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주 4.3' 기념일을 맞아, 필자가 7년 전 '제주 4.3' 70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강연을 옮긴다. '제주 4.3'이해와 질정을 기대한다.
< ‘제주 4․3’, 해방 공간의 희생양>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4․3관련 학술회의를 열게 된 것을 의미 깊게 생각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4․3과는 거의 관련을 맺지 못한 제가 기조강연의 중책을 맞게 된 것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제주4․3’으로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나 그 유족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이를 거의 의식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2003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죄를 표했을 때도, 역사학도라면 의당 그 아픔에 동참하면서, 4․3의 역사의식화를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 때까지도 거의 몰역사의식적인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자리가 저로서는 대단히 송구스럽고 죄스럽기만 하다.
[제주 4·3 사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이란, 미 군정기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했다.
4․3사건이 진행된 시기는 2차 대전 후의 미군정 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의 해방 공간에 해당한다. 미군정은 초토화 작전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예하의 경찰 군인들을 독려했고, 이승만 정권도 미군정의 소탕작전을 계승, 1949년에는 거의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이 끝나갈 즈음에 일어난 ‘6․25전쟁’은 무장대에게는 저항의 새로운 기회를 주었고, 토벌대에게는 그들의 증오심을 배설할 수 있는 폭력의 기회를 연장시켜 주었다.
[해방공간 미 군정하의 제주도]: 1945년 9월 초, 북위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맥아더는 포고령 1호를 발포, 미군정을 선포하고 군정장관에 제 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임명하여 군사적으로 한반도의 남반부를 점령해 갔다. 이런 조치에 따라 제주도에도 미군정 무장 해제팀이 도착, 제주농업학교에서 일본군 제 58군 도야마 노보루(遠山登) 중장으로부터 항복을 받고(9.28), 모슬포로 이동(10.5)했다. 미 점령군의 이같은 조치에 앞서 여운형 등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8.16)하고 미군의 진주에 앞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9.6)했으며, 제주도에서도 제주 건준을 결성(9.10)한 데 이어 제주도 인민위원회도 조직(9.22)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정장관 아놀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 남한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이라고 천명(10.10)했으며, 미 군정청 예하의 미군 1개 중대 규모의 100여명이 모슬포로 파견(11.9)되었다.
해방 후 맥아더의 도움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달라는 요구를 거부(11.7)했다. 이 때 서울에서는 3일간이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는 제주 대표로 오대진 등 4명이 참가(11.20)했다. 이 무렵 제주도에서는 미군이 관리하는 창고 주변에서 한국인 민간인이 사살되는 사건들이 일어났고(11.18, 12.15, 12.28), 제주 중문면에서 일어난 면장집단구타 사건에서는 미군이 발포,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12.12).
위의 사실은 해방 직후 남한의 미군정과 제주도의 관계를 간단히 언급한 것[허상수, 『4․3과 미국』]이다. 1945년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화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회집되면서 정당․사회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한국은…이데올로기의 전장터”라는 내용이 미국 대통령 트루만에게 보고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46년말에서 1947년 초에 걸쳐 제주도에는 미 주둔군의 파견을 강화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 고급 장교들이 수송기를 타고 제주도를 방문, 비행장과 제주지역 상황을 검열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2월 10일 제주농림학교 오현중학교 등 제주도내 중등학교연맹 천백여명이 양과자 수입 절대반대 시위가 있었고[제주신보], 학생 350여명이 제주도 주둔 군정중대에 항의시위를 했다. 미군용 물자가 제주도의 경제를 교란시키고 있음을 젊은 학생들이 가장 먼저 간파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3․1사건 직전까지 미군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 즈음해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오게 되고 그것이 곧 한반도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트루먼 독트린(: Truman Doctrine)이 발표되고 공산주의와의 대결적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 냉전체제가 성립되어 갔다. 이는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으로서, 세계각지에서 도전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고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미국은 자유세계 여러 나라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트루만 독트린의 배경은 1946년 중반 이후 극동에서는 중국이 공산화의 가능성이 커져감에 따라 한국과 일본조차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유럽에서는 그리스와 터어키도 위험하다고 봤다. 