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친일청산과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기자명 주우연 기자
입력 2004.04.12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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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관점으로 심화된 논의를 시작할 때
'친일’이란 무엇인가?
박찬승 교수(이하 ‘박’):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의 뜻만 가지고 얘기를 한다면 영어로 ‘프로재패니즈(pro-japanese)’가 되고 부일(扶日)협력자는 ‘콜레보레이터(collaborator)’라는 용어가 별도로 있다. 그러나 오늘날 친일파라는 용어는 부일협력자의 의미로 대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계에서 친일파라는 용어대신 더 정확한 용어인 부일협력자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미 일반적으로 친일파라는 용어를 부일협력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다.
권태억 교수(이하 ‘권’): 지난해 12월 열린 친일인명사전 위원회의 친일문제 공청회 때 현 국사편찬 위원장인 이만열씨가 친일청산 대상, 처벌 대상을 “일본 제국주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 지배 및 침략 전쟁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와 우리 민족에게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끼친 행위자”라고 말한 바 있다.
친일청산 움직임의 문제점
윤해동 교수(이하 ‘윤’): 지금의 시점에서 친일파를 규정하고 특정 인물들에 대한 평가나 포폄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오히려 친일 인명사전을 좀더 광범위한 근대 인명사전 같은 기초 작업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 특별 법안의 목적이 “반민족 행위의 진상 규명”인데 반민족행위라는 것은 훨씬 더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처벌의 주체인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처벌 대상인 반민족 행위의 규정 자체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박: 이번 법안 명칭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이라고 돼있는데 이 명칭은 사실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 법안의 제 2조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를 18가지 유형으로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제목은 추상적이지만 정의에서는 구체적인 행위가 명시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더욱 구체화되어 있어 추상적인 위험성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안병직 교수(이하 ‘안’): 문제는 우리의 청산 방법이 인적 청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며 이는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권선징악적 명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지금 같은 방식의 과거 심판은 식민지 경험의 피해자에게 일종의 원한을 푸는 심리적 만족감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또 일제 시기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 시기의 연구가 미흡한 상황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인적 청산 자체가 과거청산의 본질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일제의 경험이 어째서 불행했고 무엇을 배웠는가, 또 과거의 과오를 어떻게 극복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과거 청산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 안 선생님이 지적한 ‘한풀이식 도덕적 판단’과 윤 선생님이 지적한 특정 인물 포폄 문제의 경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고 본다. 특수한 상황이란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에 사회가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박 선생님의 의견은?
박: 최근 친일 문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민주화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오면서 사상과 문화 전반에 존재하는 독재 체제와 전근대적 잔재 청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전체주의, 국가주의 분위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이분법적 사고, 파시즘적 성향 등은 한국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것들의 원인은 친일 잔재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청산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를 청산하는 방법은 문화나 사상 측면의 운동인 계몽이 있지만 이런 방법도 인적 청산 문제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사상과 문화는 사람이 만들고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인적 청산 문제에 치우쳐 있다는 안 선생님 지적에 동의하며 양자가 항상 같이 거론되며 나가야 한다고 본다.
친일의 성격
윤: 제국주의 지배 아래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의 주체와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노력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수자들은 주류적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군대에서도 더 열심히 싸운다. 일제 지배 아래 한국인들의 차별구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일본과 동일시하려는 현상이다. 소수자가 억압 체제에 동화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약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생존욕구이며 지식인 뿐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히 동의를 얻은 발상이다. 일체화하려는 노력을 해도 차별구조가 타파되지 않는 상황에서 식민지인들이 가져야했던 이율배반적 의식구조로 인한 동의를 단순히 친일파․민족반역자라고 윤리적으로 폄하할 수 없다.
박: 양심에 의해 개인적 사고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강의와 집필 등 사회적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식인의 경우 군인, 관리와 다르게 책임이 막중하기에 단지 지식인의 고뇌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또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강대국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은 노예적 사고의 발로였으며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친일청산 움직임의 목적은 무엇인가
안: 나는 친일 지식인들이 반민족행위보
다는 파시즘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다만 파시즘은 당시 1920∼30년대 지식 사회를 휩쓴 일종의 지적 사조였고 당시 지식인에게는 근대화의 주체로서 국가 권력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권: 한국이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가치
를 포기하기 어렵다. 친일청산이 가져오는 효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 우리가 단일민족 국가에 집착해야 하는가는 생각해볼 문제지만 현재까지는 국가 공동체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말 일제에 대응한 의병장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저항했던 의병의 후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양란 이후 조선 정부에서 의병장 후손들을 명예로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상이 역전돼서 친일파 후손들은 지배적 엘리트가 되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극빈층이 됐다는 조사들이 있다. 만약 다시 국가의 위기가 오면 누가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겠는가? 결국 국가가 있는 한 윤리기준과 이에 따른 상벌기준이 명확해야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기준이 명확히 잡혀 있지 않다.
