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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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베트남에 사죄해야 하는가?
1. 일본의 간토 대지진시 조선인 학살
일본의 역사 왜곡은 참으로 천박하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여 저질렀던 비인간적인 만행은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서 확실한 증거가 철철 넘쳐난다. 그럼에도 일본은 만행을 완강히 부인한다.
1923년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에 뒤이어 대화재가 발생했다. 도쿄 육군 피복창 자리의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지진 대피했다. 마침 여기에 스미다강 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 피난 보따리에 불씨가 붙자마자 불바다가 되어 약 4만 명이 불에 타 숨졌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일본은 이 재난으로 국가 위기에 직면했다. 지진 발생 다음날 일본정부는 시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해 민심을 극도로 불안하게 한 다음 그날 오후 6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국자들은 유언비어의 전파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 국민이 확신하게끔 ‘유언반’, ‘지휘반’, ‘실행반’ 같은 공작대를 조직하여 방화, 독물투입, 폭탄 투척 등의 테러행위를 감행하고는 마치 조선인들이 자행한 것처럼 조작했다. 일본 국민은 조선인 폭동설을 그대로 믿었고, 그 보복책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 수 천 명을 학살했다.
2. 미국의 노근리 학살, 미 라이 학살
노근리에서 미군의 학살 현장을 본 월북 작가 이태준이 로동신문 1950년 8월5일자에 김천발로 쓴 ‘전선으로’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의 로동신문 원본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
“패망 도주하면서 조선의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과 일반 인민들까지 참살하는 식인종 만풍은 괴뢰군경들에게만 있지 않았고 그들의 스승인 미국 놈들에게 있어 더 악질적이었다는 것이 놈들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통하여 자명하여졌거니와 영동군 한 곳에서만 보더라도 임계리와 주곡리에서 평화인민 2,000여명을 학살하고 달아났으며 황간에서는 기차 터널 속에 피난한 촌사람 백 여 명에게 굴 양쪽으로부터 박격포를 들어 쏘았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중상자 한 명과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젖먹이 하나 이외에는 모조리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고 죽은 사람들 속에는 나체로 놈들에게 능욕을 당한 처녀와 젖가슴에 탄환을 박은 시체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AP통신사의 종군기자 스윈톤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랑하는 부모님, 지금 깊은 밤의 차가운 천막 속입니다. 중공군이 예상한 반격을 전개할 것인가 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각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부모님께 편지 쓰는 좋은 기회입니다.…이 마지막 진격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우리 기총소사로 수 백 명의 피란민들이 죽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이입니다. 저들은 행길 옆에 기어가듯 죽어 넘어졌습니다. 비행기의 50mm 구경 기관총이 그들을 사격할 때 모친들은 한두 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아기들을 업고 안고 가고 있습니다. 아기들은 맞지 않고 모친의 잔등에서 떨어져 나가 길옆에서 얼어 죽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전쟁을 보았지만 이것은 가장 잔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우리 공군은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적이 피란민 행렬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적의 군인 하나 죽이는데 25명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할 만한 일입니까? 민간인을 적으로 만들어, 우리가 빨갱이들에게 손실을 입힘으로써 얻는 효과를 더욱 갉아먹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 견해로는 예스, 그러합니다.
1951년 1월30일”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3월16일 한 미군 부대가 미 라이(My Lai)마을의 양민 504명을 학살했다. 주민들은 마을회관 앞에 모이라는 지시에 순응했다가 쏟아지는 기관총 세례와 수류탄에 희생됐다. 학살극은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가 상부에 보고하는 바람에 4시간 만에 중단했다. 미군은 사건 직후 진상을 철저히 은폐했다.
현장 지휘관이었던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헬기와 포격으로 사망한 20~28구의 주검을 보았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이를 근거로 11보병여단장 오란 핸더슨 대령도 20명의 민간인을 실수로 숨지게 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몇 달 뒤, 학살에 참여했던 중대원들과 맥주를 마시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치를 떤 한 병사의 용기가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병사는 혼자 조사한 결과를 워싱턴의 고위 인사 30여명에게 편지를 보냈고, 결국 뉴욕타임스의 세이무어 허시 기자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군 수사대는 진상조사에 나서 30명을 주요 범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찰리 중대의 윌리엄 갤리 중위 한 사람만이 기소돼 22명의 양민을개인적으로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갤리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3일 만에 석방되고 그 뒤 10년형으로 감형됐다가 같은 해 닉슨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은 극히 불철저했다. 그러나 처벌자의 많고 적음과는 별개로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사건의 불법성을 명백하게 인정했다.
