일은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집에 산 적이 없었습니다.
비렁뱅이 생활, 천막집, 천막, 남의 집 처마, 이런 데서 살다가, 그리고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 닦기, 이런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어떤 안정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마침 62년 8월에 여기 대구에 왔을 때 전태일이가 만의 나이로는 15살 전까지, 한 15살 정도 전후로 해서 여기서 살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비렁뱅이 생활을 청산하고 온 가족 6명이 비록 두 평이지만 살면서 첫째 그렇게 좋아하던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삼백 미터 정도 떨어진 청옥고등공민이라고도 하고 대학생 분들이 선생인 야간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그 공부를 했을 때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골목길 어디 어두운 거리에서 신문팔이 이런 걸 하다가 처음으로 친구를 만났어요.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같은 또래, 그 친구들과 공부도 하고 여기서 저 멀리 앞산 안지랭이 쪽으로 놀러 다니면서 이 젊은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친구를 만났고 세 번째는 그 인간에서 가장 그 어떤 깊은 감정인 첫사랑을 만났어요. 김예분이라고 거기에 있는 그 같은 반이야, 그 첫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분신하기 이틀 전에 대구 왔습니다. 그래서 그 김예분을 데리고 동촌에 가서 동촌 강기슭에 앉아서 '자기가 죽어야지 이 세상을 좀 바르게 할 수 있다'하는 그러한 사랑 고백이 아닌, 사랑 고백도 하고 싶었죠. 그런 건 못 하고 그냥 암시를 했답니다.
김예분이가 분신하고 난 뒤에, 그게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자기의 온 인생을 쏟아부어서 앞으로 자기가 분신으로써 이 사회를 바꿀 그 각오를 말했답니다.
그러한 여성을 만났던 이 세 가지, 공부하고 친구 만나고 첫사랑을 느꼈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전태일로서는 정말 기억하고 싶고 22살 삶에서 어린 나이 빼면 15~6년의 그 삶에서 여기를 가장 깊이 생각하고 어떤 수기나 전태일의 글이 참 좋습니다.
너무 우리나라 앵간한 국문학자들 글보다 더 좋은, 중학교 1학년 과정도 겨우 배운 그 쓴 그 시가, 그 사상, 글, 그게 전부 다 바로 여기에서 탄생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Q. 전태일 정신이란?
전태일 정신은 연민입니다. 고통스러운 사람에 대한 연민, 그런데 전태일이가 왜 위대하냐 하면 자기도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살았는데 자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먼저 생각한 거야. 그거는 어떻게 종교적으로 보면 예수의 삶과 비슷한 그런 거고, 많은 그 뒤에 한국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줬습니다.
연민,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 그걸 어떻게 보게 됐냐면 우리가 여공, 여공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잖아요? 말을 하잖아요? 제가 볼 때는 청계천에서 자기보다 2,3살 어린 여성들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일할 때 이 사람을 생각하는 거는 어린, 여공이라기보다 어린 여성 노동자로서 이 사람을 대했던 겁니다. 자기보다 더 어리고 또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그리고 그때는 노동자가 대접받지 못하는 것을, 그 어린 14살 소녀를 보면서 어리고 여성이고 노동자, 사회 최하층의 약자를 생각했던 그 정신은 정말 인류사에서도 위대한 연민 정신이라고 봅니다.
윤영균 novirusy@dg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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