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31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종교학 벌레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http://bhang813.egloos.com/1875740
선교사 게일(James Scrarth Gale)에 대해 전에 조사해 둔 것이다. 최근에 게일에 대하여 정리할 일이 있어 옛날에 과제물로 작성해 두었던 파일을 다시 찾아 올린다. 이 글 중간 부분에 인용된 <<전환기의 조선>>의 한국어 번역은 그대로 인용되어서는 안 될 자료인데, 미쳐 원문을 찾아보지 못해서 일단은 그대로 올려둔다. 게일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던 선교사"라고 단적으로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에 "조선어풍에 맞는 성서"를 주장하면서 번역위원회에서 나와서 독자적인 번역을 출판했다는 대목은, 아직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게일의 저술은 방대한데, 아래 정리된 내용은 그 중에서도 한국종교에 관련되어 찾아본 것이다.





1. 게일의 활동(1863-1937)
캐나다 온타리오 주 출생. 1884년 토론토 대학 입학. 1886년 북미 학생하령회에 참석하여 무디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고 선교를 결심. 1888년 토론토 대학 YMCA 선교사로 내한.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 경상도 지방 순회 전도. 이창직으로부터 한국에 대해 공부. 1892년 헤론의 미망인 해리엇(Harriet)과 결혼. 1897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감, 거기서 목사 안수 받음. 1900년 연동교회 에서 목회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 초대회장으로 선출. 이 무렵 독립 협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지식인들(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이원긍, 이승만, 우성준, 안국선)을 방문하였으며 출옥 후 연동교회에 입교하도록 하였다. 190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선출됨.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 1908년 부인 사망. 1910년 루이스와 재혼. 1917년 한국음악연구회 조직, 찬송가 개편에 힘씀. 1925년 성경전서 번역. 그러나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하고 윤치호의 후원으로 기독교창문사에서 출판.




2. 코리언 스케치1)
이 책은 게일이 10여년의 한국 생활 후에 미국에 안식년으로 가 있던 1898년에 쓰여졌다. 그가 한국과의 첫만남에서 받은 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당시 나온 한국에 대한 서구인의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게일의 서술은 한국인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깊이를 지닌다. 서구인들이 19세기말의 조선인들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틀어 가난함, 지저분함, 느림, 말없음, 활기 없음, 우상 숭배 등이 그러한 점들이다. 그것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생활에 비추어볼 때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일 역시 그러한 ‘낯섦’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신기하다고 늘어놓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인정2)에서 비롯하여 그 신기함의 내적 논리에 다다르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국인들이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그를 관찰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당대의 조선견문록 중에서 가장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에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인의 느릿느릿하고 태평한 자세3)에서 다른 관찰자들이 낙후된 민족의 전형적 특성을 읽어낼 때, 게일은 그러한 행동 양식이 나름대로 이유 있고 장점을 가졌다는 것을 파악한다. 그러한 태평함 속에서도 일의 처리는 능숙하며, 필요할 때는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한국의 머슴을 묘사한 장은, 그의 날카로운 관찰의 백미이다. 다른 서구인들이 영락없는 야만 행위로 묘사했을 석전(石戰)에서 그는 그 활기를 읽어내었다. 한국인들의 가난함을 관찰하면서도 그는 그 가난한 사람들이 지닌 따스한 심성에 주목한다. 조선 어느 곳에서나 인정과 친절이 나타남을 지적한다. 양반들이 낡은 지식에 매달려 있다고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수준 높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낡은 배를 불평하기보다는 조선인 뱃사공의 기술적 능숙함을 관찰한다. 재래의 방식으로 진찰하는 동네 의원을 보면서도, 과학과 주술을 넘나드는 그의 의술을 진지하게 기술한다. 심지어는 조선인의 난폭함 역시 그러할 필요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려 한다. 가족 제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단순하고, 가장의 지배하에 있는 생활은, 우리들의 복잡다단한 체제보다도 더 용이하게 정직한 행동으로 이끈다.”(284)
그의 서술이 조선에 대한 애정으로 지나치게 기운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그의 기본적 태도는 타인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전제는 인간의 보편성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미개인이 되었든 문명인이 되었던 인간의 지적 능력은 동일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동일하며, 다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상이하더라도 그 배면에 깔린 지적 과정은 나름대로의 지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해 가능한 존재라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가르침은, 게일의 서술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3. 전환기의 조선4)
이 책은 1909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위한 자료집인 것으로 보인다. (번역서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각 장의 끝마다 ‘생각해 볼 문제’ 형식의 질문들이 실려 있다. 장의 끝에 실려 있는 참고문헌은 ‘더 읽을 거리’에 해당한다) 편집자의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의 뒷부분인 7장과 8장은 편집부에 의해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해서 그리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라서 6장까지만의 내용이 게일의 서술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한국의 종교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인 3장, 선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한국 상황에 대한 서술인 5장, 초기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양태에 관한 자료들이 실려 있는 7장이 주목할만하다.



