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5

일제의 조선침략사 한국인의 민족혼 한국사 말살 정책

일제의 조선침략사 한국인의 민족혼 한국사 말살 정책


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일제의 조선침략사 한국인의 민족혼 한국사 말살 정책 by 도생(道生) 2021. 5. 15.


'임나일본부와 '정한론'을 시작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일제의 조선침략사
일본과 한국의 고대 역사를 조작해 한국인의 민족혼, 한국사 말살 정책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는 국가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무장한 일본군을 데리고 천인공노할 을사늑약 만행을 저지릅니다. 당시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친일파 을사오적은 서명했지만,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옥새를 찍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특명전권대사 이등박문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히지 않은 외교문서를 가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박탈합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잃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침략사의 시작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심혈을 기울인 정책은 한국인의 민족혼인 한국사를 조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일본사를 조작한 후 한국사 말살 작업에 들어간 일제 관변사학자들이 역사 왜곡 조작에 나섭니다.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을 영구적으로 식민지배하기 위한 식민사관 마스터플랜을 수립합니다.

















고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소위 '정한론'을 주장한 나카 미치요는 일제의 역사교과서 체제를 '일본사'와 '동양사'와 '세계사' 체제로 만들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합니다. 나카 미치요의 제안은 한국인의 민족혼인 한국사를 '일본사'에 넣는 것입니다.





일제는 1902년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집필지침을 내리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침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자 나카 미치요가 주장한 것은 일본사에 속한 한국사입니다. 조선 침략의 사전 정지작업을 끝낸 일제는 한국사 말살 정책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불법적인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1906년 2월 조선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혹자는 대한제국은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의 국권을 강탈당했기 때문에 1906년 설치된 일제의 조선통감부가 조선 침략의 교두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 알려져 있듯이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대한제국 황제의 통치권을 빼앗고 내정을 장악하여 실질적으로 식민지배했습니다.

















조선 침략에 앞장선 국가와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운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이 됩니다. 1906년 8월 공포한 '보통학교령'으로 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뀌게 됩니다. 일제가 보통학교 교과를 통합하면서 우리 민족혼을 일깨워주던 한국사 역사교과서 내용이 대폭 축소됩니다. 이어서 공포된 '사범학교령'과 '외국어학교령'과 '고등학교령' 등 기존 교육관제를 폐지하고 일제가 준비한 학제체제로 개편됩니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에서 편찬된 국정교과서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은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할 정도로 역사 왜곡이 심각해져 갔습니다. 1907년 '신문지법'을 공포하여 신문과 잡지까지 사전검열 및 허가를 받도록 통제했고,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신설 사립학교와 기존 사립학교는 학부의 인가를 받도록 합니다.



1908년 공포한 '교과서용도서검정규정'과 '학부편찬교과용도서규정'으로 말미암아 일부 사립학교를 제외한 보통학교는 일제 식민사학자가 주도하여 만든 교과서를 배우게 됩니다. 국권침탈이 이루어지기 전이었지만, 일제가 치밀하게 준비한 식민지 교육정책은 설계한 그대로 궤도에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대한제국 학부대신이 '허가'와 '불허'에 대한 권한이지만,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혼인 한국사를 말살하는 식민지 교육정책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조선통감부가 대한제국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과서용도서검정규정'은 한국인이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조선통감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입니다.







일제는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관변사학자들을 내세워 일본사와 한국사와 중국사를 왜곡 조작한 가짜이론인 식민사학을 뿌리내리면서 대한제국의 학제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교육내용을 서서히 바꾸는 식민지 교육정책을 실시합니다. 학제 개편보다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은 한국인의 역사, 즉 우리의 민족혼인 한국사를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한국사 말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인이 올바른 역사와 정신문화를 알게 되면 민족혼을 되살아나 무장 독립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들처럼 저항하면 식민지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면 죽어버리듯 한국인의 역사와 민족의 뿌리를 잘라내서 충직한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일제의 조선침략사는 아주 치밀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한국의 성인들은 총칼로 위협하고 고문해 어느 정도는 친일파로 전향시킬 수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공개적으로 성인처럼 막대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고대 한국을 지배한 나라이며 근대화시켜준 고마운 나라라는 동화정책으로 한국인을 어려서부터 식민지 교육을 받게 하여 서서히 세뇌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 내용은 일제가 만든 식민주의 역사관입니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미국편 3, 4, 5회>

https://www.youtube.com/watch?v=dX1KpgNUrXs&list=PLGD5OCKBh-RP7cx4SWxNapepRBZalI_LM&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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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辺健太郎『社会主義運動半生記』を読む

石川源嗣のコラム :山辺健太郎『社会主義運動半生記』を読む

東部労組の石川です。 東部労組機関紙2016年3月号コラム<二言三言>に下記の文章を掲載しました。


山辺健太郎『社会主義運動半生記』を読む  最近出版された中塚明編著『歴史家山辺健太郎と現代』に触発されて、40年前に山辺健 太郎自身が語った『社会主義運動半生記』(岩波新書)を読んだ。  山辺健太郎といっても、いまではほとんどの方はご存じないと思うが、みすず書房の「現 代史資料・社会主義運動」、岩波新書の「日韓併合小史」、「日本統治下の朝鮮」などの著 作で、後世に貴重な遺産を残した歴史家として高名である。  彼は戦後、「朝鮮侵略の問題を抜きにしては、日本の近代史はわからない」と近代朝鮮史 の研究に専念した。私も会ったことがあるが、無精髭(ぶしょうひげ)とはだしに下駄(げた) 履き、風呂敷包みがトレードマークであった。  しかし彼は単なる学者ではない。戦前、戦中の労働組合運動、社会主義運動を闘い抜いた。 その前半生を記したのがこの『社会主義運動半生記』である。  小学校卒で、丸善大阪の小僧、足袋(たび)工場の職人をやりながら、1921(大正10)年 の第1回大阪メーデーに16歳で参加している。日本労働組合評議会(略称は評議会)ができて、 1925年、20歳でその大阪一般労働組合の専従になった。組合員は900人近かったという。  翌年、評議会傘下の浜松合同労働組合が組織した浜松日本楽器争議に参加、争議日報を担 当した。105日間のストライキという大争議を最後まで1000人近い組合員が闘ったが、解雇 350名、解雇手当3万円という調停で労働者側の敗北に終わった。しかし争議は昭和恐慌期直 前の労働運動の高まりを示すものであった。  その後、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略称は全協)での闘いに続いていく。  この本を読んで、戦前戦中の山辺健太郎らの闘いから学ぶ点はなんだろうか。  第一は、限りなき底抜けの楽天主義と闘いの持続。権力の度重なる弾圧、逮捕、投獄、そし て裏切りに対しては、非転向で闘った。楽天主義でなきゃやっていけないか。この本にも出て きて、前に言及したことのある荒畑寒村と共通する点である。  第二に、評議会結成時の分裂主義、セクト主義への反省と戒め。万難を排しての強大な労働 者の統一戦線の追求は現在も同じだ。  第三は、「法律的救済を求め」ず、実力闘争、大衆闘争を基礎とする思想。  今の運動と同じような似たことをやっているが、運動の質を考えると、戦前戦中の方がある 面でははるかに上のような気がす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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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toshi Takenaka's post 20240201


