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30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2)

by 주성하기자   2016-12-30 9:50 am

30부만 가까스로 출판된 ‘김일성평전’. 오른쪽 사진은 1930년대 초반 김일성 장군으로 활동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 양림이다.
국정 역사교과서로 시끄러운 요즘 또 다른 논란이 될 수 있는 저서 하나를 알게 됐다.

‘김일성평전(상·하편)’. 상편만 700페이지가 넘는다. 저자 유순호는 중국 연변에서 나서 자랐고 오래전부터 항일투쟁사에 천착했다.

동북항일연군 군장 조상지의 전기 ‘비운의 장군’(1998년)을 쓴 지 3년 뒤 중국에서 “사회주의 문화시장을 교란한다”는 죄목으로 활동금지를 당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조상지의 후임인 허형식 군장의 전기 ‘만주 항일 파르티잔’(2009년)을 출판했고 이번에 김일성평전을 마무리했다.

난 김일성 연구의 한 획을 그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대숙)’,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키)’은 물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까지 다 정독했다.

이중 유순호의 김일성평전은 과거 모든 김일성 연구서를 뛰어넘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저서들이 광복 이전의 기록물 중심인데 반해 김일성평전은 항일 연고자들의 회고, 중국 공산당의 비밀자료실에 보관된 문헌들과 수백 장의 진귀한 사진 등 과거 김일성 연구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중국측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동북의 항일투쟁사를 논함에 있어서 중국측 자료의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인데 그게 드디어 빗장이 풀린 것이다.

저자는 1980년대부터 20년 넘게 관련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했다. 당시엔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인물들이 중국에 많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인터뷰를 할 수 없다.

김일성평전은 ‘김일성 신화’의 거품을 공정하게 걷어내고 있다. 혁명 모금을 한다며 부자들을 협박하던 10대의 김성주도, 만주에 퍼진 김일성 신화를 이용하려 이름을 개명한 20대의 김성주도 당시 함께 했던 이들의 증언으로 까밝히고 있다.

앞서 만주에서 김일성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도 책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이 크게 선전하는 ‘북만원정’도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야반도주한 것이며 1938년에 김일성이 일제에게 항복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달변으로 중국인 간부들의 환심을 샀던 능력도, 민생단 누명을 벗으려 작탄대 평대원으로 자원해 두 번 씩이나 선두에서 포대로 돌격했다는 등 김일성이 두드러졌다는 증언들도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1920~30년대 만주는 거대한 항일의 바다였고, 김일성은 작은 실개천이었다. 김일성의 가장 큰 업적은 죽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김일성은 수많은 항일선배들의 업적을 가로채 실개천을 바다로 둔갑시켰다. 이런 신화 조작은 지금도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 중국인 연고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 남이 한 일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거짓말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도적질과 같은 행위가 아니고 뭐겠는가.”

나는 통일 후 북한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김일성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옛날 반공교육 시대에 만들어진 김일성 가짜설로는 어림도 없다.

김일성과 함께 했던 이들의 증언은 빼고, 그냥 ‘카더라’식 위주로 채워진 주장은 북한 역사보관소의 원본 문헌들만 공개돼도 즉시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김일성평전은 통일 후 북한에서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책은 보지 못했다.

김일성평전의 출판을 막기 위해 북한은 원고를 사겠다는 등 각종 회유를 했고, 사료를 갖고 뉴욕까지 날아와 이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는 진실이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원고를 갖고 서울로 왔다. 그러나 100여개의 출판사와 접촉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보수단체가 고소하면 변호사비로 큰 돈 날릴 것”이란 이유였다. 자비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편 30부만 찍었지만 이대로라면 이 책은 출판사를 찾지 못해 묻힐 처지다.

한국에선 1980~90년대에 벌써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담은 책들이 출판됐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2016년의 대한민국에선 김일성 신화를 무너뜨릴 저서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다.

이걸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우리는 진보한 것인가, 퇴보한 것인가. 역사 앞에 정직할 자세와 준비는 돼 있는 것인가. 북한의 역사 왜곡을 당당히 단죄할 수 있을까. 김일성평전 하나 찍을 아량조차 사라진 곳에서 공정한 역사교과서가 나올 수 있을까.

난 김일성평전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은 한때의 공산주의자가 어떻게 인민을 철저히 배신했는지를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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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반공서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 읽어보곤 실망해서 빨갱이 책이라고 욕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 책의 의미는 신화적 김일성을 팩트에 기반해 인간 김일성으로 끌어내린데 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자료에는 김일성이 용감하고 임기응변과 화술이 능한 빨치산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아닌 조선인 빨치산 지휘관 중 한 명인 김일성의 활동을 그린 것입니다. 책에 김일성이 1대, 2대, 3대 등이 자세히 설명돼 있지만, 3대쯤 되는 북한의 김일성이 사실 제일 활동 많이했고, 우리가 김일성 장군 소행이라고 알고 있는 전투 대부분이 3대 김일성이 한 것이라는 것이 중국의 자료들입니다.

다만 저는 김일성이 빨치산을 했던 것이 그의 이후 죄를 사해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자도 1945년 이후의 김일성은 극악한 독재자로 변했다고 비판합니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김일성은 공 10% 정도로 시작해 과가 90%쯤 되고, 반대로 박정희는 과로 시작해 평생을 공 80% 이상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엔 항일투사일수도, 일본군 장교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끝나고 죽었으면 모를까, 이후 국가 지도자로 살았던 사람들에겐 한때의 경력이 그가 민족 앞에 남긴 업적이 될 순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부연한다면 태영호 공사의 기자회견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저렇게 외교관들이나 해외 북한 주민들이 다 본다면 저에게 탈출 방법을 언제든지 문의해도 됩니다.

우측에 배너를 띄우긴 했지만, 스마트폰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모르시는 것 같아 이렇게 텍스트로 다시 글을 남깁니다.


윗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또한 nkfuturefed08@gmail.com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안전한 계정입니다. 단, 이 메일로 북한 주민이 아닌 분이 메일 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2016-12-28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 재연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 재연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 재연구

