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1

朴正煕 - Wikipedia 일어한역

朴正煕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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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정희정희
박정희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임기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총리

임기1961년 7월 3일 – 1963년 12월 17일
내각 수반

임기1962년 6월 18일 – 1962년 7월 9일

출생1917년 (타이쇼 6년) 11월 14일 일본 통치하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대일본 제국의 국기
죽음1979년 10월 26일 ( 61세몰) 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종로구 미야이동
대한민국의 국기 
정당
출신 학교
배우자
자녀
서명
박정희 다카기
마사오
소속 조직 만주국군대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군력1944년 - 1963년
최종계급중위( 만주 국군)
대장 (대한민국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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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각종 표기
한글 :박정희
한자 :박정희
발음:

박정희

박정희
일본어 읽기:나 탓
로마자 :Bak Jeonghui( 2000년식 )
Pak Chŏnghŭi( MR식 )
영어 표기: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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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煕(박정희, 박정희 [ 2 [ 3 ] , 일본어 읽기: 나 탓, 한글 :  박정희 , 1917년 < 대정 6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은 대한민국 의 정치가 , 군인 .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 에서 제2공화국 체제를 붕괴시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해 민정이관 후인 1963년 부터 1979년 까지 대통령 (제5대부터 제9대)을 맡았다. 그의 시대부터 약 30년간에 걸쳐 '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고도경제성장이 실현되고, 한국은 세계최빈국 층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 4 ] .

한편 1972년 자기 쿠데타 및 헌법 개정( 십월 유신 )에서 대통령 임기와 중임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영구 집권을 도모하려고 하고, 또 민주화 운동을 스파이 조작이나 사법 살인 등으로 탄압했다고 ' 독재자 '라는 비판적 평가도 받고 있었다. 임기 중 1974년 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암살을 도모해(1회째는 문세광 사건 , 아내의 육영수가 사망), 2번째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암살 사건 ).

본관 은 고령박씨 .  는 중수 (청수, 중수 ). 창씨 개명 에 의한 일본 명은 타카기 마사오 ( 타카기 마사오) [ 5 ] . 첫 번째 아내에게 김호남 조선어  ) . 두 번째 아내에게 문세광 사건 으로 암살의 희생이 된 육영수 . 호남과의 사이에 장녀의 박재옥 조선어 판) . 영수와의 사이에, 차녀로 제18대 대통령의 박근혜 와, 장남으로 EG테크 현 회장의 박지만이 있다.

개요

소스 편집 ]

한일병합 후 한반도  박성과 백남 의 막내로 태어난다. 일본명에서는 타카기 마사오 (타카기 마사오)라고 자칭했다 [ 5 ] . 대구사범학교 를 졸업하고 교원을 단기간 맡았다. 이윽고 만주국군 의 군관( 장교 )을 뜻하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 대일본 제국육군의 육군사관학교 에 상당) 예과 에 1939년 4월에 입교해, 1944년 4월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대일본 제국 육군의 육군 사관학교의 유학생 과정에 단기간의 파견을 거쳐 1944년 9월 만주 국군 소위 에 임관했다. 팔로군 과 대일 참전 한 소련군 과의 전투에 참가해 내몽골 자치구 에서 종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 베이징에 설치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계 주민에 의한 독립조직)에 합류해 한반도 남북 분리 시 남부 대한민국 을 지지해 국방경비대의 대위가 됐다. 국방경비대가 한국 국군으로 재편된 뒤에도 종군을 이어, 한때는 남조선 노동당 원이었던 것이 발각되어 군법회의 에 걸리지만, 전향 하여 당내 정보를 제공한 것과 그 능력의 높이를 평가한 군 장교에 의한 조명 탄원으로 군적 박탈에 머물며, 이후는 군의 조쟁으로, 군의 발탁(문민)

조선전쟁 종결 시에는 육군 대령으로 승진, 1959년에는 육군 소장, 제2군 ​​부사령관의 중직을 맡았다. 한편 내전을 마친 한국 내에서는 이승만이 한 대규모 부정선거가 원인으로 4월 혁명이 발발해 제2공화국 체제가 성립하더라도 의회 혼란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흥과 공업화 등이 진행되지 않고 또 군내 부패도 심각화하고 있었다. 이들 상태에 대해 1961년 5월 군 장관, 장교, 사관 등의 개혁파를 이끌고 쿠데타를 결행해 군사정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을 성립시켰다( 5·16군사 쿠데타 ). 형식적인 민정이행이 이뤄진 뒤에도 실권을 계속 잡고, 자신의 정당인 민주공화당에 의한 사실상 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제5대부터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 재임 , 1963년 -1979년)과 대통령 임기  5 기에 걸쳐 맡아 권위주의 체제 .

독재 정권 하에서는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내각 총리 대신과의 한일 기본조약을 비준하여 한일 양국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또한 미국 린던 존슨 대통령 의 요청을 받아 1964년 베트남 전쟁 에 한국군을 파병 했다. 일미 양국의 경제지원을 얻어 '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부터 1970년대 에 걸친 박정희 집정하의 고도경제성장으로 1970 년경 까지 경제적으로 열위였던 같은 조선민족 의 분단국가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을 경제적으로 추월해 최빈국 그룹에서 벗어났다.

한편 통제적인 군사 정권 하에서는 민주화 등의 운동은 철저히 탄압되어 인권상 문제가 있는 고문과 정치범의 투옥 등도 벌어졌다. 대외정책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일관되게 친미 정책을 취했지만 미국 중국 교 정상화 이후는 독자 핵무장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카터 대통령의 강한 견제를 받아 실패했다. 또 일본과의 우호자세도 국내 민족주의 ( 좌파 내셔널리즘 )에서 적시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권 후반에는 단독으로 핵무장 등 자주 국방노선과 일본에 체류하던 민주화 활동가 김대중을 첩보기관( KCIA )으로 납치 하고 국가 주권 을 침해하는( 김대중 납치사건 ) 등 강경한 정책을 추진했다.

1979년 10월 26일 대규모 민주화 시위(부마 민주항쟁 ) 의 진압을 명령한 직후 측근인 김재규 KCIA 장관에 의해 차지치 청와대 경호실장 모두 암살됐다. 향년 61세.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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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정희, 박근혜 , 박지만 , 박근령 , 육영수 .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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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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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일본 통치하의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쿠미, 현재 구미시 ) 상모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5남2녀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46세였던 아버지의 박성彬은 과거 에 합격했지만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뒤 몰락해 묘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상류계급( 양반 )으로 가족에게 중등도의 토지를 상속할 예정이었지만, 1894년부터 1895년의 동학농민혁명 에 참가한 뒤 일족으로부터 추방됐다. 1916년에 아내 마을인 상모동으로 옮겨 작은 땅을 받았다. 나중에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아내와 함께 땅을 경작하지 않고 대신 술을 마시고 방랑했다. 박의 전기 작가인 이정식은 박의 아버지는 양반의 지위를 잃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일하는 곳을 보지 않으려 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박의 어머니인 백남의는 동세대 사람들로부터 근면하고 집중력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가사와 농업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박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43세였다. 노인과 비참한 경제 상황 때문에 임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녀는 여러 번 낙태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아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2살 때 화로에 떨어지고 양팔에 화상을 입고 평생 그 흔적이 남았다 [ 10 ] . 그 후의 인생, 흉터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긴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에 7세로 하여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 11 ] . 그가 다니던 구미 초등학교는 집에서 6km 떨어져 있었다. 매일 긴 통학과 배고프가 그의 몸을 먹고 있었다. 또,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은 괴롭고, 비타민A 결핍 때문에 야맹증 이 된 적도 있었다 [ 12 ] . 후세, 술에 취할 때마다 친구나 측근에 “나는 진짜 가난함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 주석 1 ] . 초등학생 시절 박정희는 이순신 과 나폴레옹 과 군인이 되는 것에 대한 동경을 안았다 [ 13 ] . 집이 가난한 데 병약했지만, 우등으로 졸업했다.

