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8
"NASA서 위성 연구하다 아내 설득해 원자력연에 왔죠" < 인물 < 뉴스 < 기사본문 - 헬로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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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서 위성 연구하다 아내 설득해 원자력연에 왔죠"
기자명 정리=길애경 기자
kilpaper@HelloDD.com
입력 2019.04.03
[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①] 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한국 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후 고국 발전상서 희망"
"지도교수, 고민말고 귀국하라 자네가 꼭 필요해" 조언
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 제1차 오일 쇼크, 재미 과학기술자로 모국 방문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지 몰랐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을 졸업하고 미우주항공국(NASA)에 취직할 때만 해도 계속 미국에서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의 직계가족이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극히 소소해 보이는 우연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그중 하나가 1973년 10월에 일어난 제1차 오일쇼크다. 미국과 중동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갈등은 급기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 미국 석유 금수조치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력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화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력 생산량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정부는 뭔가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모색의 일환으로 떠오른 것이 원자력이었다. 1973년 착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고리 원전 1호기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1974년 8월, 미국의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orean Scientists & Engineers in America)는 한국 정부 지원으로 제1차 '한국 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을 구성했다.
방문단의 구성 취지는 한국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재미 과학자들을 본국으로 초청해 우리나라의 산업시설을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속내는 미국에서 공부한 유능한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스카우트해서 첨단 기술 분야에 활용하겠다는 데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시찰단을 모집했는데 총 300여명이 참여했다.
이 1차 방문단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나이가 30세, 방문단 가운데 최연소였다. 우리는 747 점보 전세 여객기를 타고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들어와 산업시설들을 둘러보며 크게 놀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산이었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11년만에 다시 고국의 산하를 보게 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떠날 당시 한국의 산은 온통 벌거숭이였다. 전쟁과 지나친 남획으로 대부분의 산들이 나무 한그루 없는 황폐한 민둥산이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되돌아와 보니 울창한 수목이 고국의 산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둘째는 고리 원자력 1호기 공사 현장이었다. 그때는 토목·기계공사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고리는 원래 부산 인근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공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푸르게 변한 고국의 강산과 역동적인 건설 현장의 활기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한국은 더 이상 내가 떠날 당시의 그 한국이 아니었다. 1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또 다른 한국이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1일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개소식.<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지도교수 "고민 말고 귀국하라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처음 모국 방문단에 지원했을 때 사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자력과 별로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고리 건설 현장에서 본 원자력 발전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은 대단히 복합적인 시스템이었다. 직접적으로 우라늄 붕괴에 관여하는 핵물리는 전체 공정의 일부분이었고, 실제적으로 우라늄을 쪼개 열을 발생시키고 이 열을 이용해 증기터빈을 돌리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토목, 기계, 전기를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이었다.
특히 우라늄 붕괴 과정에서 고온·고압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려면 기계의 부식, 진동 마모, 피로 파괴 등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력이 관건이었다. 즉, 핵물리를 바탕으로 한 기계공학분야가 제대로 뒷받침이 되어야만 안전한 원자력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다른 방문단원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후, 나는 태릉의 한국원자력연로부터 영구 귀국 초청장을 받았다. 고민이 되었다. 나는 NASA에서 화성으로 무인위성을 쏘아 보내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교인 캘리포니아 공대의 지도교수를 찾아가 상담했다. 기계과 Caughey 지도교수는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더니 "고민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권했다. 우라늄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열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전기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기계공학적인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귀국을 결심했다. 하지만 아내를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975년, 바로 베트남이 공산화 되던 시점이라 더욱 결심이 어려웠다. '내가 군대를 안 갔으니 2년만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 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지는 당신이 결정하라'고 아내를 설득해 어렵사리 1975년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은 영구 정지된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조감도.<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원전 기술의 시작, 세 명의 거인(巨人)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원전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나라의 원자력이 있기까지는 지난 60여년 간 수많은 인재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 중 시대를 초월해 원자력 강국의 초석을 다진 세 거인(巨人)이 있다면 나는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과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을 꼽는다.
정치적인 평가는 관점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지만, 원자력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원자력 강국' 불가능했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은 80대 고령의 나이에도 "우리도 Atomic Machine(원전)을 쓰는 백성이 됩시다"며 원자력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로 당장 하루 세끼 먹을 것을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그는 원자력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의 첫 불씨를 심어준 이승만의 혜안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원자력을 상상하기 어렵다.
1959년 신설된 서울공대 원자력공학과는 서울대 학과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입학 커트라인을 갖고 있었고 덕분에 전국 최고의 수재들을 원자력 재원으로 발굴 양성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어 원자력연를 설립하고 관련법과 정부조직도 정비했다. 당시에 원자력을 이 땅에 도입한 1세대 기술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이 원자력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1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고리 1호기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전력개발정책을 석유 중심에서 원자력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한반도 정세 때문에 원자력을 오직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한다는 원칙을 세운 점이다. 70년대 중반까지도 해도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국내외의 압력 속에서도 과감하게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을 포기했다. 그리고 원자력의 평화적인 목적, 즉 원자력의 연구와 이용을 에너지 생산기술 분야로만 국한시켰다.