Ⅰ. 서론

Ⅱ. 본론

 1. 고종과 명성황후의 성장 배경
  1) 고종
  2) 명성황후

 2. 개화정책의 차이
  1) 개항
  2) 개화정책

 3. 외교적 입장의 차이
  1) 청국
  2) 일본
  3) 미국, 러시아

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19세기 세계사의 흐름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하여 동아시아 지역이 문호개방의 강압을 받는 시기였다. 이러한 세계시대의 흐름은 조선 내부에 몇 백년 동안 이어져온 성리학적 이념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 시기 청나라가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일본은 군국주의적 근대화를 이룩한 뒤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선 내부에서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자신들의 세력유지에 힘을 쓰고 있었으며 조선정부는 세계정세에 대응하여 쇄국정책이냐 개방정책이냐 하는 양 갈래 길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내부 정세 속에서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등장한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보좌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려는 명성황후가 조선의 정세를 이끌어 가는 독특한 정치구조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정치구조 속에의 두 인물 고종과 명성황후1에 대한 후대의 보편적 인식과 평가는 매우 상반된 경향을 띠고 있다. 먼저 고종을 유약한 왕 즉 능력 없고 부인인 명성황후에게 권력을 빼앗긴 왕으로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명성황후가 반대로 현명한 국모이자, 훌륭한 외교적 능력을 지닌 개화의 선각자이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다 죽은 애국적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고종의 정치적인 능력 즉 자기 주도적인 왕 이였음을 평가하다보면 남편의 권력을 탐하는 표독한 여인, 남편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여흥 민씨 세력과 함께 온갖 부패와 사치를 일삼은 수구세력의 핵심이자 시아버지와 권력다툼을 하는 부덕한 며느리로 평가를 받아왔다.2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은 절대적 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고종의 경우 지금까지 고종 개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으며 또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일제 식민지시기 동안에 일본이 한국의 정체성과 국민의 마음을 왕실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왜곡된 정보 즉 고종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부각시켰을 것이다.3 이와 같은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왕실내부와 왕과 조정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고종의 경우보다 더욱 논란이 많은 명성황후의 경우에는 왕조시대 중전이라는 위치 상 그 정치적 언행이 실록과 같은 공식 자료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은 탓에 황현의 「매천야록」과 같은 야사류에서 전하고 있는 전문기록과 식민지 시기의 어용학자, 저널리스트들이 남긴 자료, 명성황후를 직접 만나본 서양인들이 남긴 견문기에 의존해왔다. 이러한 각각의 자료 모두 객관적이기 어려운 주관적인 결과물 즉 신뢰도 문제가 발생 될 수 있는 문서이며 과대해석, 왜곡가능성을 지닌 것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학계의 연구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4 사료나 자료 등이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남북한 역사학계 모두 조선 말기의 역사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5 그러나 최근에야 왕조말기, 대한 제국기의 정치사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명성황후 역시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재평가의 흐름 속에서 이태진의 『고종시대 재조명』은 개항에서부터 일제 강점 직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고종의 초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대원군과 명성황후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유약한 군주라는 인식을 버리고 개화를 추구한 개명군주라는 새로운 평가를 하고 있으며 김행자6는 명성황후가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로써, 민비와 고종과의 관계는 이성이나 정치에 의해 결합된 부부라고 말하였으며 박진철7도 고종의 정치적 능력을 증명해주면서 고종이 유약한 왕이 아니였음을 이야기해주고 나홍주8 역시 명성황후는 현대 여성의 효시라고 말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요즘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재평가가 많이 이루어져 과거의 고정된 생각이 많이 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배경과 살아오는 과정을 기존에 연구 되어져 있는 연구 자료를 통해 알아보고 두 인물이 어떤 인물 이였는지, 왜 그러한 정치적인 일을 수행하였는지의 원인을 알아보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려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두 사람의 평가가 고종은 명성황후의 치마폭에서 둘러싸인 유약한 군주가 아니라는 점과 명성황후 역시 권력을 탐한 왕비가 아님을 알아 보려한다. 이 글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비교하다보니 고종보다는 명성황후의 이야기가 더욱 자세하게 언급되어지고 있다.
 앞으로 이글은 1장에서 고종의 성장과정과 왕위에 오른 이유와 상황을 알아보고 2장에서 명성황후의 성장과정과 왕비로의 간택과정을 알아 보려한다. 3장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할을 개항과 개화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의 배경세력을 통해 이야기해 볼 것이며, 4장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나라별 외교적 행동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으며 고종이 나약하거나 의존적인 왕이 아니며 명성황후 역시 권력을 탐하는 왕비가 아니였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Ⅱ.본론

1.고종과 명성황후의 성장배경

1)고종

 (1) 출신배경과 즉위
 고종(高宗)은 철종 3년인 1852년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부인 여흥 민씨 사이에서 2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하응은 남연군의 4째이다.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5세손 병원(秉源)의 2째로서 이름은 구(球)이다. 그는 순조의 명으로 남연군으로 봉작 되어, 대가 끊어진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고종의 이름은 처음에는 재황(載晃)이었으나 그가 12세 되는 해인 1863년 대왕대비신정에 의해 익종의 아들로 입양되어 익성군으로 봉작 되었다. 신정은 그의 이름을 희(熙)로 바꾸고 자는 초기에 명부(明夫)였으나 이름이 바뀌면서 동시에 성림(聖臨)으로 고쳐지고 호는 주연(株淵)이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승하했을 때, 왕위를 계승할 세자가 없으므로, 전통에 따라 왕실의 어른인 신정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 신정은 효명세자의 부인으로서, 순조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헌종의 어머니이다. 효명세자는 순조 치세에 잠시 섭정을 하였을 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신정은 왕비가 되지 못했다. 헌종 즉위년인 1834년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봉 할 때에 신정은 왕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대왕대비 순원이 1857년에 죽자, 신정이 대왕대비가 되었다.
신정은 교서를 내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게 흥선군의 둘째인 재황9을 왕궁으로 불러들이라고 했다. 1863년 12월 8일 영의정 김좌근은 신정의 교서를 받들고
도승지 민치상과 기사관 박해철, 김병익을 대동하고 흥선대원군의 사제로 갔으며 이들이 도착하자, 재황은 당을 내려와 절하고 남향으로 섰다. 도승지 민치상이 그의 이름과 나이를 묻고, 신정의 서한을 상위에 올려놓자 재황은 당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상 앞에 앉았다. 그 후 민치상이 신정의 교서를 읽었으며 예가 끝나자, 대신들은 밖으로가 재황을 기다렸다. 재황은 복건을 쓰고 푸른 도포를 입고 흰 대를 찾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나와, 말 위에 장치한 가교(駕轎)에 올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궁에 들어온 재황은 12월 12일에 중희당에서 관례를 치르고 익성군으로 봉작 되었고 다음날인 13일 익성군은 빈전에 나아가 대보를 받아, 창덕궁 인정문에 이르러 즉위례를 거행하였다.
<고종의 가계도>10

이렇듯 고종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12살 나이에 기본적인 왕위승계 수업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신정이나 대원군 양쪽 다 정치적 야심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정의 세력은 죽거나 궁벽한 입장에 놓여있었고 따라서 정치적 기반이 없었으므로 새 국왕을 임명함으로써 그 일가가 득을 얻을 것을 확신하면서 왕실과 일정한 타협을 벌렸다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신정의 왕위계승에 있어 공적인 명분보다는 사적인 판단에 의존한 것 같다.
이처럼 고종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 과정에서 그 어떤 왕들보다도 왕위계승의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 약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11은 궁에 들어온 초기 김병국(金炳國), 김병기(金炳冀)등에게서 효경을 배우고 매 5일에 한번씩 대신이 입참하여 고종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으며 그 동안 배운 것은 시험하였다.
 고종 즉위 후, 고조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으로 봉작되었고, 신정은 대원군을 특별 대우하였으며, 고종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으며, 자신의 고문으로 정사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신정은 영의정 김좌근을 해고하고, 자신의 친척인 조두순(趙斗淳)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그와 함께 국사를 이끌어 갔다.12

