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6

루촨의 ‘난징! 난징!’, 일본의 죄를 사하는 자 누구인가 : 한겨레

루촨의 ‘난징! 난징!’, 일본의 죄를 사하는 자 누구인가 : 영화·애니 : 문화 : 뉴스 : 한겨레

루촨의 ‘난징! 난징!’, 일본의 죄를 사하는 자 누구인가

등록 :2016-08-12 
[이승희의 중국 영화 이야기7] 루촨의 <난징! 난징!>

<난징! 난징!> 포스터

2009년,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라디오에선 “설마 아직도 안 보신 분은 없겠죠. 그렇다면 당장 달려가세요. 근처 영화관으로!”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만나는 중국인마다 <난징! 난징!> 얘기였다. 개봉 반나절 만에 수입이 900만 위안을 돌파했고, 결국 여러 할리우드 영화를 제치며 1억7000만 위안의 수입을 올렸다. 중국에서 남경대학살 소재는 흥행보장 수표나 마찬가지다. 극한 상황에서 숱한 에피소드가 분출되며 폭력성, 선정성을 띠는 데다 중국인의 민족 정서를 가장 확실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동일 소재의 영화는 많았다. 뤄관쥔의 <도성혈증(屠城血證)>, 모우둔페이의 <검은 태양: 난징대학살>, 우쯔뉴의 <난징, 1937>.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난징! 난징!>만큼 선전하지 못했다.

남경대학살의 피해자가 일본인?


도입부터 새로웠다. 1937년, 난징 성에 들어서는 일본군 장교 카도카와의 시선을 따라 도시의 참상이 펼쳐진다. 중국 피해자가 아닌 일본 가해자의 시점을 선택한 건 지극히 이례적인 발상이다. 게다가, 기존 영화에서 일본군이 극악무도한 악마적 존재로 그려진 데 반해 카도카와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전우들 사이에서 절망하고 또 절망한다. 미션스쿨을 졸업한 재원으로 지적인 면모를 갖춘 데다 용모까지 수려하여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끝내 양심의 선택에 따라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남경대학살의 가해자인 일본군이 피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각본을 직접 쓴 루촨 감독은 중국인의 관점 또한 여러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함을 나타내어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방영이 가능하게 만들고 싶었노라고 진술했다. 그는 일본군 시점을 밀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필름 전체를 흑백 처리했다. 피로 얼룩진 스크린이 자칫 전 세계 관객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 배려한 조처다. 이어서 철저한 고증을 마친 스틸컷, 예컨대 집단총살이라든지 참수·강간·구타 장면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하게 나열했다. 루촨 감독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중국의 일개 사건이 서사시적 웅장함을 갖춘 인류의 비극으로 승화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영국, 미국, 스페인 등 각국의 호평이 이어졌다.



스틸컷: 일본군 장교 카도카와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가려지는 끔찍한 진실

영화는 픽션이다. 역사영화라 해도 마찬가지다. 역사영화에서 어느 정도까지 픽션을 허용할지 설전을 벌이는 건 고무적이지 못하다. 대개 설전을 위한 설전이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비튼 대목을 탐색하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팩트의 변형은 창작자의 지향점을 투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장의 논픽션 에세이 『난징대학살』을 참조하면, <난징! 난징!>이 얼마나 ‘절제'된 터치로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 유대인 학살은 범세계적 상식이 되었지만 남경대학살은 ‘잊혀진 홀로코스트'라 칭할 만하다. 약 6주간 30여만 명이 살해되었는데, 사망자 수치보다 경악스러운 건 그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이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거나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었다.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사람을 매달아 놓고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했다. 갓난아기를 공중에 던진 뒤 총검으로 꿰어 죽였다.

루촨 감독은 이런 참혹성을 반쯤 지운 채 전쟁의 현실을 사람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불가피한 상황들로 보편화했다. 무엇보다 영화의 부제 ‘삶과 죽음의 도시'에서 감독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감독이 정해준 각본대로 원한과 갈등에서 벗어나 초월적 ‘진실'에 도달한다. 그리고 안도감에 젖는다. 피해자인 내가 아프듯 가해자인 너 또한 아팠으니, 우리가 기적적으로 공감한다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휴머니즘의 유혹은 늘 그렇듯 달콤하다.

<난징! 난징!> 옥에 티로 알아보는 역사적 진면목

옥에 티를 찾는 건 짓궂고 치졸한 취미다. 그래도 가끔은 영화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 유효하다. 첫째, 중국군은 정말 처절하게 저항했던가. 영화 초반에 양국 군인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당시 남경정부의 수장인 장제스는 일찌감치 도망치면서 시가지를 초토화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남경에 잔류한 군관 및 일반 시민들도 무조건 투항했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둘째, 안전지구의 지도자 욘 라베는 과연 나약하고 무력한 인물이었던가. 영화에서 그가 한 일이라곤 100명의 중국 여성을 일본군에게 바친 것밖에 없다. 실상은 다르다. 욘 라베는 소속회사 지멘스로부터 철수를 권유받으면서도 수차례 기한을 연장했으며 6주간의 학살 기간 동안 650여명의 난민을 보호했다.

셋째,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일본군의 제사 장면은 실재했던 일인가. 영화의 백미로 평가받지만 명백한 허구이다. 일본군 역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군국주의 희생물이라는 주장을 펼치기에는 적절했다. 하지만 감독의 자의적 설정일 뿐이다.



스틸컷: 독일인 욘 라베이런 왜곡은 왜 일어나는 걸까? 중국 정부는 대국으로의 비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역사의 치부를 봉합하는 일도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피할 수 없다면 굴욕의 서사를 저항의 서사로 새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그 중앙에 서양인이 서 있는 건 그림이 좋지 않다. 픽션상으로나마 중국인의 주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자존감의 회복에는 이렇듯 지난한 과정이 수반된다.

루촨 감독은 가해자 일본을 끌어안음으로써 초국적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꿈꾸었다. 이 시도를 오로지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야망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같은 1970년대 생으로, 세기말적 우울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란한 말장난에 흠뻑 취했던 한 사람으로서 심정적으로는 상당 부분 동감한다. 하지만 당신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그래서 기꺼이 당신의 죄를 사하겠노라는 감독의 전언은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안쓰러운 일이고, 대외적 명분일 뿐이라면 경계할 일이다.



스틸컷: 중국군 장교의 의연한 최후

결국 일본에서 <난징! 난징!>은 개봉되지 못했다. 일본을 용서하겠노라 자청했건만 정작 일본인들에겐 죄 지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국가도, 문화계 종사자도, 대중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자격이 있다. 누구도 그들에게 상처를 그만 봉합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치유의 방법과 때를 결정하는 이는 오롯이 그 당사자여야 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더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이승희 李勝喜

▶동영상: 일본군 남경점령 축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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