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김종철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 경향신문
경제적 평등 이뤄야 동등한 정치권리 행사도 가능하다. 시민의회가 전문가들과 토론과 숙의를 거치는 '숙의민주주의' 도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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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김종철

공화국은 사유물이 아니다
2016년 12월 12일

김종목 기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박민규 선임기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박민규 선임기자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은 울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중공업 등 제조업체가 밀집한 울산의 분위기부터 전했다. 그는 구조조정 때문에 노동자와 가족들이 불안해한다고 했다. “구조조정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꿈도 못 꾼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문제다. 사회 전방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7월 16일 서울 평창동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는 그리스 민주주의부터 동학의 폐정개혁안을 거쳐 토마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까지 두루 살피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추가로 들은 의견을 먼저 전한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지난 여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취재 때 말씀하신 우려가 최악의 상태로 터져나온 듯한데요.

"부적격하다는 사실 알고도 방조한
언론과 여·야정치가, 모두가 문제입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라는 인물이 정치무대에 나온 게 그 자신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었다고 봐야죠.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 말고 뭐가 있었나요? 정치가로서 아무런 자질도, 능력도 보여준 게 없죠. 공사 구별도 전혀 못하는 위인이었고요. 이걸 또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정치판과 언론계도 공직자로서는 매우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잖아요.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방치하거나 방조해온 자들이 더 문제죠. 책임져야 할 자들에는 어용언론과 여당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소위 야당 정치가들도 포함돼 있고요.

이대로 두면 너무 위험해요. 빨리 대통령직 수행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200만이 모여 퇴진을 촉구하는데도, 박근혜는 고위공직자들을 새로이 임명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조약까지 맺었어요. 앞으로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몰라요.

처음 폭로됐을 때 즉각 대통령의 직무 정지에 착수했어야…

정치권 하는 게 너무 화납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처음 폭로됐을 때 국회는 즉각 대통령의 직무 정지에 착수해야 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화국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정치가라면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 탄핵 절차를 서둘러야 했던 거죠. 최소한의 책무인데, 야당 의원들조차 꾸물거리다 뒤늦게 탄핵절차에 합의했어요. 대체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국회가 아무리 ‘공공심을 결여한 인간들’의 집합체라고 해도요. 야당이 우려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대통령직 수행을 즉시 정지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어요. 우려는 나중에 대응하면 되죠. 국회가, 좀 더 좁혀 말하면, 야당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떠맡아야 할 역사적 책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을 준비 중입니다. 사드 배치 결정 과정에서도 주권과 정책 결정의 비민주적 문제를 볼 수 있는 듯합니다.

“박근혜는 사드 배치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심각합니다. 박근혜에게 고도의 자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에요.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도 (배치를) 몰랐다는 거 잖아요. 미국의 주 목표는 중국 견제입니다. 북한 레짐 체인지 말도 나오는데, 과잉 해석 같아요. 야당의 존재, 역할에 실망이 커요. 안철수가 국민투표 하자는 게 그중 제일 나은 말이잖아요.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그 말이 민주공화국의 원칙에 제일 충실한 이야기죠.(웃음) 맞는 소리입니다.

국민이 결정할 일이지, 집권자 결정할 게 아니라는 거죠. 입만 열면 ‘애국’을 말하고, 미국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대한민국 기득권층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공익 내지 국익으로 끊임없이 위장, 은폐하면서 상습적인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죠. 사드배치,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4대강사업추진 때도 다 그랬죠.”

국방부는 9월 30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 있는 성주골프장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날 저녁 김천역에 시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고 정부의 사드배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천=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국방부는 9월 30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 있는 성주골프장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날 저녁 김천역에 시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고 정부의 사드배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천=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선생님께선 ‘공화국’의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민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근원적 민주주의'의 정착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민중이 자기 통치하는, 바로 근원적 민주주의를 시행했죠. 그런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지도자가 필요해요.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할 때까지는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야 했어요. 나는 플라톤과 같은 엘리트주의자들은 문제라고 보지만,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형성하고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 민주주의도 솔론(BC 640년 ~ BC 560년 추정)이라는 위대한 인물에게 권력이 주어졌고, 그가 보다 평등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견고하게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해졌거든요. 솔론은 무엇보다 토지를 분배한 인물입니다. 재산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사회·정치개혁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죠. 고대 이래 인간 역사는 근본적으로 토지를 어떻게 분배할지, 즉 현대식으로 말하면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이란 것도 그래요.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
"공화주의란 국가가 공유재라는 의미"

최근에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을 읽어봤는데요. <법의 정신>에서 강조하는 공화주의라고 하는 건, 결국 공화국이란 사유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국가는 공적인 것, 즉 공유재라는 거죠. 몽테스키외가 명백하게 이야기합니다. 공화주의자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요. 왜냐면, 공화주의는 공화국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공통의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하는 권리와 같은 게 공화국의 정신이니까. 결국 평등주의 원리죠. 그런데 정치적, 경제적 평등이란 곧 민주주의죠.

