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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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3일, 유신정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민청학련 사건 조직 체계도.[1]
1. 전국민주청소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이하"단체"라 한다)를 조직 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오로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1974년 4월 3일 시행, 제정.
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1972년 10월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서 전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결행하였다. 반(反)유신체제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보였으나, 총칼을 앞세운 공포분위기에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였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받게 되자, 반(反)유신체제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1973년 9월에는 대학교 개강과 더불어 대학생들[2]의 저항운동은 점차 반독재·반체제 슬로건마저 내걸게 되었고 이게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에 장준하, 백기완, 함석헌, 지학순, 윤보선 등등 지식인·종교인과 야당인사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박정희 유신정권의 인권탄압을 격렬히 규탄하면서 개헌운동을 위한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에 들어갔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긴급조치 1,2호를 각각 공포하여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저항은 지하신문 발행, 동맹휴학 등 음성적인 방법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계속해서 지식인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비밀리에 개헌서명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받게 되자, 반(反)유신체제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1973년 9월에는 대학교 개강과 더불어 대학생들[2]의 저항운동은 점차 반독재·반체제 슬로건마저 내걸게 되었고 이게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에 장준하, 백기완, 함석헌, 지학순, 윤보선 등등 지식인·종교인과 야당인사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박정희 유신정권의 인권탄압을 격렬히 규탄하면서 개헌운동을 위한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에 들어갔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긴급조치 1,2호를 각각 공포하여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저항은 지하신문 발행, 동맹휴학 등 음성적인 방법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계속해서 지식인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비밀리에 개헌서명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3. 사건전개[편집]
대한뉴스 1974년 <민청학련 수사 발표> 보도. 물론 중앙정보부가 검열과 통제를 하는 허위뉴스이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3]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대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절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대부분 대학생이었던 유신헌법 위반자 1024명을 조사했고 이들 중 비상군법회의[4] 검찰부가 180명을 구속기소했다. 이때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윤보선 전 대통령,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제일교회의 박형규 목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청학련 주도자로 지목되어 구속된 학생들을 색깔로 덧칠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종한 인민혁명당 세력이 있었다'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추가로 조작했다. 그리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에 지시를 내린 것처럼 각본을 만들었다. 추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73명이 구속되면서 총 구속자는 253명.
중앙정보부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 구속된 이들 상대로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갖가지 고문을 자행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엮여서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 넘겨졌지만, 재판과정도 처음부터 엉터리였다. 정보부에서 폭력혁명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쓰지도 않은 화염병 몇개뿐으로 반체제세력의 국가변란 사건이라는 처음의 발표와는 달리 엉성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통제하에 있던 대한민국 법원은 중앙정보부의 기소내용을 모두 인정해서 민청학련의 지도부로 조작된 6명한테는 사형, 주모자급은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들한테는 최고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 선고하였다. 참고로 유신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모든 법원 판사들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삼권분립을 대놓고 무시한 막장 체제였다.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판결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조작으로 국내외의 비난이 커져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8월 23일 전격적으로 긴급조치 1호, 4호를 해제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다만 주모자로 몰려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들은 계속 수감돼 있었지만, 그들도 얼마안가서 전부 석방되었다.
4. 평가[편집]
학생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전국 각 대학, 재야 세력, 종교세력 등과 조직적인 연결을 해나가자 유신정권은 그것을 차단하고 반유신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기 위해서, 민주화운동가들을 용공좌경세력으로 매도한 유신 최대의 조작극이자 국가 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인 고문이 가해진 인권탄압 사건이다.
일단 사건의 이름이 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단체부터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허구다. 이게 이 사건의 최대 특징이자, 정권의 무리수였다. 그 이전 까지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보면 독자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를 북한과 어거지로 연결시켜서 간첩단으로 만들거나, 단순한 학습모임을 반체체혁명조직으로 부풀리는 식으로 어느 정도 실체가 있는 조직을 가지고 조작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아예 존재도 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끼워맞추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썼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 가혹한 고문으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증거라고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과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맟춘 허술한 것 몇가지뿐. 무리수가 잇따르자, 정권은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이란 더한 무리수까지 연타로 두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리수에 굳이 반독재 의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오히려 정권이 국내외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허술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정권의 통제하에 있던 법원은 기소된 사람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 기소자들의 형량 합계는 무려 1650년이었다. 이때 법원은 검찰의 최종구형과 한치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판결을 내려서 '정찰제 판결'이란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사법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처음 박정희의 발표 그리고 중형선고와는 달리 완전히 용두사미로 끝나서 사형수 이철, 유인태를 시작으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이 3년이내에 석방되었다. 반체제 국가변란 사범으로 몰아서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이상을 선고했던 중범죄자들을 고작 3년만에 풀어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건 민청학련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었기 때문에 정권에서 부담을 느껴서 할 수 없이 내보낸 것이다.