권: 일제 시대 친일한 사람들이 애국자로 변모해 기득권을 가지게 된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있는가?
안: 근현대사를 보는 중요한 논리 중 하나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모순, 불평등 구조, 정치 경제적 문제의 원인을 친일청산 실패로 인한 잔재와 친일파의 기득권 형성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한 설명과 그에 따른 과거 청산은 잃는 게 더 많다. 국가의 유지를 위한 상벌의 기준으로 과거 청산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한 측면이 있다. 국가 유지는 꼭 과거 청산이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더라도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고 포상하는 등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친일청산과 민족문제
박: 특정인물을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들의 행적은 기록에 남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그러한 기록을 은폐시키고 오히려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고 쓰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다.
안: 민족이라는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국제화가 되더라도 민족과 국가는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학이 다루는 영역으로서 민족이라는 가치를 지나치게 중심에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더구나 과거 청산의 문제를 민족가치를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윤: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위해 민족 문제를 내세워 윤리적 우위를 점유하고자 하는 발상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의해 친일진상규명법과 같은 법안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위험하다. 또 처벌이 아닌 진상규명이라고 할지라도 이 법안은 소급입법으로 기본권 침해의 우려가 있다. 여전히 연좌제적 혐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인륜, 인도에 반하는 죄는 시효성이 없다고 규정한 유엔의 인권법과 달리 이번 법안은 민족․반민족의 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국가가 주체로 나서 일제 협력 행위에 대해 소급입법 처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박: 그러나 과거청산이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지지 못하면 훗날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불가피하게 소급입법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번 법안은 법안의 취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정에 개입하여 범위가 애매해졌다.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라는 어구를 집어넣어 지방차원의 부일 협력 행위와 전쟁 동원행위는 제외됐다. 이런 불구적인 법안이 그대로 나간다면 오히려 많은 부일협력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안: 우리가 흔히 모범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프랑스의 과거청산이다. 프랑스는 5년간 내전 상황 후 독일에 협력한 30만 명의 혐의자를 찾아내 10만 명을 재판하고 8만 명을 처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부역행위는 명확한 이적행위이고 따라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또 프랑스의 경우 전후 사법적 처리에서 처벌의 형평성․일관성 등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나치 점령기 유대인의 희생을 방조하거나 1954년 알제리 전쟁 때 알제리인을 학살, 고문하는 반인륜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등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과거청산을 했다고 본다. 이는 반민족보다는 반인륜이라는 가치가 과거청산의 잣대가 돼야 함을 시사한다.
식민지 지배체제의 성격에 대하여
박: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의 경우 일반적 인식과 달리 민전이 수탈당한 경우는 드물다. 조선 총독부가 조선인 토지를 약탈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실상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왜곡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식민지 지배체제는 근대적 기제를 통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지배가 공권력을 가장하여 더 치밀하게 폭력적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총독부 경찰비는 해마다 증가했고 1930년대 조선 총독부의 치안경찰비용은 총독부 예산의 9%로 교육비 3%의 세 배에 달했다.
권: 당시 근대적 기제와 시스템으로 인한 물질적 해방은 이뤄졌지만 인간해방은 철저히 부정됐다. 근대성 원리의 작용 이면에는 민족 차별 원리가 작용해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이익을 합리화했으며 정치적 권리도 배제됐다.