①한국의 종교
(이 부분은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인데, 번역서의 이 부분은 유난히 잘못된 대목이 많다.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특별한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성에는 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보다 더 높이 솟은 커다란 사찰도 없다. 눈에 띨 만한 성직자도, 대중적인 기도고, 종교를 믿는 신자도, 신앙심이 깊은 고행자도, 그리고 주위를 배회하는 신성한 동물도 없다. 성경책(bell-book?)이나 촛대를 파는 곳도 없고, 배향되는 그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종교를,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위의 다른 영혼에 도달하는 것으로 본다면, 한국인 역시 종교적이다. 그들은 경전들을 소유하고 있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신과 영혼과 천국에 대하여 대화한다.(60)


널리 퍼져있는 미신: 한국의 종교는, 조상숭배와 불교, 도교, 영혼 숭배, 신점(神占), 주술, 풍수지리, 점성술, 주물숭배 등이 복합된 이상한 종교이다. 용은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귀신이나 자연 신령들은 곳곳에 충만해 있다. 도깨비가 많아 곳곳에서 장난을 친다. 사령(死靈)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며 유령(eternal shade)이 주위를 맴돈다. 언덕, 나무, 강은 물론이고 질병이나 땅 속과 허공에 각기 의인화된 정령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는 도덕적 요구를 주재하지만, 대부분은 성정이 악하여 인간에게 불길함과 비애를 가져다준다. 그들은 쉽사리 기분이 상하고, 무엇을 결정할 때 아주 변덕스러우며 즐겁게 해주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을 주무르는 영적 세계와 더불어 사는 것은 저승(Hades)을 통과하는 것보다 별반 나을 게 없을 정도이다.(60-1)


내가 오랫동안 조선의 환경에 접하면 접할수록 나는 더욱더,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본국의 평균적인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종교를 위해, 종교 때문에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61)


②성서적 관점에서 본 조선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은 19세기말의 한국 상황이 기독교 선교에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현실적으로 무력한 조선인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뿐이라는 필연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펼치곤 하였다.5) 한국 사회의 절망적 상황과 신앙의 필연성이라는 논리는 게일의 저서에도 간혹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이 하느님에 의해 예비된 선교지라고 말하는 더 큰 이유는 당시 정세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배경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것이 게일의 독특한 관점이었다. 부정적 요인을 말하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는 문화를 통해 긍정적 요인에서 섭리를 읽어내려 하였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성서라는 텍스트에 기반하여 새로 읽는 서술을 한다. 조선 땅을 성서에 묘사된 예루살렘에 일치시키면서 상상적 지리(地理)를 구성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성서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과거를 재현하는 곳이다: “가장 은혜스럽고 놀라운 방법으로 조선은 일종의 성경 시대나 성경 지역의 모범으로 보존되어 있다.”(114) 그러한 예는 무수히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절하는 모습(정말로 땅에 닿을 듯한). ‘평안히 가시오’라는 인사(‘Shalom’이라는 고대 유대의 인사와 비슷). 신랑이 흰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은 채 행진하며, 옆의 사람들은 “길 비켜라, 신랑 나간다”라고 소리치는 모습. 희생의 원리가 살아 있는 제사(신에 대한 제물의 필요, 완벽한 희생(제물), 벌이 따르는 죄악, 고백에 따른 용서. 예수의 대속의 기본 원리가 나타남). “그 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라는 표현.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라는 표현. 유대에서처럼 실내에서는 결코 신을 신지 않고 문지방에서 벗는다는 점.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표현(조선인들에게는 이불이 침상이니까). “조선에서 삼베옷이란 아직 구약에서의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사람들은 머리를 풀고 그 거친 자루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욥처럼 많아서 운다.” 조선의 장승들, 실제로 볼 수 있는 우상. 귀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등.
이처럼 숱한 문화적 풍광들을 통해 성서적 고대는 현실화되었고, 이것은 선교사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조선에 깃든 신의 손길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외견상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관습과 의식(儀式)의 형태로써 성경을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이 숨쉬고 있는 공기는 그리스도 시대의 향기가 주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세계의 움직임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방식을 따른다. 그들의 내면적 사고는 성경에 적혀 있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미신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기에 가졌던 바로 그것과 같다. 정신적인 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유대 주변의 국가가 이해했던 것과 꼭 같다. 삶에 대한 그들의 결론은 세속이 어떠해야 한다고 성격이 결론지은 것과 같다.
이들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 놀라운 언어인 언문이다. 목표물을 향해 쏜 탄환처럼 그것은 정면으로 오늘의 기회를 맞추고 있으며 신이 요구하는 땅을 준비한다. 국가적으로 볼 때 조선이 얼마나 신의 손길에 적합한지는 이 세상의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다.(119-120)


