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할 공원과 책 읽을 공간… 난 오늘도 행복을 정복한다
산책할 공원과 책 읽을 공간… 난 오늘도 행복을 정복한다
[아무튼, 주말]
[윤평중의 지천하 17]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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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유현호
눈 쌓인 뒷산을 오르고 냇가를 걷는다. 가벼운 땀으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맞춤한 걷기는 몸과 마음에 두루 유익하다. 산기슭 근린공원엔 자주 들르는 단골 도서관이 나를 기다린다. 우리 동네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작은 도서관이 세 개나 있다.
한국은 산이나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많다. 정원이나 마찬가지인 공원 접근성이 뛰어나다. 서울 같은 세계적 대도시가 아름다운 국립공원을 안고 있는 것에 외국인들은 놀란다. 도심을 흐르는 한강과 개천도 청량한 축복이다.
‘정원과 서재가 있다면, 전부를 가진 셈이다.’ 나라 곳곳 작은 도서관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훌륭한 공용 서재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은 곳일 것’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공공 도서관이든 개인 서재든 책 읽기는 행복의 정복으로 가는 아늑한 오솔길이다.
한강 작가 책을 자랑하는 인증 사진 놀이가 한동안 소셜미디어에 가득했다. 이른바 책 ‘플렉스(자기 자랑·flex)’이다. 평균 독서량이 낮은 한국인에겐 맞지 않는 ‘자랑질’이라며 냉소하는 이도 있지만 짧은 생각이다. 책 자랑은 다른 자랑과는 달리 즐겁고 유익하다.
책 플렉스를 내세운 페이스북 동아리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증언한다. 개인 서재를 소개하는 ‘The Librarianologist’와 ‘I Have No Shelf Control’은 각각 회원 17만명, 5만명에 이르는 세계 애서가들 놀이터다. 수십 권에서 수천 권 서재 사진을 게시하면서 책 사랑을 털어놓는 세계시민들에겐 국적과 인종,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서재를 ‘천국, 안식처, 고향, 자기만의 성소(聖所), 행복에 겨워 낮잠 자는 곳’으로 묘사한다. 허름한 서재여도 뿌듯해하고 행복해한다. 다른 이의 서재를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기쁨을 공유한다.
소셜미디어는 자기표현을 빙자한 자기 자랑의 공간이기 십상이다. 책 플렉스도 그럴 위험성이 있다. 개발 독재 시대 졸부들은 차떼기한 호화 장정 전집으로 서재를 장식하기도 했다. 나아가 지금은 전자책으로 수십만 권 책을 저렴한 비용으로 읽을 수 있다. 전자책은 수납 공간도 필요 없고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무겁고 곰팡이까지 피는 종이책을 ‘시대착오적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한 권 한 권 모은 책엔 나만의 시간과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엔 부족한 용돈으로 고민하면서 사는 게 책이고 사회인이 된 후엔 박봉을 나눠 마련하는 게 책이다.
서재는 나의 현존을 서물(書物)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작든 크든 서재는 자신의 역사이자 수정같이 빛나는 삶의 결정체다. 소박한 서재 안에서 즐거워하는 이유다. 공공 도서관이 한 사회의 상징적 얼굴이듯이 서재는 ‘나’라는 존재의 긍정이다.
책 자랑은 불편한 자기 자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자기 서재에 대한 긍정이 다른 이들의 서재에 대한 부정이나 질투로 흑화(黑化)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사랑과 동의어인 책 자랑은 삶을 충만하게 하는 보편적 긍정의 체험이다.
‘한강 책 플렉스’도 순기능이 압도적이다. 인정 욕구든 자기 자랑이든 우리가 책과 만나는 기회를 크게 늘렸다. 노벨상이 일깨운 한국문학의 재발견은 ‘K르네상스’의 기폭제다. 윤석열 정부가 줄인 도서관·출판 관련 예산도 대폭 늘려야 마땅하다. 모든 선진국은 곧 출판 대국이자 문화 강국이다.
도립공원 산자락에 살고 있는 나는 뒷산을 개인 정원이라고 ‘상상’하면서 걷는다. 산책할 수 있는 공원과 책 읽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부자다.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일회성의 큰 쾌락 대신 작은 기쁨을 자주 느끼는 게 행복이다. 오늘도 나는 걷고 읽으면서 행복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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