Hidetoshi Taken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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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辺健太郎(1905-77)の『社会主義運動半生記』(岩波新書1976)を再読中。山辺の1919年に丸善大阪店に勤めた時の記述がイキイキしていい。その中に、新潮社からは四六判フランス綴じの有島武郎『或る女』が出ていたという記述がある。これは新潮社はおそらく記憶違い。『或る女』は、1919年3月『有島武郎著作集』第8集として叢文閣 より前編が刊行、続いて後編が同年6月刊行の第9集として刊行されている。
 ただこの記憶違いもやむを得ない。それは、『有島武郎著作集』は第5集までは新潮社から刊行されていて、第6集から叢文閣からの出版になったからである。新潮社の佐藤義亮「出版おもひ出話」には次のようにある。
《『有島武郎著作集』と名づけ、第一編『死』(大正六年十月)をはじめ、第二編『宣告』、第三編『カインの末裔』以下、隔月一冊ぐらゐ出して行つた。非常の好評、みな忽ち何十版といふ有様だつた。然るに七年の六月に、有島氏の友人某氏が出版を始めることになつたから著作集を譲つてくれといふ申出でに接した。そこで私が有島に会つて、新潮社に何か不備な点があるかと聞くと、何も無い。只友人の為めに枉げて承諾を願ふばかりだと言はれる。》
 このような経緯で『有島武郎著作集』の版元が変わったのであり、装幀のスタイルも踏襲されているので、丸善店員たる山辺が間違うのも理由がある。
それにしても、『有島武郎著作集』はフランス綴じ=アンカットの装幀だったのか。現物にあたって確認したい。
See translation



Shigeru Umeda

非常に興味深いご指摘です。
「その中に、新潮社からは四六判フランス綴じの有島武郎『或る女』が出ていたという記述がある。これはおそらく記憶違い。」というのは、版元に関する記憶違いのことだと思いますが、私は「四六判フランス綴じの有島武郎『或る女』」というところに反応してしまいました。その後紆余曲折して、有島武郎の個人雑誌『泉』の最後となった号に広告された沼田流人の『血の呻き』が三方アンカット版で出版されていたことを竹中さんとご一緒に北海道文学館で確認できその意味するところを竹中さんに教えていただいたときの驚きと連動して、この二つのご指摘の間に何か関連性はあるのだろうか、と、関心が湧き出しています。
何かお分かりのことがあれば、ご教示を。



Hidetoshi Takenaka

梅田 滋 さん 拙文を「これはおそらく新潮社は記憶違い」に訂正します。
『有島武郎著作集 或る女』初版の書影でも確認しましたが、山辺がフランス綴じ=アンカットと言っているのは正しいです。つまり、いずれも叢文閣から刊行された『有島武郎著作集』と沼田流水『血の呻き』は、造本においてフランス綴じ=アンカット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このことが何を示唆するのか。それを知るためには、叢文閣から刊行された当時のほかの本の現物を確認する必要がありますね。



Shigeru Umeda

ご指摘のこと、ますます興味が深まりました。この謎解きにワクワクします。何か分かりましたら、またぜひご教示ください。お願いばかりで、申し訳ありません。




Hidetoshi Takenaka

梅田 滋 さん 折口信夫の詩に「遠野物語」があります。その一節に《末ずゑはぺいじも截らず/…/指もて我は截りつゝ》とあるところを見ると、柳田國男『遠野物語』1910年版はアンカットの造本だったことが分かります。





Shigeru Umeda

アンカット版はカット版と比べてコストがかかるとお聞きしました。版元あるいは著者がなんらかの強い想いがある場合にアンカット造本になるケースが多いのかな、と想像しますが、他にどのような狙いや位置付けの場合にアンカット造本になっているのか、お分かりになる範囲で結構ですので、教えていただけますとありがたいです。


Hidetoshi Takenaka

梅田 滋 さん 西野嘉章『新版 装釘考 (平凡社ライブラリー741)』で触れていたところがあったと記憶していますが、今、手元に置いていなくて、まずは探索の上、お知らせします。


Shigeru Umeda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楽しみにいたします。
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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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 평생 한국 근대사 연구한 일본인 - 야마베 겐타로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 평생 한국 근대사 연구한 일본인 - 오마이뉴스

연재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 21화
21.08.08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도서관의 기인,  ①야마베 겐타로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세 사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가 좋은 놈, 나쁜 놈이고, 이상한 놈인지 따져보는 재미도 있지만, 영화 제목처럼 세상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영화 속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어떤 사람일까?

야마베 겐타로는 1905년 5월 20일 도쿄시 혼고구(本鄕區) 다이마치(台町) 51번지에서 태어났다. 1912년 규슈(九州) 벳푸(別府)에서 신조(尋常)소학교를 졸업한 야마베는, 1919년 마루젠(丸善) 오사카 지점에서 견습 사환으로 일했다. 마루젠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영어와 한문, 독일어를 배웠다.

