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근통신 木槿通信
김소운 (지은이)오트(AUGHT)2021
284쪽
책소개
일본의 이중성을 지적하며 우리 민족의 자각을 촉구한 김소운의 수필집이다. ‘목근통신’은1951년 『국제신보』에 연재한 서간체 형식 수필 제목이다. 한국의 현실을 왜곡한 일본 주간지 기사에 분노하며 쓴 글로 당시 ‘일본에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었다. 기사는 같은 해 11월 일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중앙공론』에 실렸다. 1952년 단행본 <목근통신>(영웅출판사)이 발간됐고, 1973년 삼성문화재단이 일본과 한국에 관한 저자의 글을 더해 <목근통신(外)>를 출간했다.
저자는 <목근통신(外)> 서문에서
“우리의 국민도의를 지켜나가고 이웃 나라를 과부족(過不足) 없이 정시(正視)함에 있어서 만분의 1이라도 기여하는 바 있기를 기구하는 마음에서 묵은 글을 다시 한번 내놓았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반일이나 친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34년간 일본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에게 받은 모멸에 항의하고, 반성 없는 일본의 태도를 준엄하게 지적한다. 동시에 말로는 극일이나 배일을 외치지만 일본문화의 거죽에만 빠져 있는 한국의 실정을 개탄했다.
세기가 바뀐 2021년, 한일 양국은 출구 없어 보이는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묵은’ 훈계가 아니다. 양국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은 70년이 지난 오늘날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막힘없이 읽히는 세련된 글솜씨는 ‘명문’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번에 복간한 <목근통신>은 1973년 출판본을 읽기 쉽게 고치고 주석을 더했다. 더불어 세로쓰기 형식으로 옛 맛을 되살렸다. 1950년에 연재한 16편의 글과 귀국 후 20여 년에 걸쳐 쓴 수필이 총 3부로 나뉘어 실렸다.
목차
목근통신木槿通信 - 일본에 보내는 편지
* 미움과 친애의 두 진실에서
* 《선데이매일》지의 기사
* 「구린내 나는 나라」의 출토품
* 제 욕을 제가 하는 바보
* 어느 쪽이 더 교활?
* 《하가쿠레葉隱》의 일화
* 배움직한 일본의 「서비스 스피릿」
* 일본을 이해함에 있어서
* 일본의 「선善」을 두고
* 「자유혼」이란 그 한마디
* 일본의 「악」
* 일본 문화의 토양은……
* 「받는 민족」에서 「주는 민족」으로
* 세계의 일본이기 전에
* 서로의 공동 이해利害에 있어서
* 『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붉은 튤립 - 일본의 지식인 Y씨에게
민족문화의 순결을 위하여
* 그리운 옛 노래
* 장한몽長恨夢
* 입맛 쓴 실례들
* 영리한 베르나르
* 인형 모가지
* 깨끗한 소복素服
일본말과 민족 감각
* 등대지기
* 「긴 상」 「복 상」
* 피로 연連한 「어머니의 말」
* 뒤죽박죽인 언어생활
* 『오레와 닛뽄진다』
* 연륜을 거듭한 민족 체질
대일 감정의 밑뿌리
* 구미에 맞춘 양념
* 민족과 민족의 상극相剋
* 혈관 속에 설레는 「피」
* 우호를 가로막는 장벽
* 장벽을 뚫는 길
2부
가깝고도 먼 이웃
* 월남月南 선생의 선학善謔
* 일방적인 영합 迎合
* 기차와 승객
* 4백분의 1인 「한국」
일본이란 이름의 기차 - 한·일협정의 발효에 붙여
* 플랫폼 일본
* 기대와 위구危懼
* 일본의 뿌리
* 생활 정신의 토대
도착倒錯된 대일對日 감각
* 문화식민지의 상표
* 못들은 역시譯詩 테이프
일본말의 망령들
*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낯간지러운 CM
* 전자계산기라면 몰라도
* 「하루나」 「긴타로」
* 일본말의 대가들
수감隨感· 일본어
「일본 태풍」 속의 한국
* 멘델 교수의 충고
* 「피」의 기억
* 얼마나 깔보았으면
* 모든 책임은 이쪽에
* 무색한 충무공 동상
조국의 젊은 벗들에게
* 건망증
* 고인 물, 흘러가는 물
* 알지 못할 수수께끼
* 뿌리 깊은 일본의 매력
* 버려야 할 하루살이 대일 자세
* 칼레의 시민
* 겹겹으로 사무친 대일 감정
* 쉬운 길, 어려운 길
3부
시점視點 Ⅰ
* 일제 천국
* 『야마모리로 주어요』
* 「복수」라는 수입품
* 「어머니」와 「오모니」
* 4반세기
* 겁내지 말고 신중히 – 일본문화원 개설을 두고
* 아쉬운 민족 긍지
시점視點 Ⅱ
* 달갑잖은 부산물
* 외래인과 「삼국인三國人」