③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
이 책에의 7장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신앙 태도를 증언하는 많은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게일의 서술은 아닐지라도, 이 자료들 중에서 한국인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를 정리하고 넘어가자. 우선 우리는 성서가 다른 책과는 달리 평범한 독서를 통해서 전파된 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신께서는 처음 어디에서 복음을 들었습니까? 교회인가요? 거리인가요? 기도회인가요? 아니면 성서를 통해서인가요?” 수년간에 걸쳐 이러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오. 저는 김씨, 박씨, 또는 최씨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가 저의 집에 와서 예배를 함께 보았습니다.” 복음은 입과 입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 만주에서 머나먼 골짜기까지, 두만강의 구부러진 길까지, 소용돌이치는 호수까지, 바위까지, 그리고 남해 군도의 십자 물결까지, 동서로, 모든 땅에 걸쳐서 전파되어 왔다.(146)


성서는 특수한 맥락에서 전파된다. 그것은 읽히기도, 암송되기도, 들려지기도, 불려지기도 하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는 한국의 글읽기 문화 속에서 유통된다. 그 글읽기는 한학(漢學)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전통적 독서 문화에 있어서 텍스트, 교과서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유교 경전들은 과거 시험과 연계되어서 읽혔고, 따라서 그것은 현세적 구원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삶을 지배하던 경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 경전은 양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 열려 있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나가 경전을 읽을 수 있으며 그에 의해 구원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 경전에 쏟아졌던 향학열이 성경으로 전이되었으며, 그것은 독점되었던 경전이 모두에게 공유되기 시작하였다. 옛날에는 천자문, 소학, 논어를 읽어야 사람이 되는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성서를 읽어야 사람이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게일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조선인)은 지난날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글을 좋아하는 국민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상업에도 능하지 못하고 호전적이지도 않았으나 호학(好學)했다. 그들은 책 읽는 것을 칭송했고, 따라서 ‘책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를 환영했다.(110)


그런데 그 책읽기 방식은 전통적인 유교 경전 읽기를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의 자세와 그것에 대한 암송, 생활에의 실천의 노력 등이 뒤따르게 되었다. 성서 암송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성서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북쪽으로부터 성실한 선교사 1명이 왔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방문 목적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저는 성서를 몇 구절 기억하고 있는데, 이것을 당신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 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나흘 밤을 여행하는 동안 목사들에게 몇 구절의 성경을 암송해 주면서 그 먼 거리를 걸었다. 특히 한 마디의 실수도 없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성경 구절을 한국말로 암송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147)


이처럼 성서를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문화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었다. 확실히 이러한 태도는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에 전통적인 태도를 적용해서 나온 산물로, 성서에 대한 비공식적인 태도였다. 한학적인 책읽기, 여기에서부터 한국인들은 성서에 대한 비공식적 해석을 산출해 내었다.




