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9

송필경 Lee Sanha. 제주 4.3에 대한 회고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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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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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 is with Lee Sanha.
제주 4.3에 대한 회고와 전망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우리 민족이 무언가 준비할 겨를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서양의 새로운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은 어떠한 정당성도 없이 우리 땅 한반도를 38선에서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자기들 군대를 남쪽과 북쪽에 각각 파견했다. 두 승전국이 동아시아에서 분단이 꼭 필요했다면 독일처럼 전쟁 범죄 국가인 일본을 그렇게 했어야 했다.
단군 이래 조선말까지 이어온 왕조 체제와 일제 식민체제와 전혀 다른 지배체제를 우리 민족은 맞닥뜨렸다. 우리 역사 잠시였지만 옛 중국 식민지배와 최근 일본 식민지배는 어쨌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던 같은 문화권의 지배체제였다.
서구 지배체제는 극히 일부 엘리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민중에게 생소한 체제였다. 전통이 단절하면서 일어난 급작스러운 변화에 민중은 그저 어리둥절 당황했다. 잠시 뒤 숨 돌리고 보니 668년 삼국통일 후 한 번도 갈라지지 않은 우리 땅을 미소 두 나라가 분단했다는 사실에 우리 민중은 당황을 넘어 분노에 이르렀다.
게다가 우리 땅에 들어온 소련군과 미군은 그 당시에는 아주 다르게 우리 민족을 대했다.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의 포고문 핵심은 이랬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이제) 자유국이다.”
이에 비해 미군 사령관 맥아더의 포고문 핵심은 이렇다.
“본관의 지휘 아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Occupy)'했다.” 
실제 미군은 맥아더 말처럼 남한을 점령해서 군사정부를 운영했다.
북쪽에서는 '나라를 일제에 바치고 굴종한 어버이 세대의 비겁을 경멸'하면서 항일 투쟁에 전념한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사분란하게 결집했다.
남쪽에서는 해방에 대한 나름의 열정을 가진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열정에다 뚜렷한 비전을 지닌 그룹들도 있었고, 단지 열정만을 지닌 그룹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에 대한 열정보다는 일제부역에 대한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하려는 세력이 몸을 움츠리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맥아더가 38선 남쪽 영토의 점령을 선언하면서 반공 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 친일 부역 세력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잽싸게 점령자 맥아더가 펼친 반공 우산으로 몰려갔다. 왜냐하면 맥아더의 관심은 오직 반공뿐이었고 과거의 친일부역 같은 민족적 비윤리성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일, 민족 반역자, 일제 협력자들은 친미라는 이름을 덧붙여 오늘날까지 완고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승만의 친미반공 세력은 분단에 화를 내는 인물이라면 점령 사령관 맥아더의 묵인 아래 누구를 막론하고 미국의 반공 노선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폭행하거나 암살하여 제거했다.
바로 이 점이 남쪽의 고질적인 비극이었다. 다음 예에서 비극의 실체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김원봉은 항일 투쟁에서 전설을 만들었던 ‘의열단’ 사령관이었다.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일제 경찰의 악질 하수인 노릇하다가 맥아더 군정 경찰에서 승승장구한 노덕술에게 잡혀가 뺨 맞고 고문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예가 달리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형님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는 일제 강점기에 대구경북 지역에서 이름 난 엘리트로서 항일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박상희는 미군정의 가혹한 착취에 항의한 1946년의 대구 10월 항쟁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총살당했다.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박정희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존경한 황태성은 목숨을 부지하여 월북했다. 박정희는 형의 죽음과 존경하는 형 친구의 월북에 큰 충격을 받고 군인 신분으로 남로당에 비밀리에 가입했다. 제주 4.3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가 진압을 거부하고 ‘여순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진압을 거부한 반란군에 대한 대대적인 좌익 세력 색출 과정에서 박정희가 군부 내 남로당원인 것이 탄로 났다. 일본 육사 출신 박정희도 이럴진대 남쪽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분노는 어떠했을까?
제주는 예로부터 설움의 섬이었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없고 돛단배만 있던 시절에는 조선 땅에서 유배길이 가장 먼 가혹한 곳이었다. 지금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관광지이지만, 논이 없고 밭만 있는 과거 환경에서는 먹기 힘든 항상 배고픈 땅이었다. 귤과 전복 같은 값어치 있는 특산물은 임금님 밥상에 올린다는 명목으로 심하게 착취당했다.