또한 사법역사상으로도 엄청난 흑역사인데, 세계 최초로 재판 중에 변호사가 구속된 사건이다. 1974년 7월 9일 민청학련 사건 결심 공판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을 하던 도중 재판이 갑자기 중지되더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신옥, 홍성우 변호사를 무작정 연행해간 것이다. 결국 강신옥 변호사는 긴급조치 4호 위반, 법정모독죄로 구속되었고 이게 격분한 동료 변호사 99명이 대규모 변호인단을 결성해서 재판에 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민주화운동세력을 한방에 조지기 위해서 무려 1024명을 수사하고 253명을 저인망식으로 싹쓸어서 구속했기 때문에, 훗날의 유명인사들 상당수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현재 정치권, 언론, 학계, 종교(특히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천주교 사제, NCCK 소속의 개신교 목회자), 시민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프로필을 보면 '민청학련 사건 구속'이라는 항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26 사태를 촉발하여 피고인이 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인이 민청학련 사건의 변호를 담당했던 강신옥 변호사였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2004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 위원장 변정수)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일단 사건의 이름이 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단체부터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허구다. 이게 이 사건의 최대 특징이자, 정권의 무리수였다. 그 이전 까지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보면 독자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를 북한과 어거지로 연결시켜서 간첩단으로 만들거나, 단순한 학습모임을 반체체혁명조직으로 부풀리는 식으로 어느 정도 실체가 있는 조직을 가지고 조작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아예 존재도 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끼워맞추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썼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 가혹한 고문으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증거라고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과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맟춘 허술한 것 몇가지뿐. 무리수가 잇따르자, 정권은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이란 더한 무리수까지 연타로 두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리수에 굳이 반독재 의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오히려 정권이 국내외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허술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정권의 통제하에 있던 법원은 기소된 사람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 기소자들의 형량 합계는 무려 1650년이었다. 이때 법원은 검찰의 최종구형과 한치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판결을 내려서 '정찰제 판결'이란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사법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처음 박정희의 발표 그리고 중형선고와는 달리 완전히 용두사미로 끝나서 사형수 이철, 유인태를 시작으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이 3년이내에 석방되었다. 반체제 국가변란 사범으로 몰아서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이상을 선고했던 중범죄자들을 고작 3년만에 풀어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건 민청학련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었기 때문에 정권에서 부담을 느껴서 할 수 없이 내보낸 것이다.
또한 사법역사상으로도 엄청난 흑역사인데, 세계 최초로 재판 중에 변호사가 구속된 사건이다. 1974년 7월 9일 민청학련 사건 결심 공판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을 하던 도중 재판이 갑자기 중지되더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신옥, 홍성우 변호사를 무작정 연행해간 것이다. 결국 강신옥 변호사는 긴급조치 4호 위반, 법정모독죄로 구속되었고 이게 격분한 동료 변호사 99명이 대규모 변호인단을 결성해서 재판에 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민주화운동세력을 한방에 조지기 위해서 무려 1024명을 수사하고 253명을 저인망식으로 싹쓸어서 구속했기 때문에, 훗날의 유명인사들 상당수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현재 정치권, 언론, 학계, 종교(특히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천주교 사제, NCCK 소속의 개신교 목회자), 시민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프로필을 보면 '민청학련 사건 구속'이라는 항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26 사태를 촉발하여 피고인이 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인이 민청학련 사건의 변호를 담당했던 강신옥 변호사였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2004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 위원장 변정수)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5. 관련인물[편집]
윤보선, 종교계 인물 등을 제외하면 사건이 사건인만큼 상당수의 인물들이 노무현 정부 즈음에서 데뷔했거나 요직에 중용되었다.
- 지학순 다니엘 주교
- 박형규 목사
- 이해찬 - 국무총리
- 정동영 - 통일부 장관
- 김근태 - 보건복지부 장관
- 유홍준 - 문화재청장
- 유인태 - 청와대 정무수석
- 이강철 -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 황인성 -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 정찬용 - 청와대 인사수석
- 이철 - 한국철도공사 사장
- 김학민 - 사학진흥재단 이사장
- 장영달 -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 강창일 - 학계에 있다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 제주도에서만 4선을 하였다.
- 손학규 - 노무현 정부때에는 경기지사를 지낸 한나라당의 거물급 정치인이었으나 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으로 이동하였다.
- 서경석 - 목사. 정계 데뷔를 시도하다 실패하자 이후 보수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 서중석 -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강신옥 - 1세대 인권변호사.
- 조영래 - 1세대 인권변호사.
- 장기표 - 재야 운동권의 거물급 인사였으나 21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으로 이동하였다.
- 심재권 -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때 따라가지 않았으며 노무현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서울 강동에서만 3선을 하였다.
- 김병곤(1953~1990)[5]
6. 참고자료[편집]
- 『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
- 『실록 민청학련』
- 『한국민주화운동사(2권)』
7. 같이보기[편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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