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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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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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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1)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1.30
대동의 나라, ‘대동교학회 취지서’에서 그 길을 찾는다
이종만 선생의 대동교학회취지서 끝 부분에 실린 취지서의 핵심: 원문과 현대어 풀이
대동인, 대동사회, 대동국가, 대동세계는 이종만 선생의 일생의 꿈이었고 대동정신, 대동사상, 대동주의는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환갑이 되던 해 1945년에 해방을 맞은 이종만은 그 감격과 기쁨 속에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 ‘대동의 나라’ 건국의 대망을 품고 국민정신 개혁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 군정하의 남한의 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를 실현하고자 북을 선택했다. 북에서도 대동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는 역사의 파편으로 땅속에 파묻혀버렸다.
‘대동의 나라’는 허황된 꿈일까?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일까? 너와 나, 남과 북, 북과 남, 그리고 세계 인류가 서로 도우며 다 같이 평화롭게 사는 길은 없는 것일까?
2021년이 저물어가는 이제 나는 먼 이국땅에서 이종만의 <대동교학회 취지서>를 꺼내어 들고 그 퇴색한 글자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어 보고 있다, 이 곳은 이종만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일본 강점기의 조선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미국, 웨스트 헐리우드* 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놀랍게도 그 속에 꺼지지 않은 대동정신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불빛이 우리 모두의 행복과 평화의 길을 밝혀 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한다는 소명을 받은 바와 다름 아니다. (* 웨스트 할리우드 West Hollywood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군)에 있는 Hollywood의 서쪽에 있으며, 연예와 록 음악의 역사로 유명한 선셋 스트립 Sunset Strip과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가장 큰 게이Gay 나이트라이프 지구가 있는 곳이다. 주점, 레스토랑, 커피숍, 공원이 즐비하고, 많은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웨스트 할리우드에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2019) 남과 북이 함께 독립선언서에 담긴 자주독립, 자유, 평화, 공존의 정신을 기리며 앞으로의 평화공존의 대도(大道)를 펼쳐나가고자 솟구친 기운이 아직도 넘치고 있는 이 때에 대동(大同)을 논하게 됨은 하늘의 뜻이 이에 닿았기 때문이다.
76년 전 해방을 맞으며 이종만 선생이 작성한 <대동교학회 취지서>가 남과 북이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진정한 민족 광복(光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주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북으로 간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은 대동의 혼(魂)으로 부활하여 이 길에 앞장서리라 믿는다.
오늘날의 남과 북의 모든 국민과 인민들, 그리고 이 시대의 온 인류가 갈망하는 평화와 공동번영의 길이 <대동교학회 취지서>에 담겨있음을 밝히기 위하여 이제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심층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해설 편의상 본문을 열 단락으로 나누었음
1.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이다.
유사이래의 비참하기 그지없는 대 전쟁은 8월 14일 일본의 굴복으로써 막을 내렸다. 전 세계가 온통 전장이 되었고 전 인류가 모두 피해자였다. 소모된 물자는 억조(億兆)에 달하고 살상된 인명은 수십만에 이른다. 아비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집을 잃고 서로 떨어져 울부짖는 자로 말하면 억(億)으로 헤아릴 것이다. 아, 전쟁의 처참한 해독이여, 전쟁의 죄악이여.
이제 전쟁의 승부는 판명이 났다. 패자는 조국과 모든 자유를 잃었거니와 승자는 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영토냐, 배상이냐, 승리의 기쁨이냐. 그런 것이 전쟁의 손실을 보상 할 수 있으랴. 전쟁으로 하여 상실된 인명과 생존자의 비통을 대신 보상할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한 가지 일이다.
이번 전쟁 후 처리에 있어서 이 한 가지 일을 이루지 못하여서 지구상에 다시 원자폭탄이 사용되게 된다 하면 그것은 이번 승전자의 책임이다.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이다.