트루만 독트린의 발표를 계기로 미군정도 한국에서 공산주의 침투에 대해 점차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제주에서 미군이 관련된 ‘3․1사건’(1947)이 일어났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3․1운동 제 28주년 기념 제주도민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좌우 연합으로 개최되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인 안세훈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쳤다. 이런 주장은 당시 좌우 가릴 것 없이 의식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의 경찰들은 이 모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후 3시께 시위대 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났을 때 어린 아이가 경관의 말발굽에 채어 쓰러겼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경관이 발포, 6명의 민간인이 쓰러졌으며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라 할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곧바로 통행금지령을 내린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는 한편 자신들의 발포를 불가피한 정당방위로 천명하고, 강경대응에 나서게 되었다. 경찰은 육지로부터 증원을 받아 3․1절 행사를 이끈 간부와 학생들을 수감시키고, 이 대회를 주도한 남로당의 선동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캐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은 3․1사건 발포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3․1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대책위원회는 제주도 민정장관 스타우트 소령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에게 경관의 무장을 해제하고 발포 책임자와 발포경관을 즉시 처벌할 것, 희생자 유가족과 부상자에 대한 구호 대책을 세우라는 등 6가지를 요구했다. 이 건의가 무시되자 민중은 총파업에 이르게 되었다(10일). 총파업에 앞서 미군정에서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8일), 3․1사건과 총파업에 대해서도 조사하여 사건의 원인이 경찰의 발포에 있음을 밝혔으나, 남로당의 대중 선동에 초점을 맞춰 좌익척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어서 ‘총파업을 깨기 위한 해결사로’ 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경찰의 발포를 정당화하는 한편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모는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육지로부터 경찰 사백여명이 증원되고 서북청년회원이 투입되어 4월 초순까지 민간인 500여명이 검거되었다. 3월 20일경 총파업이 수그러들자 미군정은 제주도의 군정장관과 도지사를 경질했다. 한독당 출신의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등장, 서청 단원과 함께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더욱 괴롭혔다. 3․1사건에서 시작된 민중의 요구와 항쟁이 더욱 심화된 것은 행정당국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회의 제주도민을 향한 행패 때문이었고, 그 배후에는 미군정이 있었다.
[제주4․3의 진행과정]; ‘4.3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해방 후 제주도에 대한 밀무역과 관련된 경제사회적 관점에서 투시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남하한 피난민들의 울분이 고립된 섬에서 폭발되었다는, 이념적 시각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견해와 관련, 김익렬은 “제주도에 이주하여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그 직접적 계기는 1948년에도 계속된,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제주 민중에 대한 안하무인적인 고문치사사건이었다. 도지사 유해진이 부임한 후 1948년 3월 경찰은 학생․청년 세 사람을 살해, 민중을 분노케 했다. 제주도민의 분노를 알고 유해진 지사의 경질과 제주도 경찰에 대한 조사 등 4개항이 건의되었으나, 미군정은 거부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5․10선거를 강행해야 한다고 보고 유해진을 유임시켰다. 1948년 3월 초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논란 끝에 강경파가 주장하는 4.3무장봉기를 결행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에는 무장대의 경찰지서 공격을 알리는 봉화가 올랐다. 제주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서북청년회 숙소 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내세운 명분은 매국 단선 반대와 조국 통일독립, 완전한 민족해방이었다. 공격대상은 경찰․공무원․청년단원 등이었다. 그들은 양심적인 경찰․청년․민주인사들에게 인민의 편에 서서 반미구국투쟁을 전개할 것을 권고했다. 슬로건에는 경찰 등의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위한 5․10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외세에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300여명 규모의 무장대의 봉기로 민간인 8명과 경찰 4명, 무장대원 2명이 희생되었다. 5․10선거를 제대로 치르고자 미군정은 1,700명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제주로 보냈다. 그러나 ‘토벌대’의 거친 만행은 입산자만 더 늘려 무장대의 세력만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 데에 급급했다.
폭동발생의 주원인은 밀수혐의 등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와 고문치사 강간 등에 대한 보복에서 비롯되었다[김익렬].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미군정의 실정과 관리들의 부패가 이런 현상을 불러왔다고 진단하면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이 바늘로 터트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무장대들의 최초 목적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로 잡혀간 자들의 가족들이었다. 초기의 토벌작전 실패 후 경찰은 ‘초토화작전’을 쓰게 되었는데, ‘잔인성에서 악명이 높은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되었다.[김익렬] 처음 산간부락에서 시작된 초토화작전은 점차 확대되어 초토화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락이 거의 없을 정도로 되었다.