* 불어오는 일본 바람
* 평온 무드에 경종 - 김희로金嬉老 사건에 뒤따르는 것
* 「일본 공해」
스도首藤 노인 - 일본의 양심
양梁군의 죽음
일본 무사도의 계보
* 뿌리 깊은 생활 도의
* 일본도에 연連한 향수
* 무사도의 집약 〈충신장忠臣蔵〉
* 일본적인 모럴과 체취
* 무사도 화려했던 시절
* 「마치야코町奴」와 「하타모도야코旗本奴」
* 탈을 바꾼 무사도 정신
접기
책속에서
P. 58~59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중략) 1939년11월 호 《부인공론》에 〈보오노하나〉(박꽃)란 수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향토에 대한 내 애정과 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향토는 내 종교였다……』 거기 쓴 이 한마디 말은 목숨이 다할 날까지 내 가슴에 지닐, 괴로우나 그러나 모면치 못할 십자가입니다. 문둥이의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느 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입니다. 접기
P. 121~122 패전, 유사 이래로 처음 겪는 침통한 체험, 거기서 일본이 배운 것이 무엇이었던가? 강화講和까지의 일본은 그래도 비굴에 가까울 정도로 「반성병」이 유행했었다。『천황은 상징일 뿐입니다. 기원절이니 천장절이니는 영영 잊어버리겠습니다.』 『무기는 다시 두 번 손에 쥐지 않겠습니다.』 『기미가요니 군가 따위를 우리 입으로 또 다시 부르다니오…….』 (중략) 전후戰後 17년, 이미 일본은 전후의 고난 속에서 허덕이던 그날의 일본이 아니다. 경제력의 부흥과 더불어 자신과 오만은 날로 조성되어 갈 뿐이다. 총리대신은 국회 연설에서 「동아東亞의 미개국들을」하고 망언 소동을 일으켰다. 접기
P. 189~190 수백 년토록 얽히고설킨 일본과의 그릇된 인연을 우리는 눈감아 흘려 버릴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숙원宿怨, 그 역사의 불행에 언제까지나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흐지부지 구채舊債(묵은 빚)를 탕감하는 것이 아니오, 민족적인 지각과 내일을 지향하는 건강한 생리에서 일본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인식을 길러야만 하겠다. 한 자리에 고인 물은 썩어도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낡은 민족 감정은 마치 흐르지 않는 물과도 같다. 그로 해서 일시의 쾌快(기쁨)를 맛볼 수는 있을망정, 결코 올바른 미래에의 성장을 거기서 바랄 수는 없다. 안이한 타협이나 실리적인 순응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고인 물에서 흘러가는 물로 우리들 자신이 탈피하고 전환해야만 할 때이다. 접기
P. 204 선천적인 체질 속에, 후천적인 체험 속에, 겹겹으로 사무친 이 일본에의 「미움」, 교양이나 양식으로 지워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뿌리 깊은 것이 우리들의 대일 감정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 위험한 하나의 함정이 있다. 일본을 욕하면 누구나가 「애국자」이다. 일본인의 따귀 한 대만 갈기면 누구나가 쉽사리 영웅이 될 수 있다. 거기 대해서 그것을 비난하고, 그릇된 일이라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슴속 깊이 간직할 우리들의 조국애, 「칼레의 시민」이 부럽지 않은 우리들의 조국을 향한 신앙이, 이렇게도 손쉽게, 이렇게도 안이하게 노출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과연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일까?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소운 (지은이)
“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 본문에서
