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1.25
"나는 일본 군국주의 만행에 참여했다"
난징대학살에 참전한 한 일본인의 증언
이승욱(baebsae)

ⓒ오마이뉴스 이승욱
지난 24일 백발의 한 일본인이 '현해탄'을 건너 생애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증언한다며 대구를 찾았다.
160센티미터가 넘을까 말까한 작은 키. 그리고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깊게 패인 주름. 붉은 반점이 이리저리 피어난 창백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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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노인을 연상할 때쯤,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을 듣는다면 멈칫 놀랄 수밖에 없다.
남경대학살 참전한 일본인 노병
그는 바로 역사교과서에나 만날 수 있었던,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난징대학살'(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1937년 말부터 38년 초까지 중국, 조선인 등 수십만 명이 무참히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지만 당시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패전까지 계속됐다고 함- 편집자 주)에 참전했던 일본군이었다.
구보타 테츠지(久保田哲二). 나이 82세. 1939년 히로시마 보병 11연대 소속으로 참전. 중국 호남성, 하남성 등지에서 전쟁 수행. 종전 후 전쟁범죄자로 시베리아에서 노역생활. 50년 중국 무순전범관리소에서 6년간 구류 생활. 일본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잘못을 참회하고 일본 귀국 후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전쟁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음.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런 그가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대표 곽동협)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사과했다.
24일 오후 3시 대구 곽병원 건강관리센터 지하강당에는 구보타 옹의 증언을 듣기 위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무리 사이에는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인 정신대 할머니들의 모습도 하나 둘 눈에 띄었다.
구보타 옹은 준비해온 원고를 살펴가며 증언을 시작했다. 증언 도중 그는 가끔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증언 내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 들었던 것이 아니며 직접 봤고, 동료와 했던 일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증언은 일명 '삼광(三光)작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삼광작전은 전쟁 당시 일본군이 행했던 작전 방식이다. 삼광작전은 죽여 없애고, 태워 없애고, 그리고 빼앗아 없애는 것을 말한다. 내가 저질렀던 작전 중에 '한수(漢水) 도하작전'이란 것이 있는데 당시 독가스탄, 화염방사기를 동원해서 일본군이 강 건너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독가스를 퍼트렸다. 결국 방독면이 없던 중국군은 퇴각했고 우리는 손쉽게 마을을 점령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일단 식량을 없애 버리고 집엔 불을 질러 태운다. 그리고 정보를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민간인도 모조리 죽인다.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두 노인과 아기 하나가 발견됐는데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군인들이 모두 죽였다."
"일본군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의 증언은 일본 군국주의 잔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피난민이라고 확인한 상황에서도 군인들은 공적을 쌓기 위해 태연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아기를 업고 있던 할머니도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농민들을 죽이기도 했다. 또 일본군이 중국군 군복을 입기도 했는데 우리를 본 민간인들이 접대를 잘 해주면 그들까지 죽였다."
그는 "민간인을 잡아와 고문하고 목을 잘라 학살한 경우에는 가족들이 찾아 울면서 돌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럴 때면 '조사 받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돌려보낸다. 그러면 울면서 돌아가던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면서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들이 이렇게 태연하게 학살 만행을 저지른 점에 대해서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나의 만행은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서 비롯됐다"
"나는 학교와 군대에서 '일본은 위대하다', '천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타민족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내가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못했다. 지금 일본의 새로운 교과서는 당시 내가 봤던 역사교과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전쟁 당시에만 해도 죄책감이 없었다는 그가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증언은 종전 후 전범수용소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무순전범관리소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수많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죽였지만 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일본군은 인간을 벌레처럼 죽였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무렵 인간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참회하고 군국주의의 죄상을 인식하게 됐다."
그는 정신대할머니를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로 불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설치된 위안소에 대해 일본이 부인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이 사기진작을 위해 이용한 '성노예'
"전쟁 당시 3년 동안 위안소가 설치된 부대에서 근무했다. 위안소는 형식적으로 경영하는 민간인이 있지만 사실상 군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의 경비대장이 위안소를 감독 지휘했다. 위안소의 영업허가권을 군대가 가진 것이다. 이런 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업자들은 장소를 빌려주고, 여자들이 직접 매춘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정신대할머니를 향해 사과하는 구보타 옹ⓒ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는 또 위안소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들에 대한 기억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사관이었던 나는 하사관 출입이 가능한 오후 5시부터 위안소를 이용했는데 그때면 장교를 수십 명 상대한 여성들이 지쳐서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인 여성들은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증언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한국에는 '한'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한국 역사를 공부해 보고 나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면서 "머리를 수없이 조아려 사죄해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일어서 정신대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 쉼 없이 말하기엔 세 시간의 시간은 너무 길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곳엔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정신대 할머니들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증언이 모두 끝난 후 그에게 물었다. '가해자로서 피해자를 대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그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한국에 올 때 나의 잘못된 인생을 바꾸게 해준 은사(恩師)의 나라에 온다는 마음으로 왔고 할머니들에게 절을 해서라도 사과를 할 수 있다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증언에는 정신대할머니들과 학생들이 자리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는 "앞으로 다시 이런 군국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 어디든 찾아가 전쟁의 실상을 증언하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군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그 세월에 묻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가해자' 구보타를 대하는 지금 우리는 그를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든 잘못된 교육과 사회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 역사를 반추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씁쓸함과 희망을 동시에 건네주는 그와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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