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田清美
l7mc tSpofonASsurgruorsSt aettl 20idnc:4t4heh ·
先日8月6日で広島の原爆投下から75年の節目になりました。
覚えている方もいらっしゃると思いますが
オバマ大統領と抱擁をした森さんの話です。
戦争を美化するつもりでもなく、被害者コスプレをするものでも、ありません
얼마 전 8월 6일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 75년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포옹을 한 모리씨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미화할 생각도 아니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原爆 희생 美軍병사와, 아마추어 歷史家
줄리안 레이올(英國 데일리텔레그래프紙 기자)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의해 사망한
희생자 중에는, 12명의 美軍 포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추어 역사가 '모리 시게아키'(森重昭,79세)씨는,
40년 이상을 헌신하며 피폭 미군 병사 유족을 전부 찾
아냈다. 미국의 영화감독 '배리 프렉체트'는, 그 기록을
'Paper Lanterns'(燈籠流,유등)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담
았다.
40년 동안이나 모리 시게아키(森重昭)씨는, 히로시마 원
폭으로 희생이 된 14만 명 가량의 사람들을 포함한 피폭
미군 병사 12명에 대한 기록의 단편(퍼즐)들을 맞추어 나
갔다. 2016년에 79세가 된 모리(森)씨는, 본인 또한 피폭
피해자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해온 그의 위업은, 피
폭 미군 희생자 '노먼'과 학창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조카
(영화감독 배리 프렉체트)에게 알려지기 前까지는 세상
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모리(森)씨는, 40년이나 되는 세월을 쏟아가며 피폭 미군
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왔습니다. 아마추어 역사가로서
史實을 매우 중시하는 모리(森)씨에게 있어, 자세하며 세
부적인 역사적 발견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2명의
미군 비행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사람들의 기억을 하나하
나 더듬어, 유족들을 향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알려
주고 싶었던 모리(森)씨는 그 일을 해낸 것입니다'라고 프
렉체트 감독은 말했다.
배리 프렉체트 감독과 모리(森)씨가 만나게 될 운명은, 감
독이 태어나기 훨씬 前에, 美육군 소속 B24 폭격기 론썸 레
이디號와, 터로아號가, 또다른 두 機의 美해군 전투기와 함
께, 1945년 7월 말에 日本 순양함을 폭격하던 중 격추된 시
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격추된 폭격기 승무원이 전부 살
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낙하산으로 구조된 13명은, 가까운
도시인 히로시마의 일본군 헌병대 사령부로 호송되었다.
그 후, 토머스 카트라이트 중위는 심문을 위해 東京으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갈림길이 토머스 중위의 목숨을 구하
게 되었다.
1945년 8월6일 아침 8시15분에 원폭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했을 때, 미군 포로가 억류되어 있던 헌병대 사령부는
폭심지로부터 400 미터 떨어져 있었다. 9명의 포로는 즉사
했다. 시애틀 출신의 '휴 아트킨슨' 중사는 폭발 당시에 비
록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다음 날 방사능 증상으로 사
망했다. 나머지 두 명, '랄프 릴' 중사와 '노먼' 상병은, 원
폭이 600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기 직전에, 심문을 받기 위
해 헌병대로부터 다소 떨어진 장소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두 명 또한 원폭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
다. 일본인 의사로부터의 응급처치와 치료를 받았지만,
13일 후에 방사능 증상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일본 헌병
대원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8월9일 두 번째 원폭이 나
가사키에 투하되고 일본은 8월15일에 항복했다.
1945년 당시 8살이었던 모리(森)씨는, 히로시마를 뒤덮은
참화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모리(森)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폭발 당시, 폭심지로부터 2.5 킬로미터 떨어진 北西 쪽 언
덕에 있었습니다. 爆風에 떠밀려 강(川)에 빠졌고, 겨우 정
신 차렸을 때는 버섯구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
니다. 온통 어두워 바로 앞 10 센티미터 거리의 저의 손가
락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열감(熱氣)은 믿어
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고, 주변의 나무들과 집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이 공중으로 빨려올라갔습니다. 지구
가 폭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戰後에, 모리(森)씨는 스스로의 인생설계에 매진했다. 학
교에서는 특히 역사과목에 흥미가 있었고 성적도 아주 좋
았다. 모리(森)씨는 역사학 교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워
나가는 동시에, 대학 졸업 후에는 대기업 증권회사, 그리
고 이후에는 악기 메이커 야마하에서 정년까지 근무했다.