김소운은 1908년 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교중(敎重)이었으나 광복 후에 소운(素雲)으로 개명했다. 진주 재무서 주사였던 아버지 김옥현(金玉顯)은 1909년 의병들에게 친일파로 몰려 피살된다. 어머니는 박덕수(朴德水)는 1912년 재혼해서 러시아로 떠났다. 양친을 잃고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들과 생활하며 진해, 김해, 목포 등으로 계속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16년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홀로 평안남도 진남포로 가서 2개월간 체류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절영도소년단 활동이 문제가 되어 옥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듬해 사촌 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동경 개성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923년 9월 동경대지진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오사카 숙부댁에서 약 반년을 지내다 한국에 돌아왔다. 다음 해 상경하여 오상순, 김범부, 조명희, 변영로 등의 문학인들과 교류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 식민지와 제국을 여러 차례 왕복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김소운은 한국문학을 번역해서 일본에 소개하며 한국인의 문학 정신을 널리 알렸다. 1926년 동경에서 교포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채집한 구전민요를 일본의 시 잡지 『지상낙원』에 연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3년 일본 출판사에서 『언문조선구전민요집』을 발간했다. 3천 수가 넘는 구전민요가 실린 700여 쪽짜리 순 한글책이었다. 또한 3년여의 편집과 번역 끝에 1976년 『현대한국문학선집』을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편찬했다.
호는 삼오당(三誤堂)이며 한국수필사에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수필가 중 한사람으로 꼽혔다. 저자는 삼오당의 뜻을 익살스럽게 밝혔다. “첫째로 허다한 나라를 두고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제1의 과오이고, 인간의 운명이니 감정에 관련된 문필작업 같은 이런 고생길을 택한 것, 이것이 둘째 과오. 30전후에 죽어서 애석하다는 소리나 들어볼 것이지 죽지 않고 살아 이게 무슨 과오일까 보냐?”
1952년 베니스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할 정도로 국내 문단내 입지가 높았다. 『가난한 날의 행복은』 7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목근통신』은 대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원작보다 좋은 일본어 번역 실력 덕분에 1977년 한국번역문학상을,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향토와 조국의 문화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을 글을 쓴 김소운. 근엄하면서도 격정적인 성격으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모순과 상처투성이인 인간을 그려내며 성찰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1981년 11월 향년 74세에 타계했다. 접기
최근작 : <목근통신 木槿通信>,<[큰글씨책] 김소운 수필선집>,<김소운 수필선집> … 총 1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세기가 바뀐 2021년, 한일 양국은 출구 없어 보이는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묵은’ 훈계가 아니다. 양국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은 70년이 지난 오늘날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막힘없이 읽히는 세련된 글솜씨는 ‘명문’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번에 복간한 <목근통신>은 1973년 출판본을 읽기 쉽게 고치고 주석을 더했다. 더불어 세로쓰기 형식으로 옛 맛을 되살렸다. 1950년에 연재한 16편의 글과 귀국 후 20여 년에 걸쳐 쓴 수필이 총 3부로 나뉘어 실렸다.
목차
목근통신木槿通信 - 일본에 보내는 편지
* 미움과 친애의 두 진실에서
* 《선데이매일》지의 기사
* 「구린내 나는 나라」의 출토품
* 제 욕을 제가 하는 바보
* 어느 쪽이 더 교활?
