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내장산 공원에서 정읍 논어산책을 함께 하는 분들과 즐거운 소풍을 했다.
좋은 곳에서 좋은 벗들과 함께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자유로운 대화 가운데, 내가 ‘새로운 진보 정당’의 창당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객관적 조건은 위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높아졌는데, 그 주체 역량이 그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 특히 새로운 담론과 실천방향에 대한 강령적 전망을 만드는데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 특히 백가쟁명하는 의견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렴하는 대화 토론 소통 합의를 할 수 있는 인문적 바탕이 약하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면서 필요하다면 미력이나마 그 인문적 토대를 만들어가는데 일조(一助)할 수 있다면 노년의 행복이라는 말을 했다.
이어서 내 말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 가운데, 왜 ‘새로운 진보’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잇었다.
나에게도 늘 질문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진보’는 지금까지 대립항으로 이야기되어온 진보 대 보수나 좌우 대립 같은 의미가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포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진보인데, 딱히 그것을 표현할 단어가 마땅한 것이 없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했다.
정읍은 ‘동학’운동의 심장 같은 곳의 하나다.
자연스레 ‘동학’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이 출발점에서 ‘서학’에 대한 대항적 의미가 있었다할지라도 그 것을 현대에서 살리기 위해서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서학에 대항적인 말이 아니라, 그것을 포월하는 의미가 되어야 현대 세계와 현대 인류가 봉착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상상력의 원천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름 자체가 보다 시대에 맞고 그 풍부한 내용에 맞게 창조되기를 바란다.
참으로 이름(名)이 창조되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기왕에 있는 이름에 맞추는 정명(正名)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나 시대정신에 맞게 창조되는 이름이야말로 역사를 개척하는 ‘정명(正名)’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역사에 기여한 것은 물질적 생산력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모순은 여전하다. 한 세기에 가까운 ‘단절적 변혁(소비에트)’의 실패는 자본주의를 세계의 지배적 질서로 확장한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급투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기후변화나 팬데믹과 같은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되고 있다.
이미 실패한 총체적인 단절적 변혁이 아니라 공생적 변혁(자본주의와 함께 변혁)의 필요성은 이제 평등의 문제를 넘어서 생존의 문제로 되고 있다.
이 공생적 변혁 속에는 부분적 단절이나 새로운 문명을 직접 시도하는 틈새적 변혁들이 있다.
이런 총체적 변혁을 설계하고 추진하는 것을 나는 ‘새로운 진보’라고 무르고 있다.
계급 투쟁이 불가피한 지금의 자본주의를 계급 간의 조화를 통해서도 생명력을 갖는 자본주의로 바꾸는 것은 보수나 우파에게도 매력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상상력의 한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정치 세력 • 정치주체가 출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심교역국가’와 ‘새로운 문명의 선도국가’라는 두 지향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보완적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두 바퀴로 다가오는 것도 그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읍 소풍을 하며 들었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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