오늘날 남북 간의 번영과 고립, 밝음과 어두움의 갈림도 당시 박 대통령과 김일성의 원자력 정책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구한데 반해 후자는 군사적 목적에만 치중한 것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민주화와 경제개발, 외교력과 국민 생활수준에서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3대 세습 정권인 북한은 2018년 자체 개발한 핵무기와 미사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며 '비핵화'를 통한 핵무기의 완전 포기와 경제개발의 기로에 서서 미국과 벼랑 끝 협상을 벌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필순 소장이다. 1980년대 초 한필순과 원자력의 만남은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의 핵심 원전기술자립과 원전 국산화의 효시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오늘날 국내에 25기의 원전이 가동 중에 있고 해외에 연구용 원자로와 발전용 원전의 수출까지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 소장은 국내 원전 핵연료와 원전 기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사진=대덕넷 DB>인간적인 측면에서 한필순은 기술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여서 자신의 능력을 120퍼센트 발휘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1979년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제5공화국이 태동하면서 한국 원자력은 존폐의 위기로 내몰린다.
그 여파로 연구자들이 원자력연를 떠날 준비를 하던 시절, 그의 진솔함에 이끌려 마음을 고쳐먹은 연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연구원에 남은 연구자들과 함께 그는 작은 사업부터 큰 사업까지 많은 프로젝트들을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중수형 핵연료 국산화를 필두로 경수형 핵연료 설계·제작 사업, 경수형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 등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프로젝트들은 별로 없었다.
한 소장은 평소 입버릇처럼 "원자력은 나라의 통치자가 관심을 가져야 살아난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으로 누가 봐도 불가능했던 프로젝트들이 거짓말처럼 풀려 나갔다. 원자력 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상용원전 건설사업의 핵심기술에 깊이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노력과 이를 인정한 최고 통수권자의 믿음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2년 동안 연구원이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설계사업을 주관했던 덕에 우수한 인재들이 확보되었고, 이들을 통한 기술의 축적으로 우리나라의 원전기술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 외국의 원자로를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직접 신형 원자로를 설계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약하게 되었다. 90년대 말 연구원이 주관하던 원전 계통설계사업이 국영산업체로 이관됨으로써 산업체는 대형 원전의 상용화를 좀 더 효율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고, 연구원은 국가연구개발기관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이렇게 원전의 핵심 기술인 원자로 계통설계기술과 핵연료 설계기술을 갖추었기에 새로운 신형 연구로나 차세대 첨단 발전로의 설계 건설 사업을 국내 주도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후 계속해서 10여기의 원전들을 국내 기술 주도로 주어진 공기와 예산에 맞춰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한전의 대형 사업 관리 능력과 원자력연의 기술력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었던 쾌거였다.
<다음 편에서는 '필(必)설계기술자립'과 윈저(Windsor)의 한인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 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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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딜레마, '에너지 전환'아닌 '정책 전환'이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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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 44명, '必원전기술자립' 삼창 후 美 윈저로"
기자명 정리= 길애경 기자
kilpaper@HelloDD.com
입력 2019.04.04 09:37
수정 2019.04.0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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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②]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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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 '턴키' 방식 원전으로 방식 제각각, 기술 국산화 필요성 부각
1970~80년대, 국내에는 고리 1호기부터 울진 1·2호기까지 모두 9기의 원전이 건설 또는 운전 중에 있었다. 원전사업은 급증하는 국내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의 원전업체들에게 '턴키' 방식으로 맡겨졌다.
턴키 방식은 건설과 운전을 모두 해당업체에 일임하는 것으로 기업의 기술력보다는 차관 등 유리한 조건을 우선해 지정했다. 업체에 따라 건설이나 운전방식이 제각각이었고 규제나 국산화 측면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상황으로 80년대 초부터 원전 설계의 표준화 필요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관련 국내 산업체들 사이에서는 일괄적 기술 전수 과정을 통해 신규 원전 건설의 주계약자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국내 산업체들도 우라늄 원광과 농축 기술을 제외한 원전의 라이프 사이클(life-cycle) 전반에 대한 기술자립의 주체로 서서히 그 모습을 갖춰 갔다.
이때 끝까지 주관기관 선정에 애를 먹었던 분야는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설계분야였는데, 산업체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주계약자로 선정됐다. 선정 이유는 가장 우수한 기술 인력을 확보한 기관이 원자력연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자력연 기계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설계 주계약자로 원자력연이 선정됨에 따라 졸지에 영광3, 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 책임자가 되었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떠맡기에는 너무도 막중한 임무였다.
해외 원자로 공급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고, 준공 시점을 엄수하며 결과물 책임까지 져야 했다. 이 일은 주어진 예산 범위 내에서 영광3, 4호기 원자로 계통의 설계를 완수하여 최종 원자로 출력의 성능 보장까지 국내사가 책임지는 첫 사업이었다. 그 부담감이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단은 기술 도입선을 선정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였다. 당시 원자로 계통을 공급할 수 있는 업체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의 4개국 기업뿐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원자로 계통기술은 첨단에 실증된 기술로, 이런 핵심기술을 이전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업체를 선정하는 게 관건이었다.
업체들 사이에서는 정상 외교를 포함해 치열한 수주 경쟁이 벌어졌는데, 1년 6개월여 간의 경쟁 입찰 평가 결과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 CE)이 주 기술 도입선으로 결정됐다. 이 회사는 상업적 실적은 부족했지만 기술의 우수성과, 무엇보다도 기술 전수 조건이 우리나라에 가장 유리했다.
