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30

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2)폭력, 왜 사라지지 않는가 - 기독공보

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2)폭력, 왜 사라지지 않는가 - 기독공보

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2)폭력, 왜 사라지지 않는가

박성용 목사l승인2015.04.14l2983호 l조회수 : 426
'폭력'이 '또다른 폭력' 부른다

박성용 목사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갈등해결이나 비폭력 대화 실천가로서 필자에게 있어 개인 간, 단체 내, 혹은 단체 간이나 학교폭력 관련 갈등에 있어 활동을 하다보면 깊이 다가오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적'이라는 단어가 막연히 저 멀리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부부 간에 있어서 상대방의 강제, 무관심, 권위주의적 태도, 혹은 듣기 힘든 언어로 힘들어 하고 상처를 받은 40대, 50대의 고백을 듣는 일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식간에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처럼,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낸 부모나 시어머니나 친척들과의 소통 단절과 비인격적인 태도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단절의 경험에 대한 하소연은 봇물을 이룬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가 싶을 정도로 공감하며 듣고 있노라면 가슴 시리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원수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연인, 동료, 친척, 지인이라는 딱지로 살지만 실제로는 가해자, 원수로 대면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며, 이로 인해 가슴앓이를 너무나 많이 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말할 수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드러내면 안전하지도 않아 속으로 쌓아가는 일들이 많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에 새로운 현상이 급속하게 그리고 그 관여되는 학생 숫자와 발생건수에 있어서 심각하게 퍼지는 양상이 새로 생겼다. 그것은 카카오톡과 스마트폰의 문자에서 발생하는 집단적인 언어폭력의 만연에 교사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거나 싫은 아이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만 아니다. 오히려 더 빈도수가 많은 것은 친구였던 사이가 오해나 상호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다툼과 증오 그래서 적으로 등돌리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고, 카톡이나 문자메일을 본 부모들이 학생 당사자보다 더 분노하여 그것을 증거로 학교폭력위원회나 소송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버 상에서 서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상호작용하는 속도가 종래 만나서 언어로 전달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지면서 자극되는 말과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얽히고설키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리고 최초 원인제공자와 이것을 퍼나르고 중간에 개입하는 학생들의 구분과 정체성이 모호해지도록 얽히면서 학생지도나 문제해결에 난감해 하는 담임이나 학생부장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여기서 가정이나 학교의 사례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원수(적)를 생각할 때 막연히 내가 사는 영토가 아닌 다른 곳, 내 생활공간 밖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 누구가 아니라 실상 우리는 가족이나 공동체원이라 생각하는 현실 속에서 가까이 대면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부모, 친척, 친구, 직장동료, 공동체원으로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 상처, 폭력, 손해의 경험으로 인해 실제로는 원수로 지내고 그로 인한 심리적 비용과 아픔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매우 크다. 눈에 안보이게 저 멀리 있는 원수보다 집안에서 공동체안에서 만나는 겉으로는 가족, 친구, 동료이지만 속으로는 원수지간인 상황이 오히려 길게 가고, 상대방에게 기대가 있었기에 그 상처는 더 깊고 이로 인한 심리적인 절망과 무력감은 그 일을 계속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영혼까지 해치는 정도가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원수는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어쩌다 대면하는 희소성의 사례가 아니라 늘상 직면하는 실재(리얼리티)이자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무거운 정서와 소진하는 시간, 의기소침해지는 활력성의 상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에 대한 낯설음은 의식되지 않은 자동적인 반응의 '폭력의 각본'이 되어 우리의 의식을 점유하게 된다. 여기서 '폭력각본'이라함은 연극의 연기자가 대본에 따라 자신의 실재의 정체성이 아닌 각본에 따른 연기자로 충실히 역할을 한다는 비유로 폭력의 대본에 따른 연기가 자신인양 폭력의 시나리오에 몰입되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 폭력각본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렸을 때 본 만화영화 속에 철저하게 녹아있다. 뽀빠이, 톰과 제리는 물론 슈퍼맨, 600만불의 사나이 등 속에서 위험한자, 원수, 적의 설정, 우리편과 저들 및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법과 협력에 의한 문제해결이 아닌 강한 주인공에 의한 문제해결, 그리고 대응에 있어서 대화가 아니라 이른바 뱀의 생존논리인 '공격하기(Fight), 도망가기(Flight), 복종하기(Frozen)'에 따른 행동 등이다.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에 의해 '그들'에 속한 사람들은 관심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더 나아가 도전적인 상황이면 징벌의 대상이 되어 쉽사리 무찔러 없애는 것에 대한 타당성의 논리가 적용되어진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고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대응방식으로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상대가 나에게 행한 상처와 고통 그리고 손실에 대해 시비선호의 논리에 따라 알려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당한 차원의 일부를 네가 맛보아야만 정신 차리게 될거야. 그러니 너도 당해봐야 내 심정을 알겠지." “"네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뭔가 힘의 충격이 필요해. 그래야 너는 정신이 들거야."

잘못을 행한 상대가 그것을 고치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려면 상대방이 나에게 한 '같은 종류'의 그 무언가를 최소한 돌려주거나 더 자연스럽게는 더 강하게 전달해야 상대방은 잘못됨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를 더 이상 미래에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여기에는 확고하다. 지금 내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상대방이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통을 부과하기, 강제로 교정시키기, 더 큰 힘으로 영향을 미치기 등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대응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시키는 폭력'이라는 신화이다. 힘으로 상대방을 교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보복적인 상호응답의 신화로 인해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현실은 창조되고 폭력의 현실은 더욱 확산되어진다.

여기에서 대응방식의 초점은 타인에 대한 강제의 힘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상대방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구속, 처벌, 고통 부과, 분노, 안보기, 상대방의 논리나 진영을 훼손하기 혹은 무너뜨리기 등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도 어느새 모르게 내가 싫어하던 '적을 닮아가기'를 실습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싫은 것을 나도 이젠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당하게 상대방에게 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시키는 폭력'이 효과가 있다는 고정관념과 신화 속에 살 때, 두려움, 수치심, 고통과 굴욕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섭고 우둔한 방식인가? 가정폭력, 학교폭력, 성폭력, 국가폭력, 전쟁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보편적인 인간성을 보는 시야를 잃고 '나 또는 우리 대 너 또는 그들'의 이분법에 따라 시비선호의 논리에 의해 '적-이미지'를 갖게 되고,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방식으로 '구원시키는 폭력'의 각본에 의해 행동하게 되면서 자극상황이 폭력상황으로 바뀌고 이를 강화한다. 이 폭력각본의 덫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 강제, 힘이 효과가 있다는 그 어떤 신념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 볼 수 있는 영혼의 자각이 요청된다.

박성용 목사

박노자 글 "포스트모던형 종북마녀사냥"...

