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8

일본 속 우리 고대사 ⑩ - 일본 천태종 수호신은 ‘신라묘진(新羅明神)

월간중앙

홍윤기의 일본 속 우리 고대사 ⑩ - 일본 천태종 수호신은 ‘신라묘진(新羅明神)
신라계 도래인 집안의 전통신앙이 ‘신불습합(神佛習合)’으로 굳어져


9세기 중엽 활약한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기록으로 유명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의 유명한 승려 엔닌(圓仁)이다. 이 엔닌이 신라계 도래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엔닌과 엔친 등 9세기 일본의 신라계 고승들은 부처님과 함께 신라묘진(新羅明神)을 모셨다. 그 이면에 이들 고승과 신라묘진의 인연이 자리한다.



일본의 시가(滋賀)현은 옛 오우미(近江) 지역에 해당한다. 바다처럼 거대한 비와코(琵琶湖, 672km2)를 품은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교토(京都)에서 동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닿는 오쓰(大津)시는 고대 신라와 백제인들의 연고지다. 특히 동남쪽으로 오쓰시내를 내려다보며 높이 솟은 불교의 성산(聖山) 히에이산(比叡山, 848m)은 신라계 고승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일본인들에게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히에이산이 신라계 고승들의 근거지가 된 배경에는 산 동쪽 아래 큰 마을인 오토모노무라(大友村)가 있다. 오토모노무라는 고대 신라인들의 집단 이주지로 지금의 지명은 사카모토(坂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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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태종 수호신은‘신라묘진(新羅明神)’

신라계 도래인 집안의 전통신앙이 ‘신불습합(神佛習合)’으로 굳어져




일본의 시가(滋賀)현은 옛 오우미(近江) 지역에 해당한다. 바다처럼 거대한 비와코(琵琶湖, 672km2)를 품은 지역이다.그중에서도 교토(京都)에서 동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닿는 오쓰(大津)시는 고대 신라와 백제인들의 연고지다. 특히 동남쪽으로 오쓰 시내를 내려다보며 높이 솟은 불교의 성산(聖山) 히에이산(比叡山, 848m)은 신라계 고승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일본인들에게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히에이산이 신라계 고승들의 근거지가 된 배경에는 산 동쪽 아래 큰 마을인 오토모노무라(大友村)가 있다. 오토모노무라는 고대 신라인들의 집단 이주지로 지금의 지명은 사카모토(坂本)다.와세다(早稻田)대 불교미술사학과 야마모토 쓰토무(山本 勉) 교수는“오토모노무라는 신라인들의 유서 깊은 고장”(<日本國寶全集> 1960)이라고 지적했다. 야마모토 교수 외에도 여러 명의 저명한 학자가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2012년 1월18일 만난 온조지(園城寺)의 최고위 승려 후쿠야 히데아키(福家英明) 종관장도 “현재사카모토로 불리는 오토모노무라는 고대 신라인들의 연고지”라고 말했다.오사카(大版)나 교토에서 사카모토까지 가려면 게이한덴테쓰(京阪電鐵)를 타는 것이 편리하다. 게이한덴테쓰는 하마오쓰(浜大津)역까지는 게이신센(京津線), 그 다음은 이시야마사카모토센(石山坂本線)으로 연결된다. 덕분에 오사카나 교토에서도 가기가 어렵지 않다.