미군정은 처음엔 ‘초토화작전’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차차 묵인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장려했다. 이렇게 되자 대부분의 산간부락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에 가담하게 되었고, 무장대는 기하급수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결사적으로 경찰에 대항하게 되었다. 경찰은 다시 중과부적이 되어 산에서 쫓겨 내려오고 제주도 산간부락은 대부분 무장대에 점거되었다. 이렇게 되자 토벌의 책임이 경찰에서 경비대로 옮겨졌고 제주 9연대가 이 책임을 맡게 되었다.
회고록을 남긴 김익렬은 이 대목에서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 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 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화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자기가 회고록을 남기는 것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통해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역사의 심판’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기록을 남겼을까.
폭도 토벌의 책임을 지게 된 9연대장 김익렬은 제주도 미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을 움직여 먼저 무장대를 분리시키고 귀순 화평공작을 펴기로 했다. 귀순공작의 책임자로 유해진 도지사를 비롯하여 경찰토벌사령관 김정호,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이 임명되었으나 모두 핑계를 대며 뺑소니쳤고,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지명되었으나 이마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연대장 김익렬이 담판 당사자로 나선 것은 이 때다. 미군측은 김익렬에게 국제정세와 한국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한 후 빠른 시일 내에 진압하기 위해서는 ‘초토화작전’을 강조했고 아울러 금전적 유혹까지 내비쳤다. 그러나 그는 그 유혹에 응하지 않고 귀순화평의 회담을 통해 무장투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9연대장 김익렬은 죽음을 각오하고 무장대 측과의 담판에 나섰다. 1948년 4월 28일 제주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구억국민학교에서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담판이 이뤄졌다. 그는 무장대와의 합의를 가족을 인질로 담보하려 했고, 그런 태도가 무장대를 감동시켰다. 합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으려 하지만, 생명을 건 이 담판으로 전투는 중지되었고 합의에 의해 많은 무장대들이 ‘귀순’하게 되었다는 것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그러나 경찰과 행정당국은 이 합의를 파기했다. 5월 1일 ‘메이데이’ 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에 정체불명의 일단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부락을 방화하는 일종의 귀순방해공작이 일어났고, 이어서 5월 3일 오후 3시경 ‘귀순폭도’ 2백~3백 명이 오라리 부락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하는 도중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귀순무장대들과 이들은 호송하고 있는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9연대 병사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했다. 귀순공작에 대한 방해공작이 노골화되었고,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무장대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이렇게 되자 무장대들도 각 지서를 습격,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귀순, 귀가했던 무장대들이 각지에서 살해되었다. 이를 두고도 경찰 측에서는 무장대들이 자기들의 배반자를 처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5월 5일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등으로 구성된 ‘최고 수뇌회의’가 있었으나 조병옥의 거짓증언과 미군정측의 우유부단함으로 결국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고 ‘무장대’와의 약속은 파탄났다. 수뇌회의에서 다시 초토화작전을 확대하게 되자, 발발 한달만에 끝낼 수 있었던 ‘제주 4․3’은 그 뒤 5년간이나 연장되어 제주도를 제노사이드의 고장, 인간사냥터로 만들어 갔다. 최고수뇌회의가 있고 난 뒤 김익렬은 제9연대장에서 해임되었고 그에게는 각종 시련의 길이 뒤따르게 되었다.
[제주4․3의 희생자]: 그 뒤 제주도는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이 소외시킨 표적지역으로서 각종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취급되었고 각종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1948년 5․10 선거는 전국에서 제주도의 세 선거구 중 두 개 선거구 의원을 선출하지 못해 5월 31일 서울에서 회집된 제헌의회는 198명이 참석하여 개원되었다. 1948년 10월부터는 송요찬이 제주도경비사령관의 책임을 맡아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내륙 지역으로 통행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고, 제주도민을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삼진작전을 통해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제주도의 산간 지역은 밤낮으로 무장대와 토벌대가 교대 점령하면서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48년 11월 17일에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재판없이 주민처형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산중턱의 마을은 소각되었으며 군법재판은 이유없는 주검을 양산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하산한 자, 체포되어 포로가 된 자가 거의 1만여명에 달했다”[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고 하며, 무장대는 약 250여명으로 축소되었다. 미군정보고서에 의하면 희생자의 80%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죽었고, 무장대에 의한 사망은 전체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1949년 5월 10일에 재선거를 치러 국회의원을 뽑게 되자, 5월 15일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고, 그 다음달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을 보인 것은 무장대의 저항이 거의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일어난 ‘6․25 한국 전쟁’은 제주도에 다시 살육의 광풍을 몰아왔다. ‘빨갱이의 섬’ 제주도에는 북한에 동조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하여 예비검속을 강화하였다. 일반 재판 및 군법회의 수형인 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라산에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것은 1954년 9월 21일, 1947년 ‘3․1사건’이 일어난 지 7년 7개월만이다. 그것도 1951년 1월 말 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가 3개월 동안에 일곱 차례에 걸쳐 한라산 토벌작전을 감행하고 난 뒤였다.