박노자 글 "포스트모던형 종북마녀사냥"...
Sejin Pak
1 hr
2] 박노자 글 "포스트모던형 종북마녀사냥" 0628
https://www.facebook.com/vladimir.tikhonov.5/posts/10210254390738893
오늘 박유하 교수 (세종대)의 주장들을 정밀 분석해온 박유하 교수의 비판자인 일본 명치학원 준교수 정영환 선생님은 조상의 고향, 즉 모국인 한국에 입국할 수 없다는 입국불허처분의 소식을 들으신 것입니다. 이유란, 그가 조선적 (사실상의 무국적)을 고수하면서 남북한 양쪽과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자국/모국에 가는 것은 인간의 기본인권인데, 한국에서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거의 고려하지 않죠. 한데, 박근혜 정권의 이 반인권적 폭거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평을 들어봅시다: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의 담론이 한일화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영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빼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하고) 화해할까 봐 두려워 하기보다는, 재일교포사회와 일본과의, 혹은 북한과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걸 보면 이거야말로 포스트모던식의 대북마녀사냥,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마녀사냥의 거의 "표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인 만큼은 직설어법보다 간접어법이 더 많이 활용됩니다. "정영환이 친북 재일조선인이라서 우리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화해를 일부러 방해하는 사람이다, 이런 정치활동을 벌이는 친북파를 입국시켜주지 않는 걸 당연히 이해한다", 이런 말을 하고자 하는 모양인데, 표현들은 훨씬 우회적입니다. 물론 우회적이라 해도 그 상당부분은 법률적으로 명예훼손이라는 범죄에 해당되겠죠.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했다"고? 그런 걸 입증하지 못할 경우 허위사실유포에 해당됩니다. 한데 조선적 재일동포들을 포함하여 모종의 강국의 국적을 가진 외부자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의 "주류"는 사실상 무권리적 존재로 취급하여 허위사실 유포해도 처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허위사실유포와 함께 이런 글은 법률적 처벌이 애당초에 불가능한 매우 강도 높은 왜곡을 포함합니다. 위안부 성노예화 피해자들에게 2차, 3차 가해가 되는 범죄적인 "한일 합의"를 반대하는 것이나, 일본이 한 번도 사과, 보상하기는커녕 한반도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정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한 것도, 인권운동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이 아니라 "한일 화해 방해"로 둔갑되어지는 것입니다. 화해? 70여년 전의 국가 범죄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한국 해군과 해상자위대의 공동훈련 등 노골적 전쟁준비를 골자로 하는 "화해"를 찬양하는 "젠더 연구자"(?)가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이외에 더 있나, 싶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교묘하고 우회적인 포스트모던 방식이든 직설적이고 거친 "넌 조총련이지?"와 같은 방식이든, 한국의 "주류"는 대북마녀사냥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가 봅니다. 타자에 대한 부정 이외에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가치 있는 뭔가를 창조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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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유하 글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0628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1263399900570
고발 직후부터 집요하게 나를 비판해 온 재일교포 정영환의 책이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다른 것보다, 푸른역사에서 그 책이 나왔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나의 페친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을 훌륭한 출판사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번 재판에서, 검사는 김부자교수의 책을 들고 와서 나의 범죄사실을 증명하는 "범죄증거"라 했었다. 이미 일부 논문이 제출된 바 있지만, 다음번 재판에는 이 책이 제출될 가능성이 높다. 관계자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민변회장이 정영환 책의 출판기념강연회에 등장하고, 학자들이 재판중인 사람에 대한 왜곡과 규탄에 나서는 현황이,나의 일이지만 한국의 일이기도 해서, 우려스럽다.
지켜야 할 대상이 일(학문 혹은 법)자체가 아닐 때,그 공간은 낙후되거나 부패한다.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의 담론이 한일화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영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빼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하고) 화해할까 봐 두려워 하기보다는, 재일교포사회와 일본과의, 혹은 북한과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들에게, 바로 얼마전에들은,정대협의 한일합의비판을 비판하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이들이 만들려 하는 건,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반론 2(2015/8, 역사비평 112호)
https://cldup.com/mt2lV_7iqt.pdf
장정일 작가의 정영환 비판(2016/5, 허핑톤포스트)
http://parkyuha.org/%eb%b0%95%ec%9c%a0%ed%95%98-%ec%a3%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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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유하 글 어제는 과잉반응을 했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2148199812090
어제는 과잉반응을 했다. 많은 분들께 걱정 끼쳐서 죄송한 마음이다.
재판이 없었다면, 또 신뢰했던 이가 한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충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불필요한 곡해가 또다시 재생산되고 있는 것 같아 우선 그 부분에만 언급해둔다. 내가 서글프고 힘든 건, 이런 왜곡들이 문화권력을 갖는 이들에 의한 것인 이상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이들의 목적이, 내가 지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싶다.
정영환씨의 입국불허문제에 대해 나는 이렇게 썼다.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이 한일화해에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박노자씨등 몇몇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비판에 나섰다. 그 글에 어떤 비약과 왜곡이 있는지는 글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이라면 금방 알 수 있을테니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
정영환이 아니라 정부를 비판했는데도, `대북마녀사냥`이고 `마각이 드러났다`는 식으로 `멋대로, 깊이, 비틀어 읽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은, 아마도 냉전후유증으로 병들어 있는 우리사회의 단면일 것이다.
어떤 젊은 연구자는 내가 재일교포를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조선적재일조선인으로 호명해 북한과 연계시키는 짓`을 했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입에 담는 연구자가 할 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까지 비난했다.(젊은 연구자들은 언어예의교육을 좀 받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나의 책을 표현의 지유라는 말로 변호한 적도 없다.)
북한과의 연계를 언급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나와 일본우익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일본과 분명 깊은 연계관계가 있다. 그리고 누가 그걸 지적한다고 해서 문제삼지 않는다. 문제는 사실에 반하는 지 여부일 뿐.
집단명사로 호명당하는 일과, 표현의 자유문제에 민감한 이들이, 왜 나에 대한 사태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이제 직접 거들기에 나선 것인지도 묻고 싶다.
나는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을 택한 조선적 분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정점에 작가 김석범 선생이 있고, 내가 `조선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그 분을 통해서였다.
내가 언급한 건 오로지 `한국정부의 판단`이다. 쓰여 있지 않는 비난을 굳이 읽어내 비난하는 이들의 행위는, 위안부는 원래 일본인이 대상이었고 국가에 의해 이동당한 가난한 여성이라는 의미로 `조선인 위안부는 가라유키상의 후예`라고 썼더니 `그건 매춘부라는 뜻! `이라면서 판금을 요구한 지원단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현 사태를 지식인의 대중화,라고 내가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쓴 글 들을, 비판자들은 멋대로 비틀어 확산시킨다, 하지만 언어를 사용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의식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나를 옹호해 준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차이는, 대상과 글 자체에 대한 존중이 있는지 여부였다고 생각한다.
정영환문제에 대한 참고자료로 조관자 선생의 논문을 올려 둔다. 재일교포/조선적에 대해 말하려면 이 논문은 필수적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입국제한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6절이 자세하다.

2016-06-29

동포세계 |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두 차례 재외동포NGO대회 개최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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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부끄러운 마음으로 활동해 왔다”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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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사할린 강제징용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오마이뉴스 모바일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인터뷰] 재외동포 운동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
일시 09.02.27 17:35l최종 업데이트 09.02.28 10:05
성하훈(doomeh)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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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었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은 압박과 수탈의 연속이었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도 살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돈에 팔려나가야 하는 신세였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뒤로 한 채 돈 몇 푼에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끌려갔다. 살기 위해 간도 연해주 중국 땅을 옮겨 다녀야 했고 거기서 다시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해 흩어져야 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등등, 그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1천만 해외동포를 운운하지만 한국 해외 이주민사의 시작은 이렇듯 가슴 아픈 '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짧게는 60여년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후 세월에 덮이며 고난의 기억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당시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구촌동포연대(Korea International Network. 약칭 'KIN')' 배덕호 대표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아리랑>에서 그려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덕호 대표는 사할린 동포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그 내용은 소설 <아리랑>과 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은 소설과 같았고, 소설 내용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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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어머니와 동생들을 놔두고 먼 미국 땅 사탕수수 밭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끝내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한 달 가까이 죽음의 여행을 한 끝에 생면부지의 땅에 내려진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실 속, 징용이란 이름하에 사할린 땅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마저도.

