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

“한·일의 역사 기억 차이, 시민이 다리 놔야”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한·일의 역사 기억 차이, 시민이 다리 놔야”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한·일의 역사 기억 차이, 시민이 다리 놔야”

등록 :2021-08-13 05:00수정 :2021-08-13 08:55
김소연 기자 사진
김소연 기자

[김학순 할머니 증언 30년 하]
인터뷰 ② | 우에노 지즈코 ‘여성행동네크워크’ 이사장
12·28 합의, 일본이 정치적 책임 인정한 것
피해자의 다양성 배제하지 않는 태도 필요

우에노 지즈코 ‘여성행동네크워크’ 이사장

1991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일본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연구자인 우에노 지즈코(73·도쿄대 명예교수) ‘여성행동네트워크’(WAN) 이사장은 이때 충격을 받고 ‘위안부’ 문제에 뛰어들었다. 재일동포 2세인 김부자(62) 도쿄외국어대학 교수도 그즈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인생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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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흐른 지금도 한·일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중요한 인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한-일 간 첨예한 외교적 쟁점인 ‘위안부’ 문제는 양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일본의 두 학자도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다만 일본 사회에서 오랜 세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두 양심적 지식인의 제언은, 한·일이 미래를 위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데 의미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국비 지출을 결정했다. 이것은 큰 변화다.” 우에노 지즈코 ‘여성행동네크워크’ 이사장은 12일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고노 담화보다 더 나아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에노 이사장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인 만큼, 이것을 바탕으로 반성과 기억, 재발방지를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의와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은 한‧일 양국 모두에게 불가피한 과제”라며 “정부 간 협상이 난항을 겪더라도 그동안 시민들이 쌓은 경험은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 당시 김학순 할머니 증언을 듣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몸이 아플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또 누구나 알고 있었을 텐데,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피해자들이 자신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 30년이 지났다. 아직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성과를 무엇이라고 보나.

“전시 성폭력이 국제정치의 과제가 됐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옛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둘러싼 분쟁이 있었고, 전시 성폭력이 전쟁에서 병사의 일탈이나 성욕의 발로 등이 아니고 전쟁 병기(수단)의 일종이라는 점을 널리 인정받게 됐다. 그 결과 2018년 노벨평화상은 전시 성폭력에 맞서 싸우고 피해자들을 치유해온 콩고민주공화국의 산부인과 의사 드니 무퀘게와 이라크의 소수민족 인권운동가 나디아 무라드가 수상했다. 성적 피해가 여성이 감수해야 할, 아무렇지 않은 피해가 아닌 게 된 것이다. 아시아권에서의 연구나 활동에 자극을 받아, 다른 나라에서도 역사 연구가 진행됐다.”

―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당시 총리, 게다가 우파 정권의 아베 신조가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비 지출을 결정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게 큰 결정은 우파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언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고노 담화보다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 이 합의를 인정한 뒤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무엇인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 됐다. 그것을 바탕으로 반성과 기억, 재발방지를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한다.”

― 아베 신조 전 총리뿐만 아니라 현재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위안부’ 문제가 다 끝났다는 입장이다. 다음이 가능할까.

“코로나 대책의 실패와 도쿄올림픽 강행으로 자민당(+공명당) 정권에 대한 평가는 현저하게 내려가고 있다. 보수정권이 아주 견고하다고 말할 수 없다.”

― 불법적 ‘위안부’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아베 정부는 한·일 합의로 정치적 책임을 인정했다. 법적 책임을 위해서는 (일본에서) 입법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후보상특별법을 만들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전후 몇 번이나 발의됐으나 (찬성 의원이 적어) 폐기됐다. 지금 국회 세력을 봤을 때 (입법은) 무리다.”

―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 내 국민 여론이 궁금하다.

“90년대 초에는 일본 국민 사이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미안하다’, ‘뭔가 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다. 그것이 (1995년 일본에서 발족한)국민기금의 민간 기부금 5억6500만엔(약 59억)이라는 액수에 나타나 있다. 그 뒤 위안부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장기화되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무력감과 절망감이 확산됐다. 여기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쪽 책임도 있지 않을까.”

―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14명이다. 평균 연령이 92살이다. 한·일 사이에 외교로 해결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 체험의 계승은 ‘포스트 체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직접 체험자가 기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나고, 그것을 들은 다음 세대가 어떻게 기억을 계승할지의 문제가 된다. 그 계승에 어떤 ‘이야기’가 관여할지, 그리고 국가 간 기억의 차이에 어떻게 다리를 놓느냐가 다음 과제다. 연구자와 시민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피해자 중심주의가 자주 이야기된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화해치유재단 지원금을 수령한 분들도 있지만, 이를 거부하고 법적 투쟁을 하고 있는 피해자들도 있다.