2)명성황후

(1) 출신배경
  명성황후의 출생과 집안배경은 우리가 쉽게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나와 있는 자료들 역시 부정확한 기록이나 왜곡된 기록이 많이 나와 있다.
 흔히 명성황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랐고 몰락한 가문의 고아소녀로 묘사되어오고 있고 그런 고아소녀가 일약 중전마마가 되었다는 식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열성황후왕비세보」와 「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철종 2년 9월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났다.13
 여흥 민씨는 조선조에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숙종 비 인현왕후(仁賢王后)를 배출한 노론세력의 집안이다. 장희빈 때문에 유명한 인현왕후의 아버지로서 노론 척신이었던 민유중(閔維重)은 명성황후의 6대조이고, 좌참찬과 홍문과 제학을 지낸 민진후(閔鎭厚) 가 5대조 이다. 또한 고조 민익수(閔䘌洙)는 학문이 놓아 유일로 천거되어 사헌부 장령을 지낸 숙야재 선생이었고, 증조 민백분(閔百奮)과 할아버지 민기현은 대를 이어 문과에 합격하여 각각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을 바탕으로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은 문음으로 벼슬을 나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탓으로 장릉 참봉을 시작으로 종 6품의 제용감 주부, 사복시 주부, 사옹원 주부 등을 역임하고 과천 현감, 임피 현령, 덕천 군수, 영천군수 등 지방 외직을 전전하다가 병을 얻어 철종 9년6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의 첫 부인은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노주(老州) 오희상(吳熙常)의 딸로서 36세로 요절하였고 혈육을 남기지 못하였다. 오희상은 세도 정국에 불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은일로 자처했지만 정조의 지우를 받은 19세기 노론 낙론 학맥의 전통 산림이었다. 그의 문하인 유신환의 제자 중에는 온건 개화파인 김윤식을 비롯한 민태호, 민규호, 민영목 등 고종시대의 개화 인물들이 나왔다. 오희상은 자신이 아끼던 제자이자 사위인 민치록(閔致祿)의 부탁으로 자기보다 먼저 죽은 딸의 묘지명을 지어 애도하기도 하였다. 민치록(閔致祿)이 오희상과 사승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집안이 19세기에 세도 정치를 이끌어가던 경화사족(京華士族) 즉 서울과 서울 인근에 세거하는 노론계열의 관료, 지식인 집단의 범위안에 들어가 있음을 말해 준다.
 민치록의 두 번째 부인 즉 명성황후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1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고 막내 딸 명성황후만 남는다. 이에 민치록(閔致祿)은 생전에 대를 이어가기 위해 민치구(閔致久)의 아들 민승호(閔升鎬)를 양자로 삼는다. 고종친정초기에 세도가를 자임하다가 대원군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폭약상자를 받고 명성황후의 어머니인 이씨와 함께 죽은 자이다.
 이러한 명성황후의 집안의 배경을 살펴보면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기에 집안에 전혀 문제가 없으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의 벼슬이 높지 못하고,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곤궁함이 간택에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또한 명성황후의 출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민승호는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민씨의 친동생으로 명성황후가 대원군 가문과 맺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다리역할을 한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閔致祿)의 도조인 민진후의 동생 민진영(閔鎭永)의 후손 민치구의 아들로서, 두 집안은 5대조 민유중에게서 갈라져 나온 한 집안간이다. 민치구는 민치록(閔致祿)에게 승호를 양자로 줌으로써 대원군의 집안과 명성황후의 인연은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2) 성장과정
 명성황후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자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소설 속에서 나온 이름일 뿐이다. 아마도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태어날 때 집안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났다는 전문을 토대로 지어진 것 같다. 호(鎬)자 항렬을 따른 이름 정호(貞鎬)도 알려져 있으나 역시 명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명성황후가 서울에서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는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은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의 바로 길 하나 정도의 지근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감고당은 옛날 인현왕후가 태어나고 또 살았던 집으로 민유중의 5대 장손인 민치록 대에 까지 대대로 물려받아 서울 집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명성황후는 여성답지 않게 대담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서 습렴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이 나이 어린 민 소녀에게 잠시 자리를 피하라고 권했지만 이를 마다하고 성인과 똑같이 전 과정을 지켜보고 지석으로 곡을 하는 등 어려서부터 매우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서울의 감고당에서 왕비가 될 때까지 살았다. 이때는 아직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이지만, 천주교의 교세가 급팽창하던 시기로서 서양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과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명성황후는 도시와 농촌을 고루 체험하며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안 내력이 학문을 하는 집안이나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몇 번만 읽으며 바로 암송할 만큼 통달했고, 기억력이 좋아서 어떤 일이든 한번 본 일은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역대의 치란과 국가 전고(典故), 열성조(列聖祖)의 사적에 밝아서 혹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독서를 좋아했는지 훗날 왕비로 간택되어 별궁에서 왕비수업을 받을 때 조차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을 밤새도록 놓지 않고 읽었을 만큼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주역(周易)』,『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춘추좌전(春秋左傳)』등 평소에 즐겨 읽던 많은 책들은 죽은 뒤 홍릉(洪陵)에 함께 매장되기도 했다14.
명성황후의 가풍이나 풍부한 독서 경력을 통해 볼 때, 명성황후는 남자 선비 못지않은 유교적 경륜과 수양을 쌓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녀가 훗날 고종과 더불어 정치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러한 학식과 수양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왕비책봉
 흔히 명성황후를 대원군에게 추천한 것은 부대부인 민씨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과정에서 민승호의 개입은 누구나 쉽게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실의 혼사는 여염집의 혼사와 달리 정치적 고려가 우선이다. 세도 정권기에는 ‘국혼물실(國婚勿失)’이라 하여 세도가의 딸들이 왕비로 간택되고, 그 친정아버지는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외척발호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친정아버지와 친형제가 없는 명성황후를 왕비 감으로 간택한 것이다. 양 오라버니 민승호 마저 자신의 처남으로서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보다 더 좋은 며느리 감이 없었을 것이며 여흥 민씨는 대원군 자신의 어머니의 성씨이자 자기 부인의 성씨이기 때문에 더욱 왕비 감으로서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1863년 12월 12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고종이 15세가 되고 철종의 3년 상이 끝나자 대왕대비 조씨는 1866년 1월1일 전국의 12세에서 17세 사이 규수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왕비 간택에 들어갔다. 1월 16일에는 왕실의 가례기간 동안 왕비의 집 역할을 하는 별궁을 운현궁으로 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별궁은 간택에서 뽑힌 예비 왕비를 모셔놓고 궁중의 여러 법도와 가례의식을 미리 연습시켰던 곳으로, 삼간택에서 뽑힌 왕비는 이미 보통사람의 신분이 아니므로 사가로 돌아가지 않고 별궁으로 직행한다. 또 왕도 일반 백성처럼 신부의 사가로 왕비를 맞이하러 갈 수 없기 때문에 별궁을 따로 지정한 것이며, 고종은 자신의 생각인 운현궁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가게 된다.15
 2월 25일 창덕궁 중회당에서 있었던 초간택에서 미래의 명성황후외 5명이 뽑혔고, 2월29일 재간택에서 3명, 3월 7일 최종 간택에서 중전의 자리가 결정되었다. 3월 21일 고종이 직접 별궁으로 가 신부를 맞이하여 창덕궁으로 대리고 들어오는 친영의(親迎儀)가 운현궁에서 거행되었다. 신부인 명성황후는 16세로 고종보다 1살이 많았다.