4. 게일의 성서 번역 작업6)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1911년에는 구약성서가 번역되어 나왔으며, 그와 동시에 구약개역자회가 구성되었다. 게일은 여기에 개역위원으로 참가한다. 처음 선임된 위원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였는데, 위원들이 자주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레이놀즈는 신약에 전념, 1916년 언더우드 사망, 어드맨, 클라크의 사임. 특히 어드맨은 게일의 성서번역 방식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냄.)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게일은 1923년에 위원직을 사임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번역자들은 모두 게일이 좋아하듯 한국적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이원모의 의견을 추종하는 자세로 나아갔다. 부드러운 한국어 어투를 채용하려는 이 두 사람의 의견은 번번이 다른 위원들에 의해 부결되었는데 다른 위원들은 성서 원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사실은 영어성서 문법에 충실하고자 하였다.”(63)
게일은 개역위원회에서 손을 떼고 대신 이원모 함께 독자적인 작업에 착수하여 1925년에 기독교창문사에서 <신역 신구약전서>룰 낸다. 그의 성서 번역은 ‘조선어풍에 맞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다른 선교사들의 축자적 번역, 즉 성서의 원문(영어 성서)과 한글 번역문이 그 뜻은 물론이고 양도 비슷해야한다는 원칙을 가진데 반하여 게일의 번역은 ‘짧게 줄인 풀이역’이었다. 예를 들어 게일은 한국어에서는 같은 단어를 되풀이하는 것을 꺼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앞 문장의 주어를 자주 생략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창세기 번역은 개역위원회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21년 9월 창세기 21장까지 국한문 혼용으로 인쇄하여 선교사들에게 배분하고 의견을 묻게 되었는데 이 때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대다수 의견은 게일이 문체에 매이다보니 의미를 희생시키고 말았다고 하며 영어 문장 구조를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아주 부드러운 한글번역문을 만들어 내기는 했으나 ‘원문을 줄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게일이 명사의 반복을 피한 것이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명사가 반복되고 있으나 한글에서는 가급적 반복을 피해야 했다. 창세기 초반에 이것을 적용한 결과 하나님 칭호를 20여회 생략할 수박에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게일이 성서에서 하나님을 제거했다고 주장하였다.”(72)
이 외에 게일은 언더우드와 함께 관주성서인 <스코필드 성서>(the Scofield Bible) 번역을 시도하여 1917년 인쇄하였다고 하며, 외경 번역도 완성하여 한국을 떠나기 전(1917년) 성공회에 원고를 넘겨주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5. 게일이 생각한 크리스마스7)
크리스마스에 대한 게일의 시각은 상당히 독특하다.
그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의 회상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일년 내내 설레었던 마음, 선물을 받을 때의 흥분을 회상한다. 그러한 흥분이 어린아이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이게 때문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어떠한가?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 게일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의 한국 명절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설레임을 갖고 기다렸으며, 민속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았으며, 설빔을 입고 돌아다니던 한국의 명절. 그것이 ‘한국의 크리스마스’라고 게일은 말한다. 그러한 명절들이 이제 빛을 잃는 것을 게일은 안타까워한다. 서구에서 이식된 크리스마스는 아직 아이들에게 그러한 명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현대 문명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움직임 앞에서 이러한 축제의 날들은 해가 가면서 점차 그늘 속으로 퇴락해 들어간다. 이제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의미 없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축제의 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것은 아마 진짜 종교적인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방의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설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수천년이 걸릴 것이다.”(261)




6. 게일의 한국관에 대한 논문들

주홍근, <<선교사 奇一의 생애와 한국기독교에 끼친 공헌>>, “제3장 한국학과 한국관”
저자는 게일의 한글연구, 역사연구, 번역사업, 음악연구 등의 활동을 죽 열거한 후에, 한국관이라는 표제 하에 다음의 세가지 이야기를 한다: 

①게일은, 암담한 구한말의 상황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한국이 중국으로부터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처음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나 합방 이후 일본의 잔악한 행위를 보고 생각을 바꾸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②한국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서 준비되었다.(한글, 지식에 대한 열정, 당대의 상황) 

합방이후 한국이 조선혼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한국의 부흥을 위해서는 참된 지도자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입장에서 당시 장로교의 신학교육(목회자 이상으로,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지 않는다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저자는 게일의 복음의 노력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한때 친일적이긴 하였지만, 그 후에는 “한국의 변천 속에서 한국인이 된 한국사람”으로서 한국 사랑에 앞장섰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현재의 혼합적 상황에 대한 절망’이 연구 동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 때문에 게일의 성서번역 노력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말틴 루터없이 독일을 생각할 수 없는 것같이 奇一없이 성서와 한국을 생각할 수 없다(37)”, “(게일이 번역한) 사도행전이 읽혀지면서 원산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고 요한 복음이 읽혀지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을 하기 시작하였다(39)”, “세종대왕의 한글은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의 책이 번역될 때까지 오백년동안 그 영광을 숨기고 있었다(41)” 등의 다소 무리한 진술들이 저자의 기획을 잘 보여준다. 게일의 한국 연구는 성서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한 노력이며,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러한 정신일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복음적 동기가 강하게 깔린 그의 연구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게일의 입장과 연구자의 입장이 제대로 구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다.