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한편으로 애증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현실에 그들 운명의 기구함을 탓해야 할 뿐이었다. 그래서 외세에 나라를 뺏긴 힘없는 백성의 비애는 나라를 되찾은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강제로 떠나야 했던 조국, 고난의 기억 한국 이민사 첫 장

'지구촌 동포연대'가 27일로 창립 10년을 맞았다. 10년 전인 1999년 출범한 '지구촌 동포연대'는 바로 이렇게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조국을 등진 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이국땅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해외 동포들. 그들에게 고국의 정을 나눠주기 위해 애쓴 것이 지금껏 이들이 해온 역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 해외 입양아 출신과 함께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낳아준 부모를 찾으러 들어온 친구였는데, 비자 문제 때문에 3개월마다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하는 거예요. 괜히 화나더라고요. 해외로 팔려나간 것도 서러울 텐데 3개월에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한다니 국가가 돈벌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6일 오전 서울 마포의 지구촌동포연대 사무실. 10주년 행사 준비로 피곤한 표정인 배덕호 대표는 해외동포 권익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해 줬다. 95년이던 그때부터 캠페인을 벌이며 재외동포 문제에 눈을 뜨게 됐으니 햇수로 따지면 근 15년째. 공식적 활동보다는 한참 앞선 셈이다.

99년 재외동포법 제정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 즈음 '지구촌동포청년연대'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시작됐고, 그 이후로 해외 동포의 문제는 그의 문제가 됐다. 외교부도 아닌 민간단체가 아픈 역사를 이고 살아가는 해외 동포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우토로 문제 등은 'KIN'이 나섰던 대표적인 사안들이다.

때는 2003년, 도쿄도(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도쿄 제2초급학교(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상대로 토지양도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공유지였으며, 길을 내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없애야 한다는 것.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중심지에서 내몰렸던 조선인들이 도쿄도와 계약을 통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도 지었던 것인데, 그 학교를 사용하지 말라니 동포사회가 발끈했다. 재판을 통해 1억7000만엔의 화해권고 결정이 내려졌고, 이 소식이 알려지며 한국에서도 모금 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 KIN이 있었다.

우토로 문제도 마찬가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게 된 땅. 수십 년 촌락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을 비워달라는 땅주인의 통고에 10년간 재판으로 맞섰지만 패배한다. 강제 철거의 위기 방법은 그 땅을 사는 것뿐. 힘에 부쳐 절망하던 그들의 소식이 고국에 알려졌고, 이번에도 KIN이 나섰다. 여론의 힘을 받아 국민모금이 이뤄졌고 정부도 30억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동포애가 뭔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재외동포 문제 중요한데 낙하산 내려 보내는 정부 한심

"10년을 맞아서 27일 기념행사를 할 예정인데 앞에 내걸 말이 '10년 간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예요. 아직 마무리된 일이 없거든요. 사실 제가 한 것은 없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다른 분들이 일을 다 해준 것이지요."

이런 활약에도 배덕호 대표는 "10년 동안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10년을 돌이켜 보니 남는 것은 빚이었다"면서 웃어 보였다. 역사적 사명감이 없으면 힘든 일을 정부산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가 감당하려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 재외동포재단 등에서 지원해 주는 것은 없나요?
"신청은 하지만 기대는 안 합니다. 10주년 기념행사 한다고 초대장은 보냈습니다. 올 것 같지는 않지만요. 정권이 바뀐 게 영향이 크네요."

- 지난해 8월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낙하산 반대 성명 발표한 것이 영향을 받는 건가요?
"불이익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재외동포재단 수장이라면 나름 철학과 중립성을 갖추고 정파적 입장을 초월해야 하는데, 정권 탄생에 기여한 특정 단체 대표를 논공행상으로 문외한이 내려앉힌 것은 문제가 큰 것이지요. 초기에도 낙하산이었지만 그나마 관련 논문도 발표하고 전문성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민간 전문가들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이전 정부가 잘 따라준 것인데, 정권 바뀌었다고 아무나 내려 보내고 있으니 참 한심합니다."

해외동포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람의 문제, 특히 외교관들의 역할을 많이 언급했다. 외교관 한 사람의 노력이 엄청 큰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외동포재단 낙하산 이사장에 불만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요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할린을 예로 들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은 적국 소련과 협상을 통해 사할린 땅의 일본인 30만 명을 데리고 옵니다. 조선인들은 나 몰라라 했지만 자국민만은 챙긴 것이지요. 유골까지 송환해 올 정도였습니다. 91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전 후 이런저런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일본인들을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자국민 챙겨야 할 정부는 외교마찰만 걱정

자국민에 대한 외교부서의 책임감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뒤늦은 행동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들은 자국 동포들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외교마찰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해외동포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닌 외국이기 때문에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를 펴던데, 그럼 외교관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외교관 역할 아니던가요? 하다못해 북한도 북일 미수교 상태에서 일본의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국민을 챙기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는 우토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외교부는 남의 나랏일이라며 모른 척했다"고 말했다. 형평성 문제로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여론이 들끓고 국회에서도 나서자 마지못해 지원을 결정했다는 것. 우토로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직접 우토로 땅주인인 서일본식산 대표와 만나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하고… 그래서 애초 부르던 가격보다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담당자도 몇 번 바뀌고 편성된 예산이 실무적인 일로 지체되고 있어 답답합니다."

우토로 문제는 정부지원금도 책정됐고 모금도 이뤄졌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원방식에 대한 절충이 아직 안 끝나고 있어서다. 정부 예산지원이기에 땅 구입 및 관리를 위해 설립될 법인의 이사장과 과반수의 이사를 우리 정부 측 관계자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부의 입장.

이에 반해 우토로 마을에 대한 일본 내 관련법안 마련 및 일본 정부와의 실무적 협의는 마을 주민들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일본 정부가 꺼려한다는 것이 배 대표가 전하는 현재의 우토로 상황이었다.

"우토로 땅주인 만나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해 가격 낮춰"


우토로 관련 영화상영회에서 우토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배덕호 대표

-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국민도 아닌 해외동포까지 지원해 주느냐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경제와 재외동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재외동포 정책을 경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필요하면 써먹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의미로 보여요. 어려웠던 시기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고, 외국으로 내보내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위기 때문에 지원 힘들다 이야기 하는 것은 양심도 없는 행동입니다. 재외동포를 필요할 때만 팔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재외동포 현안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요즘 관심을 쏟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99년부터 영주귀국이 진행됐지만 정부가 45년 8.15 이전에 남겨진 1세대만 데리고 와서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들어와야 했다는 것.