마루젠에서 시작한 사회생활


▲1910년 무렵 마루젠츠타야, 키노쿠니야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서점이다. 마루젠(丸善)은 1869년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하야시 유데키(早矢仕有的)다. 2015년 준쿠도서점과 합병하여, 현재는 ‘마루젠준쿠도서점’이 되었다. 마루젠은 야마베 겐타로의 첫 직장이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마루젠에서 1년 반 직원으로 일한 후, 야마베는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서점을 그만뒀다. 1920년 그는 양말(버선)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21년 5월 1일 오사카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에 야마베가 참여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작은 틈도 아껴서 공부했다"라고 할 만큼, 책과 사회주의 잡지를 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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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부터는 고이와이 기요시(小岩井淨)가 운영한 자유법률상담소에서 일했다. 고이와이 법률상담소는 당시 좌익의 거점 같은 곳이었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야마베는 월급이 생기면, 사회과학 및 사회주의 서적을 구입해 읽으며, 공산당과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야마베는 1920년대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사회주의 문헌 대부분을 읽었다. 사회주의 문헌을 '독파'한 그를 두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비롯한 일본 사회주의 이론가 사이에 '천재가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스물한 살이었던 1925년, 야마베는 일본 노동조합평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야마베는 '지도부'로, 일본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1926년에는 하마마츠(浜松) 일본악기 쟁의에 참여했다. 오사카에서 공산청년동맹 재건 운동을 벌이던 그는, 1929년 4.16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야마베는 복역 중 전향을 거부하고, 1933년 12월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다시 노동조합 운동을 벌인 그는, 194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도쿄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 안에 있는 예방 구금소에 갇힌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야마베는 일본 패전으로부터 두 달 후인 1945년 10월 10일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야마베는 왜 '전향'하지 않았을까? 일본 역사 연구자인 기쿠치 마사노리(菊地昌典)가 야마베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이 질문에 야마베는 이렇게 내뱉었다.

"그건 성격이야. 타고난 성격이지. 이론 따위가 아니야. '이 빌어먹을' 하는 근성이 없으면 안 돼."

타고난 반항 기질이 그를 '비전향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야마베는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가가 된 이유를 <사회주의 운동 반생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타고난 반골과 시대 풍조 탓에 사회주의의 길로 내달렸다."

일본인인 그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


▲도요타마 형무소 정문도요타마 형무소는 김지섭(金祉燮), 박열(朴烈), 이강훈(李康勳) 같은 조선 독립운동가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관련자가 옥고를 치른 곳이다. 현재 일본 교정(矯正)연구소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정문과 담장 일부가 남아 있다. 야마베 겐타로는 194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이곳에 투옥되어, 1945년 10월 출소했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야마베는 소문난 '골통'이었다. 여름에는 죄수복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지냈고,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아 간수들이 직접 나서 청소를 해줄 정도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야마베는, 김천해(金天海)라는 재일 조선인을 만난다. 이 만남은 야마베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김천해를 만난 것이, 나중에 나의 한국사 연구의 원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자본주의 연구에 있어서 식민지 수탈을 빼놓을 수는 없지요."

야마베의 표현처럼, 김천해는 '재일 조선인으로 전향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마베는 감옥에서 극도로 쇠약해진 김천해가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부축해주고, 용변을 본 다음에는 그의 엉덩이를 직접 닦아 주기도 했다. 감옥에서 우유를 따로 받아, 김천해에게 먹이기도 했다. 민족과 국적을 떠나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야마베와 김천해는 '동지'였다.

1898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김천해는, 경성 중앙학림을 졸업했다. 고향에서 야학과 농민 운동을 하던 그는, 1920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천해는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震災) 과정에서 터진 '조선인 학살'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유학 중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김천해는,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를 맡아 활동했다. 출소와 체포를 거듭하던 그는 도쿄 도요타마 형무소 예방 구금소로 옮겨져, 야마베 겐타로와 함께 수감 생활을 했다.

일본 패전 후 출소한 김천해는 일본공산당 서열 3위까지 올랐다. '재일 조선인의 빛나는 별'이었던 김천해는 1950년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로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고위직으로 일했다.

사회주의 혁명가에서 역사 연구자로


▲1950년대 일본공산당 본부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창당했다. 1945년 일본제국 패망 후 합법화되었다. 현재 자민당, 입헌민주당, 공명당에 이어, 원내에 진입한 제4당이다. 1945년 출소한 야마베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본부 입구에 "전쟁 반대"라는 구호가 선명하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일본 패전 후 감옥에서 출소한 야마베는, 일본공산당 재건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본공산당 서기국원과 통제위원, 잡지 <전위>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6년 3월 1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조선독립 3.1 혁명운동 기념일 인민대회'가 열렸다. 일본공산당을 대표해서 이 행사에 참석한 야마베는, '조선 인민과 연대한다'라는 인사말을 했다.

마흔넷이었던 1948년, 야마베는 여성 지질학자 후지와라 다카요(藤原隆代)와 결혼했다. 그의 반려자인 후지와라 다카요는,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서실 사서와 게이센(惠泉)여학원 도서관 분관장을 지냈다.

1949년 5월 15일 야마베는 역사학 연구대회에 참가했다. 정식 교육과정을 거쳐 역사를 공부하진 않았지만, 그는 역사학 연구대회에서 당당하고 신랄하게 발언했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역사학 연구대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역사 연구와 공산당 활동을 병행하던 야마베는, 1958년 일본공산당을 탈당했다. 그 이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아닌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1959년 그는 조선사연구회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 야마베는, 일본 근대사 연구에 중대한 결함 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 만주를 침략했다. 일본 식민지 경영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이 부분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을, 야마베는 간파했다. 이 통찰이 일본과 한국 근대사를 '함께' 연구하게 된 중요 계기였다. 야마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의 근대사를 이해하려면, 조선 문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 문제, 이것을 빼놓고는 일본의 근대사를 알 수 없다.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다."