4․3사건과 관련, 제주도는 흔히 인구 30만 중에서 그 10%에 해당하는 3만여명이 사망하고, 160개 마을 가운데 100여개 마을이 초토화되었으며, 가옥 2만(혹은 4만)여동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5차례에 걸친 희생자 신고 접수와 그 결정과정에서 14,032명의 희생을 확인했다. 제주도의 인구 추이는 1947년 275,899명, 1948년 282,000명, 1949년 254,589명으로 나타나 있다. 피해자 규모도 1949년의 6개의 기록에는 15,000명, 17,000명, 20,000명 등도 있으나, 1949~1961년 사이에 발표된 다른 11개의 기록에는 피해규모가 27,719명에서 30,000명 선이 대부분이고, 많은 경우는 40,000에서 65,000에 이르기도 한다. 허상수는, ‘4.3인명’ 피해를 앞의 여러 통계 중에서 3만여명을 지목한 것이 가장 많다는 것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신고건수를 감안하여, 3만명 설을 지지하고 있다.[허상수, 367) 그러나 작가 현기영은 「순이삼촌」에서는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명”이나 되는 무수한 주검을 말했고, 「해룡이야기」에서도 역시 폭동진압 과정에서 5만 넘게 죽었다고 증언한다.
이 주검들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무차별 살륙이었다는 것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잘 보여주고 있다. 2001년 5월 30일 현재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에 최종신고된 희생자 14,028명 중 12.6%에 해당하는 1,764명이 ‘산사람’에 이해 희생된 데 비해 78.1%인 10,955명이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 희생자의 연령별 사망 현황[11세-20세: 3,026명(21.6%), 21세-30세: 4,956명(35.3%), 31세-40세: 2,108명(15%), 41세-50세: 1,365명(9.8%), 51세-60세: 899명(6.4%)]에서 10세 미만 814명(5.8%)과 61세 이상 860명(6.1%)을 합친 수자가 1,674명(11.9%)이나 된다는 것도 이 학살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주검들은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거의 체포와 동시에 총살 혹은 수장으로 집단학살되었다. 4․3사건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예외가 아니어서 성폭행 후에 잔인하게 학살되거나 혹은 살아왔다 하더라도,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 무차별적 집단학살과 성폭행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은 ‘제주4․3’의 성격을 웅변하고 있다.
[제주4․3의 원인론]: 4․3사건은 해방 후 일제 강점이 미군정으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제주도민에 대한 ‘멸시’, 남북분단으로 핍박을 받은 이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가 제주도라고 하는 폐쇄된 공간에서 분출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주역을 맡은 것이 육지로부터 온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이었다. 따라서 4․3사건은 해방 공간에서 일제잔재인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의 완전자주통일을 간절히 소망하는 제주도민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일종의 집단학살이다. 이것은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해야 한다는 한국인의 간절한 소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 일제시대의 경찰․관리들을 그대로 재등용한 결과라고도 할 것이다.