총 공사비 3조4000억원,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건설사업 공사 계약이었다. 여기에는 기술도입 비용이 포함돼 있었다. 영광3·4호기 사업은 이렇게 1987년 계약이 체결되었다. 업체의 선정은 연구원 실무진들이 평가한 결과를 그대로 반영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연구원 기술진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때는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지구촌의 모든 원자력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원전을 포기하던 시기였다. 세계 원전 시장은 급격하게 침체되었다. 한국만 유일하게 가장 유리한 기술 도입 조건을 확보하면서 기술자립정책을 고수했다. 선진국들이 장기간의 기술정지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한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가 토끼를 추월한 것과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 '필(必)설계기술자립'과 윈저(Windsor)의 한인촌
원자력연 연구진 44명은 미국 윈저로 떠나기전 필(必)설계기술자립을 외치며 각오를 다졌다. 3년간 200여명의 연구진이 참여, 이후 국내에서 원전 기술 핵심 인력으로 역할을 했다.<사진=대덕넷 DB>
첫 발을 내딛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달걀'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누군가 길을 닦아놓으면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길을 개척하고 길을 여는 자의 노력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1986년 12월 14일, 원자력연에서는 특별한 출정식이 있었다. 원자로 계통설계 요원 1진 44명을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의 설계센터가 있는 윈저(Windsor)로 파송하는 기념식이었다. 윈저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연구진은 그곳에서 3년간 파견 근무를 해야 했다.
이날 파견 연구진들은 한필순 소장의 제의로 '필(必)설계기술자립'을 삼창했다. '필(必)설계기술자립'을 외치던 연구진들의 마음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결연한 외침이었다. 설계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생면부지의 땅 미국에 뼈를 묻겠다는 결기가 연구진들의 음성에서 묻어났다.
실제로 연구진들은 설계기술자립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축축해진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연구진 대부분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만해도 훈련이나 연수 목적의 장기 해외여행은 규제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만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근무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3년간 연인원 200명의 한국 기술자들이 이렇게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배워온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은 나중에 '원자력 한국'의 토대가 되었다. 이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제3세대 신형 원자로 APR1400이나 소형 SMART 원전이 태어났다.
미 동북부의 소도시 윈저는 한꺼번에 몰려온 200여 명의 한국 기술자 가족 덕분에 아파트 월세가 급등하는 기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영광3, 4호기 설계사업 투입 인력 이외에도 다수가 당시 미국에서 진행 중이던 신형 차세대 원전(ALWR, Advanced Light Water Reactor) 연구 개발 업무에도 참여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아득한 일이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그때 우리가 원자로와 핵연료 계통설계 기술 요원으로 미국에 파견한 인력들은 3년 후 설계센터를 대전으로 옮길 때까지 단 한 명의 낙오자나 이탈자도 없이 전원 제때 귀국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귀국한 후 후속기 사업과 신형로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다시 10년, 마침내 영광 3·4호기가 준공되었다. 우리는 약속된 공기를 준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초에 계획했던 대로 원전 기술자립 국산화 95%라는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때 세웠던 기념비가 지금도 원자력연 내에 그대로 있다.
'원전 기술자립 95퍼센트'라는 말의 의미는 미국에서 기술 전수 받고 배운 원전의 총체적 설계, 제작, 운전 기술의 국산화 수준이 동일형의 원전을 순 국내 기술로 95퍼센트까지 반복 건설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 해가 1996년이었다.
미국에서 기술을 전수받으니 자연스럽게 신형 원자로 창조기술도 길이 열렸다. 제3세대 가압경수로형(Pressurized Water Reactor, PWR) 상용원전의 효시인 APR1400과 후일 한국 고유의 기술로 인정받은 일체형 SMART 원전의 설계기술은 이렇게 확보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다시 UAE 원전 수주의 토대가 되었다. 원자력연 앞마당에서 '필(必)설계기술자립'을 외치던 청년 기술자들이 20여년 만에 배워온 기술로 새로운 원자로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게 된 것이다. 20년의 세월에 담긴 눈물과 땀은 아마도 당사자들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2월 27일 '원자력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필자는 그날의 외침과 그 청년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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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必설계기술자립' 23년만의 '기적'···UAE 원전 수출
기자명 정리= 길애경 기자
kilpaper@HelloDD.com
입력 2019.04.07 13:32
수정 2019.04.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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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③] 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8000번의 설계 변경, 한국이라 가능했던 일"
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2009년 12월 27일, 저녁 9시, 그날 나는 한 식당에 있었다.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린 나의 시야에 9시 뉴스의 자막이 들어왔다. 'UAE에 한국형 원전 수출!'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자신도 모르게 텔레비전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아랍에미리트 칼리파 국왕과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에미리트 전력사 사장과 한국전력 사장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4기의 한국형 원전 수출 계약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 수출 계약이었고 계약 금액만 약 400억 달러에 달했다.
정확히 23년 만의 일이었다. 미국 윈저로 원전 설계단이 떠나던 날이 1986년 12월 14일이었다. 이들은 떠나기 전 "실패하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고 외쳤다. 그것이 '필설계기술자립'에 담긴 의미였다.
그로부터 3년, 원전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설계단은 원전의 국산화·표준화 작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구축된 '한국형 원전 기술'을 토대로 영광 3·4호기, 울진 5·6호기 등 총 8기의 원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다시 20여년, 우리 기술로 완성된 '한국형 원전'이 UAE로 수출됐던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의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9시 뉴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쇼킹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세계 원자력계에 충격을 줬다. 원전을 보유한 나라 가운데 어떤 나라도 단 20년 만에 자체적인 원전 기술을 개발해 다른 나라에 수출한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원전 역사상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아마도 다른 원전 국가들에게는 이 일이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형 원전 기술 개발에 직접 참여했던 나로서는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
UAE원전과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 수출 후 열린 축하 기념식.<사진=대덕넷 DB>◆ 체르노빌 사고 후 CE사 한국측 요구 파격 수용
1980년대 활발하게 진행되던 한국 원전 건설은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중대한 계기를 맞는다. 1986년 구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때문이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의 가공할만한 후유증을 목격한 전 세계는 '원전 공포증'에 사로잡혔다. 원전을 건설하려고 했던 나라들이 모두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유럽 지역의 바람이 체르노빌의 방사선 낙진을 서유럽과 대서양 쪽으로 날려 보내 동쪽 아시아는 후유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구미의 원자력 주도국들은 앞 다투어 원전의 축소 내지는 폐기 결정을 내리고 '탈원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세계 유수의 원자로 공급사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서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 우리나라는 원전 기술 제공과 영광3·4호기 건설사업을 하나로 묶은 국제 경쟁 입찰과정에서 기술 공급사들과 힘겨운 협상 과정을 벌이고 있었다. 최종 낙찰 후보였던 2개사와 까다로운 기술 전수 조건들을 놓고 누가 더 한국에 유리할지 밀고 당기던 중이었다.