“아, 전쟁의 처참한 해독이여, 전쟁의 죄악이여!” 이 글을 읽으면서 이종만의 절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라고 이종만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인류 역사상 한시라도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던 것일까? 약육강식의 동물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고 침탈하는 그 무수한 전쟁을 끊임없이 겪어온 인류는 인명을 살상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의 해악과 참혹함에 대해서 이제는 그렇게도 무감각해진 것인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UN이 창설되어 세계 평화유지를 위한 역할을 해왔지만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 것일까. 전쟁에 대비해서 가공할 살상무기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그 군사력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세계의 패권을 쥐려고 하는 치열한 경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인류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정의구현이나 조국수호, 동맹국 보호 등의 명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의 영웅을 숭앙하는 인류의 의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사람됨의 첫 번째 규범으로 자리 잡고 누구나 자발적으로 이를 준수하는 세상은 언제 이루어질까.
마하트마 간디가 실천한 비폭력주의가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의 구현을 위해서 악의 집단을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는 결코 평화가 오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력(武力)이 아닌 다른 차원의 해법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일, 이를 위해서는 깨달아야 하고 절감해야 하고 결심해야 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종만은 이어서 말하고 있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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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2)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4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2. 전쟁의 원인은 이기적인 탐욕, 승전국도 자기반성을 해야만 한다.
대체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에 참여한 각 나라가 서로 상대 나라의 죄를 따지는 곳에 다 표시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은 이기적인 탐욕이 전쟁의 원인이요, 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가 영위하는 왜곡된 국민교육과 과도한 군비와 군비 중심의 산업이 전쟁을 도발하는 마력인 줄을 다 안다. 그러므로 패전국에 임할 때에 반드시 그 군비를 파괴금지하고 교육, 산업을 비경쟁적으로 개조함으로써 근본정책을 삼는다.
이것은 모두 지당한 일이거니와 승전자가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패배한 나라들에게 가하는 문책과 처벌과 개조를 자신에게 가할 때에, 오직 그때에만 전쟁은 완전히 사라지고 인류사회에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전쟁의 원인의 소재를 분명히 아는 동시에 전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이념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전쟁을 변호하는 전쟁 이유를 선전하는 가운데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 즉 민족과 민족이 서로 자기의 정의를 앞장세우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여서 강제로 빼앗거나 기만하고 속이는 죄를 범하지 말고 서로 도우며 공존하는 국제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실로 세계평화의 핵심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요 더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의, 자유, 평화수호, 인권보호...이런 명분들을 내세우지 않는 전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기적인 탐욕이 전쟁의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일본 제국주의도 대동아 평화공영을 내세우며 타 민족을 침탈하고 핍박했고 제국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 탐욕은 누구의 탐욕이며 그 탐욕의 뿌리는 무엇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기적인 탐욕은 정치 권력자에게만 있었을까? 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가 영위하는 왜곡된 국민교육과 과도한 군비와 군비 중심의 산업이 전쟁을 도발하는 마력이라고 이종만은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이기적인 탐욕과의 전쟁, 이것이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전쟁일 것이다.
“지구상에 다시 원자 폭탄이 사용되게 된다 하면 그것은 이번 승전자의 책임이다.”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미국, 중국, 러시아 등 2차 대전의 승전국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이종만의 목소리가 지금 지구상에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
북조선의 비핵화, 한반도의 비핵화가 전 세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이 때에 강대국들의 핵폭탄 보유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물어야하지 않을까. 그들도 핵을 포기하고 전 세계가 핵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시대는 언제 올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류의 의식이 이기적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그날일 것이며 이는 곧 대동의 시대가 열리는 그날일 것이다.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진짜 전쟁, 사상전(思想戰)에서 승리해야 한다.