교사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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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교사의 추천을 받아 대구사범학교 를 수험하고 1932년 100명 중 51번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 14 ] . 황민화를 구석구석까지 강요한 대구사범학교에서의 생활은 박정희의 기질에 친숙하지 않고, 3년차에는 성적 부진에서 관비지급생을 탈락, 4년차에는 성적 최하위가 됐다. 한편 검도, 계기체조, 축구, 단거리 주행 등 스포츠에는 나란히 관심을 보였다. 박이 또 하나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이 군사교련 이었다. 사범학교의 배속 장교인 아리카와 케이이치 육군 중령 [ 주석 2 ] 은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멸시한 태도를 취하는 어떤 의미 공평한 인물인 것 같고, 이것이 박의 흥미를 끌었다. 아리카와도 박을 몹시 귀여워, 동작의 모범을 나타내는 훈련 조교에 쓸 정도였다 [ 15 ] . 5학년 때 보병 제80연대 에 2주간 입대했을 때도 모범연기에 선정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총검술은 현역 군인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 16 ] . 사범학교 졸업 후인 1937년 4월에 경북 문 경 공립 보통학교에 부임, 차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본인의 교장이나 교원에게 불만을 품으면서도, 일본군 의 군인을 동경하는 열심한 교사로서 근무했다 [ 17 ] . 덧붙여 사범학교 4년차의 여름방학중에 김호남과 결혼하고 있지만, 부모의 약정이었기 때문에 전혀 정이 옮기지 않고, 결혼한 것을 동급생에게 말하지도 않고, 교사 부임 후에는 종전까지 전혀 만나러 가려고 하지 않았다 [ 18 [ 19 ] . 학예회나 운동회의 단체경기에서 전쟁을 취급한 출물을 하거나, 휴일에는 학생들을 모아 전쟁 놀이를 하거나 목도로 검도를 가르치는 등 군국색의 강한 지도를 하고 있던 반면, 일본인 교사가 없을 때는 학생에게 조선어의 사용  추천 하거나 [ 20 ] . 또한 학생들에게 군대 래퍼를 불어 보여 학생들이 그 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등 친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중전쟁 하에서의 「총력전」의 목소리 아래에서 추진되고 있던 범주두를 거부해 장발을 계속했기 때문에, 1939년 가을에 문경을 방문한 시학감 에 훔쳐, 주연의 자리에서 충돌, 그 후 교사의 직을 그만두었다 [ 22 ] . 다만 당시 가르침에 따르면 장발이었던 것은 가난하고 배리칸을 갖지 않았던 조선인 학생 측에서 박정희는 주위의 일본인 교사로부터 감독 책임을 묻고 자주 충돌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시학감의 마중에 혼자서는 가지 않고 랩퍼를 불고, 급사의 경고도 무시했기 때문에 일본인 교사로부터 가방을 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있어 [ 23 ] , 장발 사건의 이야기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혼동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군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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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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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군 군관학교의 일본계 장교 틀의 수험허가를 특별(연령제한에 따라 수험자격이 없기 때문에)에 요구하는 혈서에 의한 탄원서를 제출( 1939년 3월 31 일자 『 만주신문』).

1939년 교사 실직 후, 사범학교 시절의 배속 장교였던 아리카와 케이이치 육군 중령의 추천을 받아 만주국군 군관(만주국군 장교 )이 되기로 결의했다.

1939년 4월에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예과( 대일본 제국 육군 의 육군 예과사관학교 에 상당, 만주국 의 수도 신쿄 에 소재)에 입교해 , 1942  10월에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본과 황제  을 배수) [ 7 ] .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던 정일권은 군관학교 시절의 박정희와 친해졌으며, 신경에서 만날 때에는 종종 일본 제국주의가 멸망하고 한국이 독립한다는 뜻을 박정희로부터 술 자리에서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24 ] .

1944년 4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본과를 졸업한 후 대일본 제국육군 육군사관학교 유학생과정에 단기간(최장 3개월간) 파견되었다( 대일본 제국육군사관학교 57기 상당, 육사졸업생 일람에 이름이 게재되어 있다) [ 7 ] . 다만, 군사사의 권위인 진이쿠 히코 의 견해로는 박은 엄밀하게는 육사의 졸업자가 아니다 [ 7 ] .

만주국으로 돌아온 박은 1944년 7월 만주국군 소위  임관해 대일본 제국육군 관동군 의 밑바닥 부대에 배속됐다 [ 7 ] . 만주국군 소위에 임관 후 만주국군 제5군관구 예하 [ 25 ] 의 보병 제8단(소재지:아타카와성 흥류현 반벽 산진 ( 중국어판 , 단장 :당두영상교)의 조선인 장교 4명 중 한  [1944년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경까지 행해진 팔로군 토벌 작전에서는 제8단 제2연배장으로서 참가 [ 26 ] . 그러나 박의 부대는 팔로군과 교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 26 ] .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 에 진급, 소련 대일 참전 에 의해 1945년 8월 9일 소련군  만주국으로 진공한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시 제8단 부관을 맡고 있었다 [ 27 [ 28 ] . 부관에는 갑을 두 종류가 있었지만, 박은 을종 부관이며 주로 예하부대에 작전명령통달과 단기 관리를 하고 있었다 [ 26 ] .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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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박정희 준장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 몽골 자치구 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종전을 맞은 박정희는 만주 국군 의 중국인 장교 로 무장 해제된 후 1945년 월 29일 북경 으로 정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됐다 [ 29 ] .

일본 항복에 의한 조선 해방 후 1945년 2월 연합국 정상에 의한 야르타 협정 에 근거하여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반부 연합국군정을 위해 1945년 9월 8일 미군  인천  상륙해 미군은 이미 존재한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 건준) 통치 에 둔 [ 30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는 이 재 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과 대립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군대'로서의 귀환을 허락받지 못하고 1946년 5월 8일 '개인자격'으로 부산 에 상륙했다 [ 31 ] .

귀국 후 1946년 9월에 남조선 국방경비대 의 간부를 육성하기 위해 미군정청이 설치한 교육기관 '조선경비사관학교 [ 주석 4 ] '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 32 ] . 다음달인 1946년 10월 1일 대구 에서 공산당  지도한 폭동사건, 이른바 ‘10 ·1폭동사건 ’이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구미 지역의 유력한 로운 운 지지자 였던 삼형의 박상희 가 경찰에 살해됐다 [ 33 ] . 그 후 박정희는 1947년 9월 대위에 임관 됐다 [ 34 ] . 한편 삼형 박상희가 살해된 뒤 로운亨이 결성에 관련된 남조선노동당 [註석5 ] 이 박상희의 유족을 돌보던 연결에서 박정희도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했지만, 1948년 8월 15일 북한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1948년 10 월 19일 남조선 노동당에 호응한 대한민국 국군 의 당원 장교가 여수·순천사건을 일으키면 군내 당세포 였던 것이 숙군 운동 에 의해 발각되어 11월 11 일 체포 , 서울 서대문  . 이때 전향해 남조선노동당의 내부정보를 제공한 것과 박정희의 군인으로서의 능력높이를 평가한 백선엽 , 전용덕 , 김일환 등 군내 요인의 조명탄원으로 무관면직과 함께 1949년 4월 사형을 면했다 [ 36 [ 37 ] .