안: 일제가 근대적 통치 매커니즘을 통해 인간해방을 부정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관리했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 매커니즘이 36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정통성 없는 권력임에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언가 성취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철도, 신작로 등 가시적인 성취 외에도 치안의 안정과 신분차별 금지 등 여러 근대적인 원리의 도입은 경우에 따라서는 식민지인들이 그 권력에 대해 부분적으로 용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일제를 보는 눈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 관료와 경찰의 숫자 증가는 관료제의 진행으로 인한 세계적 현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외부의 폭력이라기보다는 근대적 폭력이다. 또 여기서 ‘규율화’라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안정화되고 질서가 잡혀 경제적․사회적으로 성장하자, 조선인은 근대적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했다. 물론 계속해서 차별구조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차별에 반발을 하면서도 근대적 가치를 내면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성장, 근대적 발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 다음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차별구조에 대해서만 반발을 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 관료와 경찰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식민지 민중의 통제가 좀더 확고해졌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정통성, 정당성이 없는 것을 무엇으로 유지할 수 있었는가? 위반 시 무기징역, 사형까지 처할 수 있던 치안유지법 등의 악법과 물리력을 통한 지배가 체제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또 식민지 지배 시기가 한국이 근대와 만나는 시기와 중첩됐기 때문에 식민지 권력이 여러 가지 근대적 시설을 어쩔 수 없이 도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전까지 그런 근대적 시설을 보지 못했던 조선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부분적으로 식민지 지배가 제공해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식민지 권력이 부분적인 정당성을 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권력이 성취를 보여주었다는 것보다는 시기적인 중첩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철도가 놓이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오고 이런 것들이 식민지가 아니어도 그 시기에는 다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학교나 병원도 오히려 더 많이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권: 요즘은 일제의 일방적인 수탈로 식민지 시대를 보는 시각에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고 전통적 역사학에서도 시각을 달리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쪽에서 지나치게 밝은 면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당시는 식민지 지배가 일정 정도 근대화에 도움을 준 동시에 상대적 차별에 대한 불만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본다.
박: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전략은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는 억압에 치중해 친일 세력을 만들고 포섭하지도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전략이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배 전략에 조선 사람들이 당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고 본다. 효과적인 대응은 조직을 만들어서 대응하는 것인데 조직을 만들 경우 통제가 강력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저항 자체가 조선인들에게 불가능했다.
안: 일제 시대를 수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에게 그만큼 억압을 받았던 것에 대해 민족적으로 의분을 느끼는 데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수탈론은 당시 사람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권력에 대해서 유보적 수용을 하며 경우에 따라서 저항이나 수용 등 다양한 태도를 취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대응방식을 인정하는 역사적 서술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늦게 태어나는 행운을 누린 자로서 지금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심판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이 했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지 스스로 역사적 경험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과거청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박: 현재 국사학계에서도 일방적인 수탈론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근대성과 식민성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
권: 지금까지 여러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일정한 결론을 도출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앞으로의 과제를 말해달라.
윤: 이번 친일진상규명법안이 이미 입법화됐고, 또 필요성이 존재한다면 이를 통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 법안을 민족ㆍ도덕적 판단 기준으로 몰아가지 말고 오히려 식민지 지배하 개인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위험성을 최소화해 나가서 시야를 확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 학계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자주 이뤄져 식민지 시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다양한 관점으로 심화된 논의를 시작할 때
'친일’이란 무엇인가?
박찬승 교수(이하 ‘박’):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의 뜻만 가지고 얘기를 한다면 영어로 ‘프로재패니즈(pro-japanese)’가 되고 부일(扶日)협력자는 ‘콜레보레이터(collaborator)’라는 용어가 별도로 있다. 그러나 오늘날 친일파라는 용어는 부일협력자의 의미로 대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계에서 친일파라는 용어대신 더 정확한 용어인 부일협력자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미 일반적으로 친일파라는 용어를 부일협력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다.
권태억 교수(이하 ‘권’): 지난해 12월 열린 친일인명사전 위원회의 친일문제 공청회 때 현 국사편찬 위원장인 이만열씨가 친일청산 대상, 처벌 대상을 “일본 제국주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 지배 및 침략 전쟁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와 우리 민족에게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끼친 행위자”라고 말한 바 있다.
친일청산 움직임의 문제점
윤해동 교수(이하 ‘윤’): 지금의 시점에서 친일파를 규정하고 특정 인물들에 대한 평가나 포폄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오히려 친일 인명사전을 좀더 광범위한 근대 인명사전 같은 기초 작업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 특별 법안의 목적이 “반민족 행위의 진상 규명”인데 반민족행위라는 것은 훨씬 더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처벌의 주체인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처벌 대상인 반민족 행위의 규정 자체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박: 이번 법안 명칭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이라고 돼있는데 이 명칭은 사실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 법안의 제 2조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를 18가지 유형으로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제목은 추상적이지만 정의에서는 구체적인 행위가 명시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더욱 구체화되어 있어 추상적인 위험성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안병직 교수(이하 ‘안’): 문제는 우리의 청산 방법이 인적 청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며 이는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권선징악적 명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지금 같은 방식의 과거 심판은 식민지 경험의 피해자에게 일종의 원한을 푸는 심리적 만족감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또 일제 시기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 시기의 연구가 미흡한 상황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인적 청산 자체가 과거청산의 본질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일제의 경험이 어째서 불행했고 무엇을 배웠는가, 또 과거의 과오를 어떻게 극복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과거 청산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 안 선생님이 지적한 ‘한풀이식 도덕적 판단’과 윤 선생님이 지적한 특정 인물 포폄 문제의 경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고 본다. 특수한 상황이란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에 사회가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박 선생님의 의견은?