그리고 <법의 정신>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너무 놀랐는데, 내 평생 지론이 고르게 가난하게 살자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몽테스키외가 공화주의에 불가결한 시민적 덕성을 꼽으면서 드는 게 바로 소박하게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거죠. 18세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놀라웠죠.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자기가 살던 당시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고 봤어요. 이미 광범하게 세속화된 세상에서는 다들 사치스럽게 살고 싶은 욕망이 분출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더불어 소박한 생활을 하겠다는 정신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봤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는 공화주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본 겁니다.”

― 예전 <정치의 부재, 공화주의 결여>라는 제목으로 쓰신 칼럼이 떠오릅니다. 지난해 3월 퇴임한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재임 중 극히 소박하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을 했다는 구절이요.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 아닌
가장 욕심 없는 대통령, 무히카

“흔히 무히카 대통령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언론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은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 아니라 가장 욕심 없는 대통령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가 매우 검소하게 사는 것은 개인적인 체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나는 공화주의자다. 공화주의자는 자기 나라의 다수 가난한 국민들의 평균적 생활수준 정도로 생활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현실의 정치가 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무히카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아내와 함께 근무 시간 외에는 교외의 작은 농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관저는 자기 가족에게는 너무 크다고, 노숙자들에게 내주고요. 봉급의 대부분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출퇴근 시에는 오래된 폭스바겐 비틀을 직접 운전했어요. 이런 모습은 ‘정치적 쇼’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실은 공화주의적 신념에 완전히 부합하는 행동이었죠. 우리는 정치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에서 살면서 늘 저차원적인 담론을 주고받으면서 살잖아요. 관념적인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번쯤은 무히카 대통령 같은 지도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충격을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우루과이 대선 1차 투표 때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투표하기 위해 수도 몬테비데오의 투표소 앞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 AP
2014년 우루과이 대선 1차 투표 때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투표하기 위해 수도 몬테비데오의 투표소 앞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 AP

― 한국에선 공화주의 전통, 공화주의 정신을 찾을 수 없나요? 보통 임시정부 헌법을 떠올리곤 하는데요.

전봉준 선생의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역사 최초의 공화주의 천명

“임정 헌법 중요하죠.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소위 엘리트들의 수준이라는 것은 옛날 조선왕조가 망할 때의 엘리트들의 수준과 다르지 않아 보여요. 120년 전에 나라를 구하려고 궐기했다가 반동적인 지배층과 외국군대에 무참하게 학살을 당했던 동학농민군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죽어가며 염원했던 ‘좋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학농민전쟁 때, 1894년 4월 전봉준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10월 2차 봉기할 때까지 집강소를 설치해 자치를 했잖아요.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동학 지도자들이 밝힌 개혁안 12조가 있어요. 노비 문서 불태우고, 탐관오리 불태우고 등등 여러 조항이 있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자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토지문제였어요.

당시 시대 상황을 봐야 이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어요. 고종이 나중에 대한제국 만들고, 근대화한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소위 말하면 힘깨나 쓰는 관리, 벼슬아치들이 백성들하고 나눈다는 의식이 없었어요. 나라가 망했으면 망했지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전봉준 선생은 원래 유생이었지만, 서울의 엘리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죠. 당시 동아시아는 아직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꽤 활발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등 젊은 지식인들이 시도했던 무술변법(1898년) 운동은 그런 움직임을 대표하고 있었죠.

나는 전봉준 선생의 진취적인 혁명사상은 동학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그런 새로운 사상적 기류에 암암리에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봉준 장군이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는데, 그 재판기록이 지금 ‘전봉준공초’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문서입니다. 그때 재판에는 조선의 사법관리 외에 일본 영사도 신문관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그 일본 영사가 신문 도중에 마음속으로 전봉준 장군을 굉장히 존경하게 됩니다. 조선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있다니!

