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홍세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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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부역세력이 기득권을 계속 창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는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지 70년 이후에도 지속된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한민국이 ‘사적 소유물’이라는 점을 오롯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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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홍세화

"최순실게이트는 대한민국이 사적소유물이라는 점을 오롯이 드러낸다"
2016년 10월 27일

김종목 기자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작가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작가

홍세화(장발장 은행장)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에 관한 여러 질문을 두고 인터뷰내 여러 차례 강조한 건 ‘공적인 것’ ‘공공’ ‘공익’이다. 홍세화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다. 그러니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려는 차원에서도 공화주의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은 공공성”이라고 했다. ‘공적인 것’이고 붕괴하고, 부재하는 한국 상황에서 홍세화는 알베르 카뮈가 공화국 시민을 두고 표현한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도 인용했다. 그는 유약한 야권의 문제도 지적했다. 홍세화를 만난 건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 22일이다. 당시 그는 민주공화국의 요건을 설명하며 우병우 청와대 수석 문제 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씨 ‘게이트’가 불거진 후 그것에 관한 생각을 추가로 들어 전한다.

"국가의 공적 기관들이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만큼, 국가의 사유화는 계속 상수로 남는다"

―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는 ‘민주공화국’과도 직결되는 듯합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공화국의 어원이 ‘공적인 것(res publica)’임을 강조한 바 있는데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는 대한민국이 ‘사적 소유물’이라는 점을 오롯이 드러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근대국가에서 ‘국가의 사유화’는 박정희 독재체제가 그렇듯이 국가의 물리력과 국민 다수의 동의가 결합되어 이뤄지는데, 이번 사태는 전근대적인 신정국가의 양상이 담겨 있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진 만큼 국가의 물리력과 국민 다수의 동의에 의한 국가의 사유화는 어려워졌는데, 민주화로 약해졌거나 빈 자리를 신정국가의 요소로 채웠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전근대적인 ‘국가의 사유화’가 가능했던 원인과 배경에 정부, 국회, 사법부, 검경찰, 국정원 등 국가의 ‘공적’ 기관들이 거의 모두 사적 이익 추구의 발판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될 것입니다.

가령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또 그 이후의 과정에서도 국가공공성에 의한 견제나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배경에 공당이라기보다 사당에 가까운 새누리당을 비롯하여 강력한 사익추구 집단의 당파성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듯이, 이번 ‘최순실 건’이 오늘 불거지기까지 견제와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도 ‘국가공공성 부재’라는 마찬가지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도 국가의 공적 기관들(그래서 국민이 위탁한 권력을 갖고 있는)이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그만큼, 양태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사유화는 계속 상수로 남을 것입니다. 비판의식과 주체적 의식을 가진 시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성숙만이 그들에게 공공성을 갖게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26일자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26일자

― 민주공화국의 핵심 요소를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리퍼블릭(republic)의 어원은
‘공적인 것들’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공화국의 내용을 어떻게 같이 담아내는냐가 중요합니다.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 개념이 아니죠. 공화주의는 민주주의를 충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공화주의란 구성원들이 공공의 가치를 공유하는 내용을 담은 것인데,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보다 구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퍼블릭(republic)은 로마공화정에서 나온 라틴어인데, 그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의 뜻이 ‘공적인 것들’(public things)입니다. 로마공화정 시기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 공공성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공공의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게 물 공급이었어요. 로마 시대의 유적 중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수도교가 있는데, 먼 산에서 맑은 물을 끌어와 시민들에게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물은 세 통로로 가게 되는데, 각각 로마 인민과 귀족 수도관, 대중목욕탕 쪽으로 갔죠. 가뭄이 오면 제일 먼저 귀족한테 가는 물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가 리퍼블릭에 담겨 있죠. 공 개념을 핵심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 민주공화국 기획 준비를 하다 보니, 공화국 개념이 다양하던데요.