대개 사람마다 하늘이 부여한 양심이 있듯이 민족마다 천명(天命)을 전하는 성현이 있어 인생 생활의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하고를 아는 자가 적은 것이 아니요 도리어 모르는 자가 드물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이 인쇄, 통신, 교통, 교육기관이 발달한 현상에 있어서는 국가가 진실로 그 국민사상과 생활을 정의와 평화를 하나의 목표로 삼아 집중적으로 노력하려 하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번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나라들이 인류 구제, 전쟁 종말의 큰 목표를 세우고 현대문명의 모든 결함에 대하여 일대 수술을 감행하여 국가관과 인생관에 대 수정을 실시하여서 종래의 제국주의적, 상업주의적인 이기주의, 물욕주의를 제거하고 진정한 진리주의, 인도주의로서 각자 국내의 정치, 산업, 교육을 개혁하고 나아가서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들을 지도하기를 바라는 바이니, 이번 연합국의 전쟁 이유가 정의 옹호에 있다 하면 지금 승리를 얻은 것은 오직 무력전(武力戰에)서요, 그 제2 계단이며 최후적 승패가 될 사상전(思想戰)은 이로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세계 어느 국가가 진실로 그 국민사상과 생활을 정의와 평화를 하나의 목표로 삼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제국주의적, 상업주의적인 이기주의, 물욕주의를 제거하고 진정한 진리주의, 인도주의로서 국내의 정치, 산업, 교육을 개혁하고 있는가?
천명(天命)을 전하는 성현들의 말씀을 거울삼아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진실로 노력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얼마나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드문데도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념과 이상을 있되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이종만의 답은 뒤에서 밝혀진다.
최후의 승패는 사상전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나라가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사상이 인류가 모색하고 정립해야할 과제라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나 공산·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를 강구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사상과 생활의 중심을 오직 정의와 평화의 구현에 두는 인간사회의 근본을 정립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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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3)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5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4. 부강이 아니고 청빈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 국가를 건설해서 공존공영의 미래세계를 선도하자
돌이켜 우리나라로 보면 36년간의 이민족의 굴레를 시원하게 벗어나서 이제 역사를 새로 바꾸는 때라, 모름지기 전 인류를 구제하리라는 큰 소망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적이고 남다른 국가를 건설할 것이요, 결코 옛것만을 답습하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 것이다.
대개 우리 민족이 혈통적으로 심히 우수하고 문화가 오래 되고 고상하여 능히 중국에 못 미칠 바 없으며, 신라시대에 이미 동아시아 사상을 모두 모으는 업적을 이루었고, 또 우리 민족의 지리적 조건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문화산업 교류의 중심자리에 처하여 있으니 이 혈통과 이 역사와 이 지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요, 겸하여 세계의 대 반성 대 개조의 이 시기에 다시 건국을 한다는 것에 깊은 하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자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가 많지 않다고 해서 스스로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富强)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힘이 의(義)’리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는 앞으로는 하늘과 아울러 인류의 양심이 용허하지 아니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류의 이상이요 또 실천일 것이니, 그러므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해방 직후의 건국에 대한 얘기일 뿐만 아니라 오랜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있는 지금의 우리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참으로 중대한 방향제시가 아닌가!
여기에서 말하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이어니...”라는 말은 자본주의 진원으로 최강대국의 위치를 자랑하던 미국이 오늘날 도달한 도덕적으로 천박한 입장을 보면 그 길이 하늘의 품성을 들어내는 길이 아님을 절감한다.
부강한 나라가 아니고 청빈한 나라, 도덕의 나라, 문화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군사 강국이나 경제 강국이 아닌 도덕 강국으로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면, 이것을 남과 북이 공동의 목표로 삼아 정의와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큰 길을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힘이 의(義)’라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 건설에 앞장서게 된다면, 그리고 이 길을 통해서 남북의 평화통일이 저절로 이루어져나간다면,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순박한 품성을 빛내고 홍익인간 이념을 실현하면서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천시(天時)를 맞은 것이리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 길을 선택하려면 필히 대동사상의 함양과 생활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종만은 이어서 말하고 있다.