박: 최근 친일 문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민주화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오면서 사상과 문화 전반에 존재하는 독재 체제와 전근대적 잔재 청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전체주의, 국가주의 분위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이분법적 사고, 파시즘적 성향 등은 한국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것들의 원인은 친일 잔재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청산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를 청산하는 방법은 문화나 사상 측면의 운동인 계몽이 있지만 이런 방법도 인적 청산 문제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사상과 문화는 사람이 만들고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인적 청산 문제에 치우쳐 있다는 안 선생님 지적에 동의하며 양자가 항상 같이 거론되며 나가야 한다고 본다.
친일의 성격
윤: 제국주의 지배 아래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의 주체와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노력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수자들은 주류적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군대에서도 더 열심히 싸운다. 일제 지배 아래 한국인들의 차별구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일본과 동일시하려는 현상이다. 소수자가 억압 체제에 동화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약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생존욕구이며 지식인 뿐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히 동의를 얻은 발상이다. 일체화하려는 노력을 해도 차별구조가 타파되지 않는 상황에서 식민지인들이 가져야했던 이율배반적 의식구조로 인한 동의를 단순히 친일파․민족반역자라고 윤리적으로 폄하할 수 없다.
박: 양심에 의해 개인적 사고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강의와 집필 등 사회적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식인의 경우 군인, 관리와 다르게 책임이 막중하기에 단지 지식인의 고뇌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또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강대국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은 노예적 사고의 발로였으며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친일청산 움직임의 목적은 무엇인가
안: 나는 친일 지식인들이 반민족행위보
다는 파시즘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다만 파시즘은 당시 1920∼30년대 지식 사회를 휩쓴 일종의 지적 사조였고 당시 지식인에게는 근대화의 주체로서 국가 권력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권: 한국이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가치
를 포기하기 어렵다. 친일청산이 가져오는 효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 우리가 단일민족 국가에 집착해야 하는가는 생각해볼 문제지만 현재까지는 국가 공동체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말 일제에 대응한 의병장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저항했던 의병의 후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양란 이후 조선 정부에서 의병장 후손들을 명예로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상이 역전돼서 친일파 후손들은 지배적 엘리트가 되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극빈층이 됐다는 조사들이 있다. 만약 다시 국가의 위기가 오면 누가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겠는가? 결국 국가가 있는 한 윤리기준과 이에 따른 상벌기준이 명확해야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기준이 명확히 잡혀 있지 않다.
권: 일제 시대 친일한 사람들이 애국자로 변모해 기득권을 가지게 된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있는가?
안: 근현대사를 보는 중요한 논리 중 하나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모순, 불평등 구조, 정치 경제적 문제의 원인을 친일청산 실패로 인한 잔재와 친일파의 기득권 형성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한 설명과 그에 따른 과거 청산은 잃는 게 더 많다. 국가의 유지를 위한 상벌의 기준으로 과거 청산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한 측면이 있다. 국가 유지는 꼭 과거 청산이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더라도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고 포상하는 등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친일청산과 민족문제
박: 특정인물을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들의 행적은 기록에 남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그러한 기록을 은폐시키고 오히려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고 쓰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다.
안: 민족이라는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국제화가 되더라도 민족과 국가는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학이 다루는 영역으로서 민족이라는 가치를 지나치게 중심에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더구나 과거 청산의 문제를 민족가치를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윤: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위해 민족 문제를 내세워 윤리적 우위를 점유하고자 하는 발상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의해 친일진상규명법과 같은 법안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위험하다. 또 처벌이 아닌 진상규명이라고 할지라도 이 법안은 소급입법으로 기본권 침해의 우려가 있다. 여전히 연좌제적 혐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인륜, 인도에 반하는 죄는 시효성이 없다고 규정한 유엔의 인권법과 달리 이번 법안은 민족․반민족의 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국가가 주체로 나서 일제 협력 행위에 대해 소급입법 처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박: 그러나 과거청산이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지지 못하면 훗날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불가피하게 소급입법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번 법안은 법안의 취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정에 개입하여 범위가 애매해졌다.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라는 어구를 집어넣어 지방차원의 부일 협력 행위와 전쟁 동원행위는 제외됐다. 이런 불구적인 법안이 그대로 나간다면 오히려 많은 부일협력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안: 우리가 흔히 모범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프랑스의 과거청산이다. 프랑스는 5년간 내전 상황 후 독일에 협력한 30만 명의 혐의자를 찾아내 10만 명을 재판하고 8만 명을 처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부역행위는 명확한 이적행위이고 따라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또 프랑스의 경우 전후 사법적 처리에서 처벌의 형평성․일관성 등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나치 점령기 유대인의 희생을 방조하거나 1954년 알제리 전쟁 때 알제리인을 학살, 고문하는 반인륜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등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과거청산을 했다고 본다. 이는 반민족보다는 반인륜이라는 가치가 과거청산의 잣대가 돼야 함을 시사한다.
