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9

Namgok Lee -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 최근의... | Facebook

Namgok Lee -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 최근의... | Facebook


Namgok Lee

soerndoptSua4i42mm79nm a1f5 tug33ar0ul2y0ii06:i81 0a4ua12m5J ·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 최근의 12.3 비상계엄이라는 충격적인 사태를 접하면서 그 동안 확대된 심리적 내전이 실제적인 내전으로 언제든 비화할 수 있다는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 위험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 이 퇴행적인 정치현상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은 반짝 빛났다가 고질적인 암(癌)을 고치지 못해 쇠락한 나라로 기억되겠지요.
- 이정철이 쓴 ‘왜 선(善)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를 이번 기회에 한번 더 읽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사림(士林)의 동서분당과 피비린내나는 당쟁을 분석한 책입니다. 요즘 한국의 퇴행적 편가름과 심리적 내전이 그 연장선 위에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선한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나는 그들이 선한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 ‘자신이 선하다’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보입니다.
- 그 배경에 주자 성리학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윗 문장을 ‘이단을 행하면(배우면) 해로울 뿐이다’는 주자(朱子)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이 문장의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해석은 공자 사상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논어를 연찬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공자는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어떤 단정도 없이 그 시점의 의(義)를 추구하며 실천하려는 사상가이며 실천가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정통이고 다른 생각은 이단이라는 사고가 없습니다.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며 유교나 유학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주자류의 사고에 젖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격멸해야할 적(敵)으로 간주하고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해야 지금과 같은 심리적 내전 상태에서 벗어나 그 동안 어렵게 축적한 밑천을 제대로 살려 21세기의 선진국 즉 문명 선도국으로 갈 수 있을까요?
- 우선 정치가 전환되어야할 것 같습니다. 주자류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치세력이 무대의 중심부로 나오고, 퇴행적 편가름에 빠진 양극단의 낡은 세력이 주변부로 가야겠지요. 그런 교체가 내전(內戰)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가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겠지요.
- 새로운 정치세력의 중심 과제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연찬하는 상대로 생각하는 정치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는 새로운 질(質)의 정치가 탄생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익산 소통신문에 게재했던 글을 공유해 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울까? (‘공자의 변명’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틀렸다’고 단정해 버리는 오래된 착각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인 간의 다툼도 이런 태도에서 벌어지는 것이 많고, 그런 다툼들이 법정에 가서 재판으로 끝나는 일들도 흔히 보는 일이다.
마음으로 승복하지는 않더라도 일단은 강제력을 가진 국가 기관인 법원의 판단으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된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집단적 편가름으로 되어 ‘우리 편은 옳고(正, 善), 상대편은 틀렸다(邪, 惡)’가 되어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서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싸움으로 전개될 때이다.
조선을 망국(亡國)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으로 이와 같은 당쟁(黨爭)을 들고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악령이 얼씬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어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당연히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고,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 있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른 입장과 견해에 따른 정당이나 단체들이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한 것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나 갈등은 그 해결 과정에서 사회를 진보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이 잘 작동하는 것이 건강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집착적이어서 현실과 유리된 관념이나 정서로 대립하고 증오하는 퇴행적이고 소모적인 편가름을 벗어나자는 것이고, 조선 후기의 당쟁과 같은 것을 반복 재생산하지 말자는 것이다.
상대는 실제로는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인데, 관념과 정서 속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제거되어야 할 적(敵)인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태도인데, 지금도 이런 관념과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조선조(朝鮮朝) 멸망의 원인을 그 시대의 지배 사상이었던 유학(성리학)에서 찾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써 충분히 공감하는 바가 있다.
비단 당쟁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공자에게 돌리다 보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나는 나이 60이 훌쩍 지나서 처음으로 논어를 접한 사람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2년 여 사람들과 함께 논어를 연찬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것의 중요함’이었다. 비단 그것은 우리나라에 그 동안 끼친 유학의 폐단에서 벗어나는 길일 뿐 아니라, 유학(유교)이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이 요즘 공자를 들어 올리고는 있지만, 공자의 사상은 전체주의나 독재에서는 제대로 살아날 수 없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내가 몇 해 전 어떤 신문 칼럼에 ‘시진핑 주석에게 드리는 글’을 실었는데, 나의 이런 심정을 담은 것이었다.
앞으로 여러 방면에서 지금 현실과 직결되는 관점들을 이 칼럼을 통해서 검토해 보려고 한다.
내가 논어를 사람들과 함께 읽고 연찬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의 하나가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위정 편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제각각 가지고 와서 보던 책들이 거의 다 ‘공(攻)’을 ‘전공(專攻)한다, 행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이단(異端)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공자의 ‘무지(無知)의 자각’에 바탕을 두고 ‘단정이나 고정이 없는 진리 탐구’나 ‘의(義)를 끝까지 추구하되 무적무막(無適無莫)의 바탕에 서 있는 태도’ 등을 고려할 때, 이런 해석은 공자의 일관된 태도에 배치된다고 생각했다.(이 부분은 다음 칼럼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처음 읽으면서는 자기 생각을 정통(正統)이라 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공자의 사고에는 없는 것이라고 판단이 되어서, 이 이단(異端)은 극단(極端)을 의미하는 말로 썼지 않겠느냐는 정도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공(攻)’을 ‘공격(攻擊)한다’는 의미의 뜻으로 읽으면 ‘이단(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롭다’로 해석하게 된다.
나중에 보니까, 이 문장의 두 가지 해석이 유학을 크게 가르는 두 개의 흐름으로 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학이 끼친 폐단인 실질이 아닌 허례허식이나 지배층의 공허한 위선적인 도덕주의나 물질이나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반근대성(反近代性) 같은 것으로 공자를 비난하는 것도 공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왜곡이 극심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문장의 해석인 것 같다.
유학이 권력과 결합하면서, ‘이단을 행하면 해롭다’라고 해석하게 되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유학과 다른 사상이 이단으로 되어 공격과 배척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같은 유학 안에서도 자파(自派)의 생각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서로 비난하며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싸우게 된다.
그런 역사를 거쳐 조선은 망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은 공격의 대상인가? 함께 검토할 대상인가?
물론 치열하게 검토하는 과정이 싸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격’과 ‘검토’는 그 바탕이 다르다.
지금 우리 현실과 오버랩된다.
검토의 대상으로 될 때라야 과학적이고 현실적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합의와 화합의 정치가 가능하다.
코로나나 기후 위기 등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공동운명체라고 말들은 너나없이 하면서, 실제로는 서로 상대를 향해 분노와 증오의 칼을 갈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 보다 번영된 삶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폭력으로 치닫기 전에 이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절박한 과제로 보인다.>>




All reactions:20이병철, 신영숙 and 18 others


2 comments

2 shares

Like




Comment


Share


Oldest




Jewon Jeon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Jewon Jeon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
를 읽어 보면
현대 정보 사회에서의
극명하게 나눠지는 의견 차이의
이유와 해법이
어느정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