(4) 궁궐생활
 처음 궁궐에 들어온 명성황후의 일상은 여는 왕비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웃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를 비롯하여 헌종 비, 철종 비 등 대비들을 모시는 일부터 각종 제사의례 등에 참석하고 주관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고종이 익종의 후사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조 대비는 명성황후의 시어머니 격이 되었다. 조 대비는 자신을 지성으로 섬기는 명성왕후에 대해 그 효성을 칭찬하고 궁중 내 대소사를 모두 중전에게 맡긴다는 전교를 내릴 정도로 신임했다. 이러한 명성황후는 총 4남 1녀를 생산하였으나 그 과정이 참으로 기구하다 할 수 있다.
 16세에 결혼하고 5년 동안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궁인 이씨에게서 1868년 4월 완화군(完和君) 선(墡)이 태어났고, 손자를 기다리던 대원군이 완화군을 귀여워하였다. 그러던 터 고종8년 11월에 드디어 첫 왕자를 낳았는데, 쇄항증(鎖肛症)이라는 선천적 기형으로 5일 만에 죽게 되었고 그 후 1873년에 딸 하나를 낳았으나 역시 222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 후 1874년 2월 두 번째 왕자가 태어났는데, 바로 나중에 순종이 된 세자 척(拓)이다. 그러나 3남, 4남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나마 살아있는 순종은 잔병치레가 많고 허약하였다. 그런 아들을 둔 명성황후는 어머니로써 매우 불쌍한 왕비이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로 하여금 무당에게 의존하게 하고 명산대천에 수만 냥의 거금을 써 가면 기도를 드리게 하는 계기가 되고 세자의 훈육에도 열심히 하는 원인이 된 것 같다.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애를 살펴 본 결과 왕과 왕비의 자리의 오르게 된 것이 정상적인 과정과 이유에서가 아닌 정치적인 이용의 수단으로 왕과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고종은 신정의 정치적 욕심과 아버지인 흥선군의 정치적 욕심 때문이며, 명성황후는 그 정치적 욕심을 체우기 위해 안동 김씨 일족처럼 세도정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흥선군의 계획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태어나 자라는 동안의 환경적 차이가 훗날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과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가치관을 보여준다. 고종과 달리 명성황후의 어릴 적은 시골에서의 생활과 서울에서의 생활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명성황후의 그 개화적인 성격이 자라오는 과정 속에서 커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 개화정책의 차이

 여기서 이렇게 평범한 왕비인 명성황후가 왜 일상에서 벗어나 국정에 간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또 어떤 연유에서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자 책봉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완화군이 태어나고 귀여워하던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명성황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대원군 견제에 나서기 시작했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 왕자를 낳았을 때 대원군이 보내 산삼을 먹고 왕자가 죽었다고 믿은 명성황후의 적개심이 더욱 고조되어 있었고, 10년 에 걸친 대원군의 철권통치가 성년이 된 국왕 고종에게 큰불만 이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고종 스스로 생부인 대원군에게서 왕권을 빼앗을 의지를 다지는 길에서 명성황후가 개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즉 대원군에게 정면도전하기에는 유교적 윤리관에서는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되므로 명성황후를 내세워 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내고 자신은 뒤에 숨어 불효자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려는 방법 이였을 수도 있다. 이점에 대해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고종이라는 부자간의 권력 갈등 속에서 희생물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6
 반면 명성황후는 우리가 평가하는 고종의 왕권을 탐냈다는 평가가 마땅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성황후는 고종의 충실한 참모이자 정책적 반려자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남편인 고종이 명성황후의 국정간여를 용인하지 않았다면 강력한 친정가문의 배경도 없는 명성황후의 월권행위는 당장 폐비의 운명에 처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고종은 대원군과 조 대비에 의해 갑자기 만들어진 왕으로 고종의 친위기반은 전무한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별다른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고종이 스스로 통치기반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은 유일한 수단 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민씨 일족은 안동 김씨의 세도나 대원군의 집정처럼 왕권을 압도하는 형태가 아닌 보좌 형식 이였다. 또한 고종이 친히 지은 「어제행록」에 보면 고종이 아내인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간 대궐에서 정사를 도와주고도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당하다가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45세라는 중년의 나이로 돌아간 아내에 대한 고종의 회한이 절절 묻어난다. 덧붙여 인재등용에 대해서도 왕후가 괜찮은 인물은 전적으로 신뢰하되 그렇지 않은 인물은 빨리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같은 인물을 키워 을미사변을 당하게 했다고 후회 또 후회하였던 고종은 명성황후의 장례 때 직접 무덤 속에 들어가는 관의 명정(銘旌)을 쓰기도 했다. 또한 황태자가 쓴 「예제행록」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은 밤에도 방안의 불빛이 환히 비치고 말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고 회고했듯이 고종부부는 금술 좋고 여러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으면서 동지애로 다져진 정치적 반려자이다.17

1)개항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폈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국왕인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1873년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하면서 문호 개방의 여건이 마련되어 갔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왜 개화를 추진하게 되었는가를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명성황후가 개화의 방향으로 틀을 잡은 것이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역행하는 수단 이였다 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한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고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 감정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의 스승 오희상의 문하에 있던 유신환의 제자들 중에서 개화인맥이 많이 나온 점18, 또한 민씨 일가가 북학풍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도서기론자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이 학풍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화가 이미 목표화 되어있었고 그 목표를 향한 방법만이 문제가 될 따름 이였을 것이다. 고종 역시 개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개항을 결심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요 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 등 세 항구의 개항이 이루어졌으나 치외 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뒤이어 일본과 통상 장정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반면, 조선은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이어서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과 맺은 조약 역시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을 전담하고 개화를 주도할 관서로  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19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1880년 수신사파견을 통해 일본의 개화의 실상을 확인한 다음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중국에는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서양사정을 탐문하고 『해국도지』,『영환지략』,『이언』등의 양서를 읽고 있었음을 미루어 볼 때 아직은 동도서기론적 한계에 갇혀있기는 해도 대단히 진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20