“유럽에 있는 동안, 학자들마다 공화국이나 근대공화국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나 살펴본 적이 있어요. 학자마다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보편적인 게 있어요. 첫째 근대 공화국의 주체는 자유로운 시민들이라는 거고요. 둘째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애매하지만 공익을 목표로 하죠. 그리고 수단이 있는데, 바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에요. 이게 근대 공화국에 대한 보편적 개념 규정이죠.”

― 한국은 어떻습니까? 헌법 1조 1항에 그런 보편적 개념·규정이 얼마나 들어있는지요?

대한한국 공화국, 자유로운 시민들이라는 주체 개념도 비어 있고 공익이라는 목표도 실종됐다.

“한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왕 대신 대통령을 뽑는 제도’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게 현실이죠. 자유로운 시민들이라는 주체 개념도 비어 있고, 공익이라는 목표도 실종됐고요. 그렇다고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죠. 한국은 그야말로 크로포트킨의 ‘법은 힘센 자의 권리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국가 아닌가요? 전쟁과 분단 때문에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후과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도가 아니라, 옷을 뒤집어 입은 꼴이죠. 일제 부역세력을 일컬어 ‘사적인 안위와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res privata(사적인 것들)이 res publica(공적인 것들)을 배반했다는 뜻인데, 그런 배반 세력이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실제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공공성, 공익의 가치가 설 자리가 애당초 없었던 것이지요.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그 뒤 계속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됩니다.

저는 한국의 이른바 메인스트림(주류)을 관통하는 보편적 성질을 ‘오로지 사익추구’라고 봅니다. 행정부 관료들이나 법조계가 그렇듯이, 국방부문도 일제 만주군이든 일본군이든 일제에 부역한 자들이 국군 장성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죠. 재벌도,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주름잡고 있죠. 사학, 종교계 등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부역세력이 기득권을 계속 창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이런 양상이(제헌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지 70년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공화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죠.”

철도노조 조합원 및 KTX민영화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앞에서 박근혜 정부 ‘또 민영화 추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철도노조와 KTX민영화 저지 범대위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철도망 구축에 향후 10년간 19.8조원 민간자본 유치’라는 계획은 대국민 약속 위반이자, 재벌특혜라고 했다. 김정근기자
철도노조 조합원 및 KTX민영화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앞에서 박근혜 정부 ‘또 민영화 추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철도노조와 KTX민영화 저지 범대위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철도망 구축에 향후 10년간 19.8조원 민간자본 유치’라는 계획은 대국민 약속 위반이자, 재벌특혜라고 했다. 김정근기자

― 이런 현실에선 민주공화국에 무엇을 품어야 할지요?

유럽의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공화주의 가치의 연장선

“제일 중요한 건 공공성이죠. 유럽의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것은 사회안전망과 연결되지만, 애당초 공화주의라는 가치와 무관하지 않았죠. 공공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공화주의 틀 속에서 어떤 구체적 공공적 가치를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몰려올 때 유럽에서도 ‘작은 정부론’이 떠올랐죠. 그 핵심과 목적은 공공적인 가치를 공격하려는 거였습니다. 자본이 교육, 사회복지, 건강, 철도 등의 공적 부분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사유화하려고)’ ‘정부를 축소하라’는 논리·주장을 폈죠. 한국의 경우는 공공 부분이 워낙 취약합니다. 교육 부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이미 레스 푸블리카도 지극히 취약한데 그마저 레스 프리바타로 만들려는 겁니다. 민영화란 말을 많이들 쓰죠. 하지만 민영화는 지배이념이 담긴 언어입니다. ‘공기업’의 반대말이 ‘민기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영화, 사유화라고 말해야 옳죠. 인천공항도, KTX도 사유화하고 싶어 하잖아요. 공유, 공공적인 것, 공공성, 공익은 그 개념 자체가 애매한 점이 없지 않지만, 한국에선 그 토대 자체가 비어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 일제 부역 세력 말씀하시면서 언론 문제도 지적하셨는데요.