일본사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야마베는, 한국과 인연이 있다. 벳푸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무렵 그는, 어머니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살았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경성에 머문 이 시절은, 그에게 조선을 실체적으로 체험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학교만 졸업한 그가 연구자로 명성을 날린 이유


▲야마베 겐타로와 나카츠카 아키라텐리대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이 야마베 겐타로다. 야마베에게 큰 영향을 받은 나카츠카 아키라는, 교토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나카츠라 교수는 근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한 지한파(知韓派)다. 일본 식민지배 책임을 철저히 추궁한 그는, 일본 양심을 대표하는 학자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관련사진보기
그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야마베는 조선 근대사 분야를 개척한 일본인 연구자로 이름을 날렸다.

"학문에 학력은 필요 없지만, 노력은 필요하다."

야마베가 한 말처럼, 그는 이렇다 할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노력해서 뛰어난 학자, 역사가가 되었다. 그가 1966년에 쓴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와 1971년 펴낸 <일본 통치하의 조선>(日本統治下の朝鮮) 역시, 이와나미서점을 통해 신서판으로 출간되었다.

<일한병합소사>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과정을 쓴 역사서로는,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30쇄 넘게 발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립국회도서관 건립과 운영에 기여한 하니 고로(羽仁五郞) 참의원 도서관운영위원장은, 루쉰(魯迅)의 말을 인용하며 <일한병합소사>를 높이 평가했다.

"붓으로 쓴 거짓은, 피로 쓴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일곱 권으로 발간한 <현대사자료 - 사회주의 운동편> 역시 야마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소학교 졸업에 그쳤지만, 그가 연구자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기반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서점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역사 연구에 몰두한 후로 도서관에 기거하다시피 했다. '책에 파묻혀 산 삶'이라 할 수 있다. 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운동 반생기>에 야마베는 이렇게 썼다.

"소학교에 들어갈 때 벌써 중학생이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에 살며 파고든 한국 근대사


▲야마베 겐타로감색 보자기를 들고, 게다(나막신)을 신은 모습이다. 야마베가 터줏대감처럼 머문 국립국회도서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옷차림과 집안 정돈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치밀한 고증을 거친 그의 글은 늘 정갈했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관련사진보기


일본 안에서 '거짓'과 '속설'로 이뤄진 한국 근대사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야마베는 자료를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국립국회도서관을 매일 드나들며 살다시피 했다.

국립국회도서관뿐 아니라 옛 우에노(上野) 제국도서관, 도쿄대학과 와세다대학 도서관, 도요문고(東洋文庫), 세이카도문고(靜嘉文庫), 아치다가키치문고도 자주 드나들었다. 야마베는 <일한병합소사> 머리말에 자신이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한 기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저자는 도요문고, 세이카도문고,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외무성 기록 등 수많은 자료를 면밀히 조사 검토한 후, 사실에 입각하여 본서를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던 중요 문헌인 산조 사네토미 문서, 이토 히로부미 문서, 이노우에 가오루 문서, 무쓰 무네미쓰 문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문서, 가쓰다 다로 문서를 '섭렵'하며, 사료를 통해 자신만의 역사적 사실을 구축했다.

야마베가 살다시피 한 국립국회도서관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새롭게 문을 연 일본의 국가도서관이다. 1948년 6월 아카사카(赤坂) 이궁(離宮)을 임시청사로 개관했다. 1961년 나가타쵸(永田町)에 도서관 공사를 끝내고, 옛 제국도서관이었던 우에노 도서관 장서까지 합쳐, 일본 최대 도서관으로 거듭났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법 전문은 "국립국회도서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확신 위에서, 헌법이 서약하는 일본의 민주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여기에 설립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진리'가 아닌 '반지성'에 근거한 일본 정치가 국민을 전쟁과 패전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반성 속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을 건립한 것이다. 국립국회도서관 본관 2층 목록홀 벽면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헌정자료실은 1949년 9월 국립국회도서관 분관에 개설했다. 헌정자료실의 창설과 운영을 주도한 사람은 오쿠보 도시아키(大久保利謙)다. 일본 근대사 연구자인 오쿠보 도시아키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함께 '유신 3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손자다.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 정치인의 각종 사료와 문서를 방대하게 수집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정치인의 공문서와 사문서를 체계적으로 모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서 아카이브'가 탄생했다.

- 2편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 평생 한국 근대사 연구한 일본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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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 22화
21.08.08 19:54ㅣ최종 업데이트 21.08.08 19:54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 평생 한국 근대사 연구한 일본인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도서관의 기인, 야마베 겐타로 ②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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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야마베 겐타로는 역사 연구에서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이 차지하는 위상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벌써 12, 13년 헌정자료실에 다니고 있는데, 실제로 매일매일 읽고 있어도 잇따라 중요한 사료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정자료실에 다니는 것이 즐겁습니다. (중략) 헌정자료실이 일본의 근대사 연구 발전을 위해 하고 있는 역할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AD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직원으로 일한 유이 마사오미(自井正臣)는 야마베에 대해 이런 회상을 남겼다.

"그 무렵은 정말 날마다 즐거워 보였다. 규칙적으로 아침 10시 30분경, 감색 보자기에 2, 3권의 책과 원고용지, 필통에 연필을 몇 개나 준비해왔다. 또 조간신문을 한 부 반드시 가지고 왔다. (중략) 10시 30분경부터 오후 4시 무렵까지는 사료를 베끼거나 차 준비를 하면서 정말 자유롭게 공부하고 있었다. 완전히 자신의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헌정자료실 감옥의 감방장이라 칭했지만, 종종 열람하러 온 사람을 붙잡고 "너, 사료를 만년필로 베끼면 안 된다. 연필로 해라"라거나 "너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책을 읽었는가. 사료 읽기 전에 저것을 먼저 읽어라" 라는 식으로 주의를 주거나 가르쳐서 도서관 직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명물이자 기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입법부에 속한 국가기관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은, 입법활동 보좌를 위해 세운 의회도서관이다. 1948년에 개관했다. 국가도서관 기능을 겸하고 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도쿄에 본관을 두고, 간사이관과 국제어린이도서관을 분관으로 두고 있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야마베는 '재야 연구자'로서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 재야 연구자라는 위상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다. 강덕상(姜德相) 같은 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이니치'(在日) 강덕상이 '우리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야마베 겐타로와 만남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강덕상을 처음 만난 야마베는 이런 말을 건넸다.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중국사를 하나? 일본의 근대는 조선 식민지 지배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니, 일본에 있는 너희 조선인이 조선사를 해야 의미가 있다."