5. 종교적 진리를 일상 실행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핵심
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이다. 교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기초로 하되 종교를 떠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기 쉬우니 자비, 인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학이야말로 능히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는 본래의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전쟁의 비극은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 공자의 인의, 예수의 박애는 시대와 사람이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둘도 없이 유일한 새 생활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다. 세계의 평화는 결코 신통변화로 될 것이 아니요 진리의 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로 실현될 것이다.
과학도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서 있고 산업도 그러한 세계야말로 정당한 질서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고 끼리끼리 모여 증오와 비방과 투쟁을 일삼는 종파 종교를 시인함이 아니요 순수한 종교의 출현을 희망하거니와, 아무리 퇴화한 종파라도 아주 없는 것 보다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인류동포 세계일가’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자!” 이 얼마나 차원 높고 혁명적인 주장인가! 편협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벗어나서 세계를 한 가정으로 삼고 세계인을 모두 한 가족처럼 받아들이자는 이 이념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 나가야할 대동평화의 길이지 않겠는가.
자기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이것을 넘어 상대와 전체의 이익을 함께 도모해나가는 길이 정의와 평화의 길임은 영성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공존공영의 정신의 뿌리는 바로 대동의 사상과 깨달음에 있다.
종교적 신조와 진리를 떠난 과학과 산업이 결국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전쟁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덕과 종교적 진리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이것이 이종만의 평화론이며 이를 위해 직장이 그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의 평화론이 말로만 그치는 공허한 주장이 아니고 세상에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평화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평화의 길을 알면서 왜 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아니, 왜 가지 못했을까?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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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4)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7
4. 부강이 아니고 청빈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 국가를 건설해서 공존공영의 미래세계를 선도하자
돌이켜 우리나라로 보면 36년간의 이민족의 굴레를 시원하게 벗어나서 이제 역사를 새로 바꾸는 때라, 모름지기 전 인류를 구제하리라는 큰 소망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적이고 남다른 국가를 건설할 것이요, 결코 옛것만을 답습하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 것이다.
대개 우리 민족이 혈통적으로 심히 우수하고 문화가 오래 되고 고상하여 능히 중국에 못 미칠 바 없으며, 신라시대에 이미 동아시아 사상을 모두 모으는 업적을 이루었고, 또 우리 민족의 지리적 조건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문화산업 교류의 중심자리에 처하여 있으니 이 혈통과 이 역사와 이 지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요, 겸하여 세계의 대 반성 대 개조의 이 시기에 다시 건국을 한다는 것에 깊은 하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자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가 많지 않다고 해서 스스로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富强)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힘이 의(義)’리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는 앞으로는 하늘과 아울러 인류의 양심이 용허하지 아니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류의 이상이요 또 실천일 것이니, 그러므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해방 직후의 건국에 대한 얘기일 뿐만 아니라 오랜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있는 지금의 우리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참으로 중대한 방향제시가 아닌가!
여기에서 말하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이어니...”라는 말은 자본주의 진원으로 최강대국의 위치를 자랑하던 미국이 오늘날 도달한 도덕적으로 천박한 입장을 보면 그 길이 하늘의 품성을 들어내는 길이 아님을 절감한다.
부강한 나라가 아니고 청빈한 나라, 도덕의 나라, 문화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군사 강국이나 경제 강국이 아닌 도덕 강국으로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면, 이것을 남과 북이 공동의 목표로 삼아 정의와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큰 길을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힘이 의(義)’라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 건설에 앞장서게 된다면, 그리고 이 길을 통해서 남북의 평화통일이 저절로 이루어져나간다면,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순박한 품성을 빛내고 홍익인간 이념을 실현하면서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천시(天時)를 맞은 것이리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 길을 선택하려면 필히 대동사상의 함양과 생활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종만은 이어서 말하고 있다.
5. 종교적 진리를 일상 실행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핵심
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이다. 교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기초로 하되 종교를 떠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기 쉬우니 자비, 인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학이야말로 능히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는 본래의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전쟁의 비극은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 공자의 인의, 예수의 박애는 시대와 사람이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둘도 없이 유일한 새 생활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다. 세계의 평화는 결코 신통변화로 될 것이 아니요 진리의 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로 실현될 것이다.