한규무, “게일의 한국인식과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1898-1910년을 중심으로”

앞의 글의 게일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는 달리, 한규무는 냉정한 입장에서 게일의 친일적 태도와 그 영향을 분석한다. 게일이 한국을 많이 알고 사랑했던 선교사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도급 선교사로서 한국의 기독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한때의 생각은 무책임하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이 논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이다. 일단 게일의 한국 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는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잘못된 정치에 의해서 한국의 주권 상실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외부적 요인보다는 내부적 요인, 즉 한국인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황을 인식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정치 참여를 엄중히 금하는 입장이었다.

게일이 갖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이 한국 교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된다: 그는 감옥 설교를 통해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접촉하며, 그들은 이후에 연동교회(게일이 담임)를 출석하며 황성기독교청년회(게일이 회장)에서 활동한다. 

이 인력들은 1904년 국민교육회 창립의 주축이 된다. 게일의 영향력아래 이들은 주로 비정치적인 활동에만 주력한다. “결국 게일은 이 땅의 지식층 교인들로 하여금 정교 분리의 원칙에 충실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이다(176)”.
저자는 짧은 시기를 포착하여 게일의 한국인식이 당시의 정치적 정황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호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난 냉철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게일에 관한 연구
Rutt, Richard, A Biography of James Scrarth Gale and a New Edition of his HISTORY OF KOREAN PEOPLE, Seoul: Royal Asiatic Society, 1972.
조경정, J. S. “게일의 한국인식과 재한활동에 관한 일연구”, <<한성사학>> 3 (1985).
주홍근, <<선교사 奇一의 생애와 한국기독교에 끼친 공헌>>, 피어선 신학연구원, 1985.
한규무, “게일의 한국인식과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4 (1995).

1) Gale, J. S., 장문평 옮김, <<코리언 스케치>>, 현암사, 1970. (Korean Sketch, 1898)

2) “결국 우리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과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지적 탐험과 재치 있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과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되고, 또 정신이 어느 정도는 일치될 때가 올 것이다.”(215)

3) 게일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이상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짜증나는 나라에서 ‘서두르는’이라는 뜻의 말은 왜 그리 많은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어서’, ‘급히’, ‘얼른’, ‘속히’, ‘빨리’, ‘바삐’, ‘즉시’, ‘잠깐’. 날래‘, ’냉큼‘ 등은 우리가 쓸 수 있던 흔한 말의 일부에 불과하고, 매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4) Gale, J. S., 신복룡 옮김, <<전환기의 조선>>, 집문당, 1999. (Korean Sketches, Cincinnati, Jenning & Graham, 1909)

5) 이러한 논리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강요하는 믿음으로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을 표명하고 사회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섭리만을 이야기하는 신학은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얼마 전에 자식이 걸린 병을 고치지 않아 아이를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가 있었다. 그 부모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이에게 나타날 것이며, 아이의 병세가 심해질수록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되심을 나타내기 위한 준비라고 말하였다. 아이를 병원에 보내지 않은 채.

6)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p.320-422. 에서 요약

7) James S. Gale, “Christmas", KMF 19-12, 1922, pp.25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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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양인의 눈에 비친 . . .-제임스 게일의 '조선의 마음' (KoreanIdentity)

[16] 서양인의 눈에 비친 . . .-제임스 게일의 '조선의 마음' (KoreanIdentity)

서양인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인들
James Gale:Korean Sketches(현암사 간행)에서

이달에는 제임스 게일의 코리언 스케치(Korean Sketches, 현암사 간행)에 실린 '조선의 마음'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낯 설은 이국땅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은 가운데서도 가장 낯설었던 사람들의 속마음. 말과 행동이 다른 조선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숨겨진 저류임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게일 목사(1868-1937, 한국명 기일奇一)는 미국의 선교사요 신학박사로 한국어 학자이기도 합니다. 1889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생활 면에서 역사상 가장 참담한 시련을 겪고있던 이조말기의 현황을 직접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대로 스케치 한 것이 입니다.
변환기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풍습 등에 관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이 책을 썼으며 후에 <한영사전>을 비롯해서 한국문화에 관한 많은 저서들을 출판하였습니다.