면직 후에는 ' 육군정보과 북한반상황실장'으로 북한의 정보분석에 근무했으나 1950년 6월 25일 조선 전쟁 발발 후 소령으로 군역 으로 복귀하고 같은 해 안에 육영수 와 재혼 하고 있다 조선 전쟁 중인 7월 14일 현역 군인으로 복귀한 뒤 1950년 9월 15일 중령 으로 승진 , 1951년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승진하고 39 ] 1953 년 월 27일 조선 전쟁 휴전협정 조인까지 대령 으로 승진했다 . 박정희는 이 조선전쟁시에 미군의 군인도 인정할 정도의 근금이 들어간 반 공산주의자가 되고 있다 [ 40 ] .

조선전쟁휴전 후 미국 육군 포병 학교에 유학했다 . 미국 육군 유학으로부터의 귀국 후에는, 1955년 7월 14일 에는 제5사단장, 1957년 에 육군 대학을 졸업해 제7사 단장, 1959년 7월 1일 에는 제6관구 사령관, 1960 년 1월 21일 에는 부산 군 수기지 사령부 사령, 1953년 에 준장 , 1959년 에 소장 으로 승진하고 있다 [ 41 ] .

정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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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와 국가 재건 최고 회의 (1961-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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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명위원회 ' 앞에서 회견에 응하는 박정희 소장
(중앙 부분·오른쪽에서 두 번째).

1960년 4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 월 혁명 으로 실각한 뒤 학생들이 남북한 회담을 열려고 하는 정치적 소란 속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장도 육군 중장  의장에 세워 6군사 쿠데타 ) 반공산주의 , 친미 정책, 부패와 구악의 일소, 경제 재건 등을 결기의 이유로 했다.

당시 육군 소장의 계급에 있어 제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한국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을 중심으로 한 그룹으로 추려져 쿠데타 그룹의 리더가 됐다 [ 42 ] . 한국 육사 8기생은 1945년 해방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자전으로 훈련한 군인들이며, 그 중심인물이 금종비 였다 [ 주석 6 ] . 1961년 시점에서 약 60만명의 인원을 보유한 군대 그 자체의 규모에 비해 쿠데타에 동원된 인원은 반드시 많지는 않았고 성공도 각속할 터였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 부대가 1961년 5월 16일 국영방송국( KBS )을 점거했을 때 박정희 소장과 함께 결기한 병사는 전군 중 3,600명에 불과했다 [ 43 ] . 이미 1960년 4 월 혁명 직후 박정희 소장은 군내 인사의 일신을 요구하고, 육군참모총장의 송애만 중장 에 대해 서한으로 사임을 요구했지만(' 청군운동 ') 한국 육사 8기생이 요구 하는 군내 인사의 변경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에 1960년 9월 10  ' 충무 장 결의 '에서 박정희 소장은 장래 군사 쿠데타 를 결정했다 [ 44 ] .

또 이 5·16 군사 쿠데타 는 한국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반대했지만 육군사관학교 11기생 전두환 은 박정희 소장에 의한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전두환의 호소로 육군 사관학교 학생들이 쿠데타 지지행진을 했다 . 한국 육군 사관학교 11기생에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 노태우 등이 포함 되어 있어 박정희가 경남 출신이었던 적도 있어 동향 전두환  ' 하나 페'( 일심회 ) 를 결성해 영남 출신자 와 의 군내정쟁 속에서 ' 영남군벌 ' 을 구축했다 [ 46 ] . 이들 군인들에게는 지방의 빈곤층 출신자가 많아 그들의 신망을 모으고 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 부대는 군 정상의 회유에 성공했고 나중에 군 정상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일소하는 것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쿠데타그룹은 스스로를 '혁명주체세력'이라고 부르며 계엄령을 내렸다. 금융 동결, 항만·공항을 폐쇄, 의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장면 정권의 각료를 체포했다.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권은 1961년 4월의 플라야 힐론 침공 사건 실패로 쿠바 혁명 후에 구축되고 있던 피델 카스트로 체제 의 타도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후 시말에 바살당하고 있어 미국 국내에서 장공 정권을 지지한 반 쿠데타파를 쿠데타 장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47 ] .

군이 갑자기 정치의 표 무대에 춤추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의 정치사 에서 예를 보지 않는 거대 세력이었다 [ 주석 7 ] .

이렇게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 국가재건 최고회의 '로 개칭해 스스로 의장으로 취임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박정희는 치안유지와 경제개선을 위해 '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을 시행했다. 6월 10일 에는 비밀첩보기관· 대한민국중앙정보부 (KCIA)를 발족시켜 초대부장에게는 김종비가 취임했다 [ 48 ] . 7월 3일 에는 쿠데타 당시 의장에 세운 장도중장을 실각시켜 군사 정권의 톱에 선다. 이들 권력탈취 과정에서 군사독재 정치색을 강해 갔다. 이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자주 일어나게 되지만 박정희는 KCIA를 이용해 잡았다. 또 부패 정치가의 배제·암거래의 적발·치안 향상을 목적으로 한 풍속점 적발 등도 실시해 “ 야쿠자도 적지 않는 박장군 요출전 ] ”이라고 말하게 된다.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정권탈취 후 일한국교정상화에 의욕을 보이며 1961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일본 측 대평 정방 외무 대신과 김종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 장관의 협상. 또 박정희 자신도 같은 해 11월 12일 일본에 이케다 총리와 조기 타결에 대해 회담했다 [ 49 ] . 그 결과 ' 금·대평메모 '가 작성되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협력자금 1억 달러 이상'의 내용으로 합의했다 [ 50 ] . 박정희는 이 배상청구에 의해 대한민국 경제를 다시 세우려고 했지만 '김 ·대평메모 '의 합의액은 이승만 정권기의 대일배상청구액이었던 20억 달러나  2공화국 기의 38  5000만 달러에 비해 적었 기 때문에 한국 내 여론 .

또 박정희 의장은 1962 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시에 채용한 ' 단군기원 '에서 ' 서력 '으로 달력법 을 변경하고 있다 [ 52 ] .

박정희 대장제대식(1963년)

그 후, 정권에의 미국의 지지를 설치하기 위해 방미하게 되어, 미국 대통령 과 균형을 이루는 계급을 주어야 한다는 군 장로의 진언에 따라 대장 으로 승진했다. 방미의 왕로, 일본에 들러 11월 12일 에 이케다 용인 총리 와 회담, 한일 양국의 시급한 국교 정상화로 합의했다. 이때 일부 일본어 를 사용해 회담했기 때문에 한국 내 반일세력에서 비판을 사게 됐다. 방미에서는 민주당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  실현했다.

제3공화국 시대(1963년~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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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현재 독일 연방 공화국 의 전신)의 빌리 브란트 사민당 당수와 함께( 1964년 12월 10일 ) .
방미시 백악관에서 케네데이 대통령 부부와(1961년 11월 14일)

1962년 12월 17일 에 ' 제3공화국 헌법 '이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어 대통령 임기를 2기까지 정한 제3공화국이 성립했다 [ 53 ] . 1963 년 군사정권인 국가 재건 최고회의가 민정으로 복귀했다. 박정희는 8월 군을 퇴역해 민주공화당 에서 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에 입후보해 민정당 의 윤택선 전 대통령을 약 15만 표 차이로 꺾고 스스로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제5대 대통령 취임 후 1964년 1월 10일 '연두교서 연설'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결속을 요구하는 미국의 의향을 염두에 박정희는 한일관계 개선을 호소했다 [ 54 ] . 이에 대해 1964년 4월 고려 대학 이명박 주석 8 ] 학생회장이 한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지도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학생 운동 에 대해 계엄령을 발하고 이명박을 포함한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 55 ] .