식민지 지배체제의 성격에 대하여
박: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의 경우 일반적 인식과 달리 민전이 수탈당한 경우는 드물다. 조선 총독부가 조선인 토지를 약탈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실상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왜곡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식민지 지배체제는 근대적 기제를 통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지배가 공권력을 가장하여 더 치밀하게 폭력적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총독부 경찰비는 해마다 증가했고 1930년대 조선 총독부의 치안경찰비용은 총독부 예산의 9%로 교육비 3%의 세 배에 달했다.
권: 당시 근대적 기제와 시스템으로 인한 물질적 해방은 이뤄졌지만 인간해방은 철저히 부정됐다. 근대성 원리의 작용 이면에는 민족 차별 원리가 작용해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이익을 합리화했으며 정치적 권리도 배제됐다.
안: 일제가 근대적 통치 매커니즘을 통해 인간해방을 부정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관리했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 매커니즘이 36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정통성 없는 권력임에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언가 성취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철도, 신작로 등 가시적인 성취 외에도 치안의 안정과 신분차별 금지 등 여러 근대적인 원리의 도입은 경우에 따라서는 식민지인들이 그 권력에 대해 부분적으로 용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일제를 보는 눈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 관료와 경찰의 숫자 증가는 관료제의 진행으로 인한 세계적 현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외부의 폭력이라기보다는 근대적 폭력이다. 또 여기서 ‘규율화’라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안정화되고 질서가 잡혀 경제적․사회적으로 성장하자, 조선인은 근대적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했다. 물론 계속해서 차별구조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차별에 반발을 하면서도 근대적 가치를 내면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성장, 근대적 발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 다음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차별구조에 대해서만 반발을 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 관료와 경찰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식민지 민중의 통제가 좀더 확고해졌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정통성, 정당성이 없는 것을 무엇으로 유지할 수 있었는가? 위반 시 무기징역, 사형까지 처할 수 있던 치안유지법 등의 악법과 물리력을 통한 지배가 체제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또 식민지 지배 시기가 한국이 근대와 만나는 시기와 중첩됐기 때문에 식민지 권력이 여러 가지 근대적 시설을 어쩔 수 없이 도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전까지 그런 근대적 시설을 보지 못했던 조선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부분적으로 식민지 지배가 제공해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식민지 권력이 부분적인 정당성을 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권력이 성취를 보여주었다는 것보다는 시기적인 중첩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철도가 놓이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오고 이런 것들이 식민지가 아니어도 그 시기에는 다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학교나 병원도 오히려 더 많이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권: 요즘은 일제의 일방적인 수탈로 식민지 시대를 보는 시각에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고 전통적 역사학에서도 시각을 달리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쪽에서 지나치게 밝은 면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당시는 식민지 지배가 일정 정도 근대화에 도움을 준 동시에 상대적 차별에 대한 불만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본다.
박: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전략은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는 억압에 치중해 친일 세력을 만들고 포섭하지도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전략이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배 전략에 조선 사람들이 당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고 본다. 효과적인 대응은 조직을 만들어서 대응하는 것인데 조직을 만들 경우 통제가 강력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저항 자체가 조선인들에게 불가능했다.
안: 일제 시대를 수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에게 그만큼 억압을 받았던 것에 대해 민족적으로 의분을 느끼는 데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수탈론은 당시 사람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권력에 대해서 유보적 수용을 하며 경우에 따라서 저항이나 수용 등 다양한 태도를 취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대응방식을 인정하는 역사적 서술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늦게 태어나는 행운을 누린 자로서 지금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심판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이 했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지 스스로 역사적 경험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과거청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박: 현재 국사학계에서도 일방적인 수탈론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근대성과 식민성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
권: 지금까지 여러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일정한 결론을 도출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앞으로의 과제를 말해달라.
윤: 이번 친일진상규명법안이 이미 입법화됐고, 또 필요성이 존재한다면 이를 통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 법안을 민족ㆍ도덕적 판단 기준으로 몰아가지 말고 오히려 식민지 지배하 개인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위험성을 최소화해 나가서 시야를 확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 학계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자주 이뤄져 식민지 시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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