게이한덴테쓰는 철도가 아니라 도로 면에 설치된 궤도를 따라 달리는 전차에 가까워 색다른 정감을 느끼게 한다.사카모토에서는 신라인 덴쿄타이시(傳敎大師) 사이초(最澄,767∼822)의 생가 쇼겐지(生源寺)가 유명하다. 사이초의 신라식속명은 미쓰노오비토 고야(三津首廣野)다.(본지 9월호 참조) 사카모토 북쪽 산기슭에는 거대한 가람 엔랴쿠지(延曆寺)가 자리 잡고있다. 엔랴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제1세 천태좌주(第一世天台座主)인 사이초가 산꼭대기에 자그만 암자로 개창한 절이다.이 가람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사이초의 뒤를 이어 일본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를 장식할 신라계 고승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중 특히 두드러진 두 명의 고승은 시카쿠타이시(慈覺大師) 엔닌(圓仁, 794∼864)과 치쇼타이시(智證大師) 엔친(圓珍, 814∼891)이다. 엔닌은 통일신라기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밝혀주는<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졌다.엔닌과 엔친은 모두 당나라 유학승으로 약 10년 간격을 두고 귀국했다. 그런데 이 두 고승은 똑같이 귀국길에 서해바다를 지날때 신라묘진(新羅明神)을 만났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후 두 고승은 신라묘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서는 이야기 전개의 편의상 엔친의 경우부터 살펴본다.


히에이산 동쪽 기슭 게이한덴테쓰의 게이신센과 이시야마사카모토센이 만나는 하마오쓰 역에서 사카모토 방면으로 한 역을 더 가면 미이테라(三井寺)역이 나온다. 이곳에 유서 깊은 고찰 미이테라(三井寺)가 있다. 미이테라의 옛 이름은 온조지(園城寺)인데,지금도 구글어스에는 미이테라와 온조지를 병기해 놓았다. 이 온조지를 창건한 고승이 바로 엔친이다. 야마모토 교수는 “엔친이 이곳에서 온조지를 부흥시켰다. 본래 온조지는 도래계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사찰(氏寺)이었다”(<日本國寶全集>)고 내력을 밝힌바 있다.

‘신라묘진(新羅明神)’은 장보고?

미이테라에서 주목할 만한 사당이 하나 있다. 신라묘진(新羅明神)의 신상을 모시는 신라젠친도(新羅善神堂)다. 11세기 중엽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묘진의 신상과 이를 모시는 신당은 조영된 이후 100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신라(新羅, しんら)’라는 한국어 발음 그대로 존칭되고 있다. 높이 78cm의 편백나무한 둥치로 만든 신라묘진 신상은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신라신의 모습이다.

신라묘진 신상은 1956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신라묘진 신상을 귀중한 문화재로 여겨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반인은 그 존재조차 잘 모른다. 미이테라의 금당 역시 일본의 국보로 엔친이 9세기에 세운 절집이다.2008년 무려 50년 만에 이 신라묘진 신상이 공개된 적이 있다. 이때를 전후해 국내에서 “신라묘진은 장보고”라는 주장이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이 같은 주장은 학문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신라젠친도는 미이테라에 속하지만 금당에서 북쪽으로 약 700m가량 떨어진 숲 속에 자리 잡았다. 때문에 신라젠친도로 가려면 일단 미이테라 경내를 벗어나 골목길을 걸어 미이테라 다음역인 벳쇼(別所)역까지 가야 한다. 벳쇼역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4층 건물이 오쓰 시청인데, 시청 정문에서 북쪽으로 다시 약 200m전진한 다음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을 따라 다시 약 100m 올라가면 왼쪽 숲 속에 신라젠친도가 위치한다. 야마모토 교수는 엔친과 신라묘진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엔친이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위해 서해를 지날 때 한 노옹이 나타나더니 ‘나는 신라묘진이다. 이제부터 그대의 불교 교법(敎法)을 지켜주겠노라’라고 말했다. 또한 엔친이 왕도 헤이안쿄(平安京, 교토)로 돌아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교경전을 최고위 관리인 태정관(太政官)에게 올리자 다시금 노옹이 나타나더니 엔친을 오우미 호숫가 지금의 온조지 터로 이끌었다. 그 후에도 신라묘진은 온조지 북쪽에 머물렀다. 이에 엔친은 조간(貞觀) 2년(860) 그곳에 사당(神祠)을 세우고 신라묘진을 모셨다는 사실이 온조지의 고문서인 <온죠지류케에엔키(園城寺龍華會緣起)>(1062)에 기록되어 전한다.”(<日本國寶全集>)야마모토 교수는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엔친이 이곳에 자기 집안인 오토모 가문의 사찰로 온조지를 개창한 것은 자기 집안에서 모시던 신라신과 불교를 연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묘진 신상은 에이쇼(永承) 4년(1049) 왕실로부터 산미(三位)라는 큰 벼슬을 하사받았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신라노마쓰리(新羅祭)’라는 신라식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 후부터 신라묘진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 기록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신라묘진이 엔친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엔친고호덴세쓰(圓珍護法傳說)’가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신라묘진 신상은 이처럼 신위(神威)를 고양하는 가운데 제작되었다고 본다.”

