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9

Minhee Park 1968년 오늘 린자오가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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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오늘 린자오가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첸리췬 선생의 책 <망각을 거부하라>에서 린자오를 처음 만났다. 그는 1932년 펑린자오라는 이름으로 쑤저우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나 16살에 지하공산당 조직에 가담했고 린자오라는 필명으로 국민당 정부의 부패를 비난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혁명 뒤에도 공산당의 열성당원으로서 토지개혁에서 지주들을 처벌하는 활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마오쩌둥을 “아버지”로 여겼다. 하지만 혁명의 이름으로 경직되어가는 체재, 당 지도부가 누리는 특권에 점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백화제방 운동이 일어나자 베이징대 대학생이던 그는 “공산당이 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논의하고 있고, 우리 모두가 감격하고 기대하고 있다”고 기대를 하며 참여했다. 마오가 백화제방에서 터져나온 당의 잘못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반우파투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이 숨죽이고 숨어들 때 린자오는 오히려 더 분명하게 당의 비민주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나의 입장은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조화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처럼 국민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이 꼭 이렇게 해야 한다면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이런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과오를 인정하라는 압박이 거세졌는데도 린자오는 굴복하지 않았고 우익으로 몰려 58년부터 68년까지 10년 동안 수용소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피로 마오쩌둥의 독재, 대약진으로 수천만명의 죽음을 초래한 경직된 체제의 문제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썼다. 나중에는 간수가 몰래 준 잉크로 쓰기도 했으나 실제로 자신의 피를 흘려 많은 글을 썼다.

1968년 4월29일 그가 총살당한 이틀 뒤인 5월1일. 공안이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찾아왔다. “당신이 린자오의 어머니인가? 당신 딸이 처형됐다. 총알 값으로 5펀을 내라.” 어머니가 혼비백산해 말을 못하자 공안은 다시 재촉했다. “빨리 5펀을 내라 당신 딸이 총살당했다” 린자오는 36살이었다.
 
린자오를 어떤 초인적인 `영웅’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연이 잊혀지지 않고, 그의 혈서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사연들과 생각들을 남기려 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중국을 볼때 이런 사람들을 봐야 한다. 함께 베이징대에 다니던 시절 린자오와 반우파 투쟁의 학생들의 희생을 보았고 그들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한평생 연구를 하고 청년들과 함께 중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 첸리췬 선생 같은 사람들, 1990년대에 우연히 린자오의 사연을 알게 된 뒤 포기하지 않고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린자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 <신화통신>의 해직 언론인 후제 같은 사람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술을 해주고 감옥에서 몰래 잉크를 갖다주고, 린자오가 남긴 혈서를 몰래 가족들에게 전해준 사람들, 린자오의 친구들이 있었다.
특파원으로 처음 중국을 취재할 때 유명한 추이즈위안, 왕후이를 비롯한 신좌파 지식인들이나 우여우즈샹(유토피아) 같은 유명한 좌파 단체들에 더 많은 기대를 했다. 중국에서 더 불온시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중국을 바꿀 힘이 미약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좌우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섣부른 것이었다고 깨닫는다. 유명한 신좌파 학자들 중에서는 침묵하거나 권력 옹호로 나아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학생, 노동자들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좌파 운동, 노동운동을 계속해온 사람들이 많다. 린자오와 반우파 투쟁의 희생자들, 톈안먼의 학생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한평생 연구하고 운동하신 첸리췬 선생처럼 `민주적 사회주의’를 품은, 좌파들로부터 `우파’로 불리는 사람들도 있다. 친후이처럼 자유주의와 평등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고 `전제주의의 문제’와 맞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이름이 유명하지 않아도, 린자오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애쓴 이름 없는 사람들, 유명하지 않고, 좌-우도 중요하지 않지만, 조금 더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사회를 바라고 노력하는 중국인들이 계속 있었다.
-린자오의 54주기를 맞아, 중국의 좌-우, 혐중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서없이 써보았습니다. 최근 상하이의 상황 등을 보면서 얼마 전부터 린자오 생각이 나던 참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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