족벌 언론은 공기라는 탈을 쓴 철저한 사익추구집단

“언론은 공기(公器)입니다. 공익과 진실을 담아야 하죠. 그런데 철저히 기득권의 무기가 되어버렸어요. 기득권세력들이 사적 이익을 확대 창출하려는 무기로 만든 겁니다.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 환경을 만들려고 무기화한 거죠. 가령 한국에서 조중동 신문을 유럽에서 볼 수 있을까요? 우파 신문이라고 하는 르 피가로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럽에선 공공성·공익 개념에 의거해 좌우가 그것을 공유하고 있어요. 공익이라는 부분을 공유하기에 토론도 하곤 하죠. 한국은 완전히 찢어져서 토론도 안돼요. 한쪽은 철저히 사익을 추구하고, 한쪽은 공익을 담으려고 하죠. 이 사이 공유 지점, 겹치는 지점이 없어요. 족벌 언론은 공기 즉 공적 그릇이라는 탈을 쓴 철저한 사익추구집단입니다. 공적 그릇인 신문을 그들이 사적으로 누리는 언론 권력과 족벌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그런 집단인 거죠. 언론이라는 공기가 한국의 주류 언론에겐 철저하게 사적인 그릇이 된 것입니다. 사학도, 종교도 국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공동체의 핵심 고갱이로서 공익을 같이 보듬고 할 게 애당초 없는 상황이죠.”

― 시민사회 부문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결국은 시민의 부재, 시민성의 부재가 문제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 쪽을 바라보면, 사유(思惟)하지 않는 교육 문제가 크죠. 주체성·비판성도 부재하죠. 사유하지 않는 교육은 평등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 계속 형성되는 것이어서요. 프랑스에선 공화국이나 공화주의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아요. 예컨대, 알베르 카뮈는 정통 좌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가 공화국 시민을 두고 표현한 말이 있어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인데요. 프랑스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노동자·농민의 거친 시위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죠. 프랑스에서 근대공화국이 선 게 1792년입니다. 제1공화국 성립 의미로 부각되는 게, 앙시앙레짐이란 신분 질서를 무너뜨린 자유와 평등 이념이고요. 자유와 평등이 질서의 가치 위에 있다는 걸 강조하는 거죠. 또 사회정의가 질서 이념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명제는 논리적 정합성도 갖고 있습니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진 곳에서는 기존 질서에 도전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홍세화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장 피에르 위엘의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홍세화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장 피에르 위엘의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주체적 시민으로 형성하는 데 있어야

― 카뮈의 말은 한국에도 대입할 수 있을 듯 한데요.

“그렇죠. 사회 불의를 극복하려는 약자들의 요구를 법질서 이름으로 억압하죠. 프랑스에서 이야기하는 무질서를 택한다는 게 한국에선 뒤집어져 있습니다. 근대공화국의 시민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유와 평등 이념으로 인간에게 강요된 가장 무서운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태어난 게 근대공화국입니다. 당연히 질서에 비해서 사회정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거죠. 어원적 의미도 중요합니다. 중세 신분 질서에선 왕, 귀족, 노예가 뱃속부터 규정됐죠. 이걸 복종시키려면, 당연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배이념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신의 명령’이라는 이념이었죠. 영어로 오더(order)라는 게 명령이면서 또 질서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불어도 마찬가지죠. 사물의 질서이면서 명령이란 뜻입니다. 중세의 신분 질서는 신의 명령에 따라 규정됐다는 거죠. 이게 무너지면서 근대공화국이 탄생한 겁니다. 근대공화국이라면 자유·평등과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은 분단 상황 등 현실적 이유를 대겠지만, 법질서가 심할 정도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죠. 안타까운 건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공공성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자유, 평등, 사회정의 이념이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공유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녔을 때를 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학교에서 주로 강조 받은 것은 공공성, 자유, 평등, 사회정의가 아니라 안보, 질서, 국가경쟁력 이념입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주체적 시민으로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의 학교는 지금까지 민주공화국의 학교인 적이 없습니다.”

