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돈 前 가톨릭농민회장 별세
입력 2022.06.07
정재돈 前 가톨릭농민회장 별세
농어업선진화위원장을 지낸 정재돈 전 한국가톨릭농민회장이 지난 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춘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강원대에 다니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되고 옥고를 치렀다. 1976년부터 가농에서 활동했고, 1985년부터는 가농 전국본부 실무자로 일하며 생명공동체 운동, 우리밀 살리기 운동 등을 벌였다.
1990년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 조직국장으로 일했다. 2004년 가농 전국본부 회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전국농민연대 상임대표, 농협연구소 이사장, 국민농업포럼 상임대표로도 활동했다.
2009년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함께 민관 합동 기구인 농어업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농협법 개정, 농어업 보조금 개편 등에 힘썼다.
-깨어있는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
오늘 고 비오 정재돈선생을 보내는 가농동지들의 고별 미사자리에서 나는 이번 생에서 고인과 동지로, 아우로 만나고 함께 했던 인연을 회고하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생전에 가족이나 고향의 벗들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고인과 가장 먼저 만났던 이도,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도 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74년 이른바 민청학련이라는 사건으로 수감되어 마지막을 같은 교도소에서 지내다가 그 이듬해에 형집행정지로 함께 풀려났습니다.
당시 고인은 수감된 우리 동지들 가운데 유일한 소년수였는데, 나를 선배라고 형이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출감 후, 75년 11월, 늦은 가을에 춘천이 집이었던 고인이 나를 초대했는데 거기서 고인을 따라 당시 가톨릭농민회 강원연합회 창립을 준비하던 원주에 들리게 되어 가농에 가입하게 되었고 고 인농 박재일 선생을 생애의 첫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농선생은 혈육을 떠난 내 첫 형님이 되셨고 고인은 내 생애의 첫 동생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함께 가농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가농의 경남지역 조직을, 고인은 안동교구 조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동지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고인은 오원춘사건으로 끌려가고 나는 바깥에서 안동 현장 농성투쟁을 담당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죽창을 깎았던 것도 내 아우, 바우를 구해내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우 아우, 나는 고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강원도 감자바우처럼 우직하되 마음이 맑고 순수했기 때문이고 믿음을 바위처럼 견실하게 지켜내는 동지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른이 넘는 노총각이었던 내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아우 바우의 덕분이었습니다. 바우아우는 형인 내가 먼저 결혼을 해야 자기도 장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금까지 나를 건사해온 집사람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백수로 지내오면서도 아내에게서 내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는 아우의 정성과 노력도 한 몫을 차지한다고 믿습니다. 아우가 제 아내에게 형은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건 사랑이 그만큼 뜨겁기 때문이라고 미리 일러준 덕분에 거칠고 모자라는 나를 여태껏 건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우 아우는 심지가 바위처럼 단단하지만 심성은 여리고 따뜻해서 남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성품 때문에 좀체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맡지 않아도 되는 짐들을 대신지고 오느라 심신이 고달플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만날 때마다 제발 그런 일들은 모두 내려놓고 어디 물 좋고 바람 좋은 곳에 가서 건강부터 먼저 챙기라고 수 차례 말했지만 여린 그 마음 때문에 차마 그 짐들을 놓치 못했습니다. 아우가 일찍 간 것엔 이런 까닭도 있으리라 싶습니다.
엊그제, 아우가 타계하기 이틀 전에 나는 참으로 요행히도 병상의 아우와 만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면회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우리의 간절함이 그런 기회를 주셨다 여깁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아우는 간신히 입을 열어 내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했습니다. 그 말은 내게만이 아니라 이번 생의 여러 인연들, 가족들과 동지들에게 전하는 고인의 마지막 인사라 여깁니다.
나와 마주한 눈빛은 맑았습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아우는 깨어있었습니다. 긴 병상에서 심신을 파괴하는 고통 속에서도 동지들과 인연을 나눈 선후배들과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거나 그조차 힘든 상황에선 문자로도 작별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아내 엘리와 아이들과도 이번 생의 지난 인연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충실히 가졌습니다.
마지막 날, 임종을 앞두고도 깨어서 가족들과 마지막 고별인사를 나누고 떠났습니다.
깨어있는 생의 마무리,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또한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바람은 깨어있는 죽음일 것입니다.
고인은 비록 병상에서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지만 그 시간을 깨어있는 생의 마무리 시간으로 삼아 자신의 상처를 영롱한 구슬로 빚어내는 진주조개처럼 그렇게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인의 삶처럼 그의 마무리 또한 죽음을 앞둔 우리 모두의 귀감이라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우 바우의 아내이자 도반이며 가장 절친이었던 엘리 심영란여사에게 아우의 고마움에 내 고마움을 덧붙입니다.
나처럼 백수였던 아우를 마지막까지 잘 건사해 주신 것에 대해, 그리고 함께 고통을 감내하며 혼신의 수고를 다해 깨어있는 마무리로 이끌어 주신 것에 대해 고인의 형이자 동지로서 감사와 존경과 위로를 보냅니다. 어머님과 가족 모두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합니다.
아우 바우, 비오 정재돈 선생, 그는 고통의 그 육신을 벗고 떠났지만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하는 우리 가슴 속에, 그리고 이 땅의 농민운동사와 민주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우이자 멋진 동지, 바우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화가 함께 하소서.
2022년 6월 7일
동지이자 형인 여류모심.
-오늘 오후에 한국가톨릭농민회 동지회가 주관한 추도식이 있었다. 추모미사를 겸하여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인을 회고하며 내가 한 추도사의 대강이다.
오랜만에 옛 동지들과 함께 재회했다. 이런 자리에서나 만난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이를 어찌할 것인가.
세월이 이미 그렇게 흐르고 있는 것을.
우리 또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깨어있는 죽음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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