* 《하가쿠레葉隱》의 일화
* 배움직한 일본의 「서비스 스피릿」
* 일본을 이해함에 있어서
* 일본의 「선善」을 두고
* 「자유혼」이란 그 한마디
* 일본의 「악」
* 일본 문화의 토양은……
* 「받는 민족」에서 「주는 민족」으로
* 세계의 일본이기 전에
* 서로의 공동 이해利害에 있어서
* 『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붉은 튤립 - 일본의 지식인 Y씨에게
민족문화의 순결을 위하여
* 그리운 옛 노래
* 장한몽長恨夢
* 입맛 쓴 실례들
* 영리한 베르나르
* 인형 모가지
* 깨끗한 소복素服
일본말과 민족 감각
* 등대지기
* 「긴 상」 「복 상」
* 피로 연連한 「어머니의 말」
* 뒤죽박죽인 언어생활
* 『오레와 닛뽄진다』
* 연륜을 거듭한 민족 체질
대일 감정의 밑뿌리
* 구미에 맞춘 양념
* 민족과 민족의 상극相剋
* 혈관 속에 설레는 「피」
* 우호를 가로막는 장벽
* 장벽을 뚫는 길
2부
가깝고도 먼 이웃
* 월남月南 선생의 선학善謔
* 일방적인 영합 迎合
* 기차와 승객
* 4백분의 1인 「한국」
일본이란 이름의 기차 - 한·일협정의 발효에 붙여
* 플랫폼 일본
* 기대와 위구危懼
* 일본의 뿌리
* 생활 정신의 토대
도착倒錯된 대일對日 감각
* 문화식민지의 상표
* 못들은 역시譯詩 테이프
일본말의 망령들
*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낯간지러운 CM
* 전자계산기라면 몰라도
* 「하루나」 「긴타로」
* 일본말의 대가들
수감隨感· 일본어
「일본 태풍」 속의 한국
* 멘델 교수의 충고
* 「피」의 기억
* 얼마나 깔보았으면
* 모든 책임은 이쪽에
* 무색한 충무공 동상
조국의 젊은 벗들에게
* 건망증
* 고인 물, 흘러가는 물
* 알지 못할 수수께끼
* 뿌리 깊은 일본의 매력
* 버려야 할 하루살이 대일 자세
* 칼레의 시민
* 겹겹으로 사무친 대일 감정
* 쉬운 길, 어려운 길
3부
시점視點 Ⅰ
* 일제 천국
* 『야마모리로 주어요』
* 「복수」라는 수입품
* 「어머니」와 「오모니」
* 4반세기
* 겁내지 말고 신중히 – 일본문화원 개설을 두고
* 아쉬운 민족 긍지
시점視點 Ⅱ
* 달갑잖은 부산물
* 외래인과 「삼국인三國人」
* 불어오는 일본 바람
* 평온 무드에 경종 - 김희로金嬉老 사건에 뒤따르는 것
* 「일본 공해」
스도首藤 노인 - 일본의 양심
양梁군의 죽음
일본 무사도의 계보
* 뿌리 깊은 생활 도의
* 일본도에 연連한 향수
* 무사도의 집약 〈충신장忠臣蔵〉
* 일본적인 모럴과 체취
* 무사도 화려했던 시절
* 「마치야코町奴」와 「하타모도야코旗本奴」
* 탈을 바꾼 무사도 정신
접기
책속에서
P. 58~59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중략) 1939년11월 호 《부인공론》에 〈보오노하나〉(박꽃)란 수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향토에 대한 내 애정과 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향토는 내 종교였다……』 거기 쓴 이 한마디 말은 목숨이 다할 날까지 내 가슴에 지닐, 괴로우나 그러나 모면치 못할 십자가입니다. 문둥이의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느 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입니다. 접기
P. 121~122 패전, 유사 이래로 처음 겪는 침통한 체험, 거기서 일본이 배운 것이 무엇이었던가? 강화講和까지의 일본은 그래도 비굴에 가까울 정도로 「반성병」이 유행했었다。『천황은 상징일 뿐입니다. 기원절이니 천장절이니는 영영 잊어버리겠습니다.』 『무기는 다시 두 번 손에 쥐지 않겠습니다.』 『기미가요니 군가 따위를 우리 입으로 또 다시 부르다니오…….』 (중략) 전후戰後 17년, 이미 일본은 전후의 고난 속에서 허덕이던 그날의 일본이 아니다. 경제력의 부흥과 더불어 자신과 오만은 날로 조성되어 갈 뿐이다. 총리대신은 국회 연설에서 「동아東亞의 미개국들을」하고 망언 소동을 일으켰다. 접기
P. 189~190 수백 년토록 얽히고설킨 일본과의 그릇된 인연을 우리는 눈감아 흘려 버릴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숙원宿怨, 그 역사의 불행에 언제까지나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흐지부지 구채舊債(묵은 빚)를 탕감하는 것이 아니오, 민족적인 지각과 내일을 지향하는 건강한 생리에서 일본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인식을 길러야만 하겠다. 한 자리에 고인 물은 썩어도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낡은 민족 감정은 마치 흐르지 않는 물과도 같다. 그로 해서 일시의 쾌快(기쁨)를 맛볼 수는 있을망정, 결코 올바른 미래에의 성장을 거기서 바랄 수는 없다. 안이한 타협이나 실리적인 순응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고인 물에서 흘러가는 물로 우리들 자신이 탈피하고 전환해야만 할 때이다. 접기