"이 사람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일본 신문관도 감동시킨 전봉준의 답변

그러면서 나중에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올려 이 사람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구명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동학 잔당을 살려놓을 수는 없고, 조선 정부 측에서는 국가에 맞서서 무기를 들었던 반란군의 수괴를 살려놓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결국 처형을 당하죠. 그런데 신문관들이 전봉준 선생에게 동학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전봉준 선생의 답변은 바로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이렇게 된 건 결국 1인 통치의 결과이다, 군주제에서는 늘 영민한 군주가 나오리란 보장이 없다, 어리석은 군주가 등장하면 나라가 망해 가도 방법이 없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현명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합의제 정치다, 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니까 조선의 역사에 최초로 공화주의 사상이 천명된 거죠.

나는 전봉준 선생이 구상한 이 정치모델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봐요. 중앙의 정치는 합의제로 하고, 각 지역에서는 집강소 시스템, 즉 풀뿌리민중에 의한 자치를 한다는 구상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헌데 12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전봉준 선생의 꿈의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원통하죠. 지금은 별로 희망도 안 보이고요.”

전봉준 압송 사진
전봉준 압송 사진

― 한국에서 공화주의를 실현하려면 어떤 게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개헌의 내용보단 '개헌의 주체'
기성 정치가들 아닌 시민의회가 중심

“요즘 나라를 다시 만들면 안된다는 절박함을 박근혜 때문에 느끼고 있잖아요. 구체적으로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죠. 결국은 비례대표제로 국회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급합니다. 우선 독일식으로 지역구 절반, 정당명부별 비례대표 절반 정도라도 가는 게 1차 목표라고 봐요. 최근에 남재희 선생이 어딘가 쓴 거 보니까, 개헌이니 뭐니 하는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했더군요. 사실 지금 5년 단임제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박근혜 같은 사람이 중임한다면 큰일 나죠. 이원집정부제도 대혼란을 가져와요. 대통령은 외치를 맡고 총리는 내치를 맡는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내치와 외치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어요?

나는 개헌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건 개헌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성 정치가들에게 맡길 게 아니라 시민들이 개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의회(Citizen Assembly)를 만들면 됩니다. 지금 국회는 선거로 뽑힌 사람들로 구성하잖아요. 재산이나 명성 혹은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국회의원 못 되잖아요. 그러니까 국회란 결국 지배층, 엘리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될 수밖에 없죠. 그런 의미에서 추첨(제비뽑기)로 대표자들을 뽑아 시민의회를 구성하면 엘리트 지배체제에 대한 대항체가 될 수 있어요. 법적 구속력은 없어도 국회가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광화문광장에 집결해서 아무리 대중이 데모를 열렬히 벌여도 이런 시민의회로 대중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결실을 맺을 수가 없어요. 세월호 참사나 사드배치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시민의회를 열어서 전체 민중의 의사를 물어야죠.

시민의회가 전문가들과 토론과 숙의를 거치는 '숙의민주주의'

그런데 시민의회는 그냥 몇몇 시민단체들만으로 기획해선 안됩니다. 전국적으로 마을 단위에서부터 풀뿌리들이 일정한 수효의 대표자를 추천하고, 추천된 사람들이 전부 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들 중에서 제비뽑기로 몇 백명을 뽑아서 의회를 구성하는 거죠. 이런 방식이 현재의 선거로 뽑는 국회보다 훨씬 더 민의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회는 필요하면 전문가들을 초대하여 그들로부터 해당 사안에 대해 충분한 설명과 조언을 청취한 다음에 숙의와 토론을 거쳐 결정하면 됩니다. 이런 것을 숙의민주주의라고 하죠.

이 숙의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민중자치의 원리를 살리면서 동시에 그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심사숙고의 결여를 보완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현재의 대의제민주주의는 다수 민중의 뜻에 반응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 특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잖아요. 여기에 대한 가장 좋은 대안이 바로 숙의민주주의, 즉 시민의회를 수립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은 아직 보통 시민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이야기가 되기 쉽죠. 그래서 우선은 선거법을 개정하여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게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선거법 개정은 정말 필요한 듯한데요.