야마모토 교수는 엔친이 오토모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815년에 편찬된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錄>는 엔친이 오토모노무라의 신라계 와케(和氣)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엔친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많은 경우 엔친이 사누키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그간의 연구 결과 엔친의 출생지를 오토모노무라 마을로 본다.<신센쇼지로쿠>가 말하는 엔친의 집안인 와케 가문은 신라계인 제11대 스이닌(垂仁) 천왕의 후손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스이닌 천황이 B.C.29~A.D.70의 인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로는 서기 3세기께의 일왕이다. 엔친의 어머니 역시 신라계인 사에키(佐伯) 씨로, 일본의 대표적 신라계 명승 코호타이시(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835)의 조카딸이다. 와세다대 사학과 미사키 료슈(三崎良周) 교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으로 평가한 <니혼코조텐요몬쇼(日本高僧傳要文抄)>(1251년께 편찬)에는 “코호타이시 구카이는 신라 신족(神族)”이라고 밝혀져 있다.

그밖에 여러 불교 전적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엔친은 15세에 출가해 바로 뒷산인 히에이산으로 올라갔다. 당시 엔친은 히에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엔랴쿠지에 머무르던 신라계 스님인 기신(義眞, 781∼833) 스님 밑에서 수도를 시작했다.기신 스님 역시 당나라 유학승이며 사이초의 직계 제자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王仁の後裔氏族と佛敎’ 1943)에 기신 스님이 신라계 도래인임을 덴쿄다이시(傳敎大師) 시이초(最澄, 767∼822) 등 13명 고승의 행적과 함께 밝혀놓았다.

엔친이 히에이산 엔랴쿠지에서 수도하다 왕실의 허락을 받고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해는 853년,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당시 엔친은 50세 손위 스승 엔닌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엔친역시 사이초·엔닌 등 선대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당나라 유학길에 신라 선박을 얻어 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북큐슈의 신라신을 모신 가와라진구지(香春神宮社, 본지 9월호 참조)를 경유하며 신라 신도(神道)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마이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논술했다.“오우미의 신라젠친도는 오쓰시 벳쇼초(別所町)에 위치한다.이 신사는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총본산 온조지 경내 엔만인(園滿院)에서 몇 정보 떨어진 북동쪽 산속에 위치한다. 신라젠친도는 온조지 오사진수(五社鎭守)의 하나로 북원(北院)에 속한다.

현재의 건물은 지붕을 편백나무 껍질로 이은 국보이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가 신사 건물을 중수할 만큼 무사정권의 숭경을 받았다. 이 사당은 순수한 신사 건축물이다. 이 신당의 본존인 국보 신라묘진 신상은 산형(山形)의 갓을 쓰고 갈색 도포를 입었으며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용모다. 이분은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烏尊, 일본의 개국신이 된 신라신)라고 한다.”(<歸化人と社寺>)




옌친은 신라계 와케(和氣) 가문 출신

이처럼 이마이 교수는 신라젠친도의 본존 신라묘진을 신라신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고 주장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니혼쇼키>에서 하늘나라에서 신라 우두산(牛頭山)으로 내려와 살다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出雲)로 왔다는 신라신이다. 도쿄대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도 같은 주장을 펼치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른바 ‘황국신도’를 바탕으로 한 군국주의 일제가 한창 기세를 떨치며 학문의 자유를 유린하던 1892년의 일이다.