리서치(조사활동)는 주말을 이용했다. 모리(森)씨의 역사
연구에 대한 열정은 지속되었다. 38세 때 모리(森)씨는,
종전 무렵 미군 비행기가 이카치(伊陸)村(현재, 야마구치
현 柳井市) 인근 야산에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
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실제로 추락했다는 현장을 찾아
가, 농부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모두들 추락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추락현장으로 저를 안
내해 주었습니다'.
모리(森)씨가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미군 폭격기 '론썸
레이디號'의 잔해였다. 그 후 몇 년간의 연구를 통해 모
리(森)씨는, 미군 승무원들의 명단 한 명 한 명 전부 파
악했고 그들이 히로시마 헌병대 사령부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울러, 그 후에 추락한 또 다른 미군
폭격기 승무원 세 명도 포로로 추가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리(森)씨는 이름을 확인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유족들을 찾아내어, 자신이 밝혀낸
정보를 최대한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부 기관
은 사실상 도움이 안되었다. 우선, 사망한 미군의 패밀리
네임(姓)을 찾아내어, 同姓의 미국인을 찾아내는 작업부
터 착수했다. 당시, 전화로, 국제전화 오퍼레이터(교환원)
의 통역을 통해 워싱터州를 시작으로 미군 사망자와 패밀
리 네임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기시작했다.
'조사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심장 기능에 문제가
있어 미국 현지로 갈 수도 없었고, 미국은 50개州나 되었
으며, 같은 姓을 가진 미국 사람은 무수히 많았기 때문입
니다. 그렇더라도, 죽을 때까지 해보자, 어떻게든 유족을
찾아내어 사망한 미군의 사진과 이름을 정식으로 평화기
념자료관에 원폭희생자로서 등록시켜 주어야겠다고 결
심했습니다'.
국제전화 통화 요금 청구서는 매월 7만 엔 정도나 나왔다.
조사는 계속 난항을 겪었다. 바로 그 때에 '제임스 라이언'
의 兄 '프란시스 라이언'과 만나게 된 것이다.
'피폭 미군 병사의 이름을 처음으로 평화기념자료관에 등
록할 당시, 저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라고
모리(森)씨는 당시를 떠올렸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없
었습니다. 어려움이 계속 되었지만 저는 어떻게든 이 일
을 완수하고 싶었습니다'.
'프란시스 라이언'으로부터 출격前 찍은 사진을 비롯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고, B24 폭격기 론썸 레이
디號 前기장 '커트 라이트' 중위를 찾아내는 일에 성공하
게 되었다. '커트 라이트'씨와는 그 이후로, 20년 이상 우
정을 쌓았다. 커트 라이트씨가 작년(2015년)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서로 교환한 편지는 100통이 넘었다.
'히로시마에는, 원폭 희생자를 위한 수 십개의 위령비들
이 있지만, 희생된 미군 병사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
니다. 저는 다행히 살아남았습니다. 때문에 살아남은 제
가 어떻게든 유족들을 찾아내어, 사랑하는 가족(미군)의
마지막에 대해 전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1999년 모리(森)씨는, 12명의 피폭 미군 희생자 기념비를
히로시마 헌병대 사령부가 있던 자리에 건립했다. 2012
년에는, 트루먼 대통령의 손자 트루먼 다니엘씨와 함께
이 기념비에 헌화하며 조의를 표했다. 차츰 이러한 모리
(森)씨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미국 메릴랜
드州에 있는 미국州立국회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비롯
한 여타 각종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드디어 12명의
피폭 미군 희생자 전원의 유족을 찾아내게 되었다.
모리(森)씨는, 마지막 12번째 미군의 유족을 찾아냈을 때,
이제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시했지만,
결코 연구활동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두 번째
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희생된 영국軍과 네덜
란드軍 포로의 유족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다.