일반인에겐 부담스러운 공탁금 1500만원
선거법 개정으로 정치장벽 낮춰야

“그렇죠. 하승수(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씨가 신생정당이 정치권 들어가기 지난하다고, 녹색당 활동하면서 절감한 모양이더라고요. 첩첩이 장벽입니다. 공탁금 걸어야 하는 데가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해요. 일본은 그나마 공탁금이 우리보다 많이 싸다고 하고요. 녹색당은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가난하니까. 후보당 1인당 1500만원을 내고, 15%를 득표해야 돌려받는데, 실제로 신생성당 후보자들은 다 날리거든요. 돈 없는 사람들은 아예 정치판에 끼어들지도 말라는 소리죠. 이건 선거법만 조금 고쳐도 되죠.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으로 돌아가려면 선거법 개정이 필요해요. 제비뽑기로 하면 제일 좋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직은 낯선 아이디어니까요. 어느 자리에서 내가 검찰총장도 제비뽑기로 뽑아야 한다고 하니까 다들 웃더라고요. 전국의 상당한 경력을 가진 법대 교수, 검·판사, 변호사들이 검찰총장 후보를 3~4명 선거로 뽑은 다음에 그 명단들을 항아리에 넣어서 광화문 광장에서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제비로 뽑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검찰총장이 출현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나로서는 꽤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다들 웃기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검찰만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제대로 역할을 해준다면 다른 제도를 고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에 우리나라가 보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봅니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검찰총장 직선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모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선거는 얼마 안 가서 대체로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부정이 개입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니까요. 선거를 하면 파벌이 생기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분쟁이 그치지 않아요. 장기적으로는 공직자 전부를 선거가 아닌 제비뽑기로 뽑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민주공화국을 정말로 만들려면 말이에요.”

― 경제 불평등 문제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완전한 평등은 성립될 수 없지만, 극단적 경제 불평등은 동등한 정치적 권리 행사까지 불가능하게 합니다."

“결국은 재산문제죠. 공화국을 성립하려면 경제적 평등이 보장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완전 평등은 있을 수는 없어요.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데 완전한 평등이라는 게 성립될 수 없죠. 하지만 기회는 동등하게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게 공화주의인데,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권리가 실현이 안 되죠.

지금 세계적으로 경제 불평등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어요. 세계적 민간기구인 ‘옥스팜’이 2015년 정초에 내놓은 보고서는 “전지구적으로 갈수록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의 손에 부가 집중되고 있다”는 구절로 시작해요. 2014년도 세계 최상위 1% 부유층이 소유한 재산은 세계 전체 부의 절반에 육박하고, 상위 10% 부자들은 세계 전체 부의 90%를 차지했다죠. 이렇게 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대로 가면 곧 세계의 부가 0.1%한테 집중될 거예요. 금융상품 거래를 보세요. 주식시장에 개미들이 들끓지만, 실제로 자본투자(투기)를 해서 생기는 이득은 0.1%한테 집중되고 있어요. 그 0.1%가 현재 모든 ‘캐피탈게인’의 50%를 차지한다잖아요. 그리고 10%의 개인이 전체 이득의 90%를 가져간다고 하고요. 하위 90% 투자자들이 얼마 안 되는 나머지 이익을 나눠가지는 거예요.

실물 경제보다 금융 시장이 거대한 경제체제
'빈인빈 부익부' 가중시켜

이런 구조에요. 부자들은 그렇게 번 돈을 갖고 계속 금융상품을 가지고 장난을 하거나 기업 통폐합을 한다든지 해서 끊임없이 재산을 늘리고 결국 정치를 맘대로 주무르고 있잖아요. 지금 세계경제를 보면 생산 활동보다 금융상품 거래 쪽에 훨씬 많은 돈이 돌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금융자본주의화가 바로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왜곡시켜온 장본인이죠. 그걸 규제하라고 요구하면 자본이 외국으로 나간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안하잖아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같은 사람은 금융자본에 대해서 국제적인 과세를 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죠. 그러려면 각국 정부가 공조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협력할 정부가 있겠어요? 고소득자에게 최대 80%의 누진세와 상속세를 부과하고 부유층의 토지·주택·특허·금융자산 등 자산 전체에 매년 최고 5~10%의 글로벌 총자산세를 물리자는데 동의하겠어요? UN을 통해서 그게 가능하겠어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그런 딜레마를 남겨놓고 끝나요. 피케티가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수백년간 지속된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을 방대한 통계자료로 입증한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그러나 그의 해법은 실현성이 희박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피케티가 1·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까지가 비교적 불평등이 완화된 시기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나는 피케티의 이런 관찰은 그동안 근대적 정당정치와 대의제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조건, 즉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데 전혀 무력했다는 걸 암시하는 거라고 봐요. 종래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불평등의 심화·확대를 촉진하거나 적어도 방조해왔다는 거죠. 피케티의 최종적 해법은 ‘민주주의의 강화’인데, 여기서 정말로 필요한 게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의 민주공화국 기획은 시의적절하다고 봅니다. 어쨌든 구태의연한 방법으로는 민주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공명정대한 나라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도요.”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해당 기사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에 관한 의견은 republic@khan.co.kr 로 보내주십시오

취재기자김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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