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야마 토시유키
최근 수정 시각: 2021-05-20 15:54:53
분류
일본 소설가/ㅋ
일본 남성 작가
히키아게샤
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1930년 출생
1975년 사망
결핵으로 죽은 인물
梶山季之
1930~1975.
일본의 소설가. 기업소설에서부터 추리소설에 에로물 성향의 소설들까지 오가며 온갖 작품을 써내기로 유명한 인물. 오야부 하루히코처럼 한국의 서울 태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될 운명을 타고 났는지 초등학생 때 자기가 직접 쓴 공상과학소설을 반 아이들에게 직접 읽어주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942년에 경성중학교(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이 패망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중학교를 거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의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는데 여기서도 문학 동인 활동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쓰루시공업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면서 찻집을 같이 경영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생각한것은 역시 소설로 결국 1958년에 교사와 찻집경영을 모두 접고 자유 기고가로 활동했다. 한편으로 필명을 달리해 청소년 대상 모험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편으론 라디오 드라마의 각본가로도 활동했는데 이런 다양한 집필 경험이 인기작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1961년, 결핵을 앓아 한동안 모든 활동을 중단한 후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변신을 꾀했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로 기업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점을 착안해서 기업소설을 집필했는데 대박을 쳤다. 많은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기업간 암투와 이면을 다룬 소설을 쓰는 한편, 주인공이 기업에서 성공을 거듭하면서 여자들과 떡질도 가득한 내용들로 남자의 로망을 대리만족시켜준 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다. 즉 시마 과장 스타일의 원조. 그리고 카지야마 토시유키의 이런 기업소설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에 들어와 상당한 인기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 내 성묘사도 꽤나 세게 나갔으며, 작품활동 후반기에 아예 에로 중심으로 쓴 소설들은 일본 내에서도 너무 나갔다고 말이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6년에 집필한 <여자경찰>은 너무 수위가 높았던 탓인지 주간 신초 편집장과 함께 음란물 유포혐의로 약식기소되어 벌금 5만 엔을 물기도 했다.
다작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한참 죽어라 쓰던 시절에는 주간지 연재만 6개, 거기다 신문 연재가 둘, 또 월간지 연재 2개, 그것도 모자라 소설 전문지에도 연재를 하는 짓을 벌였으며, 그러면서 매달 원고지 1천 장에서 1천2백 장 분량을 써냈다고 한다. 이틀 사이에 252장을 썼다는 말도 있는데 더 골때리는 건 일본의 원고지는 200자 원고지가 아니라 400자 원고지란 것. 즉 한국 기준으로 치면 한달에 원고지 2000장 분량을 써내는 미친 짓을 한 격.
이렇게나 글을 썼던 건 그만큼 씀씀이가 헤퍼서였다는 말도 있다. 알아주는 호색한이라 여자들 있는 술집 가서 쓰는 돈이 엄청났다나. 또한 도박에도 미쳐서 시바타 렌자부로에게 거액의 도박빚을 진 걸 탕감받겠다고 공식석상에서 변태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저렇게 살다보니 몸이 축나는 게 당연했던 모양. 죽기 3년 전인 1972년에 전에 앓았던 결핵이 재발해 요양하기도 했지만 너무 과로한 생활과 술과 여자를 밝히는 생활 스타일을 버리지는 못했다. 결국 1975년, 작가 자신의 필생의 주제들을 다 담아내려던 소설 <적란운>과 관련해서 취재차 홍콩으로 갔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니 불과 45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생전의 카지야마가 소설들 중 히트친 대중 통속소설들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가가 필생의 주제로 삼았던 건 조선, 원폭, 이민이라는 세 가지였다.
조선의 경우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자라나는 동안 그가 본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아픔을 1963년에 발매한 단편집 《이조잔영李朝残影》에 담았다.[1]《이조잔영》은 나오키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신상옥 감독이 1967년 영화화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GkdtNWUh38&t=4s
1961년, 결핵을 앓아 한동안 모든 활동을 중단한 후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변신을 꾀했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로 기업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점을 착안해서 기업소설을 집필했는데 대박을 쳤다. 많은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기업간 암투와 이면을 다룬 소설을 쓰는 한편, 주인공이 기업에서 성공을 거듭하면서 여자들과 떡질도 가득한 내용들로 남자의 로망을 대리만족시켜준 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다. 즉 시마 과장 스타일의 원조. 그리고 카지야마 토시유키의 이런 기업소설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에 들어와 상당한 인기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 내 성묘사도 꽤나 세게 나갔으며, 작품활동 후반기에 아예 에로 중심으로 쓴 소설들은 일본 내에서도 너무 나갔다고 말이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6년에 집필한 <여자경찰>은 너무 수위가 높았던 탓인지 주간 신초 편집장과 함께 음란물 유포혐의로 약식기소되어 벌금 5만 엔을 물기도 했다.