이러한 국내의 반대를 억제하면서 1965년 6월 22일 에는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내각 총리 대신과의 사이에 ' 한일기본조약 '을 조인하고 8월 14일 에 여당 민주공화당 단독참가의 국회에서 이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했다 [ 56 ] . 한일기본조약은 일본 통치시대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금으로 나라를 팔는 것으로 한국 국내에서는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발생했다. 민주화 활동가의 대학생과 시민, ‘평화선’(이승만 라인 ) 의 견지를 요구하는 야당 민정당 김영삼 의원 들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한민국 국내에서 ‘굴욕외교’에 대한 격렬한 저항 이 펼쳐지 는 가운데 일본 과 의  ] . 또 일본 국내에서도 조약에 근거한 거액의 자금제공은 독재 정권을 이리자 반대 운동이 일어나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재일조선인 의 존재를 본국정부(귀국의 수용을 거부한 이승만 정권 [ 59 ] ) 의 책임으로 전후 일본에 불법 입국 한 경우나 조선 총련 등 일본 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한 경우도 용서한다며 한국에 귀국을 촉구하는 담화

그 후 1963년 11월 22일 달라스 에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후 부통령 에서 대통령 으로 승격한 민주당 린동 존슨 정권의 요청에 따라 1964 년 대한민국 국군 의 베트남 전쟁 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 61 ] .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파병 에 있어서는, 남 베트남군 이외에서는 미군에 이어 약 5만명의 대한민국 국군 장병을 남베트남 에 파견해, 남 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 (베트콘)과의 싸움에 종사시켰지만, 미국군과 남베트남군 의 패배 군 멀리 갔다 . 또 이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파병 에 즈음해 대한민국 국군은 ' 퐁니 퐁냐트의 학살 ' 등 비무장 베트남인에 대한 전쟁 범죄를 벌여 베트남 전쟁 종결 후 월한 관계 에 숙근을 남기게 됐다.

4년 임기 만료에 따라 1967년 대한민국 대선 에서 여당의 민주공화당 에서 입후보하고 신민당 에서 입후보한 윤선선을 다시 깨고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68년 1월 21일 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북한)이 ' 대남공작 '에서 파견한 조선인민군 의 게릴라 부대 에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습격당해 암살당하고 있다(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 이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 북파 공작원 '으로 북한의 김일성 총리 암살을 위해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 (684부대)를 창설했지만, 1971년 8월 23일 684부대는 처우를 둘러싸고 반란을 겪었다 .

그동안 경제정책에서는 일본을 모범으로 한 경제정책을 썼다. 개발독재 라고 불리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소비에트 연방 의 계획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62년 부터 시작된 수차에 걸친 5개년 계획 계획 방식이 그것이다. 또 박정희의 경제개발 수법이 실제로 보고 들은 만주국의 경제 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동안의 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을 대담하게 수출형 중공업화에 의한 경제 이륙 정책으로 전환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 주석 10 ] . 국가주도로 산업육성을 도모하기 위해 경제개발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재벌 과 국책기업을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 얻은 돈과 물건을 중공업에 중점적으로 투입했다. 이에 따라 건설된 대표적 시설에 하치만 제철소 를 모델로 한 포항제철소가 있다. 또 “ 일본 경제 급성장 의 비밀은 석유화학 에 있다”며 석유화학 공장 건설을 서두르게 했다. 서독 에 탄광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해 그 급여를 담보로 차관을 받은 것으로 시작되어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체결로 얻은 자금이 부족했던 인프라의 정비에 충당한 것이나 베트남 참전 에 의한 특수  이 ' 한강의 기민 '이라고 불렀다 . 특히 한일기본조약에 근거하여 1966년부터 1975년 2월까지 일본에서 지급된 5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포항종합제철공장 , 쇼 양강 다목적 댐 건설 등 한국의 제2차 5개년 계획 실현 시 ' 한국 의 국민경제 향상 발전에 적은 기여를 했다' [ 대일 청구권백서]에 기록되었다 [ 63 ] . 또 한국과학기술원을 창설하는 등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을 확립했다 [ 64 ] .

1963년 에 촬영된 사진.

또한 1970년대 초부터 ' 새마을운동 '이 되는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했고 1976년 농촌전화율은 91%에 달했다 [ 65 ] .

1969년 스스로 대통령 3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3선 개헌을 실시한 뒤 1971년 4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에서는 신민당 김대중을 깨고 뜻대로 3선을 완수해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덧붙여 이 취임식에는 일본으로부터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참석해, 박은 식의 끝에 사토와 악수를 하는 퍼포먼스를 실시했다(사토는 이날의 일기 에 「일치 연극이 걸린 포즈인가」라고 기재하고 있다) [ 66 ] . 그동안 베트남 전쟁 의 막힘 속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0년 3월 26일 주한 미군 의 삭감을 대한민국에 전해, 다음 1971  에는 미국과 북베트남 과  비밀 협상이 진행되고, 또한 닉슨 대통령 방중 계획이 발표되었다 . 이런 냉전 데 탄트 중 1970 년 8월 15일 연설에서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는 신승이었고, 직후인 1971년 5월 25일 에 실시된 국회 총선거 ( 제8대 총선거 )에서 야당이 약진하여 여당이 의회의 2/3 이상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대통령 4선은 불가능해졌다 [ 68 ] .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 기반을 흔들며 국내 반체제 학생운동이 가속,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국가 비상사태 선언을 내는 등 독재색을 강하게 했다 [ 69 ] . 박은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위협에 대화로 임해, 1971년 2월 6일 에 발표된 미한공동성명에 의해 주한미군 의  7보병사단을 철퇴시켜, 1972 년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김일성 총리와 함께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하고 있다 .

제4공화국 시대(1972년 10월 17일~197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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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 의 다음 1973년 10월 1일 에 열린 대한민국 국군 의 퍼레이드.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이 매스게임 으로 표현되고 있다.

しかし、南北共同声明発表後も朴正煕大統領の内憂外患への疑念は収まらず、1972年10月17日には非常戒厳令を宣布し(十月維新)、大統領の任期を6年に延長するなどの憲法改正を行って維新憲法を制定、第四共和国に移行した[ 72 [ 73 ]。 이 직전의 1972년 10월 6일 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대통령 부인의 방일 계획이 발표되어, 다나카 가쿠에이 카쿠 총리 대신과의 회견 및, 쇼와 천황 주최 의 미야 나카 만찬에의 출석이 언급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에 있어서 이 방일전 의 발표 ] .

김대중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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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 이후 정치적인 슬로건 으로 '유신 체제'를 표방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권력 기반을 강화한 박정희는 스스로를 위협하는 자에 대해서는 정적뿐 여당의 유력자라도 물러나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에서 함께 입후보자가 된 정적 김대중에 대해서는 도쿄  호텔 그랜드 팰리스 에 머물고 있던 1973년 8월 8일 에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에 의한 납치사건을 일으켜 일본 여론은 일본국에 대한 주권 침해 라고 박정희 . 김대중 사건에 의해 악화된 한일관계는 박정희 대통령과 다나카 각영 총리대신 사이의 정치적 결착에 의해 결착했지만, 일본의 매스미디어는 그 후의 김대중 수감에 대해 박정희 정권 비판을 거듭하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이 김대중 납치 사건 에 따라 국제 . 덧붙여 이 일본 ​​측으로부터의 김대중 납치 사건에 있어서의 「주권 침해」의 목소리에 대해, KCIA의 ​​이후경 부장 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 이야말로 주권 침해라고 반비판하고 있다 [ 77 ] . 또 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있어서 북한은 조선통일문제 의 북측으로부터의 대화 중단의 의지를 한국에 전하고 있다 [ 78 ] .