그와 함께 2차대전 후 냉전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한반도 안에서도 38선을 중심으로 이념적 냉전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냉전구도는 전통적․복합적 요인들과 뒤얽혀 성장해 갔다. 제주도의 경우, 조선 왕조 이래 유배지로서 변방 취급을 받았고 출륙금지된 상황에서 계속 ‘민란’이 일어났고 그 뒤 일제강점기로 들어갔는데, 이러한 전통과 도서민에 대한 멸시비하 감정이 그 섬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역사적 바탕 위에 해방 후의 덧붙여진 복잡한 구도-육지에서 온 경찰․서북청년들과 함께 사회경제적 요인-가 중첩되면서 4․3이라고 하는 제노사이드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것이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이었던 만큼 군정의 책임당사자인 미국에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묻고 따지는 것은 4․3의 역사를 정직하게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4․3이 남로당 제주지부 주도로 이뤄졌다고 해서 오늘의 잣대로 남로당을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남로당은 해방 공간에서도 정당활동을 한 좌파 정당의 하나였다. 이 정당도 다음의 여론조사에서 보이는 민의를 기반으로 정당활동을 하고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두 번째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는 개인독재(219명, 3%), 수인독재(322명, 4%), 계급독재(237명, 3%), 대중(대의)정치(7,221명, 85%), 모릅니다(453명, 5%)였고, 그 세 번째 질문은,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자본주의(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릅니다(653명, 8%)의 결과로 나왔다. 대의정치 선호도 85%, 사회주의 선호도 70%의 해방정국에서 3%의 개인독재, 7%의 공산주의를 고집하면서 정당활동을 했다면 대중적 뿌리는 박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고 남로당 제주도당책으로 있었다는 김달삼이 김익렬과 담판할 때 들려준 다음의 주장은 해방정국에서 피력한 그의 이념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이 담판에서 행한 김달삼의 연설은, 그 주장의 정당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4.3사건’ 당시 무장대측 지도부의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 회고록의 일절이다. “그는 앉은 채 연설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민족자주독립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기들의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제주도에서도 일제시대의 몇 배되는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인 강간 고문치사 등을 일삼고 있다며, 폭동 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또 만주와 이북에서 일제시대에 악질경찰이나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던 놈들이 월남하여 반공애국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수 백 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하여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한다고 성토했다. 그래서 선량한 도민들은 견디다 못해 친일파와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의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미군정은 이 ‘의거’를 수습하기 위하여서는 제주도내에 있는 일제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된 경찰과 관리를 채용하여 제주도민을 위한 행정과 치안을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일반이니 최후의 1인까지 사투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결의를 표한다.” 이 증언은 김달삼이 사회․공산주의자인지, 민족주의자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 증언이 중요한 것은 제주4․3사건의 원인을 그 당사자로부터 들어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담판에서 무장대 대장 김달삼의 설명을 들은 김익렬은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는 당시 무장대가 ‘폭동‘을 일으킨 자기 주장을 확인한 것으로, 토벌대 사령관이 담판에서 듣고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크다.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가족을 인질로 해서라도 무장대의 귀순을 가능케 했던 토벌사령관이 무장대 두목의 말을 정리한 것이다. 이 또한 ’4․3원인론‘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다.
[‘해방공간 희생양’의 역사적 위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는 반외세․민족통일에 대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소명감으로 희생된 많은 선진들이 많다. 국가권력이 외세와 결탁하여 민중을 탄압할 때 여기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중운동도 자주 있었다. 19세기 초반부터 농민저항이 성장하여 1862년의 ‘임술민란’으로 발전했고, 그런 민중의 저항세력이 동학과 결부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대내적으로는 반봉건․사회개혁을 주장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외세․국가자주를 주장하면서 무능 부패한 봉건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봉건정부는 외세와 결탁하여 동학농민혁명세력을 진압하고 ‘동학난’이라 규정했다. 봉건조선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세력도 ‘동학난’이라고 같 개념규정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했고, 일제 강점하에서 삼일운동(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삼일운동에서 보인 민주․자주․정의의 이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는 삼일운동을 통해 발현된 민주의 이념을 임시정부의 헌장 제 1조에 투영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계승한 것이다. 이승만의 독재와 장기집권으로 민주주의와 통일의 열망이 사라지고 있을 때, 4.19혁명이 일어나 민권․민주․통일의 이념을 되살려 놓았고, 다시 유신세력과 신군부에 의해 짓밟혀졌을 때 그것을 딛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오랜 동안 군사정권의 적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민주공화제 헌법이 위기에 처했을 때 6월민주화운동을 통해 ‘1987년체제’를 만들어냈다. 정권교체 후 한동안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이 진행되었으나 반민주․반민족의 수구세력이 사회정의마저 파탄내고 있을 때 촛불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면 이 좁은 섬에서 수년간에 걸쳐 3만여명이나 희생된 제주 4․3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4․3’이 갖는 존재 양식이나 성격부터 규명해야 할 것이다. 앞의 원인론 등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조 이래 변방취급에 출륙금지, 귀양지로서 취급받아 온 제주도가 해방공간에서 육지에서 수백 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했고 미군정도 제주도내에 있는 일제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과 결탁, 제주도민들을 괴롭혀 왔을 때, 제주4․3은 1차적으로 친일세력과 ‘육지세력’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자주적 성격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제주도민은 1948년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해 왔는데, 이는 제주4․3이 바로 통일에 대한 열망과 상통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제주4․3에서 ‘자주’와 ‘통일’의 이념을 추출할 수 있다면, 비록 바다로 폐쇄된 공간에서이지만 제주4․3은 4․19에 앞서는 ‘자주’와 ‘통일’ 운동으로 개념화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제주4․3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일제강점기의 3․1운동을 거쳐 해방공간의 제주4․3,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주화운동 및 촛불혁명과 궤를 같이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위대한 운동선상에서 자리매김하여 역사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시해 본다.