구메 교수는 “무릇 <쇼쿠고지단(續古事談)>에 보면 신라묘진은 스사노오노미코토며, 오우미 지방은 문수보살의 터전”(‘越前國名蹟考’ 14세기께)이라고 해서 엔랴쿠지에서 문수보살을 주불로 모셨음을 지적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신라처럼 신(神)과 불(佛)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사찰과 신사에서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신불습합(神佛習合)을 고증한다.그런데 “신라묘진은 온조지에서 신라인 오토모 가문에서만 모신 것이 아니라 대부호이자 야마토(大和) 정권의 장경(藏卿, 재무부장관)을 지낸 신라 호족 하타(秦) 가문에서도 역시 관여했다”(‘寺門傳記補錄’ 1968)고 저명한 고대 신라·가야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는 밝혔다.

엔닌은 엔친보다 약 10년 앞서 신라묘진을 만났다. 역시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험한 파도 속에서였다. 엔닌은 엔랴쿠지의 제3세 천태좌주를 지낸 신라인 고승이며, 이른바 천태종 산문파(山門派)의 창시자다. 앞에서 말한 엔친도 뒷날 엔랴쿠지의 제5세 천태좌주를 역임했다.엔친은 이후 스승 엔닌과 달리 히에이산에서 하산해 자신의 생가가 있던 오토모노무라에서 그곳에 예전부터 있었던 신라인들의 오토모노스구리테라(大友村主寺)라는 사찰을 온조지로 부흥시키고 신라묘진을 모시면서 사문파의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창시자가 되었다.이들 두 고승이 입적한 훨씬 뒷날 히에이산 위 엔닌의 산문파와 히에이산 아래 엔친의 사문파는 크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마이 교수는 현재의 오쓰 일대가 신라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며 온조지의 전신이 오토모노스구리테라였다고 밝혔다.

엔친의 스승 엔닌은 시모노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의 신라인 호족 니부(壬生) 가문에서 태어났다. 백제인 왕족들이 고대 일본을 지배하기 이전에 왜국으로 건너온 신라계의 실질적 초대 왕인 스진 천황(崇神, 3C 전후의 나라 지방 지배자)과 핏줄이 이어진다. 도쿄(京都)국립박물관의 가게야마 하루키(景山はるき) 박사는 “엔닌의 선조는 스진 천황의 제1왕자와 연결되는 지방의 명문가”(‘比叡山その宗敎と歷史’, 1970)라고 지적했다. 소년 엔닌은 히에이산 입산에 앞서 아홉 살 때 고향 쓰가의 다이지지(大慈寺)에 들어가 중국인 광지(廣智)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이지지는 본래 백제인 고승 행기보살(行基菩薩, 668∼749, 뒷날 왜 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됨)이 세운 48곳의 사찰 중 한 곳이다.

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밤 꿈에 ‘위엄 있는 고승’을 만났다. 이 꿈에 나타난 고승을 히에이산에서 사이초 스님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순간 확인했다”고 한다. 히에이산으로 온 엔닌 소년은 당시 42세였던 사이초의 직계 제자가 되어 주로 ‘지관(止觀)의법문(法文)’을 배우며 20년 동안이나 수도승 생활을 했다. ‘지관’이란 천태종에서 헛된 망상을 버리고 고요한 속에서 밝은 지혜로 천지 간의 온갖 법도를 관조하는 일을 가리킨다.엔닌은 35세 때 잠시 산에서 내려와 고향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하기도 했으나 곧 히에이산으로 돌아가 산 북쪽 후미진 곳에 틀어박혀 깊은 명상 속에 참선고행을 시작했다고 9세기에 편찬된 그의 전기 <시가쿠타이시덴(慈覺大師傳)>에 적혀 있다. 엔닌의 고행을 기록한 <에이가쿠요키(叡岳要記)>(10세기 무렵)에 따르면 그는 히에이산 깊은 산속인 요카와(橫川)에서 죽음에 처할 만큼큰 고통을 견뎌내며 3년 동안 참선고행을 했다고 한다.“엔닌은 커다란 삼나무 고목에 팬 구멍 속에 들어앉아 3년 동안 칩거했다.