그래서 요즘 KIN이 접근하는 사할린 한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냐는 방향성이다.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로 동포사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당국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어렵게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한국 사회의 빈민층과 같다는 시각으로 보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 KIN의 노력은 재외동포 문제에 대한 작은 진척들을 이뤄냈다.  2005년 재외동포에 대한 홍보자료가 정부에서 나왔고, 에다가와 학교와 우토로 마을 등에 국민적 관심을 일으켰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법도 계속된 노력 끝에 2004년 개정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을 제외시켜 논란이 있었던 재외동포법은 200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이후 해방 이전으로 재외동포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은 우리가 겪은 일방적 피해

 축소
▲ 사할린 한인 현지 실태 조사차 KIN이 방문했던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 ⓒ 지구촌동포연대

그는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재외동포 운동의 방향에 대해 "모든 게 다 정치인데 그 부분에 게을렀던 것이 가난한 일을 자초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재외동포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법제나 예산 등의 정책적 틀을 갖추고 국제적 연대 활동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아울러 사할린 문제와 재외동포의 중요성 등에 사회적 관심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할린은 강제 징용으로 우리 국민이 일방적 피해를 본 사안입니다. 재일동포는 해방 후 귀국을 보장받았지만 사할린은 돌아오고 싶었어도 올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KIN에서 관심 갖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해외에 형성된 동포사회는 돈으로 일부러 만들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주요 사안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가능하고 네트워크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 점심시간이었다. 한사코 점심을 같이 하자는데 빚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비록 밥 한 끼일망정 얻어먹는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내가 사든가 아니면 나는 그냥 가든가. 그러자 절충안을 제시한다. 자기가 살 테니 후원회원이 돼 달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반칙을 했다. 밥값까지 내가 냈다.

끝으로 물었다. "10주년 행사에 손님들 많이 오실 것 같아요?"

답변은 간결했다. "외교부 재외동포 담당 대사님이 오신다고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토로 주민대표 분들도 오신다고 하고 한 100여명 오시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오마이뉴스 모바일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오마이뉴스 모바일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인터뷰] 재외동포 운동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
일시 09.02.27 17:35l최종 업데이트 09.02.28 10:05
성하훈(doomeh) 기자
-

예전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었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은 압박과 수탈의 연속이었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도 살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돈에 팔려나가야 하는 신세였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뒤로 한 채 돈 몇 푼에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끌려갔다. 살기 위해 간도 연해주 중국 땅을 옮겨 다녀야 했고 거기서 다시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해 흩어져야 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등등, 그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1천만 해외동포를 운운하지만 한국 해외 이주민사의 시작은 이렇듯 가슴 아픈 '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짧게는 60여년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후 세월에 덮이며 고난의 기억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당시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구촌동포연대(Korea International Network. 약칭 'KIN')' 배덕호 대표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아리랑>에서 그려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덕호 대표는 사할린 동포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그 내용은 소설 <아리랑>과 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은 소설과 같았고, 소설 내용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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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어머니와 동생들을 놔두고 먼 미국 땅 사탕수수 밭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끝내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한 달 가까이 죽음의 여행을 한 끝에 생면부지의 땅에 내려진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실 속, 징용이란 이름하에 사할린 땅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마저도.

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한편으로 애증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현실에 그들 운명의 기구함을 탓해야 할 뿐이었다. 그래서 외세에 나라를 뺏긴 힘없는 백성의 비애는 나라를 되찾은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강제로 떠나야 했던 조국, 고난의 기억 한국 이민사 첫 장

'지구촌 동포연대'가 27일로 창립 10년을 맞았다. 10년 전인 1999년 출범한 '지구촌 동포연대'는 바로 이렇게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조국을 등진 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이국땅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해외 동포들. 그들에게 고국의 정을 나눠주기 위해 애쓴 것이 지금껏 이들이 해온 역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 해외 입양아 출신과 함께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낳아준 부모를 찾으러 들어온 친구였는데, 비자 문제 때문에 3개월마다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하는 거예요. 괜히 화나더라고요. 해외로 팔려나간 것도 서러울 텐데 3개월에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한다니 국가가 돈벌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6일 오전 서울 마포의 지구촌동포연대 사무실. 10주년 행사 준비로 피곤한 표정인 배덕호 대표는 해외동포 권익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해 줬다. 95년이던 그때부터 캠페인을 벌이며 재외동포 문제에 눈을 뜨게 됐으니 햇수로 따지면 근 15년째. 공식적 활동보다는 한참 앞선 셈이다.

99년 재외동포법 제정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 즈음 '지구촌동포청년연대'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시작됐고, 그 이후로 해외 동포의 문제는 그의 문제가 됐다. 외교부도 아닌 민간단체가 아픈 역사를 이고 살아가는 해외 동포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우토로 문제 등은 'KIN'이 나섰던 대표적인 사안들이다.

때는 2003년, 도쿄도(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도쿄 제2초급학교(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상대로 토지양도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공유지였으며, 길을 내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없애야 한다는 것.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중심지에서 내몰렸던 조선인들이 도쿄도와 계약을 통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도 지었던 것인데, 그 학교를 사용하지 말라니 동포사회가 발끈했다. 재판을 통해 1억7000만엔의 화해권고 결정이 내려졌고, 이 소식이 알려지며 한국에서도 모금 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 KIN이 있었다.

우토로 문제도 마찬가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게 된 땅. 수십 년 촌락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을 비워달라는 땅주인의 통고에 10년간 재판으로 맞섰지만 패배한다. 강제 철거의 위기 방법은 그 땅을 사는 것뿐. 힘에 부쳐 절망하던 그들의 소식이 고국에 알려졌고, 이번에도 KIN이 나섰다. 여론의 힘을 받아 국민모금이 이뤄졌고 정부도 30억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동포애가 뭔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재외동포 문제 중요한데 낙하산 내려 보내는 정부 한심

"10년을 맞아서 27일 기념행사를 할 예정인데 앞에 내걸 말이 '10년 간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예요. 아직 마무리된 일이 없거든요. 사실 제가 한 것은 없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다른 분들이 일을 다 해준 것이지요."

이런 활약에도 배덕호 대표는 "10년 동안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10년을 돌이켜 보니 남는 것은 빚이었다"면서 웃어 보였다. 역사적 사명감이 없으면 힘든 일을 정부산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가 감당하려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 재외동포재단 등에서 지원해 주는 것은 없나요?
"신청은 하지만 기대는 안 합니다. 10주년 기념행사 한다고 초대장은 보냈습니다. 올 것 같지는 않지만요. 정권이 바뀐 게 영향이 크네요."

- 지난해 8월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낙하산 반대 성명 발표한 것이 영향을 받는 건가요?
"불이익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재외동포재단 수장이라면 나름 철학과 중립성을 갖추고 정파적 입장을 초월해야 하는데, 정권 탄생에 기여한 특정 단체 대표를 논공행상으로 문외한이 내려앉힌 것은 문제가 큰 것이지요. 초기에도 낙하산이었지만 그나마 관련 논문도 발표하고 전문성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민간 전문가들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이전 정부가 잘 따라준 것인데, 정권 바뀌었다고 아무나 내려 보내고 있으니 참 한심합니다."

해외동포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람의 문제, 특히 외교관들의 역할을 많이 언급했다. 외교관 한 사람의 노력이 엄청 큰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외동포재단 낙하산 이사장에 불만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요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할린을 예로 들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은 적국 소련과 협상을 통해 사할린 땅의 일본인 30만 명을 데리고 옵니다. 조선인들은 나 몰라라 했지만 자국민만은 챙긴 것이지요. 유골까지 송환해 올 정도였습니다. 91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전 후 이런저런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일본인들을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자국민 챙겨야 할 정부는 외교마찰만 걱정

자국민에 대한 외교부서의 책임감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뒤늦은 행동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들은 자국 동포들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외교마찰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해외동포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닌 외국이기 때문에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를 펴던데, 그럼 외교관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외교관 역할 아니던가요? 하다못해 북한도 북일 미수교 상태에서 일본의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국민을 챙기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는 우토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외교부는 남의 나랏일이라며 모른 척했다"고 말했다. 형평성 문제로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여론이 들끓고 국회에서도 나서자 마지못해 지원을 결정했다는 것. 우토로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직접 우토로 땅주인인 서일본식산 대표와 만나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하고… 그래서 애초 부르던 가격보다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담당자도 몇 번 바뀌고 편성된 예산이 실무적인 일로 지체되고 있어 답답합니다."

