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4

민경우 공부/보수시민운동의 역사//4.19에 대한 김정남의 평가/민주화운동사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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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보수시민운동의 역사/잘 모름, 알면 거들어 주시길
- ~90년대까지 보수시민운동은 거의 관변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보수시민운동이 본격 태동하는데

* 반핵반김국민협의회(서정갑) 등의 거리 시위
* 박세일.안병직 등의 선진화담론 / 뉴라이트류의 북한인권.자유주의
* 조갑제 등의 김대중, 운동권의 실체 폭로 작업
* 역사논쟁 / 식민지근대화론, 건국절, 이승만.박정희 복권 작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다.
* 탈북자.북한인권
- 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후 격렬한 거리시위가 있었고 거리시위의 주도권을 기독교 중 정광훈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 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계기로 새로운 차원의 보수운동이 성장
* 20~30대 참여 / 이들은 위 역사논쟁을 강하게 차용하고 있다. / 이들의 참여로 진보 주류, 보수 사이드의 구도가 바뀌고 있는 듯 하다.
* 같은 보수라도 이명박/박근혜, 시장보수와 안보보수가 다른 것 같다.
- 헌재의 탄핵 선고 이후 시민운동의 지형이 많이 바뀔 것 같다.


Daniel Seok Yeong Jung
정광훈이 아니라 전광훈이구요, 거리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사실 노무현 시절 때부터입니다. NLL을 북으로 넘기려 했던 시도를 막기 위해 교계에서는 전광훈 목사, 시민단체 또는 보수단체에서는 박세직 재향군인회 중심으로 시청 앞 광장을 매우는 일로부터 시작했지요.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요,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지금은 10월 3일이나 3월 1일이지만, 그때는 6월 6일이 메인 데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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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Seok Yeong Jung
서정갑 대령도 꽤 역할을 하셨지만, 사실 그 대부분의 보수 시민사회 운동운 박세직 장군/장로가 주도했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보수 시민 단체는 CCC의 김준곤 목사가 상당 부분을 시작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계 중심으로 알고 있어서 그쪽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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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Yong Shin
세상과의 가장 강력한 소통수단인 스마트단말기를 손에 쥔 개인들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전체주의적 사고와 세계관 그리고 그런 생태계를 만들어온 586 좌파 기득권 계급을 새로이 인식하고 싸운 것이 이번 탄핵정국사입니다.
이번 탄핵이 박근혜 탄핵때와는 다른 환경 중의 하나가 SNS와 유튜브의 역할입니다. 8년전에 비하여 레가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줄었던 이유는 유튜브라는 대체 미디어의 역할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거의 모든 대중들이 유튜브라는 그리고 SNS를 통해 정보를 얻고 취사선택 합니다.
이번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2030세대는 이런 디지털혁명의 세례를 받으며 큰 세대이기에 저항도 그런 디지탈 단말기를 통해 이루어졌지요.
민경우 대표의 분석의 틀이 답답하고 올드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이런 디지털 단말기를 손에 쥔 개인들이 새로운 정치적 저항세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예전의 방식으로 재단을 하려는 시도를 보여줄 때 입니다.
이번 탄핵정국에 대한 분석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너무 피상적이고 간단한 언어로 기술을 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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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Park
저는 수학강사를 한다는 스마트한 분이 어떻게 부정선거의 통계적 의심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지점에서 이것은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고 지극히 인간의 양심적인 문제라서 전체가 疑心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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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jin Kim
Sung Park 대수의 법칙과 함께 조건부확률도 고려해보시지요. 부정선거는 수학적으로도 납득이 잘 안됩니다. 제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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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Park
Yujin Kim 네~ 저도 초기에는 소위 베이지언정리라고도 하는 ㅈ조건부확률이 적용되지 않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것이 적용되기에는 너무나 큰수의 모집단 혹은 표본의 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재검표 과정에서 나온 "실증거들" "情況들"을 보고나서는 그 이론 혹은 가설 혹은 법칙의 유효성, 진실은 큰수의 법칙이 맞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실증적 증거(물)들"과 "정황들"이 무엇이냐고 되물으신다면 오늘 당장 1시긴 정도만이라도 투자해서 검색하고 찾아보고 직접 판단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겨우 학부에서 통계학과목을 전공했지만 졸업하면서 손놓은지 오래되어서 부정선거의 존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면 이만큼의 자기 정리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진님의 프로필을 잠깐 보니 아직 초롱초롱한 어린 학생들을 교수하는 수학학원의 현직강사 내지 대표이신 것으로보아서 관심이 좀 없거나 서로 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렇지 님의 수학과목에 실력은 저보다 훨씬 ㄴ나을것 같습니다만. 사족으로 첨언하자면, 앞에서 얘기했듯이 대수의 법칙과 조건부확률론은 통계학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서로 판이한 맥락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두 이론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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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ang-ki