밤낮없이 <법화경>을 외워 그 묘리를 깨달으며 참선하는 가운데 건강이 극도로 악화했다. 마침내 눈마저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 생명마저 위급하게 되었다”는 <시가쿠타이시덴>은 이런 3년 고행 끝에 꿈을 꾸니 하늘에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이 나는 ‘불사의 묘약’이 내려왔다고 전한다.꿈결에 이 약을 받아먹은 엔닌은 이튿날부터 건강을 회복하고 시력마저 되찾게 됐다. 엔닌은 이에 힘을 얻어 초필(草筆)을 만들어 <법화경> 8권 6만8000자를 모두 써냈다고 한다. 훗날 그 제자들은 엔닌이 쓴 <법화경>을 <근본여법경(根本與法經)>이라고 부르며 받들었다. 히에이산 엔랴쿠지 북쪽의 중심 가람인 요카와주도(橫川中堂)에서는 <근본여법경>을 불상 대신 본존(本尊)으로 받든다.



삼나무 구멍 속에서 3년 수도한 엔닌

엔닌이 당나라 양쯔장(陽子江) 하구에 당도한 것은 838년 7월.그러나 중국 관헌들은 그가 목적지인 저장(折江)성 천태산으로 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일본으로 추방했다. 엔닌 일행은 11개월을 허송하다 신라인 승려이자 일본어 통역인 도현(道玄) 스님과 신라사람들, 특히 해상왕 장보고의 도움으로 839년 6월7일 산둥(山東)반도의 동쪽 기슭에 당도해 신라 사찰의 보호를 받게 됐다. 엔닌은 이 사찰을 ‘세키잔승원(赤山僧院)’이라고 일컬었다. 엔닌 일행은 당나라 산둥성 신라방(新羅坊) 사회의 보호 속에 신라 승원에서 대접받으며 가을과 겨울을 조용하게 보냈다.

세키잔승원의 신라 스님들은 엔닌에게 멀고 가기 힘든 남쪽의 천태산 대신 그곳에서 가까운 산시(山西)성 동북쪽 오대산으로 가도록 이끌어 주었다. 오대산도 성스러운 산으로 천태산 못지않은 불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엔닌은 그들의 권고에 따랐다. 840년 2월19일 세키산승원을 떠난 엔닌은 신라인 친구의 도움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중국 관청의 허가증도 받았다.그 후 엔닌은 수업과 고행을 하며 당나라 순례를 마치고 다시금 신라 선박의 도움으로 847년 9월2일 중국을 떠나 15일간의 항해 끝에 출발지였던 규슈 오지의 가와라진구지(香春神宮寺)로 귀국했다. 848년 3월29일에는 왕도 헤이안쿄 히에이산으로 귀환했다. 당나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신라 선박에 대한 엔닌의 기록이 주목된다.

“나는 신라 바다신인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의 신단을 모시고 무사항해를 기원했다”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스미요시대신이란 스승 사이초의 생가 사카모토에 이웃한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의 신주인 ‘신라묘진’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면 신라묘진은 스미요시대신과 통하는 점이 있다. 엔닌이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요카와주도에 세키잔구(赤山宮)를 건립한 것은 10년 동안 당나라에서 고행하며 구법순례(求法巡禮)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848년의 일이다. 요카와주도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시카쿠타이시 엔닌 스님이 천황의 칙허를 받아 당나라로 유학갔을 당시 중국 세키잔(赤山)에서 신라묘진을 받들기로 했다.

그런 공덕에 의해 10년간의 수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후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후 전국 사찰에서는 천태종을 전승하는 대사(大師)로서 시카쿠타이시를 우러르며 천태종의 불법 수호신으로 신라묘진을 모셨다. 신라묘진은 재해를 막아주고 장수를 누리도록이끌어주는 신으로 세키잔묘진(赤山明神)으로 받드는데 이 신은 ‘지장보살’의 화신이기도 하다.”엔닌 연구로 저명한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박사는 “엔닌은 장보고를 몹시 존경해 대사(大師)님이라고 존칭했다. 또 엔닌은 장보고가 세키잔승원을 창설한 데 경의를 표했다.