1989년 재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국립대(히토츠바시대학) 교수가 된 강덕상의 이어지는 회고다.

"우리(강덕상과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둘 다 야마베 겐타로의 제자다. 도서관에서 야마베를 따라다니며 자료 모으는 것을 배웠다."

야마베가 도서관에서 어떻게 자료를 수집했길래, 훗날 이름난 학자가 되는 두 사람이 그로부터 자료 수집을 배웠다고 할까? 김효순이 쓴 야마베 겐타로에 대한 글을 옮겨 보자.

"그는 사료 수집의 대가였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료 수집의 노하우를 배웠다는 후학들이 적잖다. 날마다 국회도서관에 딸깍거리는 게다를 신고 가서 수없이 문헌 대출을 신청했다. 결국 도서관 직원들이 질려서 아예 서고 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했다. 나아가 도서관 한구석에 개별 공간을 마련해줘 개인 서재처럼 쓰도록 했다. 그에게 우편물을 보낼 때 주소 칸에 '국회도서관 야마베 겐타로'라고 쓰면 배달이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히 국회도서관의 명물 대접을 받은 셈이다."

1차 사료로 증명한 역사적 진실


▲야마베 겐타로조선 근대사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야마베 겐타로는 기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청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택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야마베의 기인 같은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 서해문집 <역사가에게 묻다>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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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후배들에게 '공짜'로 자료 수집 노하우를 전한 건 아니다. 야마베에게 푼돈을 '뜯긴' 후배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서관에 관련 문헌을 조사하러 나온 젊은 연구자들은 그에게 수시로 잔돈을 뜯겼다.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의 회고에 따르면, 야마베는 귀가하려고 도서관을 나서기 전에 차비가 없다며 10엔을 요구하곤 했다. 사는 데까지 가려면 20엔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얻어 쓰는 주제에 어떻게 다 타고 가느냐, 중간쯤에 내려서 걸어간다"라고 답했다. 그러다 <일한병합소사>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의외의 사실이 공개됐다. 야마베가 자신은 옷 안주머니에 항상 1만 엔을 갖고 다닌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평소에는 수중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구자란 언제, 어디서, 어떤 사료를 마주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금으로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1만 엔은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수시로 대선배에게 푼돈을 뜯겼던 후학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자료 수집의 대가인 야마베는, 특히 1차 사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1차 사료를 찾아라. 살아 있는 사료, 손대지 않은 사료를 찾아 공부하라!"

'논문은 사료로 말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야마베는, 자신의 지론처럼 엄격한 연구자였다. 그는 이런 엄격함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애써 모은 사료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서관의 기인'답다.

앞서 감옥에 있을 때 야마베가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출소 후에도 야마베는 자신의 집을 전혀 치우지 않았다. 도쿄 요요기(代々木)와 쵸후(調布)에 살았던 그는, 온갖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고양이 30마리와 함께 살았다. 손님이 오면 방 한구석을 치우고 DDT를 뿌리고 앉으라고 했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지 않았고,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편집자 오비 도시토(小尾俊人)는, 이 시절 야마베 겐타로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수염은 깎지 않고, 손에는 보자기, 늘 게다(나막신)를 신은 차림으로 나타나 자료조사에 몰두하는 야마베 씨, 처음으로 아사가야(阿佐ケ谷)의 댁을 방문했을 때 인상이 선명하다. 책은 선반이 아닌 거실 바닥에 잔뜩 깔아놓고, 그 위에 침구와 식기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가 십여 마리 그곳에 동거하고, 야릇한 냄새도 풍겼다. 그런 생활의 연상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원고의 글자는 한 칸 한 칸 단정하게 아름답고 멋있었다. 사실(事實) 앞에서의 겸허함, 명쾌한 판단, 산뜻한 문장, 순간의 유머, 그런 야마베 씨였다."

혹자는 야마베가 쓰레기 집에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누가 '역사의 쓰레기'였는지 끝내 증명했다.

고양이와 어린이를 사랑한 미식가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중전 민씨 사체 능욕설을 언급했다. 1895년 10월 8일 중전 민씨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당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낭인은, 중전 민씨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불태웠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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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그는 당뇨와 폐결핵으로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다. 2년 후인 1977년 4월 16일 오후 9시 20분, 야마베는 구기야마 병원에서 회맹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4월 28일 오후 2시, 그가 살던 히가시(東久) 구루메(留米) 단지 집회소에 300여 명이 모였다. 열흘 전 세상을 떠난 야마베 겐타로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언뜻 사회성 없어 보이는 야마베였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그가 고양이를 30마리나 거두어 키웠다는 점도 이채롭다. 또한 야마베는 '미식가'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40개나 먹었다는 일화가 있고, 말년에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찹쌀떡을 먹기 위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다. 야마베가 세상을 떠난 후 추모 문집으로 출간된 책은, 야마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구 지껄이는 잡담 속에서도 사실과 인간에 대한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경구(警句)를 날리고, 지식과 책을 사랑하고, 등산을 유일한 취미로 삼고, 고양이를 사랑한 그 품격을 그리워하며 기억할 것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제가 행한 조선통치의 실태를,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규명했다. 일제가 공표한 자료 중에는 '분식'(粉飾)된 자료가 많아, 통치자가 사용한 자료와 비밀사료를 주로 활용했다.

을미사변 당시 '중전 민씨 시체 능욕설'도 야마베 겐타로의 연구로부터 조명받았다. 야마베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한국통감부 고위 관료가 쓴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蔵) 보고서>를 인용하며, 부랑배들이 왕비의 시체를 능욕했던 내용을 언급했다.

