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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 서경식 선생(1951~2023)의 1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는 일년 전이던 2023년 12월 18일 저녁에 나가노 신슈 집 근처 온천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하고 장엄하고 운명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지난 1년 동안, “보면 볼수록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 비슷한 생각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탄산수의 포말같이 솟아나는 것이다.”라고 서경식 선생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적었던 것처럼 나는 당신의 존재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늘 시대의 풍향계였던 당신의 예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칼럼을 한겨레에서 읽으며 한껏 지적 자극을 받고 고민을 정리하곤 했다. 그건 내가 세상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한 절차이기도 했다. 이제 당신의 새로운 칼럼을 영원히 접할 수 없다.
어제 저녁에는 전 박성제 MBC사장이 운영하는 북카페 오티움에서 열린 서경식을 기억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오래간만에 서경식이라는 존재를 통해 서로 우정을 나눠온 분들과 모여, 서경식 선생에 대한 여러 추억담과 그리움의 언어를 나누었다. 서경식 선생의 파트너 후나하시 유코상의 가곡 세 곡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각별한 기쁨이었다. 후나하시 상은 참석자 모두에게 서경식 선생의 유고 신간 <어둠에 새기는 빛>을 선물했다. 깊이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동안 정말 좋아했었던 저자이자 친구(토끼띠 띠동갑이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 다정하게 대해주셨다)의 1주기에 이 공간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해 여름에 쓴 에세이를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한 편 올려본다. 이 글은 사실 서경식을 추모하는 의미로 쓴 글이기도 하다. 페북에서 읽기에는 꽤 긴 글이지만 이 공간에서라도 서경식을 아끼고 좋아하는 분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아마 페북이기에 비로소 이런 글의 공유가 가능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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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만든 어떤 운명의 표정>
도쿄 신주쿠역에서 주오선(中央線) 쾌속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20여 분 가면 고쿠분지(国分寺)역이 나온다. 이 역 남쪽 출입구에서 10여 분 걸으면 도쿄경제대학이 있다. 역 북쪽 출입구에서 조금 걸어가 시영버스를 타고 25분 정도 가면 무사시노미술대학 정문 앞이다. 바로 이곳 건너 편이 도쿄경제대학 기숙사(게스트하우스)다. 나는 2015년 2월 중순부터 6개월 동안 이곳에서 홀로 지냈다.
2014년 가을 당시 향년 74세 어머니가 림프암으로 세상을 뜨신 후에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에 휩싸여 있던 시절, 일 년 여 전에 미리 예정돼 있던 일본행은 마치 하나의 구원처럼 다가왔다. 어떻게든 한국을 떠나 있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낯선 도시 곳곳을 산책하며 인생과 공부를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오래 전 비평가 김현이 「아르파공의 절망과 탄식」(<김현예술기행>, 1976)에서 적은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고 싶다. 매일 나무 우거진 공원길을 산보하고 싶다. 오후 7시면 카페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맥주를 마신다.”는 문장은 그즈음 내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이제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늘 마음 한 켠에 똬리를 틀던 시절이었다.
동료 연구자들이 방문학자로 도쿄에 체류하는 경우 흔히 가곤 하는 도쿄 도심의 도쿄대학이나 와세다대학이 아니라, 나는 왜 고쿠분지의 도쿄경제대학으로 가게 되었을까? 도쿄경제대학 기숙사는 고쿠분지의 캠퍼스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고다이라(小平)에 있다. 이곳은 도쿄 도심에서 꽤 멀기에 세계적인 메가시티 도쿄의 문화와 역사를 온전히 체험하고 원활한 학문적 교류를 수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곳에 가고자 했으며, 그곳 생활을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게스트하우스 근처 무사시노미술대학 캠퍼스와 다마가와조스이(玉川上水) 산책로를 거닐곤 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나 가족들이 생각날 때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가 되기 전인 청춘 시절 재즈 카페 ‘피터켓’(peter-cat)을 열기도 했던 고쿠분지역 근처 이자카야에서 시메사바를 안주로 혼술을 하며 이국의 애수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일주일에 2~3일은 도쿄 시내로 가서 여러 대학 캠퍼스와 미술관, 박물관, 거리와 골목을 답사했다. 어떤 시기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두문불출하며 해방 직후에 월북한 작가 허준(許俊, 1910~?)의 대표작을 엮은 <잔등: 허준 중단편선>(문학과지성사, 2015)의 해설과 500개에 가까운 주석을 작성하며 보냈다. 허준의 소설에는 일본어가 한글 발음으로 표기된 대목이 많다. 이를 하나하나 검색하고 찾아서 주석을 다는 작업을 허준이 일본 유학을 위해 거주하던 지역과 가까운 공간에서 수행한다는 사실이 어떤 필연적인 운명처럼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내가 고쿠분지시의 도쿄경제대학 방문학자로 올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이유는 당시 그 대학에 근무하던 재일 디아스포라 논객 고(故) 서경식(徐京植, 1951~2023)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청춘의 사신> 등 그의 초기 저서들을 한 권, 한 권 읽어 내려가면서 뭔가 독서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의 책과 글쓰기(칼럼)는 당시 어떤 늪에 빠진 듯한 우울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내게 소중한 자극과 동력으로 작용했다. 서경식의 책과의 만남은 이전과는 다른 뭔가 새로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서경식은 2019년 도쿄에서 있었던 한 좌담 자리에서 “청년 시절에는 김석범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발언한 적이 있거니와, 나 역시 어느 순간에는 서경식의 에세이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기도 했다.