우토로 문제는 정부지원금도 책정됐고 모금도 이뤄졌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원방식에 대한 절충이 아직 안 끝나고 있어서다. 정부 예산지원이기에 땅 구입 및 관리를 위해 설립될 법인의 이사장과 과반수의 이사를 우리 정부 측 관계자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부의 입장.

이에 반해 우토로 마을에 대한 일본 내 관련법안 마련 및 일본 정부와의 실무적 협의는 마을 주민들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일본 정부가 꺼려한다는 것이 배 대표가 전하는 현재의 우토로 상황이었다.

"우토로 땅주인 만나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해 가격 낮춰"


우토로 관련 영화상영회에서 우토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배덕호 대표

-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국민도 아닌 해외동포까지 지원해 주느냐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경제와 재외동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재외동포 정책을 경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필요하면 써먹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의미로 보여요. 어려웠던 시기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고, 외국으로 내보내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위기 때문에 지원 힘들다 이야기 하는 것은 양심도 없는 행동입니다. 재외동포를 필요할 때만 팔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재외동포 현안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요즘 관심을 쏟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99년부터 영주귀국이 진행됐지만 정부가 45년 8.15 이전에 남겨진 1세대만 데리고 와서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들어와야 했다는 것.

그래서 요즘 KIN이 접근하는 사할린 한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냐는 방향성이다.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로 동포사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당국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어렵게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한국 사회의 빈민층과 같다는 시각으로 보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 KIN의 노력은 재외동포 문제에 대한 작은 진척들을 이뤄냈다.  2005년 재외동포에 대한 홍보자료가 정부에서 나왔고, 에다가와 학교와 우토로 마을 등에 국민적 관심을 일으켰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법도 계속된 노력 끝에 2004년 개정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을 제외시켜 논란이 있었던 재외동포법은 200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이후 해방 이전으로 재외동포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은 우리가 겪은 일방적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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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 한인 현지 실태 조사차 KIN이 방문했던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 ⓒ 지구촌동포연대

그는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재외동포 운동의 방향에 대해 "모든 게 다 정치인데 그 부분에 게을렀던 것이 가난한 일을 자초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재외동포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법제나 예산 등의 정책적 틀을 갖추고 국제적 연대 활동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아울러 사할린 문제와 재외동포의 중요성 등에 사회적 관심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할린은 강제 징용으로 우리 국민이 일방적 피해를 본 사안입니다. 재일동포는 해방 후 귀국을 보장받았지만 사할린은 돌아오고 싶었어도 올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KIN에서 관심 갖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해외에 형성된 동포사회는 돈으로 일부러 만들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주요 사안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가능하고 네트워크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 점심시간이었다. 한사코 점심을 같이 하자는데 빚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비록 밥 한 끼일망정 얻어먹는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내가 사든가 아니면 나는 그냥 가든가. 그러자 절충안을 제시한다. 자기가 살 테니 후원회원이 돼 달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반칙을 했다. 밥값까지 내가 냈다.

끝으로 물었다. "10주년 행사에 손님들 많이 오실 것 같아요?"

답변은 간결했다. "외교부 재외동포 담당 대사님이 오신다고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토로 주민대표 분들도 오신다고 하고 한 100여명 오시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배덕호 -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오마이뉴스 모바일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오마이뉴스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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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동포연대 배덕호 대표 ⓒ 성하훈 
예전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었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은 압박과 수탈의 연속이었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도 살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돈에 팔려나가야 하는 신세였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뒤로 한 채 돈 몇 푼에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끌려갔다. 살기 위해 간도 연해주 중국 땅을 옮겨 다녀야 했고 거기서 다시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해 흩어져야 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등등, 그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1천만 해외동포를 운운하지만 한국 해외 이주민사의 시작은 이렇듯 가슴 아픈 '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짧게는 60여년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후 세월에 덮이며 고난의 기억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당시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구촌동포연대(Korea International Network. 약칭 'KIN')' 배덕호 대표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아리랑>에서 그려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덕호 대표는 사할린 동포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그 내용은 소설 <아리랑>과 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은 소설과 같았고, 소설 내용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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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어머니와 동생들을 놔두고 먼 미국 땅 사탕수수 밭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끝내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한 달 가까이 죽음의 여행을 한 끝에 생면부지의 땅에 내려진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실 속, 징용이란 이름하에 사할린 땅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마저도.

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한편으로 애증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현실에 그들 운명의 기구함을 탓해야 할 뿐이었다. 그래서 외세에 나라를 뺏긴 힘없는 백성의 비애는 나라를 되찾은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강제로 떠나야 했던 조국, 고난의 기억 한국 이민사 첫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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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가와 조선학교 ⓒ 지구촌동포연대 임재현

'지구촌 동포연대'가 27일로 창립 10년을 맞았다. 10년 전인 1999년 출범한 '지구촌 동포연대'는 바로 이렇게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조국을 등진 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이국땅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해외 동포들. 그들에게 고국의 정을 나눠주기 위해 애쓴 것이 지금껏 이들이 해온 역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 해외 입양아 출신과 함께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낳아준 부모를 찾으러 들어온 친구였는데, 비자 문제 때문에 3개월마다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하는 거예요. 괜히 화나더라고요. 해외로 팔려나간 것도 서러울 텐데 3개월에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한다니 국가가 돈벌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6일 오전 서울 마포의 지구촌동포연대 사무실. 10주년 행사 준비로 피곤한 표정인 배덕호 대표는 해외동포 권익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해 줬다. 95년이던 그때부터 캠페인을 벌이며 재외동포 문제에 눈을 뜨게 됐으니 햇수로 따지면 근 15년째. 공식적 활동보다는 한참 앞선 셈이다.

99년 재외동포법 제정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 즈음 '지구촌동포청년연대'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시작됐고, 그 이후로 해외 동포의 문제는 그의 문제가 됐다. 외교부도 아닌 민간단체가 아픈 역사를 이고 살아가는 해외 동포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우토로 문제 등은 'KIN'이 나섰던 대표적인 사안들이다. 

때는 2003년, 도쿄도(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도쿄 제2초급학교(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상대로 토지양도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공유지였으며, 길을 내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없애야 한다는 것.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중심지에서 내몰렸던 조선인들이 도쿄도와 계약을 통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도 지었던 것인데, 그 학교를 사용하지 말라니 동포사회가 발끈했다. 재판을 통해 1억7000만엔의 화해권고 결정이 내려졌고, 이 소식이 알려지며 한국에서도 모금 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 KIN이 있었다.

우토로 문제도 마찬가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게 된 땅. 수십 년 촌락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을 비워달라는 땅주인의 통고에 10년간 재판으로 맞섰지만 패배한다. 강제 철거의 위기 방법은 그 땅을 사는 것뿐. 힘에 부쳐 절망하던 그들의 소식이 고국에 알려졌고, 이번에도 KIN이 나섰다. 여론의 힘을 받아 국민모금이 이뤄졌고 정부도 30억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동포애가 뭔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재외동포 문제 중요한데 낙하산 내려 보내는 정부 한심

"10년을 맞아서 27일 기념행사를 할 예정인데 앞에 내걸 말이 '10년 간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예요. 아직 마무리된 일이 없거든요. 사실 제가 한 것은 없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다른 분들이 일을 다 해준 것이지요." 