다작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한참 죽어라 쓰던 시절에는 주간지 연재만 6개, 거기다 신문 연재가 둘, 또 월간지 연재 2개, 그것도 모자라 소설 전문지에도 연재를 하는 짓을 벌였으며, 그러면서 매달 원고지 1천 장에서 1천2백 장 분량을 써냈다고 한다. 이틀 사이에 252장을 썼다는 말도 있는데 더 골때리는 건 일본의 원고지는 200자 원고지가 아니라 400자 원고지란 것. 즉 한국 기준으로 치면 한달에 원고지 2000장 분량을 써내는 미친 짓을 한 격.
이렇게나 글을 썼던 건 그만큼 씀씀이가 헤퍼서였다는 말도 있다. 알아주는 호색한이라 여자들 있는 술집 가서 쓰는 돈이 엄청났다나. 또한 도박에도 미쳐서 시바타 렌자부로에게 거액의 도박빚을 진 걸 탕감받겠다고 공식석상에서 변태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저렇게 살다보니 몸이 축나는 게 당연했던 모양. 죽기 3년 전인 1972년에 전에 앓았던 결핵이 재발해 요양하기도 했지만 너무 과로한 생활과 술과 여자를 밝히는 생활 스타일을 버리지는 못했다. 결국 1975년, 작가 자신의 필생의 주제들을 다 담아내려던 소설 <적란운>과 관련해서 취재차 홍콩으로 갔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니 불과 45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생전의 카지야마가 소설들 중 히트친 대중 통속소설들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가가 필생의 주제로 삼았던 건 조선, 원폭, 이민이라는 세 가지였다.
조선의 경우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자라나는 동안 그가 본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아픔을 1963년에 발매한 단편집 《이조잔영李朝残影》에 담았다.[1]《이조잔영》은 나오키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신상옥 감독이 1967년 영화화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GkdtNWUh38&t=4s
《이조잔영》에 실린 단편 중 <족보>를 1978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했다. 제목은 동일하게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DHy5W-Gx3dI&t=2s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선 이 영화들의 원작을 일본인이 썼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이들도 많다. 어색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담았다. 족보와 이조잔영으로 '카지야마 토시유키'라는 소설가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소설들을 찾아보다가 그 사람이 바로 떡치는 내용으로 기업소설을 쓴 사람이란 걸 알고 또 다시 뜨억하며 놀란다고 한다. 또한 권희로 사건을 소재로 한 <나는 반도인俺は半島人>[2]도 썼는데, 영화 김의 전쟁을 비롯한 권희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저 소설에서 시작된 게 많다.
아버지 고향이 히로시마현이었던 탓에 조선에서 돌아와서 히로시마 원폭의 처참한 광경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쓴 글이 후에 나온 "홀린 여자", "케로이드 심중" 같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원폭피해자 단체들은 이 소설들이 원폭 피해자들을 차별한다고 비판했고 카지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해명했다. 후에 카지야마 사후에 그의 지인이 "원폭 재해 자료 총목록"을 간행할 때 자금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민은 어머니가 하와이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필생의 세 주제를 모두 엮어서 집필하려 한 소설이 "적란운"인데 끝내 탈고 전에 죽는 탓에 집필되지는 못했다. 주간 신쵸에 10년간 원고지 1만 2천매 분량으로 연재될 예정이었지만... 서두 부분에 해당되는 원고지 약 30매 분량만 쓰여졌다고 한다.
의외로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몇몇 기사나 논픽션은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켰을 정도. 특히 방위청의 미일공동 실전계획등을 취재한 것 때문에 일본 정부에 찍혀서 음란물 유포로 약식기소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을 정도다. 저널리스트로서 취재하며 보고 겪은 일 들이 수많은 기업소설 등 통속소설들의 집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듯하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에 들어간 것은 원고지와 몽블랑 만년필, 그리고 <이조잔영(李朝残影)>이었다고 한다.
[1] 단편집에 실린 글 중에서도 책 제목과 동일한 <이조잔영李朝残影>, 그리고 <족보族譜>가 대표적이다.[2] 1969년 발매한 《경성 쇼와11년(京城昭和十一年)》에 실렸다. 쇼와 11년은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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