2)개화정책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를 결심하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등 노론명문의 자제들이다. 그들은 이미 과거 합격 이전부터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화를 추진한다는 방향에는 동의하였지만 그 방법과 핵심 추진세력에는 상당한 이견을 보이고 있었다. 고종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 사상가들을 총애한 반면 명성황후는 자신의 친정조카인 민영익을 후원하고 자신의 친정세력만으로도 개화정책의 추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개화를 추진하는데 민영익을 민씨의 핵심에 삼고 그밖에 개화세력을 모아 개화정권을 구축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마도 흥선대원군과 기존 안동 김씨 세도가문에 비해 세력이 미약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확실한 정권기반을 갖추려한 의도이자 방법 일수도 있다.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척사위정(斥邪爲政)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처음에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다가 뒤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이나 영남 만인소 사건을 보면 개화의 반발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이처럼 민중의 지지가 하나도 없는 것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권의 최대 약점 이였으며, 임오군란 역시 고종과 명성황후에 정면도전하는 행동 이였다. 이러한 민중의 반감은 정당한 근거를 가진 것인가 국가정책에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개항 이후 물가 폭등으로 인한 하층민의 생활고가 국가에 대항 할 정도로 혹독했던 것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가 세자를 위해 기도에 쓰는 국고 낭비, 개화에 필요한 새로운 기구의 요직을 민씨 일가가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불신과 오해를 부르기 쉬운 것 이였다21.
 또한 1882년 7월 25일에는 다시 기무처(機務處)를 설치하고 8월 5일에는 동도서기적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전국의 척화비를 뽑아내고 개화정책을 공식화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이 반개화적 행동을 서슴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는 오히려 고종에게 더욱 개화의지를 심어주어 1882년 7월22일 ‘문벌숭상타파’의 교서를 내려 서북인, 송도인, 서얼, 중인 하급 서리와 군졸 등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현직에 등용하겠다고 발표하였다.221883년부터 정부 개화정책수행을 위해 『한성순보』『한성주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 설립 취지에 걸맞게 초기의 개화정책의 사명과 방향을 알리는 정부기관지의 역할을 다하였고 국왕과 정부의 공식적인 개화정책에 뒷받침하였다.  
 고종의 개화정책은 완전 개방적인 서양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도서기 또는 구본신참의 개화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동도에 대한 고종의 신념은 전통적 지배이념인 유학 전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도 영조, 정조 등의 선왕들이 수립해 물려준 민국의 이념으로 국(國)과 군(君)을 일치시킨 상태에서 “국은 민에 의지하고, 민은 국에 의존”하는 정치체제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정체제에 이것만 제대로 실현된다면 굳이 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치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종 자신의 재 선언과도 같은 의미이다.23
 청의 내정 간섭의 심화를 예로 들어보면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폐간이 그 것이다.한성순보는 박문국이 수구세력에 의해 크게 파괴됨에 따라 발행이 중단되고 한성주보역시 박문국의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으나 아마도 국왕의 개화정책에 대한 압박이 주된 원인이 아닌가라고 생각 할 수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개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의 친청 정책으로 인하여 개화 정책은 후퇴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14개조 개혁요강)을 일으켰다. 삼일천하로 끝난 이 정변은 개혁 주체의 세력 기반이 약했던 점, 외세에 의존하면서 정변의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였던 점, 청의 무력간섭 등으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화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도전세력으로부터 정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1885년 5월 근대화 추진기구로 설치된 내무부(內務府)를 대궐 내에 두고 왕실이 직접 개화 자강사업을 이끌어 갔으나 청의 간섭으로 지지부진해졌고 육영공원, 연무공원, 광무국, 기기창 등 신설된 각종 근대화 기구들은 재원부족으로 곧 운영정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재원부족 상태를 해결하고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으로부터 차관을 시도했으나 청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부족한 재원을 세원확장과 증세로 메우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개화정책의 추진은 곧 조세수탈의 강화로 이어져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갑신정변 이후부터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10여 년 간 고종과 명성황후가 추진한 개화는 재정부족과 청의 간섭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살펴 볼 때 고종과 명성황후 공통적으로 쇄국정책을 거부하고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으로 이웃나라의 변화된 문물시찰을 한 것이 그것이며, 갑신정변이후 친서방정책을 위한 것이다. 즉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미국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혁의 시급함까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러한 개화정책을 느끼고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차이점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바로 등용세력이다. 고종은 급진 개화세력을 이용하여 개화를 추진하였고, 명성황후 역시 민씨 일가를 이용하여 개화를 추구 하였다. 그로 인한 결과는 갑신정변을 초래하였고 민씨 일가의 죽음과 훗날 명성황후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3. 외교적 입장의 차이

 조선의 내부 정세는 꼭 조선 내부의 문제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동아시아에는 중국 중심의 질서가 존재하였고, 이 질서로 인해 중국의 전통적 관계가 조공제도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면 조․청 외교 관계도 바로 이러한 조공 관계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이 진출한 이래 , 19세기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중화중심에서 만국공법적(萬國公法的)으로 바뀌게 되었고 세계 각 국은 새로운 질서에 의해 관계를 맺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전의 조공체제 하에서의 세계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국제관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전 고종은 친청(親淸)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국정의 주도권은 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외부에서는 인식했다. 청의 황제를 “자신의 황제”로 지칭한 것이나 청의 정치담당 주재관이 왕을 알현하러 갈 때 가마를 탄 채로 옥좌 앞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단적인 예인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청일간의 충돌을 이용해 청과의 종속 관계를 끊고 진정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했다. 물론 일본의 압력과 전쟁승리가 고종의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선택의 범위를 제한을 하였다.

1) 청국
 고종의 청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주로 청에 대한 충성심을 내포한 황제 개인에 대한 안부에 집중하는 시기이고 2기는 환제 대인의 안부는 사라지고 미약하나마 중국내정과 주변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3기는 청에서부터 분리를 모색하는 것이다.24
 개항 초기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은 철저하게 청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1876년 조일수교와  1882년의 조미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항과정은 청의 이홍장이 전통적 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조선에 여러 열강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상호 견제 하에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전략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청은 러시아의 침략위협을 과장하여 조선의 집권층에게 과도한 공러 의식을 불어넣었다.
 개항 초기에도 고종은 이러한 청의 의도대로 1880년 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조선책략(朝鮮策略)』을 금과옥조로 삼아 청의 외교 전략을 그대로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속방화정책이 가시화 되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역시 임오군란 당시 청에 파병을 요구하여 친청파로 인식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이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 차원에서 청이 결정한 것이지 명성황후나 고종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임오군란의 영향으로 민씨일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피난을 가있었고 명성황후 역시 시골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이로써 친청파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함에 따라 고종과 명성황후는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이조연, 조영하 등 친청 세력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갑신정변마저 청군이 진압한 이후에는 1885년 10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라는 직함으로 부임한 원세개(袁世凱)가 조선의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지켜 봐야했으며 민씨 일가의 구심점으로 분신처럼 믿었던 민영익 마저 원세개의 적극적의 포섭으로 친청파에 가담하자 명성황후는 거청(拒淸)의 방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유안사카이와 합자하여 친러정책을 방해한 김윤식, 어윤중을 파면했다.
 하지만 원세개 및 친청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밀약은 무산되었고, 오히려 고종이 원세개의 폐위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원세개는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에서 개화정책중단을 종용하고 김윤식과 함께 고종을 폐위시키고 민씨 일가를 몰아내자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친청파 김윤식이 정계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민영익도 왕실로부터는 인아거청(引俄拒淸)25에 반대하여 조러밀약 사실을 원세개에 밀보한 혐의를, 원세개 측으로부터는 고종폐위 음모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아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홍콩으로 출국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연무공원에 미국인 군사교관을 고빙하고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 상주 외교관을 설치하고 전권공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의 다변화 전략을 통해 청의 속방화 정책에 계속 저항하였다.26