도쿄경제대학에 방문학자로 있던 시절 내게 가장 커다란 지적 자극과 깊은 슬픔을 전해준 시간은 서경식 교수가 주도한 재일조선인문학 세미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주제를 정해 전개된 세미나에는 한인 유학생, 인근의 조선대학 재학생과 졸업생, 재일조선인 신진학자 등이 참여했다. 주로 이양지(李良枝, 1955~1992)의 소설, 고마쓰가와(小松川) 사건 등 재일조선인문학과 연관된 몇 가지 쟁점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이 세미나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미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들의 인생에 드리워진 치명적 불우, 실존적 고뇌, 단단한 의지를 곁눈질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한 사람의 재일 한인(조선인)으로 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차별과 우울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걸고 자신을 둘러싼 차별, 모순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민족적 자의식과 현실적인 진로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늘 분열된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이들의 치열하면서도 처절한 실존의 고뇌가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체험이 일본에서 보낸 한 학기 직후 한국어로 번역된 김석범 대하소설 <화산도>에 그토록 몰입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서경식을 온전히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된 도쿄경제대학 방문학자 시절 지금도 눈에 선한 잊을 수 없는 시간은 그의 나가노 신슈 산장에서 3박 4일간 함께 보낸 체험이었다. 서경식, 그의 파트너 후나하시 유코(船橋裕子), 나, 이렇게 셋은 함께 마을을 산책하고 인근 미술관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저녁마다 재일 한인문학이나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에 대해 자유로운 방담을 나누는 즐거운 술자리가 있었다. 그 3박 4일의 시간 중간 중간에 미리 준비해 간 약 30개의 질문을 던지고 서경식이 답변하는 장시간의 대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후에도 도쿄경제대 서경식 교수 연구실에서 네 차례의 대담이 있었다. 2015년 8월 17일 대화에서 내가 그에게 던진 질문 중의 하나는 “재일조선인 예술가 중에서 당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분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였다. 서경식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흔쾌히 소설가 김석범(金石範, 1925~)을 꼽았다. 그 이유로 김석범 작가가 일본어로 일본 사회에서 문필 활동을 수행하면서도 일본인 다수자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드물게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아울러 서경식은 김석범 작가의 대작 <화산도>가 한국에서 완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화산도>가 과연 일본에서 얼마나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표했다. 이런 질문은 지금의 한국사회와 문단에도 그대로 던져질 수 있으리라.
서경식의 이 발언이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지 싶다. 이 대화 이후 두 달만인 2015년 10월 16일, 드디어 <화산도> 12권 전권(김환기·김학동 역, 보고사)이 한국어로 완역 출간됐다. 일본어판 출간(1997) 후 18년 만이었다. 일본의 철학자 우카이 사토시(鵜飼哲)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화산도> 전권의 한국어판 번역에 관해 “우리 시대 동아시아 최대의 문화사업이 아닐까요”라고 언급한 바 있다.
<화산도>가 나오자마자 주문해 설레는 마음으로 1권을 읽었다. 그 한 권만으로도 과연 사상과 사유의 드문 깊이, 인간의 섬세한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 엄청난 몰입력과 문학적 매력, 역사에 대한 치열한 응시를 담보한 대작이라는 사실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내친김에 12권 모두를 완독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지만, 수업 등 여러 급한 일이 밀려 있는 학기 중이었기에 <화산도> 읽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겨울방학을 기다려, 약 보름간 두문불출한 채 2016년 1월 중순 <화산도>를 완독했다. 그야말로 먹먹한 감동과 우뚝한 경지, 완독이라는 충만감이 느껴지는 잊을 수 없는 독서 체험이었다. 그 직후 완독의 커다란 여운을 간직하며 <화산도>에 대한 비평 「망명, 혹은 밀항(密航)의 상상력」(<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을 썼다. 어느 날 광화문에서 있었던 저녁 모임에서, <화산도> 번역자인 동국대 김환기 교수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그 평문을 직접 읽은 김석범 작가와 국제전화로 통화하는 기회가 생겼다. 운명과도 같은 문학적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도쿄에 갈 때마다 김석범 작가와 만나 <화산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누며 작가의 육성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돌이켜 보니 2015년 도쿄경제대학 방문학자 시절이야말로 그 이후 <화산도>와의 뜨거운 만남을 가능케 한 원체험이지 싶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는 10년 가까운 세월은 무엇보다 <화산도>를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한 도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화산도>에 푹 빠져 지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에 대한 자발적인 공부야말로 어떤 놀이 이상의 행복한 체험이 아닌가.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계속 <화산도>에 대해 공부하고 <화산도>에 대한 글을 매만지고 싶다. 이야말로 한 권의 책(작품)이 만든 운명이 아니겠는가.
청춘 시절 내 인생의 행보와 미래를 결정지은 책이
- 김윤식의 <문학과 미술 사이>,
- 김현의 <김현예술기행>,
- 최인훈의 장편소설 <회색인>이었다면(이 세 사람 모두 고인이다),
2000년 이후 새로운 열정과 지적 자극, 깊은 공감, 공부의 신선한 지평을 열어준 책으로는
-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과
-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를 들 수 있겠다.
내게 책과 글의 매력에 관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고 서경식 교수의 영원한 안식과 올해 백수(白壽, 99세)에 이른 김석범 작가의 건강을 기원하며 이 글을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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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북월드'(2024.9)에 수록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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