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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아시아] 문명의 두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을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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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아시아] 문명의 두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을 다시 읽다
인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첫 걸음
기자명원대신문
입력 2022.04.13
인류세의 도래와 문명의 전환
최근 들어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유행으로 인류의 문명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지구의 종말과 인류의 미래를 다룬 각종 SF 영화나 소설에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종래의 문명론이 인간중심적이고 국가중심적이었다는 반성과 함께 지구와 만물을 배려하는 생태문명과 지구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활발하다. 특히 2000년에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 의해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이 널리 알려진 이래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제 인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의 생존 조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한국은 지난 100년 동안 어떤 문명을 지향해 왔으며, 앞으로의 100년은 어떤 문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1991년에 『녹색평론』을 창간한 김종철의 저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근대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앞으로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문명이란 산업문명을 말한다.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산업문명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인간의 생존조건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의 탈아입구와 한국의 자기모순
아시아에서 서구적 산업문명의 모델을 맨 처음 도입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면서 중국적인 '도학'에서 유럽적인 '과학'으로의 전환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힘으로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여론을 주도한 이가 일본의 10,000엔 권 지폐에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후쿠자와는 1875년에 쓴 『문명론의 개략』과 1882년에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유럽을 문명의 나라로 자리매김하면서 야만스런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문명개화론'과 '조선개혁론'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유럽은 문명의 이상으로 설정되고 조선은 야만의 나라로 전락한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 하면 곧장 '선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한국인의 자기 비하는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증폭되었다. 우리는 근대화에 뒤졌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 아픔과 상처가 너무나도 커서 자기 전통을 버리고 일본과 같은 근대화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화에 성공하면 식민지 지배를 해도 좋은 것일까? 우리가 일본에 앞서 근대화를 선취했다면 우리도 일본을 식민지 지배해야 했을까? 우리는 한편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선취한 근대화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일본의 근대화에는 조선에 대한 비하와 폄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화란 자기 모순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본과는 '다른' 식의 근대를 독자적으로 설정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오늘날 인류가 과도한 산업문명으로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후쿠자와 류의 문명론이 주범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식의 문명론은 이제는 유효기간이 끝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후쿠자와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후쿠자와는 '문명개화론자'로서 찬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류 새 시대의 반면교사로서 다시 읽혀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근대를 다시 보고 인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후쿠자와의 물질문명론과 조선개혁론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문명론의 개략』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각각 문명, 반개화(半開化), 야만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1828년에 프랑수아 기조가 쓴 『유럽 문명의 역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 문명의 역사』에는 문명과 야만의 기준을 '그리스도교'로 잡고 있다. 즉 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문명의 정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의 『문명론의 개략』에는 그리스도교나 신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인간 지혜가 발달한 상태"를 문명이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지혜'란 무엇일까?
그것은 후쿠자와의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 알 수 있다: "하나님[上帝]의 은택이 아무리 넓고 크다고 한들 옷은 산에서 생기지 않고 음식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세상의 문명이 차츰 나아지면 그 편리함은 단지 의복과 음식뿐만이 아니라 증기와 전신의 이로움도 있다. 이 모두가 지혜의 선물이 아닌 것은 없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인간의 편리를 위해 문명의 이기(利器)를 발명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문명론은 '물질문명론' 내지는 '공리적 문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자연은 인간의 노예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해서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이렇게 해서 얻은 문명의 힘으로 후쿠자와는 조선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조선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이 개혁론은 '무력'도 용인하는 개혁론이다. 여기에서 문명과 폭력은 대치되지 않는다. 문명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후쿠자와의 조선개혁론이 있은 지 10여 년이 채 되지 않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을 감행하였다. 1948년에 전범재판을 참관한 오사라기 지로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들으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일본군의 잔학행위 대목이었다. 우리는 일본인이 문명인이라고 우쭐해 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신뢰해 온 일본 문명의 힘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이것은 후쿠자와의 문명론에 나타난 두 얼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숨겨진 문명이라는 탈을 쓴 야만이다. 그 야만은 인간에 한정되지 않고 자연으로 확장되고 있다. 후쿠자와와 동시대의 다나카 쇼조(田中正造)가 폭력을 지양하는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하면서 "참된 문명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자연을 황폐화하지 않는다"는 생태문명론을 주창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150년 동안 우리는 후쿠자와 식의 문명개화론을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인류세의 도래와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다나카 쇼조와 같은 생태문명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조성환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원대신문 webmaster@w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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