야마베는 '중전 민씨 시해가 일제가 조선에서 범한 죄악 중 가장 엄청난 행위'이며, '을미사변에 대해 지금까지 적힌 것은 전부 거짓투성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가 폭로한 일제의 만행과 바보짓


▲산행을 앞둔 야마베 겐타로1977년 4월 16일 야마베는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책과 고양이를 사랑한 그가, 유일한 취미로 삼았던 것이 등산이다. 나카츠카 아키라의 오사카 집에서 기이산지로 산행을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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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한일 교류사를 연구한 이수경 교수는, 야마베 겐타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1977년 타계한 야마베가 남기고 간 역사학자의 '양심'이야말로 진정한 한일 관계의 얽힌 역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식민통치에 직접 관여한 대다수 일본인 고위 관료는, 일본 패전 후에도 조선 통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뿐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이 조선 통치 과정에서 '선의(善意)의 악정(惡政)을 했다'라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을 "참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야마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활이 같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일본이 통치 과정에서 행한 '바보짓'도 낱낱이 나열했다. 군인 출신의 조선총독 임명, 신사 참배 강요, 군사비 부담, 조선인 징병과 창씨개명... 결국 일본의 '선의'는 증명할 수 없고, '악정'만이 남았다는 것이 야마베의 '결론'이다.

한국의 불행은 조선의 식민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야마베는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조선 통치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를 썼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일까?


▲야마베 겐타로와 후지와라 다카요의 묘비야마베는 세상을 떠난 다음, 후지와라 가문 묘소에 묻혔다. 후지와라 다카요는 야마베의 아내다. 야마베와 후지와라 두 사람의 묘비는, 히로시마시에 있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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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반기를 '사회주의 운동가'로 산 야마베는, 생애 후반부는 도서관의 책과 사료에 파묻혀 '역사 연구자'로 살았다. '도서관'에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일까? 후학 중 한 사람이 야마베에게 이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선생님만큼 평생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일제 때는 감옥에 들어가 보호받고, 전후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돈이 없으니 세금을 낸 적도 없으니까요."

'도서관 인물사'는 도서관장이나 사서처럼,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만의 역사일까? '이용한 사람' 이야기는 '도서관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야마베 겐타로 이야기는 일본인이, 일본 도서관에 남긴 이야기다. 일본의 치부를 들췄다는 점에서, 그는 일본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한국인보다 우리 근현대 역사를 뜨겁게 연구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도서관을 열렬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강렬한 흥미를 일으킨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에게 그는 '진상 이용자'였을 수 있다. 그런 그가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사서도 놀랍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야마베는 역사 연구자로서 자신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 서가를 헤매며 수많은 자료를 뒤진 그의 이야기는, 국적을 떠나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자료를 통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야마베는 진실을 추구했으되, 외면받는 삶을 살았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의 잘못을 낱낱이 규명한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도서관의 기인'으로 살았던 야마베는 상당수 사람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은 일본의 치부를 드러낸 그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일제의 조선침략사 | 야마베 겐타로우 | 알라딘

일제의 조선침략사 | 야마베 겐타로우 | 알라딘




일제의 조선침략사 
야마베 겐타로 (지은이),유달영 (옮긴이)대학서림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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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쪽


목차


1. 조선 말기의 사회 2. 19세기 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문호 개방 3. 조선의 개국 반대 운동 4. 조선을 둘러싼 청ㆍ일의 대립 5. 청일전쟁 6.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7. 러일전쟁 8. 을사조약 반대운동 9. 한일합방의 과정



저자 및 역자소개
야마베 겐타로 (山? 健太?) (지은이)
일본의 식민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진술한 '일본 식민지 조선 통치' 보고서
조선통치 해부
야마베 겐타로  山健太郎 지음
최혜주 옮김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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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조선근대사, 일본사회운동사

저·역서
『社會主義運動半生記』(1976)
『日韓倂合小史』(1966·1995)
『日本の韓國倂合』(1966·1991)
『現代史資料 社會主義運動篇13권』(2004)
『아메리카政治史槪說』(1954·55)
『코민테른의 역사(コミンテルンの歷史)』(1949)
『現代史資料 臺灣(1)』(2004)



최근작 :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일제의 조선침략사>,<한일합병사> … 총 6종 (모두보기)

유달영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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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침략사>

최근작 : <협동과 사회복지>,<산>,<다석 유영모>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한국 침략사이다. 책의 내용은 개항 직전부터 강제 병합까지의 조선 침략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원 저자는 예상 독자로 일본의 대중 독자를 지향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의도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일본인은 한국사나 과거 침략사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도 그다지 실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닌 특성은 대중 독자를 지향했기 때문에 쉬운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간결한 문장과 중요한 흐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통사적인 체제를 갖추었으며, 어려운 역사적 자료는 쉬운 말로 옮겨 놓았다. 이 책은 실증적인 자료와 사실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재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실만을 기록할 때, 한일 근대사는 '일본의 치밀한 한국 식민지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최근의 식민지 내재적 근대화론에서 제기하는 '일제강점기이지만 그래도 발전된 모습은 있었다.'라는 평가나 '식민 지배는 조선의 외세 대처 능력이 떨어지면서 기획된 것이다.'라는 사고는 매우 단순한 사고임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일본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수립한 프로젝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과거사를 보는 우리의 입장이다. 이 점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단순히 양심고백을 촉구하거나 그들을 비난하는 일로 그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 몸부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역사는 가해와 피해라는 단순 등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재판정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일본인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 조선 침략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책의 번역이 갖는 의미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이 어떠한가를 우리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데 있다. 일본인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문제처럼,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 전국적으로 들끓는 궐기대회가 진정 미래의 한일 관계를 엮어나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제 이 책의 번역으로, 우리는 일본인들의 과거사 인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는지, 또한 우리는 그들이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곱씹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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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사건1875, 강화도조약1876 전후 조선말기 사회상과 세계정세로부터 한일합방1910까지를 유려하고 이해가 쉽게 사건의 유기적 관계로 그려낸 역사 수작이다. 근거자료는 역사적 조약,지침,문서,서신들은 일본 내부의 내밀한 자료로부터 제시된다. 아마베 겐타로 선생의 수고, 노력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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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朗, 1905∼1977) / 이수경

남쪽나라

2010. 9. 10.