P. 204 선천적인 체질 속에, 후천적인 체험 속에, 겹겹으로 사무친 이 일본에의 「미움」, 교양이나 양식으로 지워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뿌리 깊은 것이 우리들의 대일 감정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 위험한 하나의 함정이 있다. 일본을 욕하면 누구나가 「애국자」이다. 일본인의 따귀 한 대만 갈기면 누구나가 쉽사리 영웅이 될 수 있다. 거기 대해서 그것을 비난하고, 그릇된 일이라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슴속 깊이 간직할 우리들의 조국애, 「칼레의 시민」이 부럽지 않은 우리들의 조국을 향한 신앙이, 이렇게도 손쉽게, 이렇게도 안이하게 노출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과연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일까?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소운 (지은이)
“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 본문에서
김소운은 1908년 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교중(敎重)이었으나 광복 후에 소운(素雲)으로 개명했다. 진주 재무서 주사였던 아버지 김옥현(金玉顯)은 1909년 의병들에게 친일파로 몰려 피살된다. 어머니는 박덕수(朴德水)는 1912년 재혼해서 러시아로 떠났다. 양친을 잃고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들과 생활하며 진해, 김해, 목포 등으로 계속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16년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홀로 평안남도 진남포로 가서 2개월간 체류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절영도소년단 활동이 문제가 되어 옥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듬해 사촌 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동경 개성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923년 9월 동경대지진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오사카 숙부댁에서 약 반년을 지내다 한국에 돌아왔다. 다음 해 상경하여 오상순, 김범부, 조명희, 변영로 등의 문학인들과 교류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 식민지와 제국을 여러 차례 왕복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김소운은 한국문학을 번역해서 일본에 소개하며 한국인의 문학 정신을 널리 알렸다. 1926년 동경에서 교포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채집한 구전민요를 일본의 시 잡지 『지상낙원』에 연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3년 일본 출판사에서 『언문조선구전민요집』을 발간했다. 3천 수가 넘는 구전민요가 실린 700여 쪽짜리 순 한글책이었다. 또한 3년여의 편집과 번역 끝에 1976년 『현대한국문학선집』을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편찬했다.
호는 삼오당(三誤堂)이며 한국수필사에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수필가 중 한사람으로 꼽혔다. 저자는 삼오당의 뜻을 익살스럽게 밝혔다. “첫째로 허다한 나라를 두고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제1의 과오이고, 인간의 운명이니 감정에 관련된 문필작업 같은 이런 고생길을 택한 것, 이것이 둘째 과오. 30전후에 죽어서 애석하다는 소리나 들어볼 것이지 죽지 않고 살아 이게 무슨 과오일까 보냐?”
