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궁금한 것 질문하세요! ③ 조선시대 개화파-척사파
중앙일보
업데이트 2011.09.21 22:03
Q. 개항 후 조선사회는 개화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고 배웠습니다. 개화파와 반대파의 주장은 무엇이었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났나요?
A. 개항 후 조선은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됩니다. 국토·이권 등에 대한 외세의 위협이 더 노골화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외국의 통상 수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됐고 조선 내에서도 점차 개화와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1>초기개화파 중심 인물
①박규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개화통상론을 주장
②오경석: 북경을 왕래하면서 새로운 서적을 조선에 소개
③유홍기: 개화 사상의 확산에 주력
<2>온건개화파의 주장
①동도서기론: 서양의 기술·문명은 받아들이되 종교·사상은 우리 전통을 따르자.
②청에 종속은 인정하고 청의 양무 운동을 모델로 한 점진적인 개혁을 이루자.
③개화를 너무 서두르면 반대 세력의 반발이 거세질지도 모른다.
<3>급진개화파의 주장
①빠른 개혁만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②개혁속도가 너무 늦으면 제국주의 열강국가들에게 뒤처질 수 밖에 없다.
③청으로부터 독립하고 입헌 군주정을 세우자.
☞애국계몽운동에 토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운동의 기반을 조성했지만 일본의 침략을 인정해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위정척사운동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1>제1차 이항로 병인양요 당시 척화주전론(통상반대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하께서는 안으로는 사학(천주교)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바다를 건너오는 적(프랑스)을 정벌케 하소서.”
<2>제2차 최익현 강화도 조약 당시 왜양 일체론(개항 불가론)을 주장.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들은 물화 교역에 욕심을 낼 것입니다. 저들의 물화는 그 양이 무궁합니다. 반면 우리의 물화는 한정이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입니다.”
<3>제3차 이만손 정부 개화 정책 움직임에 영남 만인소(개화 반대론)를 올렸다. “러시아·미국·일본은 같은 오랑캐입니다. 만일 저마다 일본처럼 땅이나 물품을 요구 한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이를 막아내시겠습니까.”
<4>제4차 유인석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을미의병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참혹함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의병을 일으키고 이 뜻을 세상에 포고하노니, 어느 누가 애통하고 절박한 뜻이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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