2) 일본
 이전 일본은 근대화를 추구 하는 것이 조선보다 빨라 조선에서는 국가차원에서 유학생을 보내는 등 자유스러운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892년까지도 고종의 독립 의욕을 도와 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 노력했던 일본도 1893년에 들어서면서 그 태도를 바꾸었다. 청이 일본의 은행 차관마저 갚게 하고 상행위를 저해하자 일본은 조선에서 세력을 펴기 위해 청세력을 퇴치하려고 하였고 1893년부터 일본과 조선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1891년 함경동 방곡령문제로 관계가 악화되고 1893년 방곡령으로 인해 더욱 긴장되어갔다. 그러나 1894년 5월 23일 일본공사 오토리는 고종을 만나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내무독판에게 협의하도록 지시했다. 일본의 요구는 강제적이었지만 고종은 일단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내에 진입하고 조선군 각 군영의 무기를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27 일본군의 목적은 대원군의 섭정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고종은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각국 공사와 만난 자리에서 고종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는 가를 묻고, 앞으로 또 다른 사태가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개혁요구와 내정간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리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인다. 고종은 칙령을 내려 대원군의 섭정을 인정한다.
 이 사건에 대해 무쓰는 고종이 오토리에게 참정을 요구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는 대원군이 오토리에게 제안한 것이다. 또한 무쓰는 고종이 아산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격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군이 청군을 격퇴시켰다고 언급했으나 증명할 자료가 없다. 당시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인 스기무라의 회고에 따르면 아산에 있는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위임장은 오토리의 요구에 의해 대원군과 조병직 외무독판이 주저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 위임장 사본은 특사를 통해 오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에게 보내졌으며 위임장과는 별도로 청의 군대가 순순히 철수하지 않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도 함께 전달되었다.
 고종은 1894년 7월 30일 현임, 전임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일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와신상담하여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설욕하도록 하자”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참석한 전 영의정 김병시는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분노를 표명했다.
 고종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전 승지 신기선이 올린 상소문에 대한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신기선은 상소를 통해 일본에 의한 개혁정책과 당시 정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자립을 잘하는 나라는 먼저 자립할 형세를 닦고 그 명색에 급급하지 않으며 개화를 잘하는 나라는 먼저 개화하는 실속에 힘쓰고 그 형식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와 외국군대가 대궐에 침범하고 요충지를 타고 앉아 생사존망이 남의 손아귀에 쥐여있는데 한갖 개국 연호나 내세우면서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났다고 하면 자립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신기선의 의견에 대해 동감을 표하면서도 일단 과거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고종은 당시 정치상황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피하고자 했다. 고종은 당시 정치상황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먼저 고려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국내정치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일본의 개입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개혁의 전권이 대원군에 있고 친일파들에게 정책의 시행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일단 일본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의 표출은 1894년 11월 4일 고종의 지시를 받아 의정부가 발표한 공포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 국가는 우호관계가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앞장서 힘쓰면서 하찮은 혐의를 개의치 않고우리에게 스스로 자립하고 스스로 강하게 될 방도를 권하였으며 그것을 세상에 성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을 잘 알고 이제 규율을 크게 떨치어 함께 일어나서 동양의 판국을 안전하게 하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간고한 형편에서 나라를 일떠세울 기회이고 위기를 전환시켜 안전하게 만들 때이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은 고종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좋은 기회로 파악하게 했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민씨 일파와 구미 개화파들의 활동도 두드러지게 활발해졌다.
 고종은 청일전쟁의 개전 직전에는 일본의 내정간섭 아래에서도 청에 대해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학혁명이 확대되면서 자체적인 진압이 어려워지자 청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 그 예이다. 이후 일본이 참전하면서 고종은 일본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고종은 일본의 직접적인 개입과 조선 내에서의 제당파간의 권력투쟁에 의해 친청에서 친일로 전환한 것으로 보여 지지만 이면에는 일본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적으로 외국의 도움을 받지만 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고, 내정개혁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와 같은 도발적인 침략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일전쟁 이후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해서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려는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다.

3) 미국, 러시아
 고종과 명성황후가 청의 속방화와 일본의 보호국화 시도를 동시에 견제할 방법으로 처음 생각한 것은 서양 강국으로서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에 의존하는 길이였다.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의 ‘거중조정’조항에 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기대는 이후 적극적인 연미책(聯美策)추진으로 나타났다. 1883년 7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28에는 민영익이 직접 전면에 나서 정사에 임명되었고 적극적으로 미국을 배우고 의존하려하였다. 미국정부는 그러한 태도를 보고 미국정부에서는 민영익과 서광범 등을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도록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도와주었다. 보빙사 귀국 이후 개화 정책은 급격히 미국을 통로로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임오군란이후 심화되어온 청의 군사적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연미책(聯美策)이 진행되면서부터 일본에 의존하여 근대화 추진하고자 했던 개화파는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은 마침 미국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미국정부는 통상 교역상 별로 가치가 없다는 판단 하에 조선내정에 불개입원칙을 고수하며 관심퇴거정책으로 일관했다. 알렌 등 조선 현지의 미국인들이 가졌던 왕실과의 개인적 친분과 달리 미국 정부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중조정’에 대한 기대를 전혀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의 태도에 실망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갑신정변 이후 더욱 강화된 청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제1차 조러 밀약은 고종이 의정부 및 통리교섭아문을 통하지 않고 독단으로 몰래 몇몇 내관과 상의하여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고종은 또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로 하여금 주일러시아공사관과 접촉하여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장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고 군사교관 파견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친청파인 김윤식이 강하게 반대하였고, 청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견제하기 위해 청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환국 시키는 등 압력을 강화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반청감정이 극에 달하여 있을 때 마침 서울에 부임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 부처와 그 가족 손탁양의 친절은 명성황후로 하여금 더욱 친러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러한 대러 의존책은 러시아정부의 인식이 조선왕실의 기대에 못 미치고, 러시아 정부 역시 조선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으며, 또한 청과 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엄격히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불간섭 정책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대러 의존책은 다시 한번 청일전쟁 이후 조선 보호국화를 기도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즉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일본이 보호국화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회복하고 개화정권과 일본세력을 동시에 제거 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의 신속한 3국간섭 주도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본 후에 더욱 친러정책에 확신을 가지고 러시아 공사와 은밀히 교섭하면서 까지도 일본에 정면도전을 시도하였다.  
 외교정책에서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국제관계를 이끌어 나아갔다. 공통점은 처음에는 사대관계를 가지고 외교에 임하던 청국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청을 견제하려하는 이유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종은 청이 조선을 청의 일부로 취급하여 내정 간섭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후광이 된 청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려 함이다. 그러나 청을 견제하는 방법에서는 다시 의견이 같아진다. 즉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서양세력과 외교관계를 성립시켜 견제하려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러시아인 것이다. 이렇듯 청을 견제하려는 의도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인적인 차이를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러시아등의 서양세력을 이용하여 청을 견제하려 함은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Ⅲ. 결론