피폭 미군 '노먼' 상병의 유족은, 모리(森)씨가 여러 다
양한 정보들을 보내준 것에 대해 모리(森)씨에게 마음
으로부터 감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노먼의 학창
시절 친구인 '에디 샨드네'가 알게 되었고, '에디'는 자
신의 조카인 영화감독 '배리 프렉체트'에게 노먼의 유
족들이 오랫동안 몰랐던 노먼의 마지막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배리 프렉체트
감독은, '유족이 정리해놓은 노먼 관련 책을 얻어 읽게
되었는데 즉석에서 빠져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히
로시마에서 피폭된 12명의 미군 이야기였습니다. 그
런데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모릅
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
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배리 프렉체트 감독은, 2013년 봄에, 처음으로 모리(森)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4년 2월에
는, 노먼의 유족이 건네준 책의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
여부를 직접 본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단신으로
일본에 입국했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모리(森)씨 집에 도착하여 응접실에 들어서자, 승무원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서류들이, 피아노나 응접 테이
블 등 위에 빼곡하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모리(森)씨는
각각의 승무원에 대해 놀라울 만큼 자세하고 정확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결혼은 했는지 여부, 아이가 있는지
여부, 아이가 몇인지 여부, 출신지와 탑승 전폭기 관련
정보 등...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이것을 꼭 세상에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노먼씨의 고향인 메사추세스州 로웰에 살고있는 사람
보다 훨씬 더 '노먼'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
을 일본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감독은, 최근 2년간 다큐멘터리 제작에 집중하는 가운
데, '노먼'씨의 조카 '수잔 브리세트'씨 및 '렐프 닐'씨
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노먼씨 유족들과 모리(森)씨
와의 만남은, 실로 감동 그 자체였다. 이 장면은 감독의
영화 'Paper Lanterns'(燈籠流,유등)의 클라이맥스로
들어갔다. 영화는, 미군 각각의 유족들과, 조각조각 형
태로 되어있던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아마추어 역사가
모리(森)씨의 이야기다. 모리(森)씨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란 이렇게 비극적인 것입니다. 향후 세계가 항상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 모리 시게아키(森重昭,79세)
-1937년생, 아마추어 역사가, 히로시마 피폭 경험. 현재
부인 가요코(佳代子)씨와 히로시마 거주. 두 명의 자녀.
1945年8月6日に広島に投下された原爆によって亡くなった犠牲者の中には、12人の米軍捕虜も含まれていた。
アマチュア歴史家の「森重昭」(79歳)さんは、40年以上を捧げて被爆米兵の遺族全員を探した。
米国の映画監督のバリー・フレシェットは、その記録を「Paper Lanterns」というタイトルの映画で紹介した。
