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2

“우리가 김학순이다” 할머니의 용기…민들레 씨앗으로 퍼져 30년 뒤 더 큰 외침으로 등록 :2021-08-11Jin Kan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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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김학순이다” 할머니의 용기…민들레 씨앗으로 퍼져 30년 뒤 더 큰 외침으로

등록 :2021-08-11
 
장필수 기자 사진

김학순 할머니 최초 증언 30주년 맞아
1504차 수요 시위, 세계연대집회 열어
“범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요구할 것”

11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김학순의 용기가 세상을 깨우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의 주제로 제9차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1인시위)가 열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성명서를 읽고 있다. 코로나19 4단계에 따라 1인시위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요. 내가 죽기 전에, 내가 눈감기 전에, 한번 말이라도 분풀이하고 싶어요”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살·1997년 12월16일 별세)는 공개 기자회견에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라고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다”라며 50여년간 가슴 속 묻어둔 참담한 고통을 풀어내던 그는 끝내 “기가 막히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정부가 일본에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해야 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김미경 전 <한겨레> 기자는 “김학순 할머니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실명을 내건 그의 증언은 한-일간 역사문제뿐 아니라 전시하 성폭력이라는 여성인권의 문제, 피해를 털어놓을수 없게 했던 한국 사회 가부장제 문화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이것이 어떤 무게와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1991년 8월15일치 일간지들은 이 회견을 아예 빼놓거나 사회면 박스기사로 다룬 정도가 대부분이다.

30년 세월이 흐른 11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선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 하라!”는 1991년의 외침이 여전히 울려 퍼졌다. 김 할머니가 원했던 사죄와 배상이 지지부진한 탓에 고인의 한이 온전히 풀리지 않았을 테지만, 30년 전 김 할머니의 용기는 더 크고 단단한 외침이 되어 민들레 씨앗처럼 전 세계에 퍼지는 중이다.

이날 열린 1504차 ‘수요시위’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30주년을 맞아 세계연대집회로 진행됐다. 6개국(한국·독일·미국·호주·일본·필리핀) 84개 단체가 “우리가 김학순이다”라는 구호 아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촉구했다. 시위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 맞춰 ‘1인 시위’ 방식과 온라인 연대발언으로 채워졌다.



11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김학순의 용기가 세상을 깨우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의 주제로 제9차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1인시위)가 열려 김 할머니 사진이 놓여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참석자들은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전 세계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수정 서울대학생겨레하나 항공대지부장은 연대발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한사람들의 용기는 세상을 깨웠고 수많은 사람이 역사를 배웠고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 있다”며 “할머니들과 함께 손잡고 싸워나갈 대학생들은 더욱 많아지고 언제든 평화로를 가득 채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외쳤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또한 “오랜 기간 침묵해야만 했던 국내외 피해자들이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미투(Me Too)로 화답했고 또 다른 김학순이 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다”며 “일본 정부가 범죄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전 세계 피해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사과할 때까지 계속해서 요구하고 또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바라며 30년간 이어져 온 ‘김학순 정신’은 여성 인권과 존엄성 회복이 필요한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마음으로, 행동으로 지지하고 연대할 것이며 김학순님의 뜻을 이어받아 여성폭력, 성착취 문제 해결에 앞장서도록 하겠다.”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군대와 군대문화가 낳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목격하고 있다. 전리품마냥 객체화된 우리 여군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주시해달라.”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 방혜린) 인권단체, 외국인, 학생들은 할머니들이 빠진 자리를 채우며 수요시위를 전 세계 여성 인권과 평화를 위한 운동으로 확대해나가고 있다.

한편, 수요 시위를 방해하는 이들의 ‘백래시(반발성 공격)’가 과거보다 한층 노골화되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날 시위 현장에 나타난 극우 유튜버는 스피커를 틀고선 “(위안부들이) 강제동원 됐다는 증거를 가지고 와라. 증거를 가지고 오면 돈을 주겠다”며 현장에 난입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정의연 관계자는 “예전에는 친일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도 있었는데, 2019년 들어서부터는 위안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시위 현장에 나타나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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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사진첩] ‘김학순의 용기가 세상을 깨우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07317.html#csidx87528b24e9c493d8084a821db9cfa9f