이 때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터진 체르노빌 사고로 국제 원전시장은 전면 붕궤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 CE)사는 과감하게 한국 측 기술 요구사항들을 파격적으로 수용하는 결정을 내려 최종 낙찰자가 된다.
사상 초유의 원전 기술 도입과 건설사업으로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주계약자들이 설계와 제작, 건설과 운전보수 등 원전 기술의 총체적인 국산화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다. 초기에는 복사하는 기술부터 연마하고 나아가서 제3세대 원전인 APR1400과 SMART 소형 원전까지 창조하는 기술 강국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토대가 되었다. 이런 기술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는 2007년 아랍에미리트의 대형 원전 국제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미국, 프랑스, 일본 같은 원전 선진국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한국형 원전의 장점을 구매자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꿈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뉴스를 보고 있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가 20년 전에 했던 일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이제 수출까지 하게 되었구나."
더욱이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은 수의계약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굴지의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따 낸 노력의 산물이었다.
아랍에미리트의 원전 건설에는 최첨단 3세대 APR1400 원자로가 들어갔다. 이 원전의 용량은 1400메가와트이고 총 4기를 동시에 짓는 대공사였다. 한 기의 건설비용만 50억 달러에 달했다. 단일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고 규모였고 우리나라 원전 역사로는 사상 최대 수출 프로젝트였다. 이런 규모의 원전 수출을 수주했다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뉴스를 본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올라 온 온갖 상념과 감정의 파고들이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적셨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며 희미한 과거의 풍경 속을 떠다니다 언뜻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의 미명이 창밖을 어슴푸레 물들이고 있었다. 날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UAE 원전과 요르단 원자로 수출 후 대덕연구단지내 연구진들이 모인 가운데 축하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사진은 2010년 1월 축하행사.<사진=대덕넷 DB>◆ UAE 원전, 설계 변경만 8000건
나는 바라카 원전 건설 현장을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 한국형 원전의 효시였던 영광3· 4호기(한빛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 책임자였고, APR1400 개발에 일조해 온 나로서는 정말 특별한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방문 당시 나는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시공사 기술진들과 현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아랍에미리트 원자력공사의 바라카 원전 총책임자와 환담하는 시간도 가졌다. 공사가 완료된 1호기의 원자로 건물, 터빈발전기 건물, 보조 건물에 들어가서 핵심 설비들이 갖춰진 모습을 직접 살펴보았는데, 잘 정돈된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가 근무하던 아부다비를 출발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통과해 4기의 웅장한 원자로 돔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마치 나의 분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2012년 8월 착공된 바라카 원전은 2018년 5월 현재 1호기 건설공사가 완료되어 운영 허가와 핵연료 장전을 기다리고 있다. 2호기는 고온성능시험이 한창이다. 3호기는 본격 성능 시험을 위해 외부 전원이 연결되었고, 4호기도 주요 기기들의 설치와 원자로 건물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러한 순조로운 진행은 아마도 한국인이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자력 인프라가 전혀 없는 사막 국가에 원전을 건설하면서 어떻게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UAE 환경을 반영한 설계 변경이 무려 8000건이나 이루어졌다. 이런 온갖 어려움을 잘 극복해 온 '팀 코리아'에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원전 건설과 관련해 아랍에미리트 원자력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세계 원자력계가 경탄하고 있다.
UAE 원전 수출 축하 행사후 기술자립시기 연구 중 순직한 故서경수 박사를 위한 헌화식을 가졌다.<사진=대덕넷DB>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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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국에 원자로 수출 "우연? 굳건한 믿음"
기자명 정리= 길애경 기자
kilpaper@HelloDD.com
입력 2019.04.08 10:20
수정 2019.04.0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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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④] 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사우디의 스마트 원자로와 요르단의 연구용 원자로 역발상의 작품
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사우디에 건설될 한국형 스마트 원전, 역발상의 작품
2015년 9월 4일은 의미심장한 날이다. 이 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자력원(K.A.CARE)과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은 향후 3년간 중소형 스마트(SMART) 원전의 사전설계(PPE, Pre-Project Engineering) 계약에 서명했다. 그해 봄 박근혜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양국은 양해각서를 교환했고 이후 6개월여의 협상 끝에 스마트 사전설계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 계약에 따라 건설사업이 이어지면 머나 먼 중동의 땅 사우디에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도 지어 본 경험이 없는 스마트 원전이 탄생하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선진국에서 이미 실증된 기존의 원자로만을 고집하는데, 사우디에서는 어떻게 이런 결정이 가능했을까? 우선은 사우디가 아직 어떤 나라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신형 원전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는 국가적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아울러 지난 4년간 아랍 사람들과 일하면서 내가 터득한 것은 바로는, 이들이 추구하는 원자력의 목표가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 위주의 국내 인프라를 원자력 분야로 진출하겠다는 의미다. 원전을 건설하며 확보된 설계, 기기제작, 시공, 운전 보수 등의 기술을 국산화 해 자국의 스마트 원전 사업은 물론 나아가 중동 전역의 스마트 수출 사업까지 주도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80년대에 와서야 터득한 원전 기술자립과 수출산업 육성의 진수(眞粹)를 이들은 초장부터 하겠다고 야심차게 나선 셈이다.