 모든 관점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역사를 볼 때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며 내면화 시키고 있다. 이러한 무비판적인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할 때 구습이라 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우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평가를 대체로 지식인의 기록의 범주 안에서 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경우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니 기본적으로는 그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다. 한 예로 명성황후가 자식들의 죽음에 기도비용으로 많은 돈을 쓰고 무속에 빠지는 것을 평범한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고 있고 또한 총기 있고 전략도 풍부하여 언제나 고종 옆에서 고종을 도왔다고 한 반면 20년 동안 정치에 간섭하여 나라를 망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천고의 변을 당했다라고 평가한 것은 왕비의 입장에서 국정에 간여한 월권행위로 보았으며 이것은 즉  유교적 지식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고종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유교적 도덕관에 입각하여 대원군에 대한 불효, 유생층의 푸대접, 외국을 동경하여 선대의 제도를 변경하고 부강정책에 예의 주시하여 경장에 급급했으나 군신 중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 모든 외교 정책을 혼자 결정하고서도 문제가 생기면 신하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능력과 자질이 부족한 왕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이러한 황현의 평가는 공공연하게 우리의 머리 속에  이어져 전해오고 있다.29
 이러한 평가와 기록은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악의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정확하게 남아 있는 기록의 존재 여부가 의심스럽고 부족하기 때문에 이 두 인물의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은 역사의 큰 희생물이라고 생각이 된다. 차츰 고종과 명성황후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대중의 관심이나 인식의 변화가 확산되어 학계에서도 연구의 태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논증을 거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하겠지만, 유교적인 기준, 가족윤리의 기준보다는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인물들로 봄이 옳은 것 같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았던 시대는 그 이전의 시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서양인들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은 은둔국 즉 외국과의 관계가 거의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과의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과의 관계는 근접국인 청과 일본이 맺고 있었는데 청과는 단지 조공을 일년에 한, 두번 보내고 왕이 바뀔 때 즉위식을 하는 정도였으며 일본과는 사신을 보내는 정도였기에 이러한 외교 관계로는 조선의 정치에 영향을 미칠 일이 없었다.
고종이 집권을 시작한 후 외국과의 교류는 조선에 전혀 다른 정치방향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의 국내문제 역시 국내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 관계에 얽히게 되었고 외국의 간섭도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시기는 민족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였고 민족주의에 입각한 제국주의 국가들인 청, 일본, 러시아가 조선을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이러한 제국주의에 대항할 경제력도 군사력도 주어지지 않았다. 고종이 정치를 시작 하였을 때는 순조와 철종의 치세에 심화되기 시작한 경제난과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당백전주조와 청전의 수입으로 국가 재정은 파산상태였고, 덧붙여 명성황후의 절제 없는 씀씀이가 민중들의 마음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고종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서양인들은 평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농본 정치에 입각한 유교이념을 극복하고 상공업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키우려함과 외국의 자본과 기술도입으로 국가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파산상태는 국가 경제 개발을 위해 감당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자본의 유치는 국내외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런 경제적 원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은 고종이 독립정책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으로 진출하자 청이 의구심을 가지고 병합하려 하고 러시아의 남하로 영국 역시 의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일전쟁이전에는 청을 이후에는 일본을 도와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였고 이러한 강대국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하기에는 조선의 힘이 너무 부족하였으며, 19세의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의 성장을 어렵게 하듯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사대봉건사상이 고종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방해하였다. 또한 정치경제사상을 도입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추진력이 필요로 하나 너무 소심하고 온건하여 재래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주위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책실행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달래고 일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고종이 유약하고 줏대가 없다고 평가받게 되는 것 같다. 여태껏 고종이전의 왕들 역시 왕의 자리에는 앉아 있으나 허수아비의 역할 밖에는 하지 않았다. 실질적은 권력행사는 여러 당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그런 허수아비의 왕의 자리를 벗어나 왕권을 행사 하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 했듯이 고종은 강압적이지 못해 그런 강압적 추진을 명성황후가 대담하게 추진하고 도와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 듯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성황후의 평가가 부정적인 이유는 고종의 불만이 불똥이 되어 명성황후에 튄 것이 아니까 싶다.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는 왕의 자리와 왕비의 자리에 올라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 이유 역시 다른 사람들의 욕심을 체우기 위한 수단으로써 올랐기 때문에 두 부부가 정치적으로 대립할 원인이 없으며, 또한 지지기반의 세력이 약한 부분에서는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공생적 관계에 놓여있다. 큰 맥락의 정치 방향과 이념은 같았으나 방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 역시 즉위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를 수없기 때문에 보인 차이이며, 그렇다고 해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살펴 볼 때 고종과 명성황후 공통적으로 쇄국정책을 거부하고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으로 이웃나라의 변화된 문물시찰을 한 것이 그것이며, 갑신정변이후 친 서방정책을 위한 것이다. 즉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미국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대원군과 외세라는 큰 세력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처세로 보일 뿐 정치적으로 고종이 무능한 왕이며, 명성황후가 권력을 탐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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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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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호칭문제는 많이 언급되어왔다. 민비, 명성왕후, 명성황후 등이 그 예이다. 민비라는 호칭은 결론부터 말한다면 올바른 표현이다. 민비라고 부르는 것은 민씨 성의 왕비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고종의 비였던 민자영을 명성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에 그 부인도 비가 아닌 황후가 맞기 때문에 사후에 명성황후라 불렀다. 대한제국(1897)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에 을미사변(1895)이 일어났다. 흔히 민비라는 표현은 일본사람들이 왕비를 격하시키기 위해 불렀던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격하시키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민씨 성의 왕비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고종의 부인 민씨를 명성황후라 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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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을 연구하던 그리피스, 『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이었던 맥켄지 -"고종의 나약하다" , 윤치호 - "고종의 결단력부족을 지적" . 출처, http://kin.naver.com/db/detai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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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이 있는데 명성황후의 연구는 시해에 대한 연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고종황제에 대      한 연구도 그 자신에 연구보다는 정치적인 방향에 대해서 연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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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이라 하지 않고, 이름인 재황이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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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례를 거행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고종이라 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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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희,「잎의 논문」, 2001년.p.104.
일본은 통상조약이 성립된 이후 양국의 친교를 위해 조선 관리를 초대했고, 고종은 1876년 75명의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 일본의 새로운 면을 보고 돌아온 김기수(金綺秀)는 고종에게 일본을 모방하여 조선을 개혁할 것을 조언하였고 그에 따라 설치된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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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연간 한때 안동 김씨가 비변사 당직을 30%까지 차지한 것에 비하면 여흥 민씨 일족이 의정부 당상직의 15%를 차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권획득 이후 십수년이 지나지 않은 것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급속하게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는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민중이 민씨 일가에 대한 반감도가 그만큼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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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거부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임.
서영희,「앞의 논문」,2001년.p.342.
이 사건이 “갑오정변”으로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년 후인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1860-1914) 일행을 보빙사로 파견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저율이긴 하지만 관세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그 뒤 1882년 9월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와 내지통상권허용, 연안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관세(30%) 부과등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조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앉게 되었다. 민들레 사회연구. http://cafe.naver.com/dolnoja/298.
서영희,「앞의 논문」, 2002년.pp.346~347.

[제792호]고종이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 특집일반 : 특집 : 뉴스 : 한겨레21

[제792호]고종이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 특집일반 : 특집 : 뉴스 : 한겨레21

고종이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독립국가의 ‘정통성’ 인정받아 광복 뒤 분단 강요당하지 않고 통일 입헌군주국 됐을 것

제792호
등록 : 2009-12-30 14:17 수정 : 2009-12-3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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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년, 4·19 혁명 50년이 되는 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30년 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모두 한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장면이었다.
<한겨레21>은 역사를 돌아볼 계기들로 가득 찬 2010년을 맞아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기획,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를 연재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 이면의 의미와 현재적 함의를 짚어보는 방식으로 ‘만약에’를 묻는 것도 의미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테면,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지 않았다며 통일 논의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도 이전 계획이 성공했다면 한국은 어떤 정치·사회적 변화를 맞이했을까?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면 민주주의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과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최성진 기자 등이 ‘역사적 가정’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나선다. 독자 여러분의 톡톡 튀는 ‘가정법 질문’도 기다린다. 편집자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 1919년 1월21일 고종 사망(※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죽음은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압도적인 사건이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간혹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그 사회와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역사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그랬고, 김주열·박종철·이한열의 죽음이 그랬다. 최근에도 두 소녀와 한 대통령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일상의 껍질을 깨고, 거리 한복판에서 격정적인 순간을 살게 했다. 1919년 1월21일,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68살의 나이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을 거뒀다.
중국 망명 막기 위한 일제의 암살이 유력

