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문서가 공개되었다.
면담일시와 장소, 제목과 내용 요약 이외 대부분은 까맣게 덧칠이 되어 있는 문건들이다. 까맣게 가려서 오히려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심지어 뭔가 있어 보이는 문건에는 사실상 국민들이 알고 싶은 내용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외교부 문건 특유의 ‘외교적’ 수사로 채워져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네 차례 면담이라는 숫자도 정부기간이 피해자 지원 단체와 의례적으로 갖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놀랍지 않다. 이미 모든 것이 세팅된 채로 ‘2015 한일합의’ 전날 저녁에 알려줬다는 내용 세 가지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언론들도 알았고 상당수의 관계자들에게도 공유되었던 내용일 것이다.
핵심은 “이번 정보 공개를 통해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혀 그간의 논쟁이 종식되고, 국민의 알 권리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는 문서공개에 덧붙인 외교부 논평에 있다. 사실관계를 흐리고 논쟁의 핵심 내용을 바꿔치기하며, 바뀐 주제로 또 다른 논란을 증폭시켜 뭔가를 숨기고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2015 한일합의’ 논쟁의 핵심은 문건에 부분 공개된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아베 총리 직접 사죄·반성 표명, 10억 엔 수준의 일본 정부 예산 출연(재단 설립)”이 아니다. 이 내용을 누가 몇 시간 먼저 알았는지도 아니다.
위의 내용을 전제로 1)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 2)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해결 노력, 3)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 자제를 약속한다는 굴욕적인 이면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이 내용이 양국 외교부장관 기자회견 당일 기습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피해자-가해자의 위치가 뒤바뀌고 30여년 간 외쳐온 피해자들의 정의와 진실 추구권이 정부의 정치적인 합의로 인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해방조차 보지 못한 피해자, 미처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피해자, 세상의 낙인이 두려워 비공개로 등록한 피해자, 오랜 세월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법적 배상을 염원했던 피해자, 이들 모두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주고받기’식으로 진행된 합의였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 원칙에서 어긋난 합의라는 비판은 여기서 출발했다.
더군다나 ‘일본정부가 잃은 것은 10억엔 뿐,’ ‘배상금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등 이후에 이어진 적반하장 아베 정부의 태도는 국민적 감정에 불을 지폈다. 피해자들과 전 세계 시민들은 ‘2015 한일합의’ 무효를 외치며 거세게 저항했고, 여러 유엔 인권기구들은 우려를 표하며 피해자들의 진실, 정의, 배상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기에 ‘2015 한일합의’의 주역들이 공개한 문건, ‘2015 한일합의’ 당시 정권을 계승한 정권, ‘2015 한일합의’로부터 출발해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정권에서 발표된 문건, 외교부 장관의 방일과 한미일 국장급 회담을 앞두고 공개된 ‘2015 한일합의 관련’ 외교부 문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국민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알려질까 두려워 까맣게 가린 흑심에 숨겨진 진실을 국민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 외교부에 묻는다.
자국 여성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및 성노예화에 대한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여야 할 의무를 지닌 정부가 그 역할에 충실하기는커녕 피해자 지원단체에게 어이없는 프레임을 씌워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일본 정부에 당당히 법적 배상을 추궁할 책임이 있는 한국 정부가 자신들이 저지른 ‘2015 한일합의’의 과오를 적반하장 피해자 지원단체에게 덮어씌우는 의도는 무엇인가. 외교부 장관이 공헌해 온 ‘2015 한일합의’ 정신 계승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세 가지 이면합의 내용 재확인인가.
며칠 전에도 중국에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났다.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걸쳐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인정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전범국가 일본,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반성은커녕 부인과 왜곡으로 일관하며 재무장의 길로 들어선 일본, 변화는커녕 피해자를 윽박지르고 어깃장 놓으며 퇴행에 퇴행을 거듭해 온 일본과 다시 반인권적·반역사적·굴욕적 협상을 시도할 의도가 아니라면, 불순한 의도로 가득 찬 문건, 사실상 아무 내용도 없는 문건으로 ‘2015 한일합의’의 본질을 호도하지 말고 협상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혀 논란을 종식시키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라!
2022년 6월 1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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