역사 이래 섬에 꽁꽁 갇혀 있었던 민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밥벌이하기 위해 제 발로 찾아 가기도 했다. 그들은 해방 후 고향 섬으로 대거 돌아왔다. 돌아온 자들은 일본에서 농사가 아니라 노동을 익힌 세력이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갖춘 세력들은 제주도가 더 이상 숙명적으로 순종하는 섬으로 되기를 거부했다. 제주는 해방의 열정이 남한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
돌아온 섬에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낯익은 일장기 대신 낯선 성조기가 펄럭였다. 그 당시 제주도 민중은 성조기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새로운 조국, 희망찬 조국’을 만들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세웠고 이를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했다.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를 마치고 해산하는 와중에 어린이가 경찰 기마의 말발굽에 채어 쓰러졌다. 경찰이 그냥 가려다가 화난 군중에 쫓기어 경찰서로 내달렸다. 군중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은 발포하여 6명을 사망하게 하고 8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이 제주 4.3의 진정한 불씨였다.
경찰은 우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발포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대신에 31절 행사 준비위원회 간부와 학생들을 잡아 들여 심하게 고문하였다. 그러자 3월 10일 공무원과 일부 경찰까지 가세한 총파업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미군정은 이 사태를 좌익 세력이 배후 조종했다고 단정했다. 미군정은 곧바로 제주도를 붉은 사상을 지닌 사람의 땅인 ‘붉은 섬(Red Island)"으로 간주했다. 그러고는 북한에서 쫓겨나 원한에 사무쳐 오직 반공만을 외치는 ’서북청년단(서청)‘을 대거 경찰 병력에 배치하여 손톱만한 불만이라도 내뱉는 제주도 민중에게 극악한 폭력을 휘둘렀다.
바로 이 시기에 대흉작까지 겹친 데다 미군정이 곡식을 강제 공출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다. 제주도는 불씨만 튀면 폭발할 화약고가 되었다.
1948년에 접어들자 미군정과 이승만은 분단을 고착화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강행했다.
'새로운 조국, 희망찬 조국'을 기대했던 젊은이들에게 분단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약 300명의 무리들은 한라산에서 “탄압이면 항쟁!,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란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알리는 봉화에 불씨를 던졌다.
미군정, 친일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은 무장단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토벌대를 만들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한계까지의 폭력을 행사했다. 토벌대는 빨갱이란 빈대를 잡기 위해  제주도란 초가삼간에 마구 태웠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남한에서 가장 가혹한 저주는 ‘빨갱이’이란 호칭이다. 남한에서 ‘빨갱이’는 불가촉천민을 의미했다. 이 ‘빨갱이’를 박멸하기 위해 저지른 극악무도한 폭력 행사를 '초토화 작전'이라 했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300명의 빨갱이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마을들을 통째 불태우며 마구 살해한 인원이 3만여 명이다. 
흰 눈이 쌓인 한라산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 추격의 총격에 붉은 피를 흰 눈에 뿌렸다. 
무장대가 출몰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남녀노소 마을 사람 모두 잡아서는 한 밤중에 검은 용암에 파도가 희게 부서지는 해변에 모아 놓고 마구 총질해서 고운 모래밭에 붉은 피를 뿌렸다. 
동굴에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가 피운 연기에 질식하거나, 토벌대가 동굴을 수색하기보다 큰 돌로 입구를 꽉 막아 검은 동굴에서 굶주리고 굶주려서 흰 뼈만 남긴 경우도 허다했다.
토벌대가 민가에 들러 남정네가 집에 없다면 도망간 거처를 대라고 여자를 죽을 때까지 팼다. 임신한 여자거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더라도 팼다. 심지어 겁탈하면서 팼다. 젊은 여자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제주 4.3 평화 공원>에 비설(飛雪)이란 조형물이 있다. 25살 엄마는 두 살 배기 딸을 안고  한 겨울에 토벌대에 쫓기다가 한라산 깊은 산속 흰 눈 위에서 죽었다. 휘몰아 친 눈에 파묻혀 꽁꽁 얼어 있다가 봄에 눈이 녹자 한 행인이 두 시신을 발견했다.
조형물에는 눈 위에서 무릎 꿇은 엄마는 딸을 가슴 깊이 꼭 안고 있다. 흰 눈 위에는 엄마의 흐느적거린 발자국이 찍혀 있다. 맨발이다. 찍힌 발자국엔 5개 발가락이 선명하다.
조형물이 완전 사실적인지 어느 정도 창작을 가미한 건지는 나는 모르지만, 조형물이 상징하는 그 이미지에서 제주 4.3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아픔이 응축해 있고, 내 능력으로써는 그 아픔을 글로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저명한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수용소의 사람)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란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 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 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 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프리모 레비가 <비설>이란 형상을 보았다면,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참상보다 더 극악한 이 참상에 대해 어떤 말을 남겼을까? 