사건의 진상이 나름대로 밝혀져 이후 비슷한 사태를 방지하고 예방하는 역할을 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군이 앞으로도 전쟁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자국 군법에 따라 개별 병사를 처벌한 적은 있지만 국제법에 따라 미군 병사의 전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배상한 사례가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런 배상 요구를 미국 국익과 세계 전략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1998년 로마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을 때 가입하지 않았다. 노근리 문제는 미국의 이런 선례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3.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야만
주월 한국군 사령관들은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무고한 양민이 한 명이라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전체에 엄격하게 집행되는 원칙이며, 실제로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신조가 되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당시 주민들은 한국군들은 총 한방 소리만 들어도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사람들 90명을 죽인다고 주장했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 1928년~)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군은 단순히 화가 나서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촘스키는 한국군이 무고한 양민들을 인질로 삼아 전쟁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한국군 중에 저격을 당하거나 지뢰로 희생자가 생기면, 그 주변의 베트남 양민들을 대상으로 보복을 했으며, 그럼으로써 베트콩이 감히 한국군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면 베트콩이 무서워한 것은 한국군의 용맹성이 아니라 무고한 양민을 인질로 삼고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안전을 구하는 무서운 비겁성 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군은 지난 8년간 적 사살 4만1천462명, 포로 4천633명 등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측도 전사 3천844명의 피해를 봤다. 아군전사 대(對) 적 사살 비율은 1대11이다.”
제2대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이세호 중장은 철군이 완료된 1973년 3월15일 수원공항에서 열린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게릴라전에서 ‘1당10’의 전과를 올린 셈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과보고는 한국을 제외한 세계 어느 언론도 곧이 믿지 않았다. 1972년 10월9일 뉴욕타임스의 크레이그 휘트니 사이공 특파원은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열린 전황브리핑을 다녀온 뒤 “한국군은 민간인을 죽여 놓고 적을 사살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적었다. 미군이 철수하는 마당에 한국군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용맹성을 자랑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했다.
4. 야만의 역사에 대한 반성
베트남에서 저지른 우리의 만행을 심층 보도한 한겨레21이 1999년 우익단체에 치른 곤혹을 보면, 인류의 공분을 자아내는 만행을 은폐하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철없는 우익집단은 이처럼 우리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우리의 역사 인식도 일본의 극우 집단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겸손하게 생각해 보면서 남을 “지독한 놈”이라고 규정짓기 전에 내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가해 역사인 베트남 참전에 대하여 우리는 뼈아픈 사죄를 해야 한다. 독일은 제2차 대전 때 저지른 만행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독일은 나치스 찬양을 법으로 금하고 있다. 미국은 아직도 자신의 야만에 대하여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는 않지만 미국 내 양심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노암 촘스키 같은 양심적인 최고의 지성인들이 인류에 대하여 미국이 사죄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2차대전시 수십 개 나라에서 사용한 양의 3배 반의 포탄을 베트남이란 조그만 나라에 쏟아 붓는 순간에, 수많은 미 라이에서 노인과 어린이가 살해되고, 부녀자는 겁탈과 동시에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때, 워싱턴 광장에서는 봅 딜런, 존 바에즈 같은 대중 가수들이 리드하는 반전운동의 메아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그리하여 베트남 반전운동은 미국만 아니고, 세계 여러 나라가 전개했으며, 국제적인 연대로 강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미국 정부로 하여금 북폭 중지, 평화교섭 개시, 미군 철수, 전쟁 종결의 결단을 내리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그들의 양심세력에 의해 미국이 신봉하는 힘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었고, 미국 내 우익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한편 일본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실로 놀라운 발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모든 침략을 미화하고 학살을 전쟁의 속성이라고만 주장하고 나서니, 주변 국가로부터 외교적 분쟁은 물론 엄청난 물질적 부를 축적한 나라답지 않게 정신의 미숙함을 드러내어 그들 스스로 세계적인 웃음거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들 나라의 행태를 비교하여 보면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일본처럼 베트남의 참전을 미화하느냐, 아니면 서구처럼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야만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양심이 파국의 경계선상에서 그 방향을 달리 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명백한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자신 있는 부분만 담아서는 그토록 경멸하는 일본인들의 편협함에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다. 잘못은 분명 반성하고 사죄하여야 한다.
이번 진료단 참가를 통해서 진료가 가장 직접적인 사랑의 실천임을 다시 느꼈고,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땀으로 범벅이 된 동료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의 주된 목적은 부끄러운 역사에 사죄를 하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모색한다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학살의 현장을 살펴보고 피해자들과의 만남은 역사에 대한 무거운 의무를 가슴에 새기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2001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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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정 박사는 1999년 10월에 한겨레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명백한 실상을 공개했습니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는 이에 자극을 받아 2000년 3월 진료단을 조직하여 학살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2001년 3월 진료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윗글은 바로 그때 쓴 글입니다.
어제 문재인 대통령께서 베트남에 방문하셔, 이제까지 우리 대통령으로서는 한 발언으로는 가장 수위가 높은 ‘유감’을 베트남 측에 표시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는 베트남을 방문했어도 초보적인 사과 발언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처한 우리 관료 사회 조건의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바람직한 정치로 앞으로 더욱 진보적인 정부를 들어서게 하여, 베트남에 우리도 독일식 사죄를 할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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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호찌민 영묘에 헌화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1968년 하미 마을 학살 때 용케 살아남았지만 발목을 잃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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