스마트 기술은 한국이 지난 20여 년 간 독자적으로 개발한 고유 설계로형에 2012년 세계 최초로 국내 원자력 규제기관의 표준설계 인허가를 획득한 모델이다. 90년대부터 대형 원전을 10여기 지으면서 터득한 기술에 우리만의 획기적인 창의성을 가미한 일종의 '작품'이다.
과거 원자력 발전소 하면 모두가 100만kw 이상의 초대형 발전소를 생각했다. 하지만 스마트 원전은 그런 생각을 뒤집은 역발상의 산물이다. 스마트 원전은 10만kw급 모듈화 된 일체형 소형 원전이다. 출력이 작아짐에 따라 원전의 안전성이 대폭 개량되고 작은 규모의 투자로 기존 화력 발전소를 대체하는 새로운 원전이다. 다양한 분야의 첨단 기술들이 고도로 'SFLDC(smaller, faster, lighter, denser, cheaper)' 하듯이 원전도 소형으로 '트렌드화' 한 것이다.
사실 이 원전은 개발 동기 자체가 해외 수출용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시범로를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사우디가 그것의 첫 건설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사우디 나름대로는 속내가 있다. 아직 아무도 지어보지 않은 신형로이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으로 기술 소유권도 확보하고 한국과 함께 제3국 진출까지 노려보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우디 원전 수출에 앞서 2013년 하재주 한국원자력연구원 신형원자로개발연구소장과 마헤르 알 오단 KACARE 연구개발혁신실장이 기술 협력을 체결하고 악수하고 있다.<사진=대덕넷 DB>◆ 사우디가 원전 건설을 서두르는 이유
그런데 세계 제1의 산유국으로 매일 10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사우디가 무엇 때문에 원전 건설을 서두르는 것일까? 이 질문은 필자가 2013년 처음 사우디에 가면서 가졌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현지에서 근무하며 비로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석유 에너지는 자원 소모적인 장치산업 에너지인데 반해, 원자력은 두뇌에서 캐내는 고급 기술 인력 위주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자력의 특성은 사우디가 추구하는 장기적인 국가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생산, 가공, 운송 체계를 갖춘 사우디의 아람코는 자국 내에 방대한 생산시설과 2차 기자재 공급망 기업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장치산업으로 고급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력 대부분이 임금이 싼 제3국 근로자들로 채워져 있다. 사우디 국왕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우디는 3300만 인구 가운데 30세 이하의 젊은 인구가 70%다.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사우디 정부 국비 장학생이 13만명에 달하고 대졸 이상 고학력 인구만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젊은 층의 실업률은 30%를 육박한다. 그래서 이공계 고학력 실직자들의 비율을 낮추기 위해 찾아낸 현실적 대안이 '원자력 산업의 사우디화(Saudization)'이다. 인접국 아랍에미리트와의 근본적 차이점이기도 하다.
자국민의 숫자가 80만 정도인 아랍에미리트는 원전을 건설하면서도 이를 통한 기술 인력의 취업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원전의 기자재는 거의 전수 수입하고, 절대 다수의 기술 인력은 외국인 용병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자국인은 최고 관리 책임자나 보안 경비 정도를 전담한다. 하지만 사우디는 최고 경영층부터 중간 실무 기술직까지 모두 사우디 인력으로 충당되고 외국인 기술자는 자문역 정도로만 활용할 뿐이다. 원전의 안전규제에서부터 설계, 제작, 건설, 운영·보수 등 전 분야에서 사우디 인력의 고용 창출 기회를 만들어낸다.
원자력 기술 인력 수요를 예측한 전문 용역 보고서에 의하면, 사우디는 대규모 원전 도입 시 소요되는 원자력 분야 총 인력의 65% 정도를 자국민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그럴 경우 약 4만5000명 정도의 사우디 인력이 필요해진다. 사우디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국 내의 고급 기술 인력의 취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원자력 산업만큼 매력적인 분야도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원자력 기술 분야만이 기여하는 국방·안보 차원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걸프만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대치하고 있는 이란과 사우디 사이에는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주국임을 과시하는 경쟁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 이란의 핵 잠재력과 서방세계의 대 이란 경제제재를 놓고 벌인 선진 6개국 협상 합의안(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퇴할 때 사우디가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우디도 자국 내 원자력 산업의 육성으로 대 이란 잠재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 연구용 원자로 JRTR, 요르단에 쌓은 신뢰의 디딤돌
요르단 원자력위원회 관계자들이 양명승 전 원장 시기 한국을 방문,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대덕넷 DB>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70km 거리에 요르단 제2의 도시라 불리는 이르빗(Irbid)이 있다. 이르빗에는 요르단 최고의 공과대학 JUST(Jordan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우리나라 KAIST에 해당하는 학교)가 있다. 그런데 이 학교 구내에는 우리나라가 지어 준 요르단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JRTR(Jordanian Research & Training Reactor)이 2016년부터 가동 중이다.
