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애 엄마가 창피를 무릅쓰고 봉지 쌀 사서 돌아오며 내쉬는 한숨 소리로 땅이 꺼져도, 배 깔고 누워 못 들은 척 보들레르를 읽고, 이웃 사람들 다 출근할 때까지 술이 덜 깨 이불에 오래오래 눌려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병에 걸려 집도 아니고 버스 종점에서 일찍 죽어 늦게 발견되어도, 문명의 일원인 시인을 가장 높은 곳에 모시는 이유는,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다른 사람 다 울 때 곁에 붙어 함께 울어줘서가 아니라, 혹은, 더 세련되게 울다가, 울음의 모범이 되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다 분노할 때 덩달아 함께 분노 해서가 아니라, 혹은, 분노의 선봉에 서서가 아니라, 해 질 녘 떼지어 네온사인 불빛으로 스며들어, 가장 빛나게 떠들썩하거나, 흥분의 주인이 되어서가 아니다. 울음의 모범은 우리 엄마다. 분노의 선봉에 서기에 너의 팔뚝과 힘줄은 과하게 연약하지. 흥분의 주인 노릇 하기에는 네 얼굴이 넉넉하게 두껍지 않아. 울음의 모범, 분노의 선봉, 흥분의 주인이라면, 굳이 너일 필요가 없지. 그 대열에 섰다면, 너는 시인이 아니야. 대오에 들면, 시인이 아니지. 왜 그러냐면, 시인은 대오에 들어서 더불어, 함께, 조화를 꿈꾸는 기질을 타고나지 못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되는 수밖에 없어서 시인이 되는 거거든. 시인은 선택해서 되거나,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운명으로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하는 수없이 되는 거거든. 검사, 판사, 변호사, 정치인, 의사 등속은 타고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들이야. 시인은 타고나야 해. 천형을 축복처럼 받은 거지. 아들 주검 앞에서도 병실 유리창이 얼마나 흐린지를 들여다보는 비인간적인 눈이 없으면 안 돼. 네가 대오에 들어 매우 인간적으로 울음의 모범이나 분노의 선봉으로 올려지고 있다면, 너는 기질도 없는데 겉멋이 들어 시인을 꿈꿨거나 그냥 시 꾼으로 살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얼굴을 가진 거지. 시인이라면, 얼굴이 최소한, 정말 최소한, 시집보다는 얇아야 한단다. 친구가 많아? 넌 그냥 좋은 사람이지 시인은 아냐. 동지가 있어? 넌 그냥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지 시인은 아냐. 친구도 많고 동지도 많으면서 애 엄마가 봉지 쌀 사 들고 올 때, 못 본 체하며 보들레르나 읽고 있었다면, 그건 그냥 막사는 거야. 그냥 가난한 거고, 그냥 게으른 거야. 또 왜냐하면, 시인은 분노에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를 보는 사람이라서 그래. 시인은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울음을 보는 사람이라서 그래. 시인은 판단하지 않아. 그냥 오래오래 들여다봐. 얼마나 깊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플 정도로 위대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아무 문장도 없이, 그저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그 사람! 오래오래 들여다보면, 눈에서 피가 나. 그 피가 종이에 떨어져 응고되면 시가 되는 거야. 너는 이 세상에 한 명이잖아. 너는 우주에 하나뿐인 눈깔로 오래오래 본 거야. 거기서 나온 피는 어떻겠어? 색깔도, 성분도, 온도도, 하나밖에 없는, 전혀 다른, 유일한, 바로 “너”지. 네가 “너”의 피를 흘릴 줄 알아서 시인이 되는 거야. 판단은 무리 짓고, 바라보기는 고독이란다. 바라보기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어. 혼자가 아니면 볼 수가 없어. 몰려다니면, 되겠어, 안 되겠어? 오래오래 보면, 하나밖에 없는 피가 흐르지. 이 하나밖에 없는 피는 세상에 없던 피야. 세상에 없던 피가 세상에 떨어지면, 피가 적시는 영토가 넓어지지. 피가 삶이야. 피 아닌 것은 죄다 숙제야. 영토를 넓혀주는 사람이 지배자지. 그래서 시인이 제일 높은 거야. 너라도 알고 있어야 해. 이 세상은 다 문장을 펼쳐놓은 것임을. 문장이 흐트러지면, 세상이 뒤집어진단다. 모든 문장은 다 네게서 시작하잖아. 그것도 잊었어? 그것도 모르면서 시인 간판을 단 거야? 세상이 잘못되면, 사실은, 다 네 책임이란다. (최진석)
ㅡㅡㅡ
아! 최진석 교수님이 왜 말이 없으실까, 궁금하던 차에 침묵을 깨고 외치는, 내 폐부를 쪼이는, 밤새 춥고 습한 콘크리트 도시를 비추는, 아침 햇발과 같은 시가! 왔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