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나는 누구인가…" 그녀는 노래에서 답을 찾았다
아버지는 일본인, 어머니는 한국인… 12년만에 한국무대 서는 가수 사와 도모에
한국서 日노래 부른 첫 日가수 수필가 김소운씨의 외손녀
김동섭 기자
입력 2010.01.30
"가와사키에서 태어나 여기저기서 자라고/ 아침에는 낫토(일본 된장), 저녁에는 김치/ 나는 누구일까요. /아버지는 고지식한 일본사람, 어머니는 고집쟁이 한국여자/ 두 사람이 합쳐서 둘로 갈라놓은 나는 누구일까요."
일본 가수로는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996년 9월 서울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공연했다. 1998년 정부의 일본문화 개방에 따라 공식적으로 일본 노래를 광주광역시 한 무대에서 처음 불렀다.
한일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됐던 싱어송 라이터 사와 도모에(澤知惠·39)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다시 12년 만에 어머니 나라 무대에 오른다. 2월 3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과 4일 부산 시민회관 공연을 앞둔 그는 들떠 있었다.
이번엔 무대를 그가 직접 골랐기 때문이다. 연세대는 유학생이던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사랑에 빠진 곳이고 부산은 외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이 두 곳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웃는 모습이 해맑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60년대 말 고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목근(木槿)통신'을 쓴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씨다. 외할머니는 10월 유신 후 둘째 딸을 구하기 위해 '양심범 가족협회' 부회장을 맡았던 김한림씨다. 아버지는 도쿄대 법대를 나와 해방 후 첫 일본인 한국 유학생으로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다닌 사와 마사히코 목사다.
일본 노래를 국내 무대에서 처음 불렀던 일본 가수 사와 도모에. 서울공연을 앞두고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연습하고 있다
1991년 도쿄예술대에 다니면서 가수로 데뷔한 그가 일본 가수로 일본 노래를 한국에서 처음 부른 지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울 대학로 공연 때는 일본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해 일본 노래를 모두 한국어로 번역해 불렀어요. 광주에서 공연할 적엔 일본 노래가 허용됐지만 단 두 곡만 허가를 받았지요."
그는 당시 대학로 공연을 마치면서 관객 앞에 나섰다. "이번 공연은 일본 말로는 못 불렀습니다. 그러나 꼭 일본 말로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외할아버지가 한국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 제가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그리곤 노래 대신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란 김동명(金東鳴)의 시(詩)였다. 지금은 '고코로(마음)'란 제목으로 일본 유명가수들이 앞다투어 취입하는 노래가 됐다. 가슴을 파고드는 서정적인 노랫말에 일본인들도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두 살 때 아버지가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면서다. 그 때문에 일본 친가와 한국에 있는 외갓집을 이어 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한·일 간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아는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일본사람과 결혼한다고 하자, 어머니와 절연했다. 그러나 일본에 가서 결혼해 예쁜 딸을 데리고 오고나자, 그제야 외할아버지는 인정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을 떠났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미국 프린스턴대로 유학간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2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짐도 채 풀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귀국 설교에서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통지를 받았던 것이다. "저의 운명은 그때 바뀌었어요. 그대로 한국에서 살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됐을지…."
일본말을 전혀 모른 채 일본에 간 그는 곧 정체성 위기에 휘말렸다. 외부인에 차갑게 대하는 일본 풍토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 'Who am I?(나는 누구일까요)'처럼 그는 누구인지 수없이 자신에게 묻곤 했다.
한국에선 '사와 도모에'가 아니라 한자 음대로 택지혜(澤知惠)로 불렀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은 그를 그냥 '지혜'라고 해 자기가 누구인지를 따질 이유도 없었다고 한다. 정체성 위기에 빠진 그를 달래준 것은 노래였고, 한국에서 세 살 때부터 배운 피아노는 일생의 친구가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록그룹 밴드에 들어가 리드 싱어가 되자,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2가 되던 해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유언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하라"고 했다. 어머니에게도 "딸을 사랑하면 그의 음악도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그는 도쿄의 명문 음대에 진학했고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다가 음악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가수가 됐다. 지금도 한해 40~50여 차례 공연을 하는 그는 20여장의 앨범을 냈고 일본 레코드대상 아시아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라이브를 고집하는 그는 열성적인 팬도 많다. 이번 공연에도 20여명이 한국 공연 내내 따라온다고 한다.
그는 이번 공연에 앞서 경기 화성의 제암리교회를 찾는다. 3·1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헌병들이 교회를 불지르고 20여명을 죽인 비극의 현장이다. "일본에서 제암리교회 비극을 들은 게 아버지가 한국에 오시게 된 계기가 됐대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그 교회에 가면 어른들이 사와 목사 딸이라고 반겨주곤 했어요." 아버지가 잔인했던 일본인을 대신해 속죄했듯이 성인이 된 그도 아버지처럼 그곳을 찾겠다고 한다.
그는 노래로 현해탄을 잇는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세 나라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Who am I?'란 일본 노래는 한국어로 번역해 부르고 그가 일본에서도 자주 부르는 '아침 이슬'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부르기로 했다.
"노래를 그대로 번역해 부르면 노래 맛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저에겐 그게 아니에요. 제 몸속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한국어든 일본어든 모두 자연스러워요." 한국과 일본 피를 반반씩 나눠 가졌기 때문이 아니냐며 활짝 웃었다.
일본어는 모음이 '아이우에오' 5개지만, 한국어는 '아야어여…' 등 10개나 된다. 이 때문에 한국어로 부르면 노래가 감각, 리듬, 숨결이 모두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그의 열정 어린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은 타고났다고 주변에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엄만 지독한 음치예요. 어떻게 내가 노래를 부르게 됐는지 누구도 몰라요. 엄마는 어릴 때 정이 넘치는 한국 동요를 가르쳐 주시곤 했어요. 아마 '정(情)'이란 더 본질적인 것을 주셨나 봐요."
10여년 전 결혼한 음악프로듀서 남편과 함께 다섯 살, 두 살짜리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한국을 찾은 그는 한국에서 노래하면 행복하다고 한다. "일본에선 남들이 박수치는 것을 보고 따라서 박수치잖아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흥이 나면 즉석에서 손뼉도 치고 노래도 따라 불러요. 이런 한국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은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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