“피해자들은 모두 똑같지 않다. 제3자가 피해자를 대변하지 않고, 피해자의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 ‘위안부’ 문제를 놓고 한국 법원에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재판은 행정‧입법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최후의 구제수단이다.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판결이 이 정도로 흔들리는 사법에 신뢰를 갖는 것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 ‘위안부’ 문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시 성폭력을 세계에 물었던 획기적인 사안이다. 정의와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은 한‧일 양국 모두에게 불가피한 과제다. 그동안 한‧일 시민연대의 움직임을 신뢰하고 있다. 정부 간 협상이 난항을 겪더라도 시민들이 쌓은 경험은 의미가 있다.”

김소연 기자




‘그날’ 이후 30년, 꼬인 매듭에 풀기 어려운 숙제 ‘위안부’

등록 :2021-08-12 04:59수정 :2021-08-12 14:55
길윤형 기자 
김학순 할머니 증언 30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처음 공개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 <한겨레> 자료사진




14일은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은 중대한 ‘국가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지 딱 30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환경’은 어느 때보다 더 열악하다. 일본 정부는 2015년 12월 12·28 합의에서 “1㎜도 움직일 수 없다” “국가 간 합의는 정권이 바뀌었다 해도 지켜져야 한다”(7월13일 일본 외무성 문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한국에선 2020년 총선 무렵 터진 ‘윤미향 사태’로 인해 투쟁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해결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답답한 교착 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외침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일본 정부로부터 올바른 사죄를 받아내는 일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거대한 ‘시대적 과제’가 됐다. 처음엔 여성들이 “업자들에게 속아 간 것”이라는 불성실한 답변에 머물던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4일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내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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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 않는 일본…고노 담화 이후 사과나 법적 책임 안 져

하지만 한-일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 협정’의 벽 앞에서 무력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기금)을 만들어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지만, ‘65년 체제’를 이유로 들며 “정부 예산은 투입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한국 사회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범죄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도의적 책임’ 인정에 머무른 일본의 ‘여성기금’을 거부했다. 그와 동시에 김학순 할머니가 포함된 1991년 12월 소송, ‘관부재판’으로 알려진 1992년 12월 소송, 재일동포 송신도 할머니의 1993년 4월 소송 등 세차례 소송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모두 패소였다. 일본 사회를 통한 정치적, 법적 해결의 길이 모두 막히고 만 것이다.

그러자 한국에선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일본 법원이 소를 기각한 이유로 제시한 한-일 협정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공개하라는 ‘외교문서 공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8월 문서를 공개하며 위안부 문제는 “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헌법재판소는 2011년 8월 일본 정부와 교섭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뻔뻔한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놓게 된다.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됐다. 한국의 집요한 외교 공세에 놀란 일본 사회는 이를 여성의 인권 회복 노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명예를 손상하려는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내에선 거대한 혐한 열풍이 불었고, 한-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미적대는 한국…박근혜 정부 12·28 합의로 한계 봉착

한국의 외교적 시도도 한계에 부닥쳤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려면 한·미·일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2015년 말 ‘12·28 합의’를 맺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이 합의에서 자신들이 인정하는 것이 ‘법적 책임’인지 ‘도의적 책임’인지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책임을 통감한다”고 선언하며 10억엔(약 108억원)의 정부 예산을 기금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대신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약속했다. 12·28 합의는 한국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월 “일본에 재교섭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한국 법원을 통해 이 문제가 일본의 국가범죄임을 인정받으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지난 1월8일 나온 1차 판결은 원고 승소였지만, 4월21일 2차 판결은 패소였다.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국가 면제’ 원칙의 적용 여부를 두고 재판부의 판단이 갈라진 탓이다.

어떻게 이 교착 국면을 돌파해야 할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학자와 활동가들은 이젠 한국 사회가 목표로 하는 ‘문제의 해결’이 무엇인지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일본을 향해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변화를 촉발한 계기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등 일본 사회 원로 7명이 지난 3월24일 내놓은 성명이었다. 이들은 12·28 합의가 “불충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양국 정부에 이 “합의의 정신을 다시 한번 높여가기 위한 노력을 요청”했다.




한일 양국 시민사회 , 해법 모색중

한국에서도 대화문화아카데미와 서울대 일본연구소를 중심으로 이 요청에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난 5월26일, 6월30일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각자 위치에서 노력해온 학계·시민단체 인사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터놓는 토론회를 진행했다. 그동안엔 12·28 합의를 보완해가자는 쪽과 폐기한 뒤 새 합의를 시도해야 한다는 이들 사이의 골이 깊어 이런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한 ‘유용한 출발점’으로 고노 담화를 주목했다. 12·28 합의는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망각’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고노 담화는 이 문제의 기억·전승·계승(“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가고 싶다”)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토론회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 원로들이 제시한) 12·28 합의를 보완해가자는 데에는 참가자들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고노 담화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자는 데에는 많은 참가자가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정부도 지난 6월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민관 협의회의’를 만들어 지금까지 세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아직 사람들의 견해가 많이 다르지만, 시민사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정부도 움직일 수 있다”며 “한·일 시민사회와 더 많은 소통을 통해 정부가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적인 토대를 제시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1007370.html#csidx0eb6b7be944c113bc69d0686fc1d4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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