어떻게 이런 연구용 원자로가 JUST에 지어질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연구용 원자로는 중동의 작은 왕국 요르단이 원전 확보의 첫 단추로 야심차게 착공한 시설이다. 나는 2012년과 2016년 사우디 근무시절 두 차례에 걸쳐 이 시설물을 방문한 적이 있다. 원자력연구소 후배들이 설계하고 건설, 관리하는 연구로 사업이었기에 나름대로 찾아 볼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요르단이 원자력연과 대우건설 컨소시움에 이 연구로 사업을 발주한 것은 2010년이다. 당시 연구로 설계는 연구원이 맡았고 시공은 대우건설이 맡아 6년 만에 준공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수출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 상용 원전 수출, 2015년 사우디 스마트 소형 원전 설계 수출 등이다. 이 중 100% 우리 기술로 만든 원자로가 해외에서 건설, 가동되기는 JRTR이 단군 이래 처음이다.
이 연구로 건설은 총 2억 달러 규모로, UAE 원전 수출 그늘에 가려 국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업의 참 뜻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리나라가 미국에서 TRIGA 연구로를 처음 수입한 것이 50여 년 전이다. 그리고 우리 자체 기술로 대덕연구단지에 '하나로'를 건설한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이렇게 상용 원전의 핵심 기술들이 축적되며 25기의 원전이 국내에 건설되었고 이들 원전은 우리나라의 첨단 중화학산업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요르단의 JRTR사업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이루어낸 해외 원자로 건설사업이다.
기존 모델을 반복해서 건설하는 상용 원전과 달리, 연구로 건설은 발주처의 필요에 따라 원자로의 용량이나 활용 기능이 달라진다. 사용자의 필요에 맞춰 개념 설계부터 다시 해야 하는 사업이다. 특히 JRTR은 요르단 최고의 공과대학 캠퍼스에 건설된 연구용 원자로이다. 때문에 의료용 및 산업용 동위원소 생산 기능뿐만 아니라 중성자를 이용하는 과학 연구 기능과 학생 훈련 기능을 다 만족시켜야 하는 다목적 연구로이다.
이처럼 참조 모델이 없는 연구용 원자로를 우리나라 기술진이 독자적으로 설계해서 건설하고, 더욱이 발주처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모두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원전 설계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향후 JRTR의 활용 및 추가 연구 설비 설치를 위해 한국과 요르단은 장기간 원자력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기에는 사업의 수익성을 뛰어넘어 원자로의 건설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던 연구원과 대우건설 기술진의 피땀 어린 분투가 감춰져 있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 있고, 그야말로 악착같은 집념으로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가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요르단 기술 경영진의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중동인의 시각은 저절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떤 난공사도 돌파해 내는 한국인의 저력을 이들은 70년대부터 보아왔던 것이다. 거기에 원자로 건설에서 보여준 한국 기술진들의 집념과 헌신을 이들은 옆에서 충분히 지켜봤던 것이다. 이런 경험이 한국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만들었다. 아랍에미리트가 바라카 원전 가동 후 60년 동안 한국 기술진에게 운영을 맡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내일은 마지막 편으로 '탈원전'을 보는 필자의 고견을 담을 예정입니다.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 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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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딜레마, '에너지 전환'아닌 '정책 전환'이 해답
기자명 정리= 길애경 기자
kilpaper@HelloDD.com
입력 2019.04.09 15:52
수정 2019.04.0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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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⑤] 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현 정부의 원자력 안전성 우려, 심각한 오류
"탈원전 속도 필요, 내수없는 수출 어불성설"
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로, 경제적 안정을 이뤄 이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듯 했다. 2018년 현재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돌파했고, 세계 7대 경제대국(30-50 클럽), 즉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이름을 올렸다.
기적에 가까운 이런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 대규모 원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원전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밑바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왔다.
그러나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원전사업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대대적인 원전 건설과 개발사업은 국가적 차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25기 운전 가동에 9기 신규 건설을 추진하며 세계 첨단 산업으로 경쟁력을 키워온 원전 관련 기업들은 졸지에 미래를 잃고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수렴, 공정 30% 가까이에서 중지됐전 '신고리5·6호기'는 건설 재개가 이뤄졌다. 하지만 나머지 ‘신한울3·4호기’, ‘천지1·2호기’, 대진1·2호기 등 후속 신규 사업들은 줄줄이 사업 정지의 운명을 기다리는 상태다. 오직 해외 건설 사업들만 정부 지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실속은 없어 보인다. 일자리 창출을 제1 목표로 출범한 정부가 어찌 이런 속단을 내릴 수가 있을까?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원전 필요성을 강조하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사진=대덕넷 DB>◆ 현 정부의 심각한 오류, 안전성 우려의 진실
'에너지전환정책'으로 포장된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저변에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깔려 있다.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믿는 현 정부는 작금의 탈원전 정책을 출범 전부터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터였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규모 9.0이라는 일본 사상 최대 지진의 여파로 파고 15m가 넘는 쓰나미 해일 때문에 일어난 천재지변이 배경에 깔려 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원전의 폭발로 이어졌다.