[해방공간 희생양의 현재화]: 제주4․3이 한국근현대사의 운동선상에서 자리매김된다 하더라도 집단학살의 성격을 비켜갈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에 나타난 집단학살은 분단으로 인한 이념대립과 전쟁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 북한의 신천사건과 6․25때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사건들이 거의 그렇다는 뜻이다. 제주4․3은 특이하게도 고립된 도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미군정을 통해서는 냉전체제의 산물로서 국제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 사건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 중앙정부가 깊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는 일본과도 무관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강우일]. 이렇게 전쟁 시기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면서 고립화를 통해 집단학살이 이뤄졌고, 그것은 또한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학살이었다. 제주4․3은 제노사이드의 관점에서도 특이하게 다뤄지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집단학살에서 수반되는 성폭력 등 반인륜적 법죄에 대해 공소시효 등의 문제가 없지 않은 바, 개정하고자 하는 법령과 관련하여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주4․3은 일종의 ‘희생양’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해방 공간에서 제주인들은 미군정의 경찰과 경비대를 통해 초토화작전의 대상으로 희생양이 되었고,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희생양이 되었으며,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서 또 이념적 대립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성서의 희생양이 인간의 허물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는 성격을 가졌다면, 4․3사건의 희생양은 냉전체제의 희생양이었고 분단의 희생양이었으며 육지와 도서 사람의 차별에서 오는 희생양이었다. 성서의 역사의식은 고난의 때를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야훼는 네가 이집트에서 종되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한다. 제주인들도 4․3이라는 고난의 때, 희생양이 되었던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탈출을 기념하면서 유월절을 지키고 광야에서 헤매면서 고생한, 그 고난의 때를 반추하기 위해 초막절을 지키듯이, 제주인들도 4․3의 ‘고난의 때’, ‘광야의 때’를 잊지 않아야 한다.
4.3관련 인사들과 기관들은 ‘4.3’을 어떻게 기억하고 전승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있으나 지방정부적 차원에서는 아직 ‘4․3절’이 제정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주객의 본말이다. 4․3이 제주도에 대한 중앙정부의 홀대와 멸시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제주 공동체는 4․3의 자기정체성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방단위의 ‘4.3절’ 제정도 그 노력의 하나다. 4․3을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이야말로 시대마다 4․3을 ‘현재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4․3을 현재화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냉전체제․분단․이념적 대결 속에서도 4․3의 희생양적 성격을 ‘화해와 상생’으로 부활시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화해는 사랑과 평화를 포괄하고, 상생은 정의와 공동체를 수반한다. ‘화해와 상생’을 상징화할 수 있는 행사, 구조물, 예술 활동을 창조해가는 것도 과제다. 이러한 상징화의 노력들은 희생양을 각인하는 것이다. 그런 각인을 통해 4․3이 해원되고 트라우마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제주인들이 외부로부터의 강압과 폭력으로 인간 존엄과 품위를 무참히 박탈당하며 공포와 억압에 짓눌려 살아온 세월을 함께 공유하고 성찰하는 일은 이 나라 국민 모두, 그리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리라”(강우일)는 소망을 성취시켜 줄 것이다.
4․3과 관련,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 있다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러 선학들이 4․3문제 해결과 그 역사적 계승을 위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고희범, 박경훈, 박찬식, 양동윤, 양윤경, 이규배, 허영선) 이해한다. 그러나 4․3사건의 해결도, 다른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 성숙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내 경험을 통해 본다면, 친일인명사전의 초기 편찬위원장 책임을 맡았을 때 ‘왜 해방 후에 친일파를 다 청산하지 못했는가’라면서, 이승만과 그 정부 그리고 그 시대를 원망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니, 친일파들이 역사를 역진시키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역설적으로 친일문제에 대한 후진들의 역사의식이 환기되고 시대마다 친일청산을 외치게 하는 여지를 남겨 놓게 되었던 것이다. 4․3에 관해서도 4․3정신의 형해화를 우려하는 뜻있는 분들의 울분과 한숨이 묻어나옴을 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역사는 ‘시간과 과정’ 속에서 완성되어가는 것이기에 그 사건 추이의 기복을 여유있게 보면서 우리 다음 세대가 이뤄가야할 4.3이념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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