1952년 베니스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할 정도로 국내 문단내 입지가 높았다. 『가난한 날의 행복은』 7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목근통신』은 대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원작보다 좋은 일본어 번역 실력 덕분에 1977년 한국번역문학상을,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향토와 조국의 문화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을 글을 쓴 김소운. 근엄하면서도 격정적인 성격으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모순과 상처투성이인 인간을 그려내며 성찰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1981년 11월 향년 74세에 타계했다. 접기
최근작 : <목근통신 木槿通信>,<[큰글씨책] 김소운 수필선집>,<김소운 수필선집> … 총 1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70년전에 띄운 편지
한·일 젊은이들에게 배달되다
일본서 활짝 핀 무궁화
목근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가 일본에서 살던 집 뜰에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더 잘하는 조선인'으로 일본 문단에서 활동한 김소운. 일본과 조선의 본질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연재를 시작한 당시 그 반향은 생각보다 커서 가는 곳곳마다 화제가 되었다. 작가 김소운의 회상에 따르면 ‘어느 다방에서 한 중년 손님은 소리 내어 읽다가 목이 메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편지는 점잖은 말투로 일본의 민낯을 매섭게 꼬집는다. 돌고 돌아 보낸 이에게 되돌아오는 선물(오미야게)에서 드러나는 일본 사회의 허위의식. 강한 자에 대해서는 허리를 굽히고, 약한 자에게는 까다롭고 오만한 사회 통칙. 역경에는 풀이 죽고 순경에는 안하무인을 일삼는 양면성. 이는 70년이 흐른 지금 일본 우익 보수의 태도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과거에 얽매인 패착 말아야
일본과 지리적으로 붙어 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 비행기로 2시간 남짓이면 서로 수도권에 닿는 부담 없는 이웃 나라다. 코로나19 이전 몇 년간 일본 내 관광객 1위는 한국인 차지였다. 코로나19로 실내에 머무는 날이 많았던 일본 넷플릭스의 2020년 연간 시청률 톱10은 절반이 한국 드라마였다. 한국인 역시 일본 문화를 다양하게 즐긴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한국 번화가에는 일본 에도 시대풍 선술집이 즐비하다.
40년 전 일본문화원 개설을 앞두고 떠들썩한 반대에 휩싸였던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민간의 교류는 이처럼 깊고 넓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다. 2019년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수출규제 조치를 했다. 불화수소가 북한에 유입된다는 명분이었지만,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양국은 혐한과 반일을 외치며 서로 한 걸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에 걸쳐 켜켜이 쌓인 감정을 하루아침에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 세계가 초유의 재난을 겪는 지금,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같이 구렁텅이로 빠지는 과오는 저지르는 건 아닐지 돌아봐야 한다.
“후진국 콤플렉스 벗어나라”
해방 이후 한국은 꾸준히 일본과의 격차를 줄여왔다. 최근 들어서는 일본을 능가하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7년에는 한국의 1인당 GDP(구매력 기준)는 4만1001달러로 일본(4만885달러)을 추월했다. 2020년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 S&P,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일본보다 높게 평가했다. 작가의 바람대로 한국은 다른 민족과 나라에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는’ 나라로 성장했다. 자동차, 전자 등 양국의 주요 산업은 경쟁 관계면서 상호 협력이 필요한 관계가 됐다.
저자는 70년 대가 한일 간에 개재한 갖가지 불균형, 불협화음을 시정하고 조절할 최후의 기회라고 했다. 후진국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 있는 민족 긍지로 이웃 나라의 번영과 성장에 축복을 보내는 아량을 가져 보자고 제안했다. 지금의 한국은 후진국도 아니요,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다. 명역력明歷歷 노당당露堂堂하게 큰길로 걸어갈 때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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