이것이 과연 원전의 안전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과연 원전의 안전성이 이 사고의 핵심이었을까? 이런 견해가 얼마나 허황되고 실제 상황과 동떨어진 판단인지는 후쿠시마 사고의 피해 당사자인 일본의 최근 원전 복구 후 재가동 실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직후 일본 전역에서 가동 중이던 54기의 원전을 전면 영구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2018년 현재, 일본 정부는 당초의 결정을 번복, 14기의 원전을 재가동키로 하고 나머지 원전도 영구 폐기할지 아니면 재가동할 지의 여부를 심사 중에 있다. 원전 없이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온실가스를 줄여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원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 정부의 결정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자탄과 후쿠시마의 방사선 피폭을 경험한 일본이다. 방사선의 안전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하고 부정적인 일본인들이다. 그런 일본 사람들이 후쿠시마 사고의 진실을 이해하고 원전의 안전성을 재신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원전들의 선별적인 안전심사를 바탕으로 원전의 재가동에 들어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쿠시마 일대에서 발생했던 1000여명의 사망자는 거의 대부분 지진과 해일의 피해자들이었다.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선 피폭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인들이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모든 원전은 기본 설계에서부터 최악의 천재지변 하에서도 방사선이 누출되지 않도록 건설되어 있었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재가동이 승인된 원전들은 모두 가압식경수로(Pressurized Water Reactor, PWR) 타입으로, 우리나라의 원전과 동일한 로형이다. 후쿠시마 원전은 모두 비등식경수로(Boiling Water Reactor, BWR) 타입으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규모 5급의 지진이 경주와 포항지역에 발생해 한반도도 지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국내 모든 원전은 기본 설계부터 규모 9급의 지진이 와도 안전하게 자동 운전 정지 모드로 가도록 돼 있다.
원전의 핵심부위를 둘러싼 격납용기는 두께 1m가 넘는 초강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지진을 위시한 어떤 충격에도 견디고 방사성 물질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다는 의미다.
25기의 우리나라 원전은 지난 40년간 무사고 운전 실적을 자랑한다. 근거 없는 막연한 공포가 과학적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후쿠시마 사고 후 원전 사업을 전면 중단했던 일본도 충분한 사실 파악과 대안을 검토한 결과 원전을 다시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핀란드, 체코 등도 비슷하다. 게다가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는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 중에 있다.
2018년 11월 대만에서 국민 투표를 통해 '탈원전' 정책을 철회한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6년 대선에서 탈원전 공약을 내세워 집권한 대만 현 정부는 2년 만에 국민 투표 결과로 이 정책의 법적, 정치적 추진 동력을 모두 상실하기에 이른다. 우리보다 지진, 인구밀집 부지 등 원전 가동에 악조건인 대만에서 원전을 다시 살려내기로 한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탈원전은 올바른 선택일까? 현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원전 폐기라기보다는 60여년에 걸쳐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자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선진국들의 원전 정책 조기 수정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 지구 온난화와 미세먼지 대책, 그리고 경제성
기후 변화는 천재지변이 아니다. 인간이 불러온 예측된 재앙이고 지구 온난화 현상의 일부일 뿐이다.
온난화에 대한 전 지구적 관심과 우려는 2015년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을 탄생시켰다.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C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195개국은 온실가스 방출을 의무적으로 줄인다는 협정에 서명했다. 세계 7위 온실가스 배출국인 우리나라도 2030년까지 37%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전력 생산 방식은 원자력이다. 전기 에너지를 기저부하로 대량 생산하는데 최적화된 원전은 온실가스와 미세먼지의 발생이 제로인 첨단 발전소이다. 화석연료를 전혀 쓰지 않고 우라늄 핵분열 시 발생하는 열로 전기를 생산하니 온실가스나 미세먼지 발생이 전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구상 현재 30여개 선진국에서 440기의 원전이 가동 중에 있다. 가장 값싸고 친환경적인 대규모 발전 수단으로서의 원전이 존재한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는다.
2018년 유엔 기구변화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특별 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지구온난화 1.5도' 제한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파리협정에서 '2도C 이하'로 정의한 온난화 온도를 '1.5도C'로 좀 더 강화한 것이다.
특별보고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네 가지 시나리오를 제안했는데, 석탄·석유·가스 감축과 더불어 신재생 에너지 증가, 그리고 원자력 에너지의 대폭 증가를 권유했다.
여기에 2018년 말 미국에서 반핵무기, 반원전 NGO 단체로 잘 알려진 '참여과학자 모임 (The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에서 미국 전체에 가동 중인 99기의 원전 현황과 전망을 분석한 '원전의 딜레마(The Nuclear Power Dilemma)' 정책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주요 골자는 미국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강화하고 발전설비를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로 구축할 것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여기서 원자력은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수명연장)과 신규 원전의 건설을 추천하였고 대규모 가스발전의 억제를 건의하였다. 값싸고 풍부한 셰일가스를 보유한 미국의 방향을 우리가 더욱 경청할 대목이다. 독일을 제외한 영국, 일본 등 여러 선진국들이 원전의 재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지구 온난화가 가져올 피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이들은 이미 깨닫고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탈원전을 시도하려면 대체전력 공급에 따르는 전력 가격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자연조건 하에서 태양광과 풍력만으로는 필요 에너지의 절대량을 충족시킬 수 없다. 현실적으로 원자력을 대체할 만한 대안은 천연가스밖에 없지만, 천연가스는 석탄이나 석유보다도 단가가 월등히 높다. 신재생 에너지는 에너지 자체의 간헐성과 저장의 한계 때문에 이용률이 20% 이하다. 당연히 전기요금이 급상승할 수밖에 없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Moody’s)의 2018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한전과 한수원의 신용도 평가를 각각 한 단계씩 하향 조정했다. 이는 최근 원자력 발전량 감소에 따른 재정 악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다.
◆ 독일의 탈원전 정책에서 배울 점
독일은 1990년 동서독의 통일 이후에도 경세성장을 유지해 유럽 제1의 경제 대국이자 유럽연합의 1인자 지위를 감당하고 있다.