문세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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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 일본 통치 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 의 축하 행의에 참가했을 때, 재일 한국인 · 문세광 으로부터 총격되어, 박정희 자신은 무사했지만, 아내의 육영수가 머리를 쏘아 사망했다( 문세광 사건 ). 덧붙여 이 때에 이용된 권총은 문세광이 일본의 경찰관을 습격해 강탈한 것이었던 것과,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총련 을, 자유민주당 의 일부나 일본 사회당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 및 경찰측이 계속 옹호한 적도 있어, 한일 양국의 정치 문제 로 발전했다. 또 이 사건은 일본의 매스미디어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 비판에 의해 악화되고 있던 한국의 여론을 더욱 대일강경적인 것으로 하고, 주한일본대사관 에서 한국인 군중에 의해 일장기가 태워지는 등, 한일관계를 보다 악화하게 되었다 [ 79 ] . 다만 이 시위는 김대중 사건에 의한 국내 의 혼란이나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한 관제 시위였다는 설이 한일의 좌파 세력의 일부 등에서 주장되고 있다 .

김대중 납치사건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과 반공법 등 법령에 따른 반정부 세력에 대한 강권적인 탄압은 '유신 체제'기에는 가혹을 다했다. 공산주의자나 ‘ 북한의 간첩 ’ 적발에 이름을 빌린 불법 고문·분죄 사건은 매거에 여유가 없다. 그 중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에 의한 1975년 11월 22일 ' 학원 침투 스파이단 사건 '은 동시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 주석 11 ] .

국내에서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언론 탄압 도 자유주의 국가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행해져 영화의 대사 하나까지 나라의 검열이 및 해외 신문, 특히 박정희 정권 에 비판적이었던 일본의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한국으로의 수입이 금지될 정도였다.

핵무장구상과 코리아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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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정책에서는 북한과 군사동맹의 중조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을 맺고 있던 중화인민공화국 의 핵무기 개발 에 대항해 비밀리에 핵무기·미사일 개발에 착수해 한국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는 미국과 충돌한 뒤 중지하는 등 베트남 전쟁파병으로 긴밀한 '소강국' 비전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자주 국방계획을 추진했다.

게다가 1976년 에는 재미 한국인 로비이스트 박동선이 미국 하원 의원을 인수하려 했던 '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각되어 박정희가 구상했던 한국의 핵무장 구상과 함께 이미 악화된 한일관계 뿐만 아니라 미한관계도 악화시켰다 [ 80 ] . 1976년 10월 사건발각에 의해 악화된 미한관계는 1977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민주당 지미 카터가 ' 인권외교'의 관점에서 같은 해 5월 3일 한국 로데시아 , 브라질 삼국을 명지 로 비판받은 것으로 추재 81 ] .

이와 같은 미한관계의 악화 속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한 번 포기했으나 이후에도 자주 국방을 위해 1978년 까지 핵무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 82 ] . 또 수면 아래에서는 당시 미중접근과 일본 중국 교 정상화에 영향을 받아 미쓰비시상사 당시 후 지노 타다시로 사장의 뒷받침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鄧小平과 경제협력을 명목에 접촉해 [ 83 ] 암살 직전 까지 중한 의 핫라인 개설도 협상 중한의 핫라인은 2015년 딸 박근혜 대통령이 개설할 때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 85 ] .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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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장례식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에 걸쳐 부산 · 마산 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부마 민주항쟁 )가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밤 연회 중에 측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 부장 김재규 에 의해 같은 측근이었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치 모두 사살됐다( 박정희 암살 사건 ). 향년 61. 암살 후 국장이 집행 되고 시신은 국립묘지 현충원 에 묻혀 있다. 덧붙여 박정희는 1985년 에는 스스로 하야하자 측근에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사건 후 ‘서울 의 봄’ 이라 불리는 민주화 분위기가 대한민국으로 충만했지만 같은 해 12월 12일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과 그 동기로 제9보병사 단장의 노태우 양 장비 를 중심 으로 한다 . 군의 실권은 하나페에 의해 장악되어, 다음 1980년 5월 17일 에 의한 「5·17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와 그 직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사건 )을 거쳐, 대한민국은 다시 군인 출신의 전두환에 의한 제5공화국 에 돌입.

사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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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0~22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의 호감도 조사(역대 대통령에서 가장 호감을 가진 사람을 1명만 선택하는 조사)에서 25.2%를 기록해 2위였다(1위는 54.2%를 기록한 노무현 ). 세대별로는 60대와 70대 이상으로 1위를 차지했다. 60대는 42.5%, 70대 이상은 55.0%가 박정희를 뽑았다. 그러나 20대에서 박정희를 택한 것은 불과 2.7%, 30대는 4.1%, 40대는 11.4%, 50대는 26.5%로 1위 노무현에 압도적인 차이를 냈다. 20대와 30대에서는 노무현, 김대중  후진을 숭배해 3위를 차지했고, 40대에서도 3위인 김대중과 1%밖에 차이가 없었다. 전국의 모든 지역 (서울 , 인천 · 경기도 , 충청 대전시 · 세종  · 충청북도· 충청남도), 호남( 광주시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대구 · 경상북도 , 부산 · 울산 · 경상남도 , 강원도·제주도 의 7 개 하나도 없었다. 호남과 충청에서는 노무현, 김대중의 후진을 숭배해 3위를 기록했고, 서울에서도 3위인 김대중과 2%밖에 차이가 없었다 [ 86 ] .

2011년 시점의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사정도 있어, 평가는 각인의 입장에 있어서 마을 거리이지만, 일반론에 있어서는, 정치면에서는 목적을 위해서는 부당한 수단도 괴롭지 않았지만, 사인으로서는 청렴이라고 평가되고 있었다(가장 박정희가 뒷받침했지만)

1999년 에는 미국의 잡지 ' 타임 '에서 '올 세기 가장 영향력이 있던 아시아의 20명 [ 주석 12 ] '에 한국인에서 유일하게 선정됐다.

긍정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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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기반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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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는 아버지 박정희의 공적에 부딪쳐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내걸고 2013년 2월 25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으로 취임했다.

박정희의 사후, 일찍부터 눈을 돌려 온 군인 전두환이 , 1980년 5월 17일 에 「5·17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로 실권을 장악한 후, 제11대,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개발 독재  를 그러나 1987년 6월 29일 ' 민주화 선언 ' 이후 그 달성감에 따라 민주화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한 것, 생활이 풍부해졌다고 국민이 느끼기 시작한 것으로 개발 독재 하에서 실현된 ' 한강 의 기적 '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성장에 의해 대한민국을 중화 민국 되는 발판을 만든 것과 군사 정권 하의 치안  장점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나왔다.

특히 정적이었던 김대중이 1997 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표를 받아들이기 위해 통합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처럼 죽는 날까지 박정희를 비판한 정치인도 있었다. 김영삼의 경우 경제정책도 장면내각 계획을 쿠데타 모두 빼앗아 갔다며 박정희를 낮게 평가했다.

내정은 전형적인 개발독재 이며 군인으로서는 드물게 강한 경제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다. 박정희가 경제를 최우선으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경험이라는 주장 외에도 5.16 쿠데타의 다른 주요 인물도 경제 성장을 중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쿠데타 정권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의 정통성 확보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성장의 모델 케이스로서 박정희는 춘추전국시대 중국과 메이지유신기 일본의 부국강병의 논리를 잘 강조했다고 한다 [ 87 ] .

쿠데타 직후, 최초로 착수한 것은 농촌에 있어서의 고리채 정리법(일종의 덕 정령 )이었다. 공업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을 무렵에는 농업의 지연이 눈에 띄게 되었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농업정책에 있어서는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농촌의 근대화를 완수했다. 또한 고속도로 건설에도 힘을 쏟았다. 교육정책에도 고등학교 를 대폭 증설해 고등교육 기관 진학률을 아시아 최고의 것으로 만드는 등 힘을 쏟았다. 또 인사면에서도 부산시 도시건설에서 역량을 발휘한 공병장교 출신인 금현옥 을 서울시장 으로 발탁하는 등 격식을 무시하고 인재를 요직에 등용했다 [ 88 ] .