40年の間、森重昭さんは、広島原爆で犠牲になった14万人ほどの人々を含む被曝米軍兵士12人の記録の断片(パズル)を合わせていった。
2016年に79歳になった森さんは、本人も被爆被害者だ。
自らを顧みず献身してきた彼の偉業は、被爆米軍の犠牲者「ノーマン」と、学生時代に親しかった友人の甥(映画監督のバリー・フレシェット)に知られる前までは、世の中にまったく知られていなかった。
「森さんは40年もの歳月を注いで、被爆米軍の謎を解いてきました。アマチュア歴史家として史実を非常に重視している森さんにとって、仔細で詳細な歴史的な発見が非常に重要だったからです。12人の米軍飛行士に敬意を表して、人々の記憶を一つ一つたどって、遺族に対して何が起きたのかを知らせたかった森さんは、ついにその仕事をやり遂げたのです」とフレシェット監督は言った。
バリー・フレシェット監督と森さんが出会った運命は、監督が生まれるはるか前、米陸軍所属B24爆撃機のロンサム レディー号とトロア号が、別の2機の米海軍の戦闘機と共に、 1945年7月の終わりに日本巡洋艦を爆撃して撃墜された時点からすでに始まっていた。
撃墜された爆撃機の乗組員がすべて生き残ったのではなかった。
パラシュートで降下して日本に救助された13名は、近くの都市の広島の日本軍憲兵隊司令部に護送された。
その後、トーマス・カートライト中尉は尋問のために東京に移送された。
この分かれ道が、トーマス中尉の命を救うことになった。
1945年8月6日の朝8時15分に原爆が広島上空で爆発したとき、米軍捕虜が抑留されていた憲兵隊司令部は、爆心地から400メートルの距離だった。
9人の捕虜は即死した。
シアトル出身の「ヒュー・アトキンス」軍曹は奇跡的に生き残ったが、次の日に放射能の症状で死亡した。
残りの二人の「ラルフ・リール」軍曹と「ノーマン」上等兵は、原爆が600メートル上空で爆発する直前に、尋問を受けるために憲兵隊からやや離れた場所に移送された。
しかし二人もまた、原爆の影響から完全に逃れ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日本人医師からの応急処置と治療を受けたが、13日後に放射線症状で死亡することになって、日本の憲兵隊員によって葬儀が行われた。
8月9日、第二の原爆が長崎に投下されて、日本は8月15日に降伏した。
1945年当時8歳だった森さんは、広島を覆う惨禍の中で九死に一生で生き残った。
森さんは、当時の状況をこう語った。
「爆発当時、爆心地から2.5キロ離れた北西の方の丘にいました。爆風に押されて川に落ちて、やっと意識を取り戻した時は、キノコ雲の真ん中にいました。世界中が暗くて、目の前10センチメートルの距離の私の指の動きですら見えませんでした。焼けるような感じ(熱気)が信じられないほど強くて、周辺の木々や家、そして、その中にあるものが空中に吸い込まれて巻き上がっていました。地球が爆発し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
戦後、森さんは、自らの人生設計に邁進した。
学校では特に歴史科目に興味があったし、成績も非常に良かった。
森さんは歴史の教授になる夢を育てていくと同時に、大学卒業後は大手証券会社、そして後には楽器メーカーヤマハで定年まで働いた。
リサーチ(調査活動)は週末を利用した。
森さんの歴史研究への情熱は、持続した。
38歳の時に森さんは、当時の米軍の飛行機が、伊陸村(現在の山口県柳井市)近くの山に墜落したという話を聞いた。
「この話を聞いて、私は実際に墜落したという現場を訪ねて、農家の噂をたよりにして捜した結果、みんな墜落の事実をよく知っていました。そして、彼らは墜落現場に私を案内してくれました」
森さんが現場で目撃したのは、米軍爆撃機の「ロンサムレディー号」の残骸だった。
その後数年間の研究を通じて、森さんは米軍の乗組員の名簿一人一人をすべて把握して、かれらが広島憲兵隊司令部に移送され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
併せて、その後に墜落した別の米軍の爆撃機の乗組員三人も捕虜に追加されたことも分かった。
しかし森さんは、名前を確認しただけでは満足できなかった。
可能なら遺族を見つけ、自分が明らかにした情報を最大限に伝えようと思った。
政府機関は事実上、参考にならなかった。
まず死亡した米軍のファミリーネーム(姓)を探して、同姓のアメリカ人を見つける作業から着手した。
当時、携帯電話で国際電話オペレーターの通訳を介して、ワシントン州を皮切りにして、米軍の死者とファミリーネームが一致する人を探し始めた。
「調査は簡単ではありません。私は心臓の機能に問題があって、米国現地に行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し、米国には50個もの州があって、同じ姓を持つアメリカ人が無数にいたからです。それでも、死ぬまで探そう、何とか遺族を探して、死亡した米軍兵士の写真と名前を正式に平和記念資料館に原爆犠牲者として登録しなければと決心しました」
