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Tikh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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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침략: 비관의 이유]
이미 누누히 지적됐지만, 국민 국가 사이의 관계는 담임 선생님의 통제가 잘 안되는 학급에서의 불량배적 남학생 사이의 관계와 묘하게 그 패턴이 엇비슷합니다. 학폭 방지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지 않고 선생님이 수수방관하고 폭력적 아이들이 좀 있는 학급이라면 남학생 사이에 매우 쉽게 "힘의 서열"이 정해집니다.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가 비공식적 "짱"이 되고, 그 주변에 또 다른 - 그러나 그보다 좀 안되는 - 싸움꾼들이 중간 보스 노릇을 맡고 나머지 남학생들이 그들에게 맞고 살든지 줄을 서든지 별로 달갑지 않는 선택을 강요 받고....국민 국가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힘의 서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 뒤에는 엄청난 "보너스"가 되지요. 예컨대 1990-2000년대의 미국의 '독주',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룰'의 강요를 생각해보시지요. 제2차 대전 전승국에다 냉전 전승국이 아니었다면 가능했겠어요? 반대로 패전국인 독일이나 일본은 그 주권의 일부분을 상실한 만큼 계속해서 각종의 "불이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만약 미국과 일본이 서열이 동등한 국가이었다면 과연 차후 엔고와 초저금리, 증시/부동산 버블, 그리고 버블 경제의 내파와 장기 침체로 이어질 1985년의 플라자 합의라는 매우 불리한 '딜'에 일본은 꼭 동의해야 했을까요? 동의한 배경은 단순치 않지만, 전승국이자 군사적 후견국인 미국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는 패전국 일본 특유의 상황이 크게 작동된 것도 그 배경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니 국민 국가 세계에서는 승산이 있는 전쟁 만큼의 좋은 투자처도 없습니다.
'전승'이 중요한 만큼 지는 전쟁이 '설욕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1904-5년 러일 전쟁에서의 패전이 결국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뇌관이 됐지만, 나중에 1917년 혁명이 보수화된 결과로 그 권력을 굳힌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설욕"을 오랫동안 도모했다가는 1945년에 미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패전을 이용해 그 뜻을 이루었죠. 스탈린이 그 때에 얻은 전리품이란 바로 1904-5년 패전으로 잃은 사할린의 남부와 요동 반도의 요충지 (여순과 대련), 그리고 38선 이북의 조선반도이었습니다. 1904-5년 러일 전쟁을 앞둔 러-일 교섭 국면에서 러시아가 줄기차게 조선반도 39선 이북 지역에서 일본군 주둔 포기를 요구한 것까지 염두에 두면 1904-5년과 1945년 사이의 '연관성'은 더 뚜렷해집니다. 하기사, 1945년 소련의 참모본부에는 러일 전쟁 참전을 경험해 본 사람도 몇 명 있긴 있었습니다. 40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것도 아니지요.
'전승'과 '패전'의 이분법으로 본다면 1991년 이후의 러시아는 좀 중간적이고 애매한 입장이었습니다. 일면으로는 냉전에서 미국에 패배해 '소련 연방 붕괴'의 트라우마를 안게 됐지만, 또 일면으로는 '주권 상실'까지 겪지 않았습니다. '주권 상실'까지 겪지 않은 만큼 처음에는 신생 러시아의 주도층은 '주권 존중'을 조건으로 해서 구미권 중심의 세계 질서에의 편입을 시도했습니다. 지금 '나토 문제'를 우크라이나 침략의 명분으로 삼기도 하지만, 사실 러시아야말로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에다 자국의 '나토 가입'의 가능성을 타진해 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러시아의 '나토 가입' 제안 등에 시쿵둥한 반응만 보였죠 (러시아가 가입했다면 나토 회원국에게 자국의 무기를 판매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미국의 경쟁자가 됐을 겁니다). 거기에다 1999년 유고 공습 등의 결정적 국면마다 러시아 지배층의 이익이나 의견을 깡그리 무시했죠. 그 미국이 아직 '힘'의 이미지를 과시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지배층은 대응을 자제하면서 내부 정리 (권위주의적인 권력 피라미드 공고화 등)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의 미국 패색이 짙었던 2007-8년에, 더 이상 미국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해서 친미 지향의 조지아 (그루지아)를 2008년에 처음으로 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의 권부는 사실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 실행해온 것이고, 우크라이나 침략은 그 프로젝트의 논리적 결과물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1991년 패배에 대한 설욕전, 즉 (아마도 발틱 공화국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제정 러시아/소련의 영토적 복구입니다. 그 프로젝트 실행의 한 수단이 구소련 국가와의 경협 증진 (무관세 무역 지대 구축 등)이라면 또 한 수단은 바로 '무력'입니다. 2013년 마이단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경협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유럽 연합 가입에 올인하자, 결국 경협이 아닌 무력 수단 적용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표면적으로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의 명분으로 말이 되지 않는 '탈나치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을 가족으로 둔 사람입니다)나 '탈군사화' (러시아야말로 우크라이나 이상으로 군사화된 사회죠)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 내부의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냉전에서의 패전, 그리고 소련 몰락의 결과며, 이 패전에 대한 설욕을 하자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취소시키거나, 적어도 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해야 한다는 논리죠. 이 논리의 차원에서는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라기보다는 서방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설욕전'이 벌어지는 '전장'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를 탈주체화시켜 대상화시키는 이 제국주의적 '설욕전'의 논리에 러시아 지배층뿐만 아니라 그 대중의 대부분 역시 동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침략에 대한 '결사 반대'를 하는 전체 인구의 약 15-16%는 주로 대도시 지식인층이나 젊은 전문가층이라면 대부분의 노동자층은 아직도 국가의 '영토 수복'의 논리로부터 자신들을 독립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옛 제국 영토 복구'라는 지배자들의 이해 관계와 정반대의 완전히 다른 이해 관계를 노동 계급이 가지고 있다는 그 계급 의식이 아직도 익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 신분의 대물림이 되는, 계급적 위치가 정지된 사회의 틀이 공고화되어버리면 그 계급 의식의 형성이 어쩌면 더 빨라질 것이고 정부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 의식도 높아지겠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그 단계에 전혀 와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단기, 중기적 예상은 다소 비관적입니다. 아마도 푸틴 정권의 의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장악 내지 초토화는 러시아 내부에서 크게 제재를 받지 않고 몇개월, 길어지면 몇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초대형 국가 범죄에 의미 있는 제동을 걸 수 있는 대중적인 좌파적 동원은 아직도 러시아 사회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1-2의 세대가 교체돼야 그 때 가능해질는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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