과학도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서 있고 산업도 그러한 세계야말로 정당한 질서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고 끼리끼리 모여 증오와 비방과 투쟁을 일삼는 종파 종교를 시인함이 아니요 순수한 종교의 출현을 희망하거니와, 아무리 퇴화한 종파라도 아주 없는 것 보다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인류동포 세계일가’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자!” 이 얼마나 차원 높고 혁명적인 주장인가! 편협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벗어나서 세계를 한 가정으로 삼고 세계인을 모두 한 가족처럼 받아들이자는 이 이념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 나가야할 대동평화의 길이지 않겠는가.
자기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이것을 넘어 상대와 전체의 이익을 함께 도모해나가는 길이 정의와 평화의 길임은 영성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공존공영의 정신의 뿌리는 바로 대동의 사상과 깨달음에 있다.
종교적 신조와 진리를 떠난 과학과 산업이 결국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전쟁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덕과 종교적 진리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이것이 이종만의 평화론이며 이를 위해 직장이 그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의 평화론이 말로만 그치는 공허한 주장이 아니고 세상에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평화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평화의 길을 알면서 왜 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아니, 왜 가지 못했을까?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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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4)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7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6. 올바른 산업은 신성하고 유쾌한 근로를 바탕으로 한다.
산업은 원래 인생의 의식주를 풍족하게 하고 안락하게 함이 목적이요 업자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다. 근대의 산업이 병적으로 발달하여 인생생활을 위하여 있을 산업이 인생생활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혐오할 모든 사상과 행위가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어서 인류 행복의 방편일 산업이 도리어 일대 혁명을 치르고서야 올바로 잡을 수 있는 문제점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의 산업은 모름지기 본래의 올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토지를 경작하고 광물을 채굴하고 기계를 돌리는 노동이 인생으로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과 처자를 보살피는 신성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일이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수요를 예측해서 생산을 하고 생산한 후에는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은 당연히 국가의 정치가 조절할 일이나, 농업, 어업, 광업, 공업 등 모든 근로가 종교적 자유와 기쁨에서 나오도록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하는 것이 또한 국가의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70여 년 전에 작성한 이 글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정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요인이 노사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든 사상과 행위에 있다고 밝히고 있고 산업이 본래의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려면 일대 혁명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동사상의 실천으로 노사화합과 공동번영의 성과를 이루었던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경영철학과 시스템 바로 오늘날의 산업의 일대혁명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방편으로서의 산업의 목적과 노동(근로)의 본질을 말하면서 “모든 근로가 종교적 자유와 기쁨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종만의 대동사상은 종교적 차원에 노동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과 노동을 이렇게 꽃피워가는 것이 국가의 중대한 임무라고 한다면 이종만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념은 또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도덕국가의 이념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 다시 펼쳐질 것이다.
7. 일터와 배움터가 하나 됨에서 수련과 보은의 인생이 이루어진다.
