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5

천관율 - 1. 오늘 윤석열의 '체포 성명'은 대략 아래와 같은 구조다. a. 세계는 자유민주진영과 그에 적대적인... | Facebook

천관율 - 1. 오늘 윤석열의 '체포 성명'은 대략 아래와 같은 구조다. a. 세계는 자유민주진영과 그에 적대적인... | Facebook




천관율's post

1.
오늘 윤석열의 '체포 성명'은 대략 아래와 같은 구조다.

a. 세계는 자유민주진영과 그에 적대적인 국가들로 나뉘고 있다.
b. 침략전쟁은 국제법상 금지다. 그래서 적대적인 국가들은 침략전쟁에 못미치는 저강도 도발로 자유민주주의를 흔들어 온다. 이런 도발은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
c. 한국 주위의 권위주의 국가(사실상 중국)는 민주당 등 진보세력을 포섭하여 우리를 자기 영향권 아래 두려 한다. 민주당은 이런 공작에 동조한 세력이다.
d. 민주당이 중국의 사주를 받은 국익에 반하는 세력이라는 증거가 있다. 국익을 해하는 입법, 예산 봉쇄, 줄탄핵이다.
e. 민주당이 이러고도 총선을 이긴 이유는 대규모 부정선거 때문이다. 따라서 선관위도 중국 공작에 동조하는 공범이다.
f. 부정선거는 대단히 많은 사람이 가담해야 성공할 수 있는 음모다. 이를 성공시킨 것으로 보아, 반국익 세력은 민주당 뿐만 대단히 뿌리 깊게 자리잡은 것이 틀림없다.
g. 나에 대한 영장 청구, 발부, 체포 과정의 어마어마한 불법성을 보라. 법조계도 이 음모의 한 축이라는 증거다.
h. 이것은 국가비상사태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변화한 안보 상황에서 이것이야말로 헌법이 말하는 '전시에 준하는 사태'다. 계엄 발동 상황이 맞다.
i. 하지만 이런 중국의 음모와 그 하수인인 반국가세력에 맞서는 눈 밝은 시민들, 특히 2030이 아주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음모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다.

2.
우선 인상적인 대목은 a와 b다. 국제 안보환경의 변화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a). 거기서 오는 새로운 위협도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다(b).

거시적 관점에서 타당한 진단을 하고 거기서 크고 급박한 위험을 정의한다. 좋은 출발이다. 좋은 음모론은 이런 기초를 갖고 있다.
c가 중요하다. c는 전형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음모론에는 항상 이런 게 있다. 민주당이 "우리는 중국의 사주를 받지 않았다"라고 입증할 방법이 없다. 아니 없다는걸 어떻게 증명하나.
상식의 세계에서 이런 문제는 주장하는 사람이 입증할 책임이 있다. 센 주장일수록, 더 강한 의무를 진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d인데, 당연히 턱도 없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건 아니다. 반증 불가능한 c와 d는 신봉자들에게 '질 수 없는 논리', 정확히는, 져도 안 졌다고 우길 수 있는 논리를 쥐어준다. 음모론에서는 이 단계가 핵심이다.
이게 스스로 터득한 기술인지 코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한국의 스티브 배넌이나 알렉산드르 두긴을 노려볼만한 꿈나무다. 아니 대통령을 하랬더니 왜...

3.
이 성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e와 f, 부정선거론이다. 윤이 부정선거론자라는 사실 자체는 새롭지 않다.
이 성명에서 새로운 것은, 이 대목이 놀라울 정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훌륭한 a~d를 통해 이미 음모의 토대, 가담자의 면면, 그들의 동기를 모두 밝혀 놓았기 때문에 부정선거론은 이 세계관에서 완전한 사족이다. e와 f를 빼고 다시 읽어보시라. 완벽하게 말이 된다.
나는 부정선거론이 윤석열 음모론의 대체불가한 기둥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오늘 성명을 보니 부정선거론은 음모론의 구조에 기여하는 게 없다. 이건 그러니까 아주 화려한 샹들리에 같은 거다. 사람들의 눈을 확 잡아끌지만, 없어도 건물 구조는 똑같다.
부정선거론과 '민주당 중국 사주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부정선거론은 반증 가능하다. 실제로도 숱하게 반증됐다. 반증 가능한 주장은 음모론에 넣으면 안 된다. 확산력을 떨어뜨린다. 뭘 해도 믿을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킬 뿐이다.
윤은 이 샹들리에를 떼버리고 더 선명하고 더 반증 불가능한 버전으로 다듬을 수도 있었다. 아마 배넌이라면, 잘나가는 극우 유투버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짜 프로들에게 중요한 것은 음모론이라는 밈의 '최대 확산'이다. 하지만 윤은 그러지 않았다.
4.
그래서 윤은 전략가나 프로페셔널은 아니다. 부정선거론에 대해, 그는 진심이다.
나는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직 국익만을 충심으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국익을 방해하는 세력(중국 -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을 리 없다. 그런데 내가 선거를 졌다. 왜? 불가능한 가능성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딱 하나가 남는다. 부정선거.
이제 윤의 머리에서 부정선거는 검증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다. 이 공리로부터 다른 현실들을 해석해 나간다. 부정선거가 있는데 선관위가 없다고 한다? 선관위도 음모 동조 세력이다. 언론도, 공수처도, 경찰도, 법원도 등등등.
이 정념을 버렸다면, e와 f를 떼버렸다면, 선거 패배는 국민들도 일시적으로 중국의 음모에 휘둘린 결과라고 정리하고 넘어갔다면, 오늘의 성명은 훨씬 더 좋은 음모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은 국민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다른 설명을 찾았다. 그 대책 없는 자기확신 위에 거대한 대안서사를 쌓아 올렸다.
음모론이야말로 고객 지향적이어야 한다. 듣는 사람의 머리를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윤의 자기확신은 그의 음모론을 고객 지향적이지 못하게 막는다. 그 자기확신이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5.
그래서 말인데, 이후에 극우 음모론은 두 갈래로 분열하지 않을까 싶다. 부정선거론이 포함된 정본. 그리고 부정선거론을 떼고 '중국-민주당 침탈론'만 간결하게 살린 수정본.
코어 그룹은 계속 정본을 들고 흔들겠지만, 밈의 속성상 수정본 유통업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 편이 더 간결하고, 더 호소력이 넓고, 더 쉽고, 더 반증 불가능하다. 아마 윤의 세계관이 출발하는 e~f는 점점 뒤로 밀려나고, 오늘 상당한 완성도로 정리된 a~d가 핵심을 차지하지 않을까.
그러면 또 윤은 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겠지. 이 분은 고집이 엄청 셀 뿐, 사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역량은 매우 낮다. 둘은 겉보기만 닮았을뿐 매우 다른 것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