― 한국 정치권에서 공화국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유승민 의원이 민주공화국을 강조하기도 했고요.

“유승민씨가 말 뿐이라도 민주공화국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건 긍정적으로 봅니다. (정치권의 공화국 담론은) 우선 한국의 보수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게 하죠. 한국의 보수는 보수를 참칭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세력이 주류죠. 그 나마 보수의 가치를 인식하는, 보수에 근접한 유승민 같은 이들조차도 사익추구집단에 같이 어울려 있어요. 그들의 입장, 포지션이 다 연결되죠. 극우적 수구세력 속에 소수의 보수가 끼어있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사익추구집단과 보수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분단상황이나 진보세력이 취약한 등의 문제 때문에 분리가 잘 안 됩니다. 친박이니 진박이니 하는 허접한 현실 자체가 새누리당이 애당초 보수하곤 인연이 없다는 걸 스스로 드러내고 있지요.

유럽의 보수세력을 보면 그 뿌리는 프랑스에서 보듯이 공화주의자입니다. 그걸 놓치면 안 됩니다. 이들이 신분제를 무너뜨린 세력이니까요. 시민계급이고요. 프롤레타리아를 견인하고, 연합해 앙시앙레짐을 무너뜨리죠. 결국 부르주와 민주주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를 배반하지만 오늘의 드골주의도 그들의 공화주의 전통과 직접 연결됩니다. 보수세력이라면 보수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민족·국가·가족·전통의 가치이고 보수세력이 보수하겠다고 하는 것인데요, 한국의 보수를 참칭하는 세력은 철저한 사익 추구세력이라 (내세우는 가치를 두고도) 어떠한 논리도 없어요. 미국을 업고 힘도 막강하죠. 유승민 같은 사람이 공화국에 관해 발언하는 건 반가운 일인데, 왜 그 품속에서 하고 있나요. 그들의 힘을 이용하면서요. 결국 그 품에서 일종의 숙주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나마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웃음)”

― 한국정치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야권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국 야권 유약하고 야성이 없다.

“유시민씨도 강조했지만 야성이 없습니다. 사드배치도 그렇고, 세월호참사도 그렇고요. 지금 엉망 아닌가요. 말도 아닌 상황인데, 도대체 싸우는 모습은 안 보이고, 이게 뭔가 싶을 만큼요. 이들이 여당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왜 이렇게 유약할까. 유약함이 내면화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죠. 야성이 보이지 않는 게 일상 세계의 함정에 갇혀서인지, 서로 끼리끼리 만나 허허 하는 상황 때문인 건지…. 총선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 쪼개졌다 해도 다수가 야 3당인데, 우병우 등 어지러울 정도로 나라가 정말 형편 아닌데, ‘이게 아니다’ 하고 총대 메고 제대로 뭔가 하는 걸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들 역시 기득권 세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죠. 그만큼 한국 민중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의식도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지나면서, 여당을 경험해본 뒤에 굉장히 물러져 버린 듯합니다. 민중의 현실이 어떤지에 대해 절박함 같은 걸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을 빼면, (의원 간에) 엄청난 비대칭성을 보여줍니다. 그 비대칭은 민중의 구체적 현실과 정치 현실 사이의 비대칭이기도 하죠. 3김 시절 만 해도 자본권력이 국가권력과 평행했거나, 국가권력이 우위에 있던 시절 김대중·김영삼이 보여줬던 야성에 비교되죠. 지금은 그때보다 자본권력은 엄청 더 커졌고, 그런 자본권력에 야권도 깊숙이 포섭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을 꼽으신다면요.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공화국 국민은 '만인은 만인의 이리'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가령 용산참사를 볼까요. 축출과 배제의 정치잖아요. IMF 이후 일방통행 밖에 없었죠. 약자들을 몰아내기만 했죠. ‘축출자본주의’라는 말도 있는데, 축출시켜놓고 계산에 넣지 않는 거죠. 일방적인 현실이 문제입니다. 당연히 노동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노동현장의 실상은 잘 보이지도 않아요. 이미 축출되어버린 거지요. 노동자들의 구체적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건 민주노총인데, 이들조차도 대기업, 남성 중심이란 한계가 있죠. 재정이 주로 거기서 나오니까…. 취약합니다. 앞으로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고요.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떤가요. 근대국가를 낳은 사회계약론이라는 게 가령 토마스 홉스의 ‘만인은 만인의 이리’의 관계에서 서로 불안을 느끼니까 국가에 권력을 위탁하고 그 국가로부터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세월호는 참사 그 자체부터 특조위 등 그 이후의 대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강력한 사익추구집단의 당파성이 근대국가 성립 정신을 부정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용산참사는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축출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했다. 사진은 2014년 I서울 한강로2가 용산참사 현장 담벼락에 꽂힌 희생자 추모 국화꽃. 이상훈 기자
용산참사는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축출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했다. 사진은 2014년 I서울 한강로2가 용산참사 현장 담벼락에 꽂힌 희생자 추모 국화꽃. 이상훈 기자