이런 활약에도 배덕호 대표는 "10년 동안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10년을 돌이켜 보니 남는 것은 빚이었다"면서 웃어 보였다. 역사적 사명감이 없으면 힘든 일을 정부산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가 감당하려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 재외동포재단 등에서 지원해 주는 것은 없나요?
"신청은 하지만 기대는 안 합니다. 10주년 기념행사 한다고 초대장은 보냈습니다. 올 것 같지는 않지만요. 정권이 바뀐 게 영향이 크네요."

- 지난해 8월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낙하산 반대 성명 발표한 것이 영향을 받는 건가요?
"불이익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재외동포재단 수장이라면 나름 철학과 중립성을 갖추고 정파적 입장을 초월해야 하는데, 정권 탄생에 기여한 특정 단체 대표를 논공행상으로 문외한이 내려앉힌 것은 문제가 큰 것이지요. 초기에도 낙하산이었지만 그나마 관련 논문도 발표하고 전문성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민간 전문가들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이전 정부가 잘 따라준 것인데, 정권 바뀌었다고 아무나 내려 보내고 있으니 참 한심합니다."

해외동포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람의 문제, 특히 외교관들의 역할을 많이 언급했다. 외교관 한 사람의 노력이 엄청 큰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외동포재단 낙하산 이사장에 불만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요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할린을 예로 들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은 적국 소련과 협상을 통해 사할린 땅의 일본인 30만 명을 데리고 옵니다. 조선인들은 나 몰라라 했지만 자국민만은 챙긴 것이지요. 유골까지 송환해 올 정도였습니다. 91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전 후 이런저런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일본인들을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자국민 챙겨야 할 정부는 외교마찰만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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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 모습 ⓒ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자국민에 대한 외교부서의 책임감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뒤늦은 행동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들은 자국 동포들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외교마찰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해외동포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닌 외국이기 때문에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를 펴던데, 그럼 외교관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외교관 역할 아니던가요? 하다못해 북한도 북일 미수교 상태에서 일본의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국민을 챙기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는 우토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외교부는 남의 나랏일이라며 모른 척했다"고 말했다. 형평성 문제로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여론이 들끓고 국회에서도 나서자 마지못해 지원을 결정했다는 것. 우토로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직접 우토로 땅주인인 서일본식산 대표와 만나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하고… 그래서 애초 부르던 가격보다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담당자도 몇 번 바뀌고 편성된 예산이 실무적인 일로 지체되고 있어 답답합니다."

우토로 문제는 정부지원금도 책정됐고 모금도 이뤄졌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원방식에 대한 절충이 아직 안 끝나고 있어서다. 정부 예산지원이기에 땅 구입 및 관리를 위해 설립될 법인의 이사장과 과반수의 이사를 우리 정부 측 관계자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부의 입장.

이에 반해 우토로 마을에 대한 일본 내 관련법안 마련 및 일본 정부와의 실무적 협의는 마을 주민들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일본 정부가 꺼려한다는 것이 배 대표가 전하는 현재의 우토로 상황이었다.

"우토로 땅주인 만나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해 가격 낮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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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관련 영화상영회에서 우토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배덕호 대표 ⓒ 성하훈

-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국민도 아닌 해외동포까지 지원해 주느냐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경제와 재외동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재외동포 정책을 경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필요하면 써먹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의미로 보여요. 어려웠던 시기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고, 외국으로 내보내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위기 때문에 지원 힘들다 이야기 하는 것은 양심도 없는 행동입니다. 재외동포를 필요할 때만 팔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재외동포 현안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요즘 관심을 쏟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99년부터 영주귀국이 진행됐지만 정부가 45년 8.15 이전에 남겨진 1세대만 데리고 와서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들어와야 했다는 것.

그래서 요즘 KIN이 접근하는 사할린 한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냐는 방향성이다.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로 동포사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당국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어렵게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한국 사회의 빈민층과 같다는 시각으로 보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 KIN의 노력은 재외동포 문제에 대한 작은 진척들을 이뤄냈다.  2005년 재외동포에 대한 홍보자료가 정부에서 나왔고, 에다가와 학교와 우토로 마을 등에 국민적 관심을 일으켰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법도 계속된 노력 끝에 2004년 개정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을 제외시켜 논란이 있었던 재외동포법은 200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이후 해방 이전으로 재외동포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은 우리가 겪은 일방적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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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 한인 현지 실태 조사차 KIN이 방문했던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 ⓒ 지구촌동포연대

그는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재외동포 운동의 방향에 대해 "모든 게 다 정치인데 그 부분에 게을렀던 것이 가난한 일을 자초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재외동포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법제나 예산 등의 정책적 틀을 갖추고 국제적 연대 활동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아울러 사할린 문제와 재외동포의 중요성 등에 사회적 관심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할린은 강제 징용으로 우리 국민이 일방적 피해를 본 사안입니다. 재일동포는 해방 후 귀국을 보장받았지만 사할린은 돌아오고 싶었어도 올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KIN에서 관심 갖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해외에 형성된 동포사회는 돈으로 일부러 만들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주요 사안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가능하고 네트워크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 점심시간이었다. 한사코 점심을 같이 하자는데 빚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비록 밥 한 끼일망정 얻어먹는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내가 사든가 아니면 나는 그냥 가든가. 그러자 절충안을 제시한다. 자기가 살 테니 후원회원이 돼 달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반칙을 했다. 밥값까지 내가 냈다.

끝으로 물었다. "10주년 행사에 손님들 많이 오실 것 같아요?"

답변은 간결했다. "외교부 재외동포 담당 대사님이 오신다고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토로 주민대표 분들도 오신다고 하고 한 100여명 오시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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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 선생님 입국 불허에 대한 항의 서명서