‘보잘것없는 이 사람에게 너무 큰 행운을 안겨주셨고 대사님의 서원에 의해 축복된 터전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힐 정도로 장보고의 은혜에 감사했다”(,1955)고 지적했다. 그렇기에 엔랴쿠지 경내 문수보살당(文殊菩薩堂) 옆에 세워진 ‘청해진대사장보고비’(전남 완도군이 현지에 건립)는 유난히 참배자들의 눈길을 끈다.

겐지(源氏) 가문의 청년무장 신라사부로(新羅三郞)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당시부터 신무왕(재위 836∼839)과 문성왕(재위 839∼857) 대에 이르기까지 청해진 대사로 있었던 장보고(?∼846)는 서해를 주름잡으며 중국 산둥성 신라방에 ‘세키잔선원’을 세우고, 이 선원에서 신불(神佛)을 함께 공양했다.엔닌이 장장 10년 동안 당나라 유학 경험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유명한 <입당구법순례행기>다.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이 소장한<입당구법순례행기> 고본에 따르면, 엔닌은 836년 5월14일 오사카 ‘구다라스(百濟洲)’의 나니와쓰 나루터를 떠나 멀리 규슈 오지에 있던 신라 신당 가와라진구지)로 향했다. 7월2일 가와라진구지를 떠나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눌러앉았다. 결국 엔닌이 당나라로 출발한 것은 2년이나 지난 838년 6월13일이었다.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는 “오우미 지역인 시가군(滋賀郡)은 현저하게 귀화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었다. 온조지의 전신인 오토모노스구리테라나 신라젠진도는 온조지가 개창되기 이전부터 이지역에 살던 귀화인들이 숭배하던 외국신(신라신)의 흔적이며, 온조지가 선 이후 (신라묘진을) 사찰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신라젠진도 사당에 모신다”(<歸化人と社寺>)고 했다.그런데 주목할 만한 일이 있다. 오토모노무라의 ‘신라묘진’을 10세기부터 당대 일본을 지배하던 무가(武家)인 겐지(源氏) 가문이 떠받들었다는 사실이다.

“겐지 가문의 명장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 988∼1075)의 셋째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1045∼1127)는 20세 되던 해 오토모노무라의 신라젠진도를 찾아와 두 손을 땅에 대고 엎드려 엄숙하게 큰절을 올렸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신라묘진 신주 앞에서 관례를 올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성씨에 그의 이름을 붙여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고 창씨했다.”(三省版 <人名辭典>1978) 이에 대해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도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신라묘진의 보전(寶殿) 앞에서 관례를 올리고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郞義光)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은 유명하다”(<歸化人と社寺>)고 지적했다.겐지는 천황의 자손이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될 때 내려지는 성씨 중 하나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쇼군 가문인 미나모토(源)의 다른 이름이다. 즉 일본 중세를 주름잡았던 겐지, 즉 미나모토 가문은 천황가의 핏줄이라는 말이다. 겐지 가문의 미나모토노 사타무(源定, 815~863)는 제52대 사가(嵯峨) 천왕(809~823)의 왕자이며 어머니는 백제 왕족인 구다라노 게이묘(百濟慶命)다.

이러한 겐지의 일족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신라인의 집단이 주지였던 오토모노무라를 찾아와 신라묘진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신라사부로라는 새로운 성을 창씨했다는 말이다. 이 같은 관계 속에 담긴 의미는 향후 커다란 연구과제로 삼을 만한 일이다. 왕실에 무공을 세워 고위 무장이 된 신라사부로 요시미쓰는 82세까지 장수하다 사후 신라젠진도 바로 이웃에 자신의 묘지를 잡고 영면했다. 메이지(明治)유신 당시인 1879년 5월25일 종3위 다이묘(大名)였던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堯, 1825~84)는 신라사부로 요시미쓰의 묘비인 ‘신라공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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