종생의 라이벌이었던 같은 조선민족의 분단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초대 최고 지도자, 김일성 에 체제 경쟁을 도전하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시점에서는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경제 가난한 경제 의 힘으로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인 성공을 체제의 정통성의 근거로 어필한 것은 오히려 박정희 등장 이전의 북한이자 '한강의 기적'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몰려든 북한은 경제면 뿐만 아니라 인민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도 만성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지자들로부터는 '독재정권'이지만 일본에서 경제원조를 이끌어내고 한국에 질서와 경제발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며, 재검토해야 한다는 소리도 뿌리깊다. 일찌기 박정희 비판으로 직을 쫓겨낸 적이 있는 조갑濟도 “일본 일류 교육과 미국 장교 교육을 받은 실용적인 지도자였다”며 암살 사건 취재를 통해 이전 부정적인 견해를 바꾸고 있다.

다만 박정희 비판자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성과가 지지자들에 의해 과장된 면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용되는 수치도 마을거리인 것, 재임 중에 경제성장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높은 물가고 시대였던 일 등 임기기간과 막대한 해외원조금을 고려하면 과대평가됐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해외에서 받은 원조금을 스위스 은행 등에 개인자산으로 착복한 의혹도 언론을 통해 꾸준히 나오고 있다.

1997년 한국의 IMF 경제위기 이후 2000년대 박정희 재평가가 이뤄져 인기를 얻었으나 2010년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인기를 추월받았다 [4] [5] .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압축성장'으로 불린다. 이는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는 의미 외에도 노동탄압 등 다양한 문제에는 눈을 뜨고 '효율 최우선' 노선을 달렸다는 비판적 의미도 포함한다.

부정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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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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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종시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종신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것, 박정권하에서의 고문, 부당 체포를 포함한 강권정치가 대통령 사후에도 2대 군사정권으로 인계돼 한국의 민주화를 늦췄다.

비판적인 견지에서는 독재자로서의 비판 외에도 박정희를 일본 통치 시대의 대일협력자· 친일파  삼는 의견도 있으며, 실제 2005년 8월 29일 한국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및 그 산하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발표된 '친일 인사 2004년 에 일본 통치 시대의 대일 협력자를 해명하기 위한 일제 강점 하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가결되어, 그 시대에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만주국군에 참가했던 박정희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 재검토의 일환이지만, 차기 대선에서 박의 딸이자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던 한나라당(당시 명칭) 당수 박근혜의 인기 하락을 노렸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등 한국의 군사정권이 실시한 개발독재 정치에 일본 통치 시대 의 조선통치의 수법과 이념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역사가에 의해 의견이 마을이다.

국외에서는 반공산주의 동맹 강화를 의도하는 미국 정부 나 일본 정부 등을 제외하면 박정희 정권은 비판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농업근대화보다 상호감시를 기능시키기 위한 농촌의 강제적인 조직화로 전체주의 적인 조직화에 비유하는 논고도 일본에서는 태어났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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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희 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에 대한민국 국군 ( 대한민국 육군 및 대한민국 해병대 )을 2개 사단 플러스 1개 여단 의 총 3만명, 최성기에는 5만명을 파병했다. 한국군은 30만명을 넘는 베트남인을 학살했다고도 하며, 베트남 에서는 마을마다 '타이한의 잔학 행위를 잊어라'고 비석을 세우고 잔학 행위를 잊지 말라고 맹세하고 있다고 한다 [ 89 ] .

미국은 보상으로 한국이 도입한 외자 40억 달러의 절반인 20억 달러를 직접 부담했고, 그 외 부담분도 알선했다. 또 전쟁에 관련된 한국군인, 기술자, 건설자, 용역군납 등의 무역외특수(7억4000만달러)와 군사원조(1960년대 후반 5년간 17억달러) 등으로 한국은 고도 성장  이뤘다 .

한겨레 21의 구수정 통신원은 파병된 한국군 부대가 현지에서 베트콘 으로 본 일반 시민을 여성이나 아이도 포함하여 학살하는 사건이나 베트남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 그 외 수많은 만행을 일으켜 생존자의 한국군의 행위에 관한 증언으로 공통점은 가옥에의 방화 등을 들고 있다 [ 90 ] .

또 강간에 의해 한월혼혈아 라이타이 한 이 수만명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베트남 전쟁 자체에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방해·억압하는 성격( 피델 카스트로 와 최게발라 등에 의한 1959 년 쿠바 혁명 등 동서 냉전 기 아시아 , 아프리카 , 라틴 아메리카 의 식민지 와 저개발국 에 있어서 민족해방운동은 공산주의 와의 관련이 강했는가). 남인 의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난 '침략자의 일원 '이라고 베트남인의 대다수 및 한국·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한홍구 는 자저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원래 ' 한겨레 신문 ' 연재 칼럼)에서 베트남 전쟁의 식민지 해방운동에 대한 압박으로서의 면을 중시하고, 일본에 의한 침략에 시달린 한국의 근현대사와 거듭하면서 박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 참전.

생가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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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일 오후 3시 15분경 경상북도 구미시 에 있는 박정희의 생가가 방화되어 박 전 대통령의 추도관(57.3㎡ ) 내부가 전소되어 박 전 대통령과 육영 수 부인 의 유영도 소실됐다. 경찰은 현장에서 100m 떨어진 주차장을 가로막고 있던 48세 경기도 수원시 거주자를 방화 혐의로 체포했다. 조사에 대해 방화의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는 것을 들고 전철로 왔다고 진술한 것이 보도됐다. 범인은, 2007년에도 서울에 있는 미타 도비를 손괴해 징역 1년 6개월(집행 유예 2년)이 되어, 2013년 12월 12일에는 대구시의 노태우  생가 에도 방화해, 징역 1년 6개월(집행 유예 ) .

2017년 4월 25일 배심원 7명 전원이 유죄로 판단, 징역 4년 6개월의 실형이 내려졌다. 또 이 재판으로 전두환 의 생가에도 침입하고 있던 사실이 밝혀졌다.

2017년 5월 2일 ‘불의에 저항한 정당한 행위’로 ‘형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하며 항소.

2017년 8월 29일 전두환 의 생가에서는 인명피해를 우려해 방화하지 않았던 점, 박정희의 생가에서는 피해를 배상할 의지가 있는 점 등에서 징역 3년에 감형된다 [ 92 ]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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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박정희의 친형인 박상희 의 딸 박영옥 의 남편이자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비 는 박정희는 실제로 약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 93 ] .

전 유엔대사 의 한병기(조선어 판 )  딸, 원국회의원의 박재홍 (조선어판 ) 과 전 대한 축구 협회장 의朴埈弘(조선어판 )  조카 , 전국회의원의 육인수 는 아내 의 형 [ 94 ] , 가수· 배우  은

일본에 관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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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 방미 길에서 도쿄에 의해 이케다 용인 총리들과 회담을 위해 30시간 정도 체류한 것만으로 박은 집권 기간에 한 번도 공식 방일을 하지 않았다 [ 8 ] . 은사였던 남운 친일 로 ( 만주국육군군관학교 교장, 전·육군소장)와는 점심식회에서 재회했다.