― 최근 프랑스에선 난민 사태를 두고 ‘공화주의’ 논쟁이 다시 나왔습니다.

“유럽 전반의 문제인데요. 프랑스는 공화주의 가치 속에 이민자들을 통합시키려 해왔습니다. 지금 (이민자나 난민 문제는) 이것이 실패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요. 공화주의 가치는 공교육을 중심으로, 같이 교육 받으면서 공공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죠. 지금 유럽의 이민자 2·3세 문제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토대에 둔 사회통합에 실패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왜 실패했냐? 저도 동의하는 지점인데, 이민자나 사회 하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하는 좌파정당들이 우경화한 걸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아요. 사회 중하층 노동자계급이 좌파정당이 아닌 극우 정당에 표를 주는 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버림받았거나 배반당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프랑스 사회당은 중하급노동자들보다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상황이죠. 신자유주의 영향이기도 하고요.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유럽의 전통적인 좌파정당들이 우경화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있을 때는 이념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왼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지요.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각 나라 좌파정당은 집권 전략상 오른쪽으로 갔는데, 그래야 표밭이 늘어나니까요, 이런 흐름에 이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왼쪽으로 견인할 힘이 없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이 ‘제3의 길’이니 ‘신노동당’ 노선을 취했고, 독일의 사민당도 신중도로 우경화되었고, 프랑스 사회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집권은 했으나 과거의 좌파정당은 이미 아니었지요.

유럽의 나라들도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예산이 줄어들고 이민자 2·3세에 대해 사회적으로 통합을 시도한 각 지역 활동이나 도서관 같은 이민자 청소년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적 장소를 위한 예산을 삭감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버려지는 상황이었죠. 전반적으로 유럽 극우세력의 준동과 궤를 같이 합니다. 좌파 정당들이 자기 노선을 지키지 않고, 집권 전략에 따라 우경화한 결과죠. 좌파 정당의 전망 부재, 이념 토대 부재 문제도 있고요.”