근로의 자유화, 행복화를 위하여는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의 제도를 확립할 것이니, 다시 말하면 모든 교육장은 즉 산업의 직장이요 모든 직장은 즉 교육의 장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종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전연 배움을 떠난 힘든 일일 뿐이었다. 이리하여서 배움과 일이 서로 분리할 뿐더러 학습하는 자는 학습에만 전념하고 일하는 자는 일에만 빠져서 학습이 없는 자와 일이 없는 자를 생기게 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 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교학, 평생근로로써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즉교장, 교장즉직장’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일과 학습이 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제도를 말하고 있다. 평생교육과 평생근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며 유쾌하고 신성한 일과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 이것이 개개인과 사회가 올바로 성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종만은 말하면서 또한 수련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는 인생, 이것은 이종만의 일생의 실천이었고 기업경영의 기본이었고 이상사회 건설의 토대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이 곧 수행이고 수행하는 것이 곧 일을 잘 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과 진리의 수행이 유리되지 않고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만은 그 수행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이어서 말한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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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5)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9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8. 정성을 다하는 신성한 근로는 자기완성과 인류 신격화의 길
그러나 근로가 배움과 하나 되게 하는 데에는 위에 말한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람을 신성하게 하고 사물을 신성하게 하는 일이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를 위하여 짚신을 만들 때에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니 그 짚신은 이득을 위한 상품이 아니고 진실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이요 하늘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노예적 근로에서 생산된 상품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이야말로 인류를 신격화 하고 한 집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교장즉직장’은 이 정신의 도장(道場)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상식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노동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이고 사상인가! 이종만은 이상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이 숭고한 이상과 이를 세상에 밝히는 용기와 소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 하늘의 물건을 생산해 해는 신성한 노동‘, 이것의 실현이 과연 가능할까? 이종만은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방에는 4대 성인- 예수, 석가, 공자, 간디- 의 사진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본질을 깨달은 종교인이고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를 그의 대동사업체와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혁명가 였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의 영혼은 또다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성이면 감천,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하했다. 그 정성이 물건에도 담겨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것을 그는 직관과 체험으로 알았던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담긴 지극한 정성, 여기에 세상을 구원하는 핵심이 있다는 이 말씀이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일으킨다. 나는 여기에서, 세상의 구원은 양심이 빛나는 순수정신, 지극한 정성, 그리고 모두가 다 같다는 대동사상의 발현이 인류에게 보편화되는 길에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인류의 모든 성현, 모든 동서의 전통종교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다. 길은 있으나 가지 않고, 앎은 있으나 행하지 않은 것뿐이다. 다 같이 잘 사는 길, 다 같이 행복과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종만은 이에 대한 답을 취지서 마지막에 남기고 있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영혼은 하늘과 닿아있는 신성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을 이종만은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손녀인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써진 대동교학회 취지서의 이 핵심이 오늘날 나에게는 생명모성의 개념으로 자리
잡고 체화되는 과정에 있으니 이것은 DNA로 전해진 신비한 영혼의 길의 연결이 아닐까 싶다.
김반아 감독 제작. 2012년에 멕시코 친구 Hilda Maria Ordeas와 함께 멕시코 엔시나다에서 Corea-Mexico Festival을 열 것을 결정하고 참가/공연자는 주변에 알려서 원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리고는 미국 아리조나 주에 있는 나바호 보호구역에 가서 고등학교를 방문하고 학생들과 사전 준비 없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에서 간 대표단은 국제 항공비를 포함한 참가비 일절은 본인이 부담하고 행사 전반은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6. 올바른 산업은 신성하고 유쾌한 근로를 바탕으로 한다.
산업은 원래 인생의 의식주를 풍족하게 하고 안락하게 함이 목적이요 업자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다. 근대의 산업이 병적으로 발달하여 인생생활을 위하여 있을 산업이 인생생활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혐오할 모든 사상과 행위가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어서 인류 행복의 방편일 산업이 도리어 일대 혁명을 치르고서야 올바로 잡을 수 있는 문제점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의 산업은 모름지기 본래의 올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토지를 경작하고 광물을 채굴하고 기계를 돌리는 노동이 인생으로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과 처자를 보살피는 신성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일이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수요를 예측해서 생산을 하고 생산한 후에는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은 당연히 국가의 정치가 조절할 일이나, 농업, 어업, 광업, 공업 등 모든 근로가 종교적 자유와 기쁨에서 나오도록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하는 것이 또한 국가의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70여 년 전에 작성한 이 글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정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요인이 노사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든 사상과 행위에 있다고 밝히고 있고 산업이 본래의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려면 일대 혁명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동사상의 실천으로 노사화합과 공동번영의 성과를 이루었던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경영철학과 시스템 바로 오늘날의 산업의 일대혁명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방편으로서의 산업의 목적과 노동(근로)의 본질을 말하면서 “모든 근로가 종교적 자유와 기쁨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종만의 대동사상은 종교적 차원에 노동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과 노동을 이렇게 꽃피워가는 것이 국가의 중대한 임무라고 한다면 이종만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념은 또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도덕국가의 이념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 다시 펼쳐질 것이다.
