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2)폭력, 왜 사라지지 않는가
박성용 목사승인2015.04.14 2983호 조회수 : 426박성용 목사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갈등해결이나 비폭력 대화 실천가로서 필자에게 있어 개인 간, 단체 내, 혹은 단체 간이나 학교폭력 관련 갈등에 있어 활동을 하다보면 깊이 다가오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적'이라는 단어가 막연히 저 멀리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부부 간에 있어서 상대방의 강제, 무관심, 권위주의적 태도, 혹은 듣기 힘든 언어로 힘들어 하고 상처를 받은 40대, 50대의 고백을 듣는 일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식간에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처럼,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낸 부모나 시어머니나 친척들과의 소통 단절과 비인격적인 태도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단절의 경험에 대한 하소연은 봇물을 이룬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가 싶을 정도로 공감하며 듣고 있노라면 가슴 시리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원수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연인, 동료, 친척, 지인이라는 딱지로 살지만 실제로는 가해자, 원수로 대면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며, 이로 인해 가슴앓이를 너무나 많이 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말할 수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드러내면 안전하지도 않아 속으로 쌓아가는 일들이 많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에 새로운 현상이 급속하게 그리고 그 관여되는 학생 숫자와 발생건수에 있어서 심각하게 퍼지는 양상이 새로 생겼다. 그것은 카카오톡과 스마트폰의 문자에서 발생하는 집단적인 언어폭력의 만연에 교사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거나 싫은 아이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만 아니다. 오히려 더 빈도수가 많은 것은 친구였던 사이가 오해나 상호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다툼과 증오 그래서 적으로 등돌리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고, 카톡이나 문자메일을 본 부모들이 학생 당사자보다 더 분노하여 그것을 증거로 학교폭력위원회나 소송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버 상에서 서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상호작용하는 속도가 종래 만나서 언어로 전달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지면서 자극되는 말과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얽히고설키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리고 최초 원인제공자와 이것을 퍼나르고 중간에 개입하는 학생들의 구분과 정체성이 모호해지도록 얽히면서 학생지도나 문제해결에 난감해 하는 담임이나 학생부장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여기서 가정이나 학교의 사례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원수(적)를 생각할 때 막연히 내가 사는 영토가 아닌 다른 곳, 내 생활공간 밖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 누구가 아니라 실상 우리는 가족이나 공동체원이라 생각하는 현실 속에서 가까이 대면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부모, 친척, 친구, 직장동료, 공동체원으로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 상처, 폭력, 손해의 경험으로 인해 실제로는 원수로 지내고 그로 인한 심리적 비용과 아픔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매우 크다. 눈에 안보이게 저 멀리 있는 원수보다 집안에서 공동체안에서 만나는 겉으로는 가족, 친구, 동료이지만 속으로는 원수지간인 상황이 오히려 길게 가고, 상대방에게 기대가 있었기에 그 상처는 더 깊고 이로 인한 심리적인 절망과 무력감은 그 일을 계속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영혼까지 해치는 정도가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원수는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어쩌다 대면하는 희소성의 사례가 아니라 늘상 직면하는 실재(리얼리티)이자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무거운 정서와 소진하는 시간, 의기소침해지는 활력성의 상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에 대한 낯설음은 의식되지 않은 자동적인 반응의 '폭력의 각본'이 되어 우리의 의식을 점유하게 된다. 여기서 '폭력각본'이라함은 연극의 연기자가 대본에 따라 자신의 실재의 정체성이 아닌 각본에 따른 연기자로 충실히 역할을 한다는 비유로 폭력의 대본에 따른 연기가 자신인양 폭력의 시나리오에 몰입되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 폭력각본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렸을 때 본 만화영화 속에 철저하게 녹아있다. 뽀빠이, 톰과 제리는 물론 슈퍼맨, 600만불의 사나이 등 속에서 위험한자, 원수, 적의 설정, 우리편과 저들 및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법과 협력에 의한 문제해결이 아닌 강한 주인공에 의한 문제해결, 그리고 대응에 있어서 대화가 아니라 이른바 뱀의 생존논리인 '공격하기(Fight), 도망가기(Flight), 복종하기(Frozen)'에 따른 행동 등이다.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에 의해 '그들'에 속한 사람들은 관심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더 나아가 도전적인 상황이면 징벌의 대상이 되어 쉽사리 무찔러 없애는 것에 대한 타당성의 논리가 적용되어진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고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대응방식으로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상대가 나에게 행한 상처와 고통 그리고 손실에 대해 시비선호의 논리에 따라 알려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당한 차원의 일부를 네가 맛보아야만 정신 차리게 될거야. 그러니 너도 당해봐야 내 심정을 알겠지." “"네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뭔가 힘의 충격이 필요해. 그래야 너는 정신이 들거야."
잘못을 행한 상대가 그것을 고치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려면 상대방이 나에게 한 '같은 종류'의 그 무언가를 최소한 돌려주거나 더 자연스럽게는 더 강하게 전달해야 상대방은 잘못됨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를 더 이상 미래에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여기에는 확고하다. 지금 내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상대방이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통을 부과하기, 강제로 교정시키기, 더 큰 힘으로 영향을 미치기 등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대응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시키는 폭력'이라는 신화이다. 힘으로 상대방을 교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보복적인 상호응답의 신화로 인해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현실은 창조되고 폭력의 현실은 더욱 확산되어진다.
여기에서 대응방식의 초점은 타인에 대한 강제의 힘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상대방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구속, 처벌, 고통 부과, 분노, 안보기, 상대방의 논리나 진영을 훼손하기 혹은 무너뜨리기 등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도 어느새 모르게 내가 싫어하던 '적을 닮아가기'를 실습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싫은 것을 나도 이젠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당하게 상대방에게 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시키는 폭력'이 효과가 있다는 고정관념과 신화 속에 살 때, 두려움, 수치심, 고통과 굴욕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섭고 우둔한 방식인가? 가정폭력, 학교폭력, 성폭력, 국가폭력, 전쟁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보편적인 인간성을 보는 시야를 잃고 '나 또는 우리 대 너 또는 그들'의 이분법에 따라 시비선호의 논리에 의해 '적-이미지'를 갖게 되고,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방식으로 '구원시키는 폭력'의 각본에 의해 행동하게 되면서 자극상황이 폭력상황으로 바뀌고 이를 강화한다. 이 폭력각본의 덫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 강제, 힘이 효과가 있다는 그 어떤 신념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 볼 수 있는 영혼의 자각이 요청된다.
박성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