山健太|韓國强制倂合100周年 2007/08/29 03:04

山健太 山健太 作品一: 紀伊國屋書店BookWeb [PDF] 山健太「日本社主義同盟名簿」...







“명성황후는 능욕당했다”(2)
일본의 양심 야마베 겐타로와 암살지휘자 미우라 고로의 수기 속의 숨겨진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2009년 10월 06일 (화) 19:08:37 이수경(일본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press@sctoday.co.kr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이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시해’사건이 아니라 ‘살해’사건이 정확한 표현이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시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사건을 모의하고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은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1926)로 돼 있다. 하지만 미우라 고로의 수기를 보면 당시 일본 내각의 핵심 인물들이 이 만행을 기획하고 책임자를 조선에 파견했던 과정이 드러나 있다.
또한 당시 살해 현장에 있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살해사건’ 후 보고서를 그의 직속상관인 미우라 고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일본에 있는 이전 상관에게 보냈다.
바로 이 점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주모자가 당시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사실인데, 이 〈에이조 보고서〉는 70여 년 동안 철저히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를 밝히는 데 큰 몫을 한 두 사람의 글을 이수경 교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내용을 1편과 2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왼쪽 이토ㆍ이노우에ㆍ야마가타가 일본 정계 최고의 세 거물(三尊)임을 나타낸 보수성향의 잡지 <일본인> 27호, 1896년, 8쪽. 오른쪽은 ‘한국의 경성’이란 약어로 ‘한경사변’에 대해서 명성황후와 대원군과 고종의 상황을 글로 적어놓은 <일본인> 11호, 1895년 12월, 9-10, 40-42쪽.



▲하기 시 아부가와 강변의 미우라 고로 집터



▲미우라 고로 집 옆에 있는 류죠지 절 묘에 세워진 송병준 석등(붉은색)




미우라 고로 집 옆에 있는 류죠지 절에는 송병준이 양잠을 배웠던 나카무라의 묘 옆에 대한국 농상공부 송병준이 보낸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이토 히로부미 옛 집터








▲야마가타의 출생지




일본제국주의를 휘잡고 있던 정계 최고의 우두머리와 육군성 장성들이 관련하였고, 그들의 앞잡이로 <한성신보사>가 이용당했다.

구마모토 국권당의 아다치나 사사 등을 포함한 일본인 기자들(사건 당시 사이온지 외상대리에게 미우라가 보낸 전보에는 ‘외국인 목격자에게 영어로 황후가 어디 있냐고 묻는 자가 있었다’고 기록)과, 행동부대로 투입된 영웅심과 허세로 날뛰었던 장사 낭인패, 그리고 수비군들과 훈련대 등에 의해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 피바다가 되었고, 정치적 능력을 지녔던 45세의 명성황후를 포함해 숱한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야마베는 우치다 영사의 말을 빌려, 명성황후가 관자놀이에 자그마한 버짐 자리(머리에 벗겨진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흥선대원군에게 들은 살해범들은 미모의 부인 3명을 벤 뒤 흉터로 명성황후를 확인했고, 더불어 근본적으로 미우라 고로처럼 육군 중장과 육군 대신을 지낸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살해사건을 지휘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흑막은 결코 그들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이 일제 육군성만의 막무가내 행위였다면 열강 운운하며 제국주의 내각제를 표방하던 일본의 부패성도 심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당시 이토가 최고의 권력을 쥐어잡고 있을 때였고, 군부도 내각의 힘에 미치지 못할 때였다.

게다가 엄연히 미우라 고로는 이토ㆍ야마가타ㆍ이노우에 등 세 지기(知己)를 의식한 듯 그들의 고유명사를 솔직하게 명기하고 있다. 또, 당시의 일본 궁궐에서도 이미 조선 궁중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비명횡사한 뒤, 억울한 영혼은 114년이 되어도 잊혀질 수 없는 역사로 늘 기억되고 있다. 그동안 필자를 비롯해 수많은 학술적 연구나 드라마ㆍ뮤지컬ㆍ영화 등이 끊임없이 그녀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해왔고, 그녀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화제를 모아왔다. 지난 9월 24일에는 한 여인으로서의 ‘민자영’의 고독함과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가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재일 문학가 김희명이 일본에서 일찍이 소설 <흥선대원군과 민비>(1967)를 발표했고, 일본인 츠노다 후사코가 야마베의 자료 제시를 주로 활용하여 <민비 암살>을 내면서 화제를 모았고, 한국 연구자들도 그 소설 속에 내포된 자료들을 참고로 여러 사람들이 접근을 하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여러모로 조명을 하게 되었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기증하여 일본 궁내 서릉부에 소장돼 있는, 빨간 표지의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네 권의 반환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필자가 2006년 가을, 서릉부에 신청하여 출입 허가를 받고, 귀중한 자료라 해서 손을 씻고 만졌던 의궤의 무게는 바로 가슴속에 무겁게 남아 있는 우리 근대사의 설움의 무게였다.

비인간적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날조와 모략을 동원해 조작을 해온 당시 육군성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행위를 야마베는 물론,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이리에 아키라조차 ‘당시 일본 외교의 크나큰 실패’라고 지적하듯이, 한ㆍ일 근대사의 불행을 상징하는 참으로 악랄한 범죄행위였다.





▲미우라가 사이온지에게 보낸 1895년 10월 9~10일의 전보. 미우라 관계 문서 90쪽.
이미1960년에 야마모토 시로는 미우라 고로가 소장하고 있던 관계 문서를 손수 베껴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사건 직후의 전보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사건 직후인 10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외상대리인 사이온지에게 보낸 전보에는 어디까지나 조선훈련대가 반기를 들어서 사건을 일으킨 것이고, 일본인 가운데 가세한 자가 있다는 소리도 듣었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런 모략은 잡지 <일본인>에 게재된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스기무라ㆍ아다치를 포함한 관계자들의 자료들, 그리고 사건 직후의 신문들도 모두 조선군에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기록이 많다. 외상대리 사이온지가 1895년 10월 10일 오전에 미우라에게 보낸 전보에는 “이번 사건은 정부에게 중대한 일이므로 상세히 밝혀서 급히 전보를 보내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쵸슈파벌이 아닌 사이온지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큰 거사였던 만큼 아군부터 속이는 전략으로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야마베는 미우라가 연막을 친 문장을 야마모토가 순진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자료를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이 만든 메이지 정부에 치명타를 가져다주는 외교문제였기 때문에 그들도 그 부분의 기록만큼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는 야마구치 출신의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의 사진이 실려있는 <일본의 조선> 책 표지(데라우치문고 소장) ▲오른쪽은 당시 조선훈련대가 일으킨 소동이라는 엉터리 내용이 게재된 1895년 10월 9일자 <요미우리> 신문.