7. 일터와 배움터가 하나 됨에서 수련과 보은의 인생이 이루어진다.
근로의 자유화, 행복화를 위하여는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의 제도를 확립할 것이니, 다시 말하면 모든 교육장은 즉 산업의 직장이요 모든 직장은 즉 교육의 장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종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전연 배움을 떠난 힘든 일일 뿐이었다. 이리하여서 배움과 일이 서로 분리할 뿐더러 학습하는 자는 학습에만 전념하고 일하는 자는 일에만 빠져서 학습이 없는 자와 일이 없는 자를 생기게 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 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교학, 평생근로로써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즉교장, 교장즉직장’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일과 학습이 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제도를 말하고 있다. 평생교육과 평생근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며 유쾌하고 신성한 일과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 이것이 개개인과 사회가 올바로 성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종만은 말하면서 또한 수련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는 인생, 이것은 이종만의 일생의 실천이었고 기업경영의 기본이었고 이상사회 건설의 토대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이 곧 수행이고 수행하는 것이 곧 일을 잘 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과 진리의 수행이 유리되지 않고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만은 그 수행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이어서 말한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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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남호 이종만,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5)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12.29
대동교학회(大同敎學會) 취지서 – 이종만(1945)
8. 정성을 다하는 신성한 근로는 자기완성과 인류 신격화의 길
그러나 근로가 배움과 하나 되게 하는 데에는 위에 말한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람을 신성하게 하고 사물을 신성하게 하는 일이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를 위하여 짚신을 만들 때에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니 그 짚신은 이득을 위한 상품이 아니고 진실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이요 하늘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노예적 근로에서 생산된 상품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이야말로 인류를 신격화 하고 한 집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교장즉직장’은 이 정신의 도장(道場)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상식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노동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이고 사상인가! 이종만은 이상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이 숭고한 이상과 이를 세상에 밝히는 용기와 소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 하늘의 물건을 생산해 해는 신성한 노동‘, 이것의 실현이 과연 가능할까? 이종만은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방에는 4대 성인- 예수, 석가, 공자, 간디- 의 사진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본질을 깨달은 종교인이고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를 그의 대동사업체와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혁명가 였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의 영혼은 또다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성이면 감천,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하했다. 그 정성이 물건에도 담겨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것을 그는 직관과 체험으로 알았던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담긴 지극한 정성, 여기에 세상을 구원하는 핵심이 있다는 이 말씀이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일으킨다. 나는 여기에서, 세상의 구원은 양심이 빛나는 순수정신, 지극한 정성, 그리고 모두가 다 같다는 대동사상의 발현이 인류에게 보편화되는 길에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인류의 모든 성현, 모든 동서의 전통종교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다. 길은 있으나 가지 않고, 앎은 있으나 행하지 않은 것뿐이다. 다 같이 잘 사는 길, 다 같이 행복과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종만은 이에 대한 답을 취지서 마지막에 남기고 있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영혼은 하늘과 닿아있는 신성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을 이종만은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손녀인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써진 대동교학회 취지서의 이 핵심이 오늘날 나에게는 생명모성의 개념으로 자리
잡고 체화되는 과정에 있으니 이것은 DNA로 전해진 신비한 영혼의 길의 연결이 아닐까 싶다.
김반아 감독 제작. 2012년에 멕시코 친구 Hilda Maria Ordeas와 함께 멕시코 엔시나다에서 Corea-Mexico Festival을 열 것을 결정하고 참가/공연자는 주변에 알려서 원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리고는 미국 아리조나 주에 있는 나바호 보호구역에 가서 고등학교를 방문하고 학생들과 사전 준비 없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에서 간 대표단은 국제 항공비를 포함한 참가비 일절은 본인이 부담하고 행사 전반은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 편집자주 : 이 글은 이종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주주통신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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