Jin Kan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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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学順さんは、どのように証言したか?--証言に食い違いがある》
#慰安婦
 ⾦学順(김학순)さんは、1991年8月14日にカミングアウトの記者会見を開き、自分が元日本軍慰安婦であったことを明かし、翌8⽉15⽇付のハンギョレ記事によれば、⾦学順さんは次のように語った。
「⽣活が苦しくなった⺟親によって14歳の時に平壌の妓生検番(置屋)に売られた。3年間の検番⽣活を終えた⾦さんが初めての就職だと思って、検番の義⽗に連れていかれた所が、華北の⽇本軍300名余りがいる部隊の前だった」
 これがハンギョレにある、この記者会見での金学順さんの発言内容ということですね。
 金学順さんは1924年に中国の吉林省(当時の満州間島省)で生まれたが、生後すぐに父が死没した。
 2歳の時(1926年)、金さんは母とともに平壌に移住。
 金学順さんは平壌で小学校に入学した(当時の朝鮮には小学校未就学の子どもはたくさんいた)。
 しかし、11歳の時(1935年)、貧困のため小学校を中退した。母子家庭での生活は苦しか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ね。
 14歳(1938年)の時、金さんの母が再婚したが、金さんと継父は不仲であった。
 15歳の時(1939年)、生活苦のため金さんの母は、金さんを平壌の妓生検番に40円で売り、金さんはこの検番の養女となり、そこから妓生を養成する学校に通った。
 金さんは17歳の時(1941年)に、妓生養成学校を卒業したが、妓生になるには年齢が足りず、あきらめるしかなかったが、養父(妓生検番の主人)に中国ならお金が稼げるだろうと言われた。そして、養父に連れられて平壌から汽車で中国に向かった。
 --ここまでは、どの証言もそれほどの差異はない。
 以下は「アジア太平洋戦争韓国人犠牲者補償請求事件」の訴状にある金学順さんの証言内容に基づくその後。
 何度も乗り換えたが、安東と北京を通ったこと、到着したところが、「北支」「カッカ県」「テッペキチン(鉄壁鎭)」であるとしかわからなかった。「鉄壁鎭」へは夜着いた。小さな部落だった。金さんは将校に案内され中国人の家に行ったが部屋に入れられ鍵を掛けられた。そのとき初めて「しまった」と思った。
 つまり、養父に連れられてテッペキチン(鉄壁鎭)の日本軍慰安所に行ったということですね。
 なお、中国にテッペキチン(鉄壁鎮?)なる村は存在しないようなので、金学順さんの記憶違いでしょうね。
 そして、次は挺対協(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現・正義連)の聞き取り調査の結果として発表された、金学順さんのその後。
 北京到着後、町中で金さんは日本軍の将校に呼び止められ「朝鮮人だろ、スパイではないか?」と姉さんと一緒にトラックに乗せられ、夜中ついた空き家で将校に犯され、翌日、お姉さんとともにテッペキチン(鉄壁鎮?)村の慰安所に連行された。
 日本の軍人に拉致・連行された上に犯されたと言っているわけですね。
 普通に考えれば、訴状に記された証言のほうが正しい。偽証は裁判を著しく不利にするからだ。それと訴状は弁護人(弁護士)が聞き取り、訴状を作成しますね。
 挺対協は、金学順さんにオーラルヒストリーを正しい手順で語らせたかを知る証拠はない。まあ、このように証言しろと挺対協が金学順さんに教唆したことはないと証明できないわけだね。
 金学順さんに限らず、韓国人元慰安婦の証言は、 こういう証言の食い違いや、事実との矛盾、記憶違いなどが、まったく検証され、その信憑性が確認されていないわけだね。
〝「韓国政府は日本に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公式謝罪や賠償などを求めるべきです」〟(記事より)
 こう言う前に、やらねばならない手順が欠落しているわけです。金学順さんに限らず。
 挺対協も、自ら聞き取ったという金学順さんらの証言の信憑性に関して、少なくとも客観的な傍証を添えるといったこともやっていないし、その聞き取り調査の様子(音声や映像)も発表していないわけだね。
 挺対協・挺身隊問題研究所が金学順さんとが金学順と文玉珠さんの証言の聞き取り調査を行った時点では、安秉直(안병직)さんもこの聞き取り調査に参加していたわけですね。
 安秉直さんはその後、この調査から離脱するわけですが、それについて「3年活動してからやめた理由は、彼ら(挺身隊対策協)の目的が慰安婦の本質を把握して今日の悲惨な慰安婦現象を防止することではなく、日本とケンカすることだったからだ」と語っています。
https://web.archive.org/.../section/article_view.aspx...
 挺対協が強制動員(連行)ありきで、元慰安婦証言を改竄した可能性、あるいは挺対協の教唆で元慰安婦が証言を変えた可能性も検証しクリアしないといけません。
 そういうことで、この記事にある主張も、鵜呑みにできないわけですよ。〝「韓国政府は日本に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公式謝罪や賠償などを求めるべきです」〟(記事より)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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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Kaneko
     金学順さんの証言が正確かどうか、他者の影響や誘導、あるいはその後の改竄・歪曲もないオーラルヒストリーといえるかどうか、ここが重要なポイントであるわけです。これがないんですよね。金学順さんに限らず、韓国人元慰安婦の証言全般に。
     法廷での証言だって、証言すれば即採ということにはならないでしょう? 信憑性の確認という手続きを伴う。それと同じですね。
     金学順さんのように、内容が異なる証言(らしきもの)がある場合には、なおさ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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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Kaneko
     1991年8月15日付ハンギョレに掲載された、前日(同年8月14日)の金学順さん記者会見に関する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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