너무 복잡하다 10 단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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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hyung Hyun
보수시민운동을 박카스할배들이나 전광훈 태극기부대 정도로 아시나 본데, 그건 운동이라기보다 원한과 울분에서 나온 광기라고 봅니다.
그런 극우화는 좌파 진보운동의 왜곡과 광기가 부추기는 면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 군사독재 시절의 광기가 좌파 진보운동 진영의 증오와 원한을 키우며 부추겨서 지금의 왜곡과 광기를 만들었지요.
이렇게 양극단은 서로 에스컬레이팅되면서 악화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정상(상식)적이고 양심적이라면 호전될 수도 있지만, 단기적이고 양육강식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정치판에서 힘들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중도)대중들은 3.1운동 419 학생들, 6월항쟁 넥타이부대 등 늘 있어왔지만, 물고기가 물을 무시하고 오히려 튕겨내듯 우리나라 진보진영은 늘 있어왔던 중도대중들을 무시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자신들이 늘 모든걸 다 하려고 해왔지요.
본격적인 (중도)보수시민운동은 김대중주의(?)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좌파 진보운동의 YS편향과 은근한 지역주의 그리고 원리주의 탓에 독자후보론과 제3후보론으로 갈린 1997 대선판에서 '김대중죽이기(강준만)' 출간으로 대중들과 상당수 진보진영의 호응을 얻으면서 중도대중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2002년 대선에서도 진보진영이 노무현으론 어림도 없다며 패배주의에 빠져있을때 역시 강준만교수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시작으로 중도 대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이 제주와 광주경선에서 이기기까지 노무현 초기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좌파진보?(학생)운동세력(586)은 거의 없었습니다. 중도대중들이랄 수 있는 노사모가 열성적으로 성과를 일구며 가능성을 만들었지요.
현재 친노(친문, 친명은 말할것도 없고)를 내세우는 586들 중에 실상 친노는 거의 없는 셈입니다.
이후부터 586들이 유시민의 선동으로 대대적으로 노사모 등에 투입되면서 (중도)보수시민운동의 왜곡이 생겨났고 그래서 '자랑스러운 노사모'가 '대깨문', '개딸'로 변질된 것입니다.
극우에 환멸을 느끼는 (중도)보수 대중들 역시 마약에 중독되듯 김어준, 유시민 등 스피커들에 현혹되고 갈수록 강도가 쎈것을 찾다보니 지금 이재명까지 와있는 것 입니다.
안철수가 중도를 자임하고 나서기도 했지만, 전국적으로 586들의 유휴 B급 조직들(문국현 창조한국당 출신들)로 수혈받으며 (당연히) 실패했고, 급기야 안철수는 중도를 포기하고 보수로 합류하고 맙니다.
지금의 한동훈도 보수의 틀 안에서 뭔가 해보려 하지만, 진영논리의 한계와 극우의 수준 등 쉽지않은 형국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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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4.19에 대한 김정남의 평가/민주화운동사1에서
- 4.19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김정남은 “4.19 혁명”에서....“4월혁명의 이념과 정신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와 부정을 뛰어 넘는 것으로 제1공화국의 잘못된 출발에 대한 거부뿐 아니라, 처음부터 바로 세워졌어야 할 공동체의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4월혁명은 우리 공동체가 반드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할 고향이요 시원으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이요 목표라고 설파했다. 한마디로 4.19는 이 민족의 정기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김정남은 4.19는 역사속의 시간이 아니라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숨결이요 정신이라고 이해했다”
- 위 인용문을 통해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어떤 집단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역사.스토리를 재구성하기 마련이다. 민주화운동 세대는 민주화 역사를 4.19를 시원으로 4.19 정신이 확대계승.승화되는 과정으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4.19 정신은 반독재보다는 민족정기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무엇이다.
이렇게 보면
첫째. 상해 임정인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인가 하는 건국절 논쟁은 민주화세대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외피이자 형식에 지나지 않고 내용적으로는 상해 임정을 형식적으로 세워 놓고 4.19-5.18-6월로 이어지는 새로운 스토리를 구성하고 싶었던 것 같다.
둘째.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해방정국의 미완의 과제,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격하, 민주화운동이 독립운동 수준으로 격상, 민주화세대의 정권 장악의 필연성 등이 도출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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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찬
시민민주주의적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4.19-5.18-87년6월" 네러티브가 중요하겠으나, 인민민주주의 세력에게는 남북한 건국의 정당성, 즉 남한의 건국절 문제가 핵심인 듯합니다. 상해임정 적통설은 그 아류나 통전적 서사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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