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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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료 '한일 '금단의 역사''에 따르면, 후쿠다 사토 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술자리에서 한일의 각료들이 일본어 로 대화를 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측의 한 고관이 과거의 일본 통치 시대를 비판하는 취지의 발언을 시작했는데, 그 고관을 진정시킨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선통치는 그렇게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매우 가난한 농촌 아이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는데 일본인이 와서 의무교육을 받지 못하는 부모는 처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소중한 노동력이었던 자신을 학교에 가게 해줬다. 그러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인 선생님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권해주었다. 또한 군관학교를 거쳐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수석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에서는 일본인을 포함한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읽었다. 일본의 교육은 비교적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일본이 한 정치도 나는 감정적으로 비난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나는 평가하고 있다.—   완료 한일 ‘금단의 역사’ p.212 쇼가쿠칸 2003년 10월 ISBN 4093896518

또, 무명의 젊은이들이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한 메이지 유신 을 「메이지 유신의 지사 를 견습하고 싶다」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특히, 중심인물의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하고, 사이고가 말한 「자손을 위해서 미다를 사지 않고[ 96 ] 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일한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 기본조약 의 입역자로 박 대통령의 명령으로 일본 측과 비밀 협상을 당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초대부장을 맡은 김종비 는 '반일보다 용일이야말로 어려운 길'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박 대통령과 나누고 있었던 만큼 친일을 하고 일본 을 박은 교묘한 화술로 일본 측의 신뢰를 얻어 한일 기본조약으로 ​​얻은 막대한 자금·투자·기술 공여, 미국·유럽의 원조를 원수로 경제 우선하는 행동으로 경제협력을 이끌어내는 날에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 [ 97 [ 98 ] .

다케시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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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 에 대해 민주통합당 문재인 은 2012  대통령 선거전에 미국립문서보관소 국무성 기밀대화 비망록을 인용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 년 러스크 미국무장관 에 대해 1965년 6월의 결말을 폭파했다. 그 섬(독도)을 폭파하고 없애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또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 같은 발언을 본인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 99 ] . 이에 대해 박근혜 진영의 조윤선 보도관은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 발언은 일본 측이 한 일이 되고 있다”며 문 후보의 주장을 “명백한 허위 사실 유포와 거짓말”로 규정하고 있다.

또 시이나 에츠조로 외상이 한일 기본조약 서명 1일 전인 1965 년 월 21일 이동 전 외무부 장관과 교제한 대화를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1965.6.22.15-226)에 따르면 이 장관은 한 중대문제이며 만약 한국 측으로 수락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면 한일회담  중지해도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

반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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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인 우선화  박정희 집정하의 1960년대 에는 한국 국내에서 한국을 일본에 비교해 문화적으로 우위에 자리매김하는 반일 이데올로기가 교육 속에서 국민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 101 ] .

한편 이승만 시대에 금지된 일본어교육 을 중고등교육에서 재개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일본에 대한 주권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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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방침에 반발해 일본에서 민주화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김대중이 1973 년 8월 8일 일본 국내에서 납치된 김대중 사건 에 대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의 관여가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을 박식하고 . 이 사건에 대해 당시 일본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다 나카가쿠에이 가 박정희 정권과의 사이에서 정치결착을 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주권침해'라며 박정희 정권 비판의 목소리가 올랐다 [ 102 ] .

문세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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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 사건은 일본 경찰에서 탈취한 권총을 이용한 재일조선인에 의한 범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사과의 성명이 나오지 않고 조선총련의 관여도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은 것에 입복해, 「일본은 정말로 우방인가?」 「(일본과 단교해도) 안보, 경제에 문제는 에 이르렀다.

한일의 외교근의 취성에 의해 단교야말로 회피했지만, 육영 수부인의 장례에 참렬한 일본 수상다 나카가쿠에이가 「힘든 눈에 당했어요」라고 타인사처럼 말했기 때문에, 박을 더욱 분개시켰다고 한다.

후쿠다 쿄존과의 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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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일본 영문학자 극작가 로 보수 사상가로도 평가가 높은 후쿠다 쿄존 과 친교를 맺었다. 후쿠다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사건 의 보도를 듣고 추도문 '고옥의 사람, 박정희'를 썼다. 후쿠다는 그 중에서 박과 점심을 함께했을 때를 회상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고인에게 밟고, 또 또 한국의 원수에 밟고, 땀을 흘린 얘기를 하지만, 나는 감으로 쓴다, 솔직히, 나는 그 조식에 놀랐고, 오믈렛은 안까지 딱딱하고, 표면이 얼룩덜룩하게 탄다. 만약 일본의 호텔이라면, 「이것이 오믈렛인가」라고 나는 불평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히라가타로 입으로 하는 청와대의 「獨裁者」를 진지하게 바라본다(후략)— 후쿠다 쿄존, 후쿠다 쿄존 평론집 제10권

조선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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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자저 '국가·민족·나'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반만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고 퇴기와 조잡함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한국사회는) 함식, 게으름, 안일, 기회주의에 나타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하나의 축도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선집2 국가·민족·나 p.234 [ 103 ]
"우리 민족사를 고찰해 보면 한심하다는 것 외에"— 박정희 선집2 국가·민족·나 p.238 [ 104 ]

한층 더 자저 '한민족이 진행해야 할 길'에서 이씨 조선 에 대해 다음 말을 남기고 있다.

"사색당쟁, 사대주의, 양반의 안이한 무사주의 생활태도에 의해 후세의 자손까지 악영향을 미친 민족적 범죄사이다"

"오늘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움이 가득한 것은 물론 이조사(한국사)의 악유산 그 자체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함께 조상들의 발자취를 원한 눈으로 되돌아보고 경멸과 분노를 맞추어 느끼는 것이다”— 박정희 선집 1 한민족이 가야 할 길 p.92 [ 105 ]

이처럼 박은 조선사 에서 의 사대주의 와 속국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자저 '한민족이 가야 할 길'로 한국인의 '자율정신의 부족', '민족사랑의 부족', '개척정신의 부족', '퇴폐한 국민도덕'을 비판하며 '민족의 나쁜 유산'으로 다음 문제를 꼽고 있다 [ 106 ] .

  • 사대주의
  • 게으름과 불노동 소득 관념
  • 개척 정신의 부족
  • 기업심 부족
  • 악성이기주의
  • 명예관념의 부족
  • 건전한 비판정신의 부족

이왕가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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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에서는 이씨 조선에 비판적이었던 박정희이지만, 한국 초대 대통령의 이승만이 막고 있던 대한 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이창 · 이방자 부부의 한국으로의 귀화를 인정하고 생활을 지원 [ 107 ] 하고, 이씨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실의 조 의 諡号로 거둔 [ 108 ] 등 이왕가  여러 개인에게는 호의적이었다.

사랑 아내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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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2회 결혼(다른 1회는 동거)하고 있어, 육영 수부인과는 만남을 거쳐 결혼했지만,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매치 때에는 술을 마시고 나서 임했다.

육영 수부인과는 사이의 품위를 연출했지만, 가정내에서는 부인이 「청와대 (대통령 관저) 안의 야당」의 역할을 완수해, 정치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종생, 육영 수부인에 대해서는 단지 아내 이상에 계속 존경했다.

그러나, 상술한 금종비 인터뷰 등에 따르면 , 이것은 미화된 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영수는 김종비 가족에게 너무 차가웠다고 바람둥이였던 박정희의 바람 때문에 고생하는 부부 겐의 끝에 얼굴에 멍이 들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는 한국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실제로 박정희는 육영수의 사후 여색에 빠져 암살되는 날까지 청와대 안가의 미야이동에서 젊은 여성들과 주연을 했다. 이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박정희 채홍사역을 분할하기도 했다. [6]

청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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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박정희 지지자들은 박정희가 독재했지만 청렴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정희는 재임기간 중에 젊은 여성들과 방탕한 술연회를 수시로 요구하고 있다.