제주 4.3의 역사에, 정말 다행히도, 참상의 진실을 담은 몇 권의 책을 용기 있는 작가가 세상에 내놓았다. 
8살 어린 나이에 4.3을 직접 겪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1978년 소설 <순이 삼촌>을 세상에 내놓았다. 
십년 뒤 1988년에 시인 이산하 선생은 분노의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해 갖은 핍박을 예상하며 통곡으로 쓴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시절 국가보안법은 펄펄 살아있었고, 그에 따른 혹독한 고문도 공공연했다. 나치가 사라진 해방한 공간에서 글을 쓴 프리모 레비와 달리, 우리의 두 분은 토벌대의 주체 그리고 그들과 긴밀히 연관한 인물의 권력이 펄펄 살아있을 때 그들의 코앞에 펼친 글이다. 토벌대의 후배 권력은 당연히 이 분들을 혹독하게 고문하고 나서 책을 불태웠다.
우리 역사에서 두 분의 용기와 희생으로 제주 4.3의 금기를 깨뜨리자 비로소 진실이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주 4.3의 진실을 밝혀내고 유족의 고통을 해결해야 할 주체는 권력을 쥔 정치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제주4.3에 대해 유감을 표시함으로써 그토록 깊숙이 잠겨있던 제주 4.3을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제주 4.3이 국가 권력의 범죄임을 자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으로 제주 4.3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2006년 위령제에 참석하여 희생자와 유족 도민에게 사과했다.
2014년에 박근혜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으나 9년 동안 이명박과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 특별한 언급 없이 침묵했다.
제주 4.3 70년 주년인 올해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그리고는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다짐했다.
긴 안목으로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는 전진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은 그동안 너무나 원통한 죽음에 대해 우리사회는 통곡조차 못하게 했다. 이제는 마음 놓고 통곡하시게 해 드려야 한다. 
위대한 혁명가로서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티(1853-1895)는 이런 말씀을 남겼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히 잠을 잘 권리가 없다.”
우리는 이런 좋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기억을 반복해야 한다. “저 피 끓었던 남도에서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라도 밝혀 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편히 잠을 잘 권리가 없다.”
역사 진실의 바퀴를 멈추거나 거꾸로 돌지 않게 해야 할 의무는 올바른 정치인을 선택해야 하는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몫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촛불로 확인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ON THI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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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un Lee
제주 4.3항쟁 70주년에 부쳐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제주도민들께 무릎꿇어 사죄드린다.
통한의 슬픔이 어찌 가시겠는가만 목포연동교회 평신도 개인 자격으로 용서를 구한다. 못난 시대를 원망하되 슬픔 거둬내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새 시대는 제발 이런 비극 없기를 그래서 우리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떨쳐 일어나기를 나의 하나님께 빌고 또 빈다.
이땅의 기독교는 썩어문드러졌다.
초기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와 평화와 평등과 호혜의 삶에 대해 전파하던 기능을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4.3항쟁 70주년이라는데 성찰의 사과성명 하나 내는 교회가 없다(혹시 있나?)
부활주일 나는 제주도의 한 교회에 참석했다. 일말의 기대를 안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발언 성명서 하나 없었다. 슬펐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미처 이를 공론화하지 못했다. 내 혼자 튀는놈 되기 싫었다.
한경직의 영락교회 서북청년단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사과하라.
이땅의 모든 기독교인들 제주도민들에게 무릎꿇고 사과하라.
나는 그것이 당신들이 믿는 예수님의 진정한 뜻이라 생각한다.
고치돈이 증언한 서청 출신 경찰 이윤도의 학살을 상고한다.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 강요하다 스스로 칼을 꺼내 한명씩 찌른다. 약 80여명이 희생된 이 자리에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엄마를 찔러 젖먹이가 버둥거리자 칼로 아기까지 찔러 위로 치켜올리며 위세를 과시했더라(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271쪽)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잔인한 광기로 몰아넣었는가. 무엇이 무고한 백성들을 총과 칼로 동굴의 추위로 죽도록 몰아세웠는가. 참담하다.
아직도 분단의식에 고착되어 때려잡자 김정은이라 외치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그러지마라. 슬픔과 광기는 우리가 안고 가자. 제주와 남한과 북한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남겨주어야하지 않겠느냐 이 썩어빠진 기성세대들아.
제발 어디 교회 하나만이라도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사죄의 성명서라도 내길 바란다. 부탁이다.
다시 한번 이름도 빛도없이 아무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제주도민들에게 무릎끓어 사죄드린다. 부디 새 시대 우리를 성찰하게 하는 에너지로 타올라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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