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거기 서!”

간토대지진이 도쿄를 강타한 다음날인 1923년 9월2일 와세다대 영문과 학생이었던 쓰보이 시게지(1897~1975)는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학 근처 하숙촌인 신주쿠 우시고메벤텐초에 자리한 친구 집을 찾았다. 그곳까지 지진을 틈타 조선인들이 난동을 피운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쓰보이는 하숙집에서 나와 대혼란에 빠진 도쿄의 거리를 걸었다. 지진의 참혹함과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내뿜는 살기가 가득했다. 다리를 건너는데 그 앞에 설치된 계엄둔소에서 한 병사가 일행을 불러 세웠다.

“이봐! 거기 서, 네놈 센진이지?”

“아니요, 일본인입니다. 일본인입니다.”

일본의 군경과 자경단이 ‘우물에 독을 타는’ 조선인과 선량한 내지인(일본인)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발음’이었다. 피난길에 오른 쓰보이가 탄 기차가 한 작은 역에 멈추자 총을 멘 병사가 올라타 한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주고엔 고주센(15엔50전)이라고 해봐.”

이날의 살벌한 광경에 대해 쓰보이는 25년 뒤인 1948년 발표한 장시 ‘주고엔 고주센’에서 그 사내가 “조선인이었다면// 그래서 ‘주고엔 고주센’을/ ‘추코엔 코추센’이라고 발음했다면/ 그는 그곳에서 끌어내려졌을 것이다”라며 “나라를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 나는 그 수를 셀 수 없구나”라며 슬퍼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이어지는 “일제시대 국적은 일본” 논란을 들으면서 가슴을 친다. 일본이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병합하며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한다고 했지만, 얄팍한 기만에 불과했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은 침략과 압제의 상징일 뿐이었다. 조선엔 ‘내지’와 달리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쓰이는 법률도 달랐다. 일본은 ‘내지호적’과 ‘조선호적’을 철저히 구분해 둘 사이의 이동을 금했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여전히 외국인이었으며, 지진 같은 위기가 닥치면 제거해야 할 차별·배제·편견의 대상일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일제가 망하는 순간까지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일제의 식민지배는 애초부터 불법·무효였다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는 이가 독립기념관장이 됐고, 또 장관이 됐다.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팩트’에 충실할 수 있어 그대들은 행복한가. 김형석과 김문수는 ‘주고엔 고주센’은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가.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