国際電話通話料金の請求書は、毎月7万円ほどになった。
調査はずっと難航した。
そしてついに、「ジェームズ・ライアン」の兄「フランシス・ライアン」と出会ったのだ。
「被爆米軍兵士の名前を最初に平和記念資料館に登録する時、思わず涙があふれました」と森さんは当時を思い出した。
「誰にも知らせずしていた仕事だったので、誰からの助けを受ける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困難が続きましたが、私は何とかこれを成し遂げたかったのです」
「フランシス・ライアン」から出撃前に撮った写真をはじめとする新しい情報を得ることができたし、B24爆撃機ロンサムレディー号の機長の「カート・ライト」中尉を見つけることに成功した。
「カート・ライト」氏とは、それ以来20年以上の友情を築いた。
カート・ライト氏が昨年(2015年)に亡くなるまで、お互いに交換した手紙は100通を超えた。
「広島には原爆犠牲者のための数十個の慰霊碑があります。しかし、犠牲になった米軍兵士のための碑は一つもありませんでした。私は幸いなことに生き残りました。だから、生き残った私は何とか遺族を見つけ、愛する家族(米軍兵士)の最後の様子を伝えなければという気持ちがより一層切実になりました」
1999年森さんは、12人の被爆米軍の犠牲者の記念碑を広島憲兵隊司令部のあった場所に建てた。
2012年には、トルーマン大統領の孫のトルーマン・ダニエルさんと共に、この記念碑に献花して、弔意を表した。
徐々にこのような森さんの努力が世に知られるようになって、米国メリーランド州の米国州立国会図書館の膨大な資料をはじめとする他の様々な膨大な資料をもとに、最終的に12人の被爆米軍の犠牲者全員の遺族を見つけ出すことになった。
森さんは、最後の12人目の米軍の遺族を探し出したとき、もう目的を達成したという気持ちにしばらくなっていたが、決して研究活動からは手を離さなかった。
今は二番目に原爆が投下された長崎で犠牲になったイギリス軍とオランダ軍捕虜の遺族の行方を探しているところである。
被爆米軍の「ノーマン」上等兵の遺族は、森さんが様々な情報を送ってくれたことに対し、森さんに心から感謝している。
このような事情をノーマンの学生時代の友人の「エディ・シャンドゥネ」が知ることとなった。
「エディ」は、自分の甥の映画監督「バリー・フレシェット」に、ノーマンの遺族らが長い間知らなかったノーマンの最後の詳細を知ったことを喜んでいると伝えた。
バリー・フレシェット監督は、「遺族が整理しておいたノーマン関連の本を手に入れて読みましたが、すぐに熱中しました。その話は広島で被爆した12人の米軍の話でした。ところで、私たちの世代の人々は、このような話を全く知りません。そのため、この話を世の中に知らせなければという考えを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と述べた。
バリー・フレシェット監督は、2013年の春、初めて森さんに連絡を取った。
そして翌2014年2月には、ノーマンの遺族が渡した本の内容が本当かどうかを直接本人の目で確認するために、単身で日本に入国した。
監督はこう言った。
「森さんの家に到着して応接室に入ると、乗組員一人一人の書類が、ピアノや応接テーブルなどの上にぎっしりと置かれていました。森さんは、それぞれの乗組員について、驚くほど詳細で正確に調べていました。結婚していたのかどうか、子供がいるのかどうか、子供が何人なのか、出身地と搭乗爆撃機の関連情報など…そして、私はその場でこれを必ず世の中に知らせなければという思いをさらに強くしました。ノーマン氏の故郷のマサチューセッツ州ローウェルに住んでいる人よりも、はるかにノーマン氏についての詳細を知っている人に日本で会うことになるとは、夢にも思いませんでした」
監督は最近2年間のドキュメンタリー制作に集中する中で、「ノーマン」氏の甥「スーザン・ブリセット」氏と「レルプ・ニール」氏と一緒に日本を訪問した。
ノーマン氏の遺族と森さんとの出会いは、実に感動そのものだった。
このシーンは監督の映画「Paper Lanterns」のクライマックスに入った。
映画は米軍それぞれの遺族と、ピースの形になっていたパズルを合わせていくアマチュア歴史家森さんの話だ。
森さんは、映画の最後の部分でこう言う。
「戦争とはこのように悲劇的なことです。今後の世界は常に平和であ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森重昭(79歳)
-1937年生まれ、アマチュア歴史家、広島被爆の経験者。現在、妻の佳代子さんと広島在住。二人の子供がいる。
23許修禎 and 22 others
20 comments
Like
Comment
---
- 2 replies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