정영환 선생님 입국 불허에 대한 항의 서명서
정영환 선생님 입국 불허에 대한 항의 서명서
정영환 선생님 (메이지가쿠인대학 준교수明治学院大学 准教授)께서 출간 기념회 참석 차 국내 방문을 계획하셨는데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오늘 입국 불허를 최종 통보 받았다 합니다. 이에 외교부에 보내는 항의 성명서를 작성했사오니 아래 내용을 읽어 보시고 동참해 주실 분은 성함과 소속을 6월 31일까지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예정된 출간기념회는 저자 불참 상태로 열릴 예정입니다.
항의 성명서
정영환 교수는 현재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大学 ) 대학 교양교육센터에서 부교수(역사학 전공)로 재직 중인 조선적 재일조선인 3세입니다. 소장파 역사학자로 일본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2013년부터 최근까지 한국과 일본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박유하 교수(세종대)의 저작 『제국의 위안부』를 정면으로 비판한 저서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을 2016년 3월에 일본에서 출판하여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위의 저서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점과 그 배경을 검증하여,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최소화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악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후보상’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과대평가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나아가 그와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계나 일부 학계가 『제국의 위안부』를 과도하게 평가한 배경을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일본 사상계의 지적・도덕적 퇴락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이에 저희는 출판기념강연회 실행위원회를 꾸려 올해 7월 1일에 정영환 교수의 저서 한국어판 출판을 기념하여 저자의 내한 강연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실행위원회는 저자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저자는 6월 14일에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여행증명서 발급신청을 했으나 2주 후인 28일이나 되어서야 입국 불허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는 입국 불허 결정에 대한 가처분신청을 방해하기 위한 의도적인 업무지연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정영환 교수의 모국 입국 권리는 이미 수년간 한국의 보수정권에 의해서 침해돼왔습니다. 2008년 이전에 정영환 교수는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지금까지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한국 입국은 사실상 불허된 상태입니다. 정영환 교수는 2009년 8월에 한국 정부의 입국금지 조치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했지만 2013년 12월에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패소하여 한국에 입국하지 못했습니다. 정영환 교수의 입국이 국가안보상의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조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남북교류협력법에 의거하여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고국 땅을 밟은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방문은 전혀 국가안보 상의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안보 위협”을 거론하여 조선적 재일 조선인들의 모국 방문 권리를 유린하는 역대 보수 정권의 조치는 해방 후 일본 정부는 편의에 따라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적’을 부여했고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할 수는 없었던 재일동포의 고뇌와 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반공의 논리로 이들을 배제해 왔지만, 이들은 한국 법률상 재일동포로서 잠재적 한국 국적자에 해당되며,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여 한국의 연구자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학술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정영환 교수에 대한 입국금지는 세계인권선언이나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B규약)이 정한 본국 (자국) 귀환 권리(right of return)에 대한 부당한 침해로 보입니다. 규약 제12(4)조에 의하면 그 어떤 개인도 자신의 나라로 입국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거부당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제, 사회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1966년) 제2(2)조에 따르면 누구도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기본권의 향유를 제한 받아서는 안 됩니다. ‘조선적’의 보유는 일본에서는 국제법상 무국적자로 해석되고, 무국적자에게는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야 한다고 한국 법은 정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의 정영환 교수의 학문적인 신념이 기본권을 향유하는 데 방해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학술 활동의 자유는 <세계인권선언>(1949년) 제19조(의견 및 표현의 자유 보장)에 따라 하나의 인권으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합니다. 정영환 교수에게 입국과 학술활동을 허용하는 조치는 국가 안보라는 법익을 침해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정영환 교수의 강연은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추궁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70년 이상 가로막힌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에 기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정영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 이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2015년 말부터 현재까지 홋카이도에서부터 히로시마까지 일본열도 전역을 돌면서, 도쿄 대학 등에서 시민센터에 이르기까지 학계와 시민사회를 오가며 열성적인 강연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저서 출간 이후에는 『도쿄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의 일간지에서 소개 기사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관련 연구자들이 도쿄 대학에서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격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보다도 정영환 교수의 강연이 절실한 곳은 바로 한국입니다. 이미 SNS를 통해 소개된 정영환 교수의 관련 글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조선적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상태는 정작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한국 시민들의 알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고 한국의 시민사회에 심각한 불이익을 초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국내의 공론장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문제에 대해 국내에서 출판되는 매우 중요한 저서를 쓴 해외 거주 필자가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만으로 외교부가 그의 입국을 불허한 처사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인권침해국’으로 인식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은 불 보듯 확실합니다.

위와 같은 사유로 우리는 정영환 교수의 입국을 불허한 외교부의 폭거에 강력히 항의하며 한국 정부에게 정영환 교수를 위시한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국제인권법상 보장돼야 할 본국 귀환권, 그리고 본국에서의 학술 활동을 비롯한 각종 활동 자유의 권리를 즉각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서승 (전 리쓰메이칸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이타가키 류타 (도시샤대 교수)
사카모토 히로코 (전 히토쓰바시대 교수)
권나영 (듀크대 교수)
윤지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변호사)
이재승 (건국대 교수)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연구교수)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
황상익 (서울대 교수)
배덕호 (KIN(지구촌동포연대) 공동대표)
나카노 도시오(도쿄외대 교수)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창록 (경북대학교 교수)
이나영 (중앙대학교 교수)
이윤제 (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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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5

미국 내 종북세력의 활동 실태 ⑨ 해외 종북 단체 목록 - 블루투데이

미국 내 종북세력의 활동 실태 ⑨ 해외 종북 단체 목록 - 블루투데이
미국 내 종북세력의 활동 실태 ⑨ 해외 종북 단체 목록
로렌스 펙 자유민주연구원 미국대표  |  press@blue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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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2  