고종의 죽음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의문은 그것이 조선총독부의 발표처럼 자연사(뇌일혈)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암살인가다. 결론을 말하면 암살의 개연성이 매우 높다. 매우 높을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고종은 1월20일 밤 독을 마시고 고통스러워한 끝에 1월21일 새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고종은 고령이기는 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했다(오히려 그의 아들 순종의 병치레가 잦았다). 뇌일혈은 전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20일 밤까지 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두루 목격되었다. 또한 당시 고종의 주검을 염습한 사람들이 남긴 증언으로는 주검이 사흘 만에 완전히 부패해 이가 입안에 모두 빠져 있었고, 수의를 갈아입히려는데 살점이 옷과 이불에 묻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비교적 흔하게 쓰이던 독약인 비상을 마신 전형적인 증상이다. 보통은 뇌나 심장이 기능을 멈춰도 체내 세포는 한동안 살아 있으므로, 부패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상의 비소 성분은 혈액의 산소 운반을 차단하므로 세포 수준에서 죽음이 바로 들이닥친다. 따라서 박테리아와 세균의 분해 작용이 통상의 주검보다 빠르게 진행돼, 당시 겨울이었음에도 사흘 만에 주검이 완전히 썩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거리(식혜라고도 하고 홍차라고도 한다)를 올렸다는 시녀들이 얼마 뒤 의문사한 점도 암살의 정황을 높인다.
암살이라면 누가, 왜 암살했는가? 아직 구체적인 암살의 각본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세가와 총독이나 데라우치 전임 총독 등 당시 일제 지배기구의 최고위선에서 모종의 비밀 계획이 꾸며졌다는 내용이 당시 총독부 고위직의 회고록이나 일본 정부 문서 등에 보인다. 그리고 1월21일 직후부터 널리 퍼진 독살설에 따르면, 총독부의 지령을 받아 이완용과 윤덕영 등이 어주도감 한상학, 어의 안상호 등에게 식혜(혹은 홍차)에 독을 넣어 고종을 살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종이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덕수궁 함녕전을 내려오고 있다. 그는 1919년 1월21일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이 자연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죽음의 원인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한겨레 자료
암살의 배경에는 고종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에 만족한다”는 친서를 보내라는 일본의 강요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해서라는 설 등이 있으나 겨우 그 정도의 문제로 암살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을까 싶다.
그보다 고종이 을사늑약 이래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비밀 후원해왔을 뿐 아니라 해외 망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암살의 이유로 유력하다. ‘외유내강’형이던 고종은 겉으로는 무기력하게 국권 침탈을 수용하고 일제의 기념품 같은 존재로 하릴없이 연명하는 듯 보였으나, 이면에서는 투쟁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뒤 국내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중국에 망명해 있던 이회영·이시영 등과 은밀히 연락해 중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추진했음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일본이 모르는 체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민족해방의 복음으로 받아들인 세계의 피압박 민족들이 제각기 웅성거리며 제국주의 지배에 맞서려는 분위기였는데, 고종이 떡하니 망명해서 병합 무효 선언을 하고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일제로서는 크나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암살이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할 만도 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자. 고종이 그때 숨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고종이 해외 망명이나 지속적인 국권 회복 투쟁을 포기하고, 이태왕(李太王)의 신분으로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기로 결정했을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고종이 1월21일의 암살을 모면하고, 어찌어찌 국외 탈출에 성공해 해외에 망명정부를 세웠을 경우다.
먼저 고종이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이후 5~10년 정도를 더 살았다고 하면, 일본의 한국 지배는 상당히 수월해졌을 것이다.
순종과 비교가 안 되는 충성의 대상
고종은 당시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45년간 재위해 조선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왕위에 있었으며, 그 시기는 개항에서 개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에 이르는 여러 정치적 격변과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거친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등 한국 근대화의 거의 전 과정에 걸쳐 있었다. 그런 어려운 시기, 격동의 시대를 함께 보낸 최고 지도자는 설령 불세출의 업적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민중에게 각별한 정을 남기게 된다. 순종도 있었지만 고종이야말로 실질적인 조선 최후의 군주였고, 한국인에게 순종과 비교가 안 되는 충성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세창·이상설·한용운처럼 고종의 밀사 역할을 했거나 고종을 동정 또는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손병희·윤치호·안창호 등 고종이 과거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을 탄압한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인사들, 또는 국가 지도자로서 고종이 너무 무능·유약했다고 비판한 이들조차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그의 죽음과 독살설에 격앙된 민심을 연료로, 그의 영전에 조문하기 위해 서울에 전에 없이 사람이 밀려드는 상황을 도화선으로 삼아 대대적인 반일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기로 했다. 이것이 고종의 장례일을 이틀 앞두고 일어난 3·1운동이었다(3·3운동이 아니라 3·1운동이 된 이유는 노제가 치러지는 당일은 고종의 장례를 방해할 수 있고, 2일은 일요일이어서 거사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해외 각지에 퍼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망명정부 수립에 뜻을 두고 힘을 합치게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의 죽음은 그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 즉위식을 마친 고종의 어가 행렬. 한겨레 자료
고종이 1919년 1월21일에 죽지 않았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어도 상당히 규모가 작은 소수 독립운동가 중심의 운동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가 덕수궁에서 일본에 의존하는 삶을 계속 살았다면, 아직도 고종과 옛 황실에 충성하는 민중과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이견 때문에 독자적 망명정부 수립, 공화국 선포 등의 행보는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한편이던 미국·영국이 점점 일본과 거리를 두게 되고(가령 1922년의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폐기하고, 중국에 산둥반도를 반환하며, 대규모로 해군을 감축하는 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일본이 대외관계에서 위기를 느끼던 시기까지 고종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이후 왕년의 독립운동가나 문인, 예술가들이 강요당한 것 이상의 친일 선전활동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고종의 이름으로 일제 지배를 칭송하거나 일본의 ‘동양평화론’ ‘대동아 공영론’을 찬양하는 성명이 남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내외 독립운동이 크게 제약받았을 뿐 아니라, 광복 뒤에도 옛 황실 처리 문제를 두고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보자면 고종이 일제의 유혹에 빠져 안일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결과 1919년 1월에 죽음을 맞이한 일은 역사적으로는 다행한 일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아무튼 ‘다행’이라는 말을 쓰는 일이 용서된다면 말이다.
임시정부보다 명분·세력 월등했을 것
하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 즉 고종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스스로 망명정부를 수립했을 경우에는 좀더 복잡해진다. 고종은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초기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도 하고 있었다.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이인영·민종식·신돌석·정환직·허위 등은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거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는 국권 상실 이후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져, 1920년대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국왕에의 충성과 국가에의 충성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옛 사상체계에서 ‘근왕’, 즉 임금을 도와 난리를 평정한다는 이념이 큰 대의명분이 되었던 까닭도 있고, 일본의 지배가 철저한 국내나 떠돌이 신세인 해외에서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이 투쟁의 자금원으로 절실하게 쓰인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밖으로 나와 망명정부를 선포했다면 상하이 임시정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세계 각국의 승인을 얻었고, 그 주권자였던 고종이 한일병합이 무효임을 밝히고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면 이에 호응하는 국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힘이 우선인 국제관계에서 당장 광복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이 확실히 일본의 적으로 돌아선 다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임시정부의 김구는 “우리가 기여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정부 자체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합법적 정부임을 주장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광복 당시 한국은 일본에 강제 점령당한 독립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에 불과했던 것으로 여겨져, 열강들에 의해 일본 대신 한반도를 분할한다는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고 임시정부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국가의 승인을 얻고 계속 일본과 싸워온 옛 황실의 망명정부가 있었다면, 당시 외국에 망명해 있다가 귀국해 정권을 되찾은 이란의 팔레비나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처럼 고종의 후계자(고종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은 작은 만큼)가 당당히 귀국해 통일 한국의 국가원수로서 한국을 통치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물론 과거와 같은 전제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의 자격이었겠지만).
후계자는 통일 한국의 국가원수?
고종이라는 한 개인이 당시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란 실로 컸다. 그가 친일을 선택했거나, 망명에 성공했거나, 혹은 삶을 이어갔을 경우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