또 당시 해외 원조금의 일부를 스위스에 있는 은행의 비밀계좌에 착복했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유명하다. 실제로 1970년대 당시 미국 의회 내 로비 사건 현장 코리아게이트에 박정희를 조사하고 있던 미국 수사관들은 그의 스위스 계좌를 확인했다고 한다. 2017년 SBS 시사 프로그램 프로에서는 스위스 계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박정희 측근 인터뷰도 나왔다. [7]

다만 이들은 시대가 시대이기 때문에 정치자금 등에 활용한 것만으로 박 대통령은 개인 착복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정희 암살 후 착임한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당시 청와대 박정희 금고에 있던 9억원을 생활비로 박근혜 에게 넘겼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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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기독교에 호의가 없었다 [ 109 ] . 그러나 당시 반체제 성향이 짙은 기독교계에서 자신의 아군을 키우고 싶다고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창설하고 있다. 이때 총재가 된 것이 후의 최순실 게이트 사건 의 시작점인 최태민 이다 .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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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한국식 우동 )가 선물로 청와대에서  사회가 열리면 반드시 나왔다. 이 때문에 대통령에게 불리는 것의 은어로서 "칼국수에게 불린다"고 말해졌다. 또 경상북도식에 푸곡(미국 말라 ) 의 된장을 넣으면서 막걸리 를 마시는 게 정해진 만찬 스타일이었다 [ 110 ] . 막걸리는 이것저것 불문하고 좋아했지만, 군시대는 대구의 '불로막걸리'와 부산의 '산성막걸리', 대통령시대는 페달리의 '고양미 막걸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 111 ] .

그 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하고 서울시 중구에 있는 '부민옥'의 추오탄 , 군포 역 앞 의 '군포 식당'의 솔론탕을 선호했다 [ 112 ] . 포병학교장시대의 부하에 의하면, 주로 채식이었다고도 말한다 [ 113 ] .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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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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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V드라마
  • 제4공화국 '(1995년) - 이창환  박정희를 연기하고 있다.
  • 제5공화국 '(2005년) - 이창환이 박정희를 연기하고 있다.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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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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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농촌부 빈곤가정의 막내였던 것은 박정희의 정신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2. ↑ 가고시마현 사족 출신, 육사 25기. 이후 제64여단장으로서 오키나와전에 참가해 자결. 육군 중장
  3. ^그 밖에 신현준 상위 , 이주일 중위, 방 규철 중위  있었다.
  4. ↑ 한국 육군 사관학교 의 전신이다.
  5. ↑ 공산주의 정당 . 1949년 6월 30일 북한 노동당 과 합병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북한)의 집정당인 조선노동당이 된다.
  6.  육군사관학교 8기생은 그때까지의 사관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의 육사 제1기생부터 제7기생까지는 구 일본군의 조선군 근무자와, 즉석에서 훈련되어 사관이 된 자들로 편성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제8기생은 1년간의 훈련을 받고 있는 점, 제1기생부터 제7기생을 합한 수에 가까운 1,800명을 옹호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육사 8기생은 조선전쟁 에서 대한민국 국군 의 주요 역할을 맡았고, 그 뒤에도 한국 현대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7. ↑ 5・16 군사 쿠데타 에 의해 군의 존재가 정치 세력으로서 처음으로 인식되었다. 군을 정치세력으로 파악한다면 대한민국 국군은 당시 최대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군은 쿠데타 때 약 60만명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 중 53만명이 육군 이다. 이에 비해 한국 병합 시 일본에 의해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6000명 규모밖에 없었다. 이는 긴 이씨 조선의 역사에서 군비가 축소되는 한편이었던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8. ↑ 이명박은 2008 년 2월 25일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9. ↑ 김영삼 은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0.  쿠데타 때 박정희는 중공업화와 수출에 의한 테이크오프를 구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출형 공업화를 도모한다는 경제정책을 채용한 것이 정권탈취 후인 것도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 모델이 자주 적용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11. ^ ‘ 학원 침투 스파이단 사건 ’은 서울에 유학하던 재일한국인 서승 과 서준식 의 형제가 수모자로 된 것, 서승이 얼굴에서 반신에 화상을 입은 모습으로 법정에 나타난 것 등으로 일본에서 떠들썩했다. 특히 화상은 고문 에 의한 것으로 믿어졌다(나중에 화상을 입은 것은 고문 중에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도모했기 때문이라고 판명). 일본에서는 서형제의 구원운동이 전개되어, 서승·서준식 “옥중으로부터의 편지”(이와나미 신서 ISBN 4-00-420163-2 )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서승은 실제로 북한의 공작선 으로 동국에 비밀리에 입국, 실제로 공작원 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던 것이 현재는 밝혀지고 있다.
  12.  다른 19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쇼 와 천황 , 호치민 폴포토 , 미야케 일생, 이노우에 다이유, 라빈 드라 나트 타고르 손문, 마하트마 건디 , 스카 르노 모택동, 리콴유 , 넉 소다 이라 , 콜라 송 아 키노 , 도요타 에이지 , 라마  , 몬콤 부스  .

출처

소스 편집 ]
  1. ↑ http://korea.hani.co.kr/arti/politics/26307.html
  2. ↑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았던 '문화주택'을 일반 공개 ”. 한겨레 . 2022년 11월 2일 열람.
  3. “ 40년 전에도 ‘남북미 대화’ 추진한 미 기밀문서에서 분명히 ”. 연합뉴스 . 2022년 11월 2일 열람.
  4. ↑ 전후 한국에 있어서의 고도 성장의 기동과 전개 「한강의 기적」림 采成(릿쿄 대학)
  5. ↑ b “【분수대】박정희의 얼굴” . 중앙일보 . (2004년 8월 25일) 2015년 12월 7일 열람.
  6. ↑ 조선인물사전 2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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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신성도히코 『조선왕 공족-제국 일본의 준황족』 중앙 공론 신사, 2015년 ISBN 978-4121023094
  109.  『한국과 기독교』, 아사미 마사이치, 안연원 저, 중공신서, 2012년, 120페이지
  110. “막걸리 인기에 ‘박정희향수’ 소요소요( 막걸리 인기에 '박정희 향수' 솔솔 )” . 조선일보 .
  111. “【연재】畦막걸리가 제일( 【연재】논두렁 막걸리가 최고야 )” . 서울 포스트. (2007년 9월 17일) 2017년 11월 25일 열람.
  112. “덩굴 한잔… 대통령의 단골 레스토랑( 후루룩한 그릇… 대통령들의 단골식당 )” . 주간 동아. (2009년 9월 1일) 2017년 11월 3일 열람.
  113. ↑ 조 1991 , p.230

참고문헌

소스 편집 ]

관련 항목

소스 편집 ]
정치사상·정책
사건
친족
  • 박근혜 - 박정희의 차녀(이모 누나 있음). 한나라당 (현 새누리당) 대표나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2013년 2월 25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에 취임해 부모와 자식 2대에서 대통령을 맡게 된다.
  • 朴志晩- 박정희의 장남. 한국 육군사관학교 의 엘리트였지만, 아버지의 암살 후는 각성제 나 히로폰 에 빠져 1989년 10월부터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언니의 박근혜의 서포트로 돌아가고 있다.
일본 관련
미국 관련
기타
  • 영남대학교 - 고지 대구 에 있던 2개의 사립대학을 통합시켜 설립. 사후 딸 박근혜가 한때 이사장을 맡았다.
  • 김우공과대학교 -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첨단산업의 발달에 의해 전문화된 고급기술인력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우수한 기술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흥공업국가를 건설한다는 시대적 과제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공학계열 중심의 김열.
  • 하나페 - 박정희의 묵인하에 복심의 전두환이 군내 에서 조직한 친위 그룹 .
  • 박정희 체육관 ( 조선어판 ) - 박정희 출신지인 구미시에 존재 하는 실내체육시설. 개관 당초는 '구미체육관'이었지만 박정희를 기념하기 위해 2002년 개명 했다.
  • 솔랄 - 박정희 정권하에서 폐지하려는 한국의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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