  
▲ ⓒ 민족통신

민족통신
LA에 기반을 둔 웹사이트와 단체로서 북한에 충성하고 북한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노길남에 의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미국의 서부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종북 단체입니다. 이 단체와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북한 당국에게 충성 경쟁을 하기때문에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길남은 북한을 62회 방문했으며 최근에는 북한에 의해 “김일성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웹사이트는 한국에서는 차단되고 있습니다. 그는 1990년에 김일성을 만났으며 북한에서 VIP로 대우받는다고 그의 여러 책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국가라고 썼습니다.
Workers World Party (International Action Center)
Party for Socialism and Liberation (International ANSWER)
이 단체는 북한에 헌신하고 북한 정부와 밀접히 연관되어있는 맑스레닌주의자 단체들입니다. 이 단체의 대부분이 비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는 한인 종북 단체들과 매우 밀접히 활동합니다. 이 단체는 각 단체들을 전담 관리하는 “International Action Center” 라는 “위장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미국에 주요 도시들에 지부들을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세계의 테러 단체들과 공산주의 반역자들을 옹호하고 FBI의 지도자로부터 미국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단체로 인용되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WWP의 분파인 “사회주의 진보당”은 “International ANSWER”라는 “위장 단체”를 가지고 미국 서부 지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 역시 종북 단체들과 매우 밀접히 활동합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영어로 “Korean American National Coodinating Council”이라고 알려진 뉴욕에 기반을 둔 이 웹사이트와 단체는 윤길상을 포함한 몇몇의 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완전히 북한에 충성하고 북한 정부와 밀접히 제휴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비공식적인” 북한 영사관의 일종으로서 사람들이 방북을 위한 비자를 얻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 단체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북 단체입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종종 평양을 방문합니다. 이 단체와 민족통신은 북한 정부에 충성 경쟁을 하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체의 웹사이트는 한국에서는 막혀있습니다.
Korea Policy Institute(한국정책연구소)
이 단체는 하와이에 사는 크리스틴 안이 지도자로 LA에 기반을 둔 웹사이트와 단체입니다. 그녀와 그 단체는 북한을 지지하며 북한의 정책들을 옹호합니다. 이 단체는 미국의 다수 주요 종북 활동가들과 학교들을 넓게 포함하고 있으며 종종 미국 전역에 걸쳐 종북 컨퍼런스와 강의를 주최합니다. 이 단체는 북한에 의해 반대되는 법률에 대항해 미국과 한국 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북한에 의해 옹호되는 여러 정책들을 찬성하기를 촉구합니다. 특히, 이 단체는 북한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미국 단체와 활동가들을 공격합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과 지도자들은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민족통신과 KANCC와 다르게 이 단체는 비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타겟으로 합니다.
LA 시국회의
이 단체의 LA지부는 한국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가는 LA의 이영식으로 ‘진보의 벗’이라는 단체의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이용식과 시국회의는 북한에 매우 옹호적이지만 그들의 주요 목표는 한국 정부와 박근혜 정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국가정보원에 대항해 이석기를 옹호하고 LA에서 집회를 개최합니다. 이 단체는 주로 사람 사는 세상, 내일을 여는 사람들, 진보의 벗과 같은 다른 종북 단체들과 같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 Workers World Party와 가깝게 활동합니다. 이 단체는 한국의 통합진보당과 긴밀히 제휴하고 있습니다. 이용식은 미국의 범민련 대표로서 노길남의 동지입니다.
National Campaign to End the Korean War
이 단체는 다른 종북 단체들의 멤버들로 구성된 “연합조직”의 일종으로 전국조직입니다. 이 단체는 북한을 지지하고 북한의 정책들에 매우 옹호적입니다. 이 단체는 북한에 대한 제재 중지와 북한과 미국의 평화 협정 체결과 같은 북한의 정책 목표를 지지하기 위한 컨퍼런스와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 단체는 종북 정책들의 찬성과 종북 법안에 대한 반대를 통해 미국 의회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합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한국정책연구소(Korea Policy Institute)와 같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단체는 Workers World Party 활동가들과 밀접히 활동합니다.
노둣돌
이 단체는 북한에 충성하는 젊은 한인들의 단체로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어린 한인 2세나 3세에 집중합니다. 이 단체는 젊은 청년들에게 북한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그들을 매년 북한으로 보냅니다. 이 단체는 또한 한국에 있는 극좌 단체들과 함께 좌익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매년 한국에 구성원들을 보냅니다. 이 단체는 Workers World Party와 밀접히 활동합니다. 이 단체의 주도자들은 북한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단체는 종북(예비) 활동가들의 “훈련장”의 일종입니다. 이 단체는 대학 캠퍼스에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liance(미국 LA 한인타운 노동연대)
이 단체는 북한을 지지하고 좌익 노동 문제에 집중하는 LA에 기반한 단체입니다. 다른 종북 단체들은 이 단체의 사무실에서 만남을 가집니다. 이 단체는 다른 종북 단체들에 의해 개최되는 종북 집회들을 공동 개최하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 단체는 지역 노동 운동의 극좌들과 제휴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많은 비한국인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이 단체의 주도자는 노길남과 친분이 있습니다.
미주 희망연대
이 단체는 한국에 기반을 둔 미국 지부입니다. 이 단체는 사람 사는 세상과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로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활동합니다. 이 단체의 리더는 장호준입니다. 이 단체는 북한을 옹호하고 반한 집회에 참여합니다. 이 단체는 한국의 민주당(현재 새정치연합)과 제휴하고 있습니다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 (한국을 걱정하는 학자들 동맹)
이 단체는 북한을 옹호하고 한국과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극좌 미국인 학자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종북 학자들로 유명한 몇몇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다른 종북 단체들과 함께 미국의 주요 대학들에서 컨퍼런스와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 몇몇은 북한에 매우 옹호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북한을 지지는 하지만 주로 한국과 미국을 적대하는 중도좌파주의자들입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 몇몇은 미국 주요 대학에서 “Korean Studies Centers”(한국학센터)의 임원이며 독립체로 된 경우로 있습니다. 또한 이 단체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Korea Policy Institute(한국정책연구소)에 속해있습니다.
미주 사람사는 세상
이 단체는 한국에 기반을 둔 미국 지부입니다. 이 단체는 원래 노무현을 지지하는 단체의 일부였습니다. 이 단체는 동부와 서부에서 활동하고, 희망연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린다 이는 이 단체와 제휴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북 단체들과 함께, 이 단체는 종종 한국 정부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최합니다. 이 단체는Workers World Party와 밀접히 활동합니다.
Veterans for Peace
이 단체는 극단주의 재향군인으로 구성된 미국 맑스 단체로서 북한에 매우 옹호적입니다.이 단체는 오직 한국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님에도 활동하는 종북 부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문제의 주도자인 한 명인 Brian Willson은 1950년 한국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거짓을 주장하는 북한의 옹호자입니다. 이 단체는 한인 종북 단체들과 Workers World Party와 밀접히 활동합니다.n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때때로 평양에 방문합니다.
내일을 여는 사람들
이 단체는 한국에 기반을 둔 미국 지부입니다. 이 단체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단체에서 등장했습니다. 이 단체는 LA에서 활동적입니다. 이 단체는 종종 반한국 집회에 참여합니다. 문선영은 이 단체와 가깝습니다. 이 단체는 북한을 옹호하고 Workers World Party와 함께 활동합니다. 이 단체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역시 시국회의, 사람 사는 세상, 진보의 벗과 같은 다른 종북 단체에 속해있습니다. 이 단체 구성원들은 사회 활동을 위해 만나서 어린 한인들에게 극좌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National Lawyers Guild
이 단체는 변호사와 로스쿨 학생들을 위한 미국 맑스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1930년부터 공산주의 “위장 단체”로 유명했습니다. 이 단체는 북한을 매우 옹호하고 구성원들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 단체는 특별한 부서를 가지고 종북 활동에 헌신합니다. 과거에 이 단체는 미국 의회에 의해 공산주의자 연계 단체로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 구성원들의 몇몇은 법학 교수들입니다.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새로운 시민운동 (Action for One Korea)
이 단체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단체로서 겉으로는 “통일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 단체는 실제로 북한을 옹호하고 한국 정부를 적대합니다. 이 단체는 LA에 사는 정치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어리거나 늙은 한인들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 단체는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반한국 집회에 참여하고 Workers World Party와 함께 활동합니다. 이 단체의 주도자는 정연진입니다. 그녀는 LA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로 그의 남편은 LA 중앙일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평범한 구성원들은 이 단체가 단지 “평화” 단체라고 믿고 있지만, 이 단체는 매우 종북이며 민족통신과 Workers World Party를 포함하는 다른 종북 단체들과 밀접히 활동합니다.
Code Pink
이 단체는 북한을 옹호하는 미국의 급진적인 여성 맑스 페미니스트 단체입니다. 그들은 북한을 방문했으며 또한 한국의 좌익 단체들과 함께 반정부 반미 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구성원은 종종 미국 보수주의자들과 충돌하며 체포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그들은 북한에 총성을 맹세했습니다.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평양에 기반을 둔 유명한 이 단체는 한국 사회와 함께 미국과 다른 국가에 여러 지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북한을 옹호하며 북한에 의해 관리됩니다. 이 단체는 LA를 포함한 미국에서 만남을 가지며, 한 명의 핵심 한국인 민주주의자를 포함한 미국 주요 종북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민련
평양에 기반을 둔 다른 유명한 이 단체는 한국 사회와 함께 미국과 다른 국가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완전히 북한에 충성하며 평양 권위자들에 의해 관리됩니다. 미국에서 이 단체는 종북 행사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주로 북한을 지지하는 한인들의 “수뇌” 단체로서 역할을 합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은 LA를 포함한 미국에서 핵심 종북활동가들의 대부분입니다. 이 단체는 LA에 있는 코리아타운 이민 노동자연대의 사무소에서 모임을 가집니다. 이 단체가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받았지만, 미국에서 이 단체는 북한의 “핵심 기반”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대부분의 핵심 종북 지도자들은 과거나 현재 이 단체에 속해있으며 구성원으로 되어있습니다.

Ⅲ. Conclusion
내가 언급한 미국의 종북 단체들과 개인들은 한인들의 대다수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고 오직 사회의 작은 비율이지만, 이를 안일하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 특히 유럽에서 지난 세기의 역사적인 경험은 독재에 헌신하고 열광적인 심지어 작은 단체일지라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다는 우려를 몇몇의 재앙적인 경우에는 그들이 운영하는 사회를 넘어 이념적 또는 정치적인 조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노길남이나 노둣돌의 젊은 추종자들이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노력이 효과적으로 방어되지 않는 한 미래에 그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추종자들의 의지를 위한 노력은 미국에 큰 위험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종북 세력의 힘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와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속이는 능력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기고 특히 어리고 이상적인 정치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이들을 유인합니다.

그들의 노력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임무는 이 종북 세력과 교육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의지는 종북 단체들과 지도자들을 고립시키도록 도와줄 것이고 그들이 “쓸모있는 바보들”로 다뤄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말하듯이 “햇빛은 최상의 살균제”입니다. 나는 내 발표가 여러분에게 약간의 빛이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