― 한국 좌파도 세가 많이 준 듯합니다

한국이 처한 모순과 갈등을 인식하기 위한 겸손과 공부가 필요하다

“새로 시작해야죠. 정치적으로 보면 2004년 민주노동당 득표율 13%로 10석을 했고, 그 뒤로 계속 지리멸렬해가는 과정이죠. 제가 볼 때, 가장 치명적 문제는 지적·윤리적 우월감에 의한 공부 부족입니다. 한국 진보·좌파 세력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로 진보·좌파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선배를 잘못 만나 거기로 들어가는데요.(웃음) 자기가 진보다, 좌파다 하는 지적 우월감에다 ‘내가 노동이나 진보 정치 진영의 열악한 조건에서도 희생적으로 운동하고, 참여한다. 자본주의사회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윤리적 우월감까지 갖고 있어요. 오만한 사람에게는 회의가 없고 회의가 없으면 성숙하지 않지요. 사람 되는 공부를 멈추니까요. 사람 공부도 멈춘데다 지적 우월감 때문에 세상공부도 안 해요. 그게 핵심적 문제에요. 사람 되는 공부도, 세상 공부도 멈춘 진보...자기모순, 자기배반이지요. 한국이 처한 모순이 얼마나 복잡한가요?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모순의 덩어리죠. 분단·민족·젠더·계급·생태·지역 모순 다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영남패권주의 문제도 있죠. 이걸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면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활동 영역과 전공이 이 모순의 중심이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활동가든 전공자든 자신 활동의 분야가 모든 모순의 정점이고, 이것만 해결하면 다른 게 해결된다는 아전인수가 심해요. 아전인수이다 보니 어떤 경우 근본주의자가 되죠. 예를 들어 사드배치가 문제가 되면,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은 모든 게 미국 문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게 재벌 문제다, 또 어떤 사람은 영남패권주의 때문이다 식으로 하죠. 겸손하지 않아요. 진보가 겸손할 줄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 영남패권주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글도 쓰셨는데.

“그 칼럼 쓰고 (저자) 김욱씨한테 또 비판받았네요. (웃음). 각자가 자기 성채 쌓고 있고,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 좀전 말씀하신 ‘사람되는 공부’란 무엇인지요?

“‘사람된다’는 의미는 자기 전공이나 활동 분야만이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없으면 각자 만들어낸 성채, 진영을 만들어낸 성채를 허물 수 없어요. (진보·좌파가) 얼마 안 되는데 다 찢어져있는 것도 자기 전공·활동이 중심이란 데서 비롯된 거죠. 보수는 이권이 있으면 모입니다. 진보는 이념으로 모이고요. 경향신문도 한겨레도 어려움 많잖아요. 조중동 보는 사람은 ‘나 이제 안 봐!’ 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경향과 한겨레를 구독하는 사람은 소수인데, 이들은 신문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즐거움 때문에 봅니다. 그런데 10개 꼭지 중 1~2개 만 자기 생각과 안 맞아도 ‘나 안 봐!’ 이러는 거에요. 창간 주주 중 한겨레 보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신문 논조가 자신의 생각과 60% 정도만 맞아도 계속 구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지요. 시민성이 성숙하지 못한 면도 있고요. 진보적이라면 이념에는 투철해도 사람들에게는 유연해야 하는데, 이게 반대로 되어 있어요. ‘가까우니까 부딪힌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먼 사람은 우리 일상에서 만날 일이 없고 실제로 만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부딪힐 일도 없고요. 그래서인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거칠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요. 극복대상보다 경쟁대상에게 더 적대성을 보이고 있는 게 진보의 자화상 아닌가요?”

에밀 뒤르켐이 이야기한 '변혁적 국면'이 필요하다

― 정리 차원에서 다시 묻자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요.

“워낙 막강하죠. 검찰, 경찰, 사법부, 언론, 국방, 종교, 사학까지. 다 반민주공화국적이죠. 반공공적이고요. 이 세력들이 철저하게 사익 추구를 위해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정치적 지형 자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정치 지형이 바뀌려면, 일단 변혁적 국면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에밀 뒤르켐이 이야기한, 소위 변혁적 국면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국면이 빨리 오면 좋겠네요. 야당엔 야성이 없고 진보 진영 이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민중의 힘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각자 자리에서 가능한 실천을 해나가야겠지요.”

―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제도 변화는 무엇일까요.

“너무 많죠. 예컨대, 독일식 비레대표제부터요. 그리고 기본소득제가 실현되길 바랍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교육 문제에요. 생각하는 교육, 사유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을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아닌 신민으로 옭아매고 있는 핵심이 주입식 암기교육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러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학평준화를 해야 하고요. 하나 더 뽑자면 검찰총장 추첨선출제. 한국은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공화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 길항 관계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려는 차원에서도 공화주의 의미가 있어야 하고요. 그 핵심은 공공성입니다.”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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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자 김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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