원자력 산업도 최상의 기술 수준을 유지한 채 자국 내에서만 17기의 원전을 가동 중이어서 명실공히 원자력 선진국의 위상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이후 2022년까지 기존 원전의 완전 폐쇄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선언한다.
탈원전 선언 이후 독일은 전국에 산재한 지표면의 석탄자원을 대규모로 태우고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 개발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지난 70년대 우리의 파독 광부들이 지하 깊이까지 내려가 파내던 석탄은 이미 고갈 상태지만, 지표면에 무진장한 저질의 자원인 갈탄을 활용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문제가 많은 정책이다. 가격이 싸긴 하지만 공해가 가장 심한 갈탄을 대규모로 태우는 것은 주변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과 심각한 공해 분쟁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대규모 재원을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원전에 비해 3~4배 비싼 가스 발전이나 풍력, 태양광 에너지로 바꾸면서 2000년 대비 약 2배 정도 인상된,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요금을 부담해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도 독일은 전력의 절대 부족은 피할 수 있다. 유럽은 서로 전력망이 연결되어 있어 국가 간 전기 에너지의 수출입이 자유롭다. 그래서 피크 전력 부족 시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원활하게 전력 공급을 받고 있다.
프랑스는 56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자국 에너지의 75%를 원자력으로 충당하고 있다. 세계 제1의 원전 대국인 프랑스는 사용하고 남은 잉여 전력을 유럽 전체망에 공급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정부 출범 직후 원전의 비중을 50%까지 낮추겠다던 정부 시책을 수정해 원자력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또한 원전의 경제성을 대체할만한 에너지원을 찾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우리나라가 독일과 유사한 정책을 강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나라는 유럽처럼 비상시 외부에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없다. 가령 전력의 절대 부족사태, 즉 '블랙아웃(blackout)' 발생 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 내수 없는 원전 수출? 탈원전 속도 필요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수출로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다. 지금은 세계 10대 교역국에 들만큼 모든 분야에서 수출로 약진을 거듭해왔다.
이 중 2009년 아랍에미리트와 체결한 원전 수출은 백미(白眉) 중 백미로 꼽힌다. 우리 기술이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국들과 당당히 경쟁해서 플랜트 수출의 최정상인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했으니 가히 역사적인 일이라 할 만하다. 한전을 중심으로 '팀 코리아(Team Korea)'가 전력투구해 2018년 바라카 원전 1호기의 완공을 이루었고, 남은 3기도 예정대로 2020년까지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로써 중동의 첨단국 아랍에미리트는 지구상에서 31번째의 신규 원자력 발전국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원전건설사업은 준비 기간이 평균 10년, 건설 기간이 10년에 운전 기간이 60년, 그리고 폐로 기간만도 10여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그러니 원전을 도입하는 나라는 앞으로 백년지교(百年之交)의 장기 거래를 염두에 두고 추진한다.
우리나라가 원전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국내에서 꾸준히 추진해온 원전사업 실적과 이에 동반된 기술력과 경제성이 인정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랍에미리트와 더불어 사우디의 소형, 대형 원전사업 진출과 요르단의 연구용 원자로 건설 가동 등 우리나라의 원자력 수출이 모두 중동지역에 집약돼있다.
지난 세기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에서 인프라 건설사업을 하면서 보여준 성실성과 인내성이 현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도 원자력 수출에 큰 힘이 되었다.
향후 신규 원전사업을 구상 중인 나라들은 현재 국내에서 진행 중인 탈원전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연 한국이 어디까지 원전을 축소하여 국내 원전 공급망 산업체에 영향을 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다. 국내에는 700여개의 기업체에서 원전 기자재의 국산화와 관련 서비스 산업화를 이루고 있고 전문 인력만도 5만 여명에 달한다.
향후 사업 전망이 흐려져서 국내 산업체들의 기술 기반이 무너진다면 한국형 원전을 고려하고 있는 나라들로서는 재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원전의 특성 상 백년대계를 고려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탈원전’은 현 정부의 선거공약 사항이었던 만큼 원천 철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국의 에너지 정책을 하루 아침에 뒤집는 일은 가능한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정부는 2022년까지 가동 예정이던 월성1호기를 탈원전 정책에 따라 수명을 4년이나 앞당겨 2018년 폐쇄했다. 수명 연장의 법적, 기술적 당위성과 경제적 필요성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첨부할 사실은 지구상의 모든 원전 국가들이 필히 갖추고 있는 자국 내 원자력안전규제기관의 실력과 권위를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40년 전 최초의 원전 도입시부터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키워온 원자력안전규제 전문기관이 건재하다. 국무총리 산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500여명의 전문 기술자 집단이 서울과 대덕연구단지 및 각 원전 현장에 존재한다. 안전성과 환경보전의 규제기준을 정하고 철저하게 관리·감독하는 것이 정부의 마땅한 역할이다.
필자의 소견으로 대안은 앞으로 전개될 신규 원전 사업의 결정과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수명연장)으로 '탈원전의 속도 조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또 철저한 안전성과 경제성, 그리고 환경 보전성을 기반으로 현 에너지 믹스에서 점진적인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 분야 에너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철저히 수렴하여 최종 결정을 국정 지도자가 할 일이다.
원자력은 1970년대 최초의 원전인 고리1호기부터 '국민 에너지'로 탄생했고, 지난 40년간 무사고 운전으로 인해 '안심 에너지'로 재인식되었다. 또한 중동에서의 '수출 에너지'로 국가 경제를 이끌었으며, 앞으로 남북이 경협단계에 이르면 '평화 에너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즉, 현재의 '에너지 전환정책'을 '에너지 정책전환'으로 탈바꿈시킬 때 '탈원전'의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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