▲왼쪽은 한ㆍ일 합방 기념으로 출간된 내각 각료들의 축사가 많이 게재된 <그래픽 특별 증간 일본의 조선(Chosen of Japan)> 1911년판. 여기에도 미우라의 범죄 행위는 일절 게재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서 범한 죄악 속에서 가장 엄청난 행위”의 야만성을 비판한 야마베는 “일본에서 지금(1966년)까지 적혀진 조선사는 거짓말과 속설 위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민비 사건도 지금까지 적혀진 것은 전부 거짓말투성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단언하며, 일본인이 자신들의 비행과 과오를 숨기기 위해 거짓 역사를 적는 것이라고 양심적 표명을 하고 있다(<일본의 한국 병합> 207쪽). 1977년에 타계한 야마베가 남기고 간 역사학자의 ‘양심’이야말로 진정한 한ㆍ일 관계의 엉킨 역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사회가 왜 이다지도 명성황후에 집착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외세 침략으로 한을 삼켜온 한국적 정서는 물론, 속된 표현으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란 힘의 논리 속에서 무력하여 수많은 침탈행위에 피눈물로 억울한 가슴앓이를 해온 민족이기에, 불행한 근대사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에 대한 집착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고, 절대 사수를 했어야 할 황궁이 습격당해 나라를 대표하는 왕비가 살해당했다는 엄청난 사실, 그리고 어릴 때 형제도 없이 고독한 궁궐 내의 삶에서 힘들게 살다가 내부 갈등과 외부의 힘에 의해 암살당한 민자영이란 사람의 억울한 아픔에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직도 찾지 못한 그녀의 사진이나 미스테리와 같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접근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어떻게 그 높은 벽을 뚫고 황궁 침입이 가능했고, 황후가 살해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냐고.

그 배경으로는 일본이 근대식 군비로 무장을 했으며, 철저히 사전 계획하에 조직되어 움직였고, 하다 못해 광화문 벽을 넘기 위해 훈련받은 병사 14명이 신속하게 사다리 이동을 전담하였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궁궐 내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라고 경성 수비대에 지시를 했었고, 훈련받은 일본 군대가 주변 제압을 한 뒤, 일본측 부랑배 낭인들을 날뛰게 했던 것이다. 그런 수라장 속에서 훈련대로 움직인 것이다.

즉, 철저히 궁궐 습격을 준비한 일본에 비해, 조선 측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에 대한 예측도 예방도 없었고, 일부 실학의 움직임은 있었지만 그만큼 국력도 무력했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로 지구촌이 움직인다면, 초강대국인 미국만 추종하며 사대주의란 미명하에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은 눈치를 보며 속국처럼 살아야만 한다. 그것은 인류의 이동이 급증하고, 다문화ㆍ다언어 사회로 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제사회의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고, 지구촌 사회의 기능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자 국제관계의 파멸을 초래하는 일이 된다.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를 칭송하는 기념비(야마구치의 데라우치 공원 내).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그동안 조수미 씨가 부른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이란 노래를 백 번 넘게 들으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명성황후의 존재와 한ㆍ일 관계 비극사의 시작, 하지만 헤어질 수도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이웃 일본. 그들의 야욕으로 시작된 1875년의 강화도 사건, 그 이후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좌우당하던 70년 세월… 당파 싸움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쇄국주의 정책으로 근대화의 물결을 거부해왔던 것이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란 운명을 자초했었음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자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력한 국가라고 해서 침략당하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바로 그러했던 험난한 근대사의 여명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 이 민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등불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부동산과 주식투자, 교육투자로 사회가 물질만능주의의 화려한 형식주의 거품에 부풀어 아픈 내 이웃을 도외시하고 소외시킨다면, 그 거품의 경제 차이가 결국 인간성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 기능이 위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아닐까?

명성황후, 그녀의 존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후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며, 한국 사회의 아픔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애절한 메시지를 사회 전체에 전하고 있다고 본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숱한 역사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역사란 삶의 흔적이다. 그 흔적의 추구란 바로 내일의 불행을 막으려는 인간의 지혜이다.

우리는 명성황후를 통해 근대사를 올바르게 알고, 향후의 한ㆍ일 관계를 포함한 아시아 질서를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전후 역사 인식을 바로 잡는 작업을 해야 한다.

편협적인 내셔널리즘으로 국수주의만 앞세우면 한국은 오히려 고립되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일본의 자성이 일도록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 과거를 통해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일본과의 신뢰 구축에 노력해야 하며, 청소년들의 문화적 교류를 포함한 풀뿌리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역사 청산과 화해를 위한 다가서기를 현명하게 해야 한다.

또한, 국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민족을 초월한 지구촌의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과 연대를 돈독히 하면서, 무력적 움직임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주시하고 제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지배받아온 우리의 역사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역사가 인류사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전 지구촌 시민들에게 침략의 아픔을 전하며, 평화 구축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선진 시민으로서의 ‘사명’ 의식이다.

100여 년 넘도록 계속된 한ㆍ일 근대사의 불행한 관계가 얼마나 아픈 미래로 남는지를 가르쳐주는 산 역사이자 증인인 명성황후는 전후 세대들인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며, 결코 불행을 초래하는 국제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고 있는 것이다.

114년째 맞는 올 가을도 스산한 바람과 더불어 그녀의 아픔이 다시 가슴을 헤집겠지만, 우리는 명성황후가 인류사를 위해 전하려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야마베와 같은 이웃의 양심도 되새겨보는 사색의 계절을 가져보자.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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