조선의 마음-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숨겨진 저류(底流)

정반대의 세계

극동에서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당연히 부닥치게 되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동양의 마음이다. 그들에게 접근해서 애정과 존경을 얻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모든 일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특별한 지적 구조때문에 몹시 어리둥절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만치 생활의 대부분은 그들의 정신속에서, 우주만물의 실재와는 정반대로 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세계가 둥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서방에서 사는 우리들은 파리들처럼 저 아랫 세계의 천정 위에 꺼꾸로 달라붙어서 걸어다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니다, 밑에 있는 것은 당신네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별도리 없이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거꾸로 서서 다니며, 우리들의 형제인 동양인들한테서 뭔가를 배울 재주가 없는 한 우리들로서는 반대 의견을 고집하는 수 밖에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우리들의 갖가지 생활원리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것이 동양에서는 엉망으로 혼란스럽게 뒤섞여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이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헌신적인 사랑은 동양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조선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알맞는 단어가 없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여러 단어를 한데 묶어야 한다. 조선인은 몹시 생색내는 말, 경의를 표하는 말, 존경하는 말 따위는 쓰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일방적인 말은 가지고 있지 않다.

부부와 사랑과 혈통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부부를 이룬다. 이런 일은 동양의 마음에 합당하다. 그러나 첫번째 아내가 죽으면 이번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번째 아내로 취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죄를 짓는 일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의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아내는 사랑을 받는 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아들로 혈통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사하는 목석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별수 없이 대(代)를 이어 주는 그런 가계상(家系上)의 교량 역할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내 아내와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가 어부 같은 사내 하나를 보았다. 그는 돌 위에 주저앉아서 아주 절망한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오?” 그는 잠깐 눈을 치떳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계속해서 울었다. 우리들은 그 이유를 캐물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통곡했다. 그야말로 아내가 죽은 순간 애정의 눈이 떠진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그를 위로하려 했다.
“그 여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거요?”
“사랑이라니요? 누가 그 여자를 사랑한단 말씀이요? 아무튼 그 여자는 내 옷을 빨아주고 내 밥을 지어주곤 했오. 그 여자 없이 내가 어떻게 산단 말씀이요? 아이고! 아이고!”


독립은 미친짓
서양의 독립사상도 조선인에게는 아무 감동을 주지 않는다.<에 폴루리부스 우눔(e plumbus unum>이란 표어가 붙은 미국깃발의 영광도, 조선인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미치광이 수작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런 미친 짓을 생각했는지, 조선인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인생을 다만 복종하는 상태로 알고 있다. 독립이란 것은 그들에게 상호간의 의심, 불신, 불법행위 따위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거리에서 흔히 묻는 것은 “어디 가는 길이냐?”이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묻는다. 또 “그 편지는 누구한테서 온 것이냐?”고 묻고, 같이 보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일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모욕적인 행위일 리가 없다. 그래서 어린애들의 장난 같은 일을 하는 데에도 두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처첨 동료의 불편을 함께 겪어서 훨씬 더 마음 편해진다는 것은 항상 독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때는 오히려 과잉 상태에 있는 모든 지적 기능에 역행(逆行)하는 것 같다.

억압을 위한 교육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우리들은 학생이 장래의 생활을 위해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고 또 준비하도록 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현재를 젖혀 놓고 오직 과거안에서만 살기 위해 마음을 조정하거나 또는 질식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발전이고 조선인들의 경우는 억압이다. 서양의 학생은 여러가지의 학식을 얻게 되는 것을 몹시 기뻐한다. 반대로 조선인들은 한문의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읽고 쓸줄은 안다. 읽고 쓰기 위해서는 20여 년 동안이나 은둔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오랬동안 은둔생활을 해도 많은 학생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서양에서의 교육은 정신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기능훈련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은 두 발을 묶는 짓이거나 기프스를 만들어 붙이는 짓에 해당한다. 일단 그렇게 해 놓으면 더 이상 성장하지도 못하고 발전하지도 못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유생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역자 주-유생들이 서양에서 온 이교를 반대한 중요 이유는 재래의 충효사상에 어긋나고, 군신의 도를 어지럽히며,조상의 제사를 못지내게 하고 사회의 윤리를 문란케 하고 침략의 앞잡이로 본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위협을 올바로 파악했으나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는 것을 뼈 속 깊이 느끼고 있다. 아무튼 이론적인 면에서 어린이들은 노동의 존엄성을 배운다. 그러나 조선에는 그와 정반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노동은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2차적인 의미는 손해, 손실, 재난, 불행이고, 이런 생각은 모두 ‘일’이란 말과 관계있기도 하고, 이 말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어있는 사람은 풍습상의 논리에 의해서 가장 고귀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있다.

*역자 주-조선말에서 ‘일이 생겼다’하면 궂은 일, 참변, 재난, 걱정거리 등 ‘큰일 났다’는 뜻이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인사말로 ‘욕 본다’고 한다.

무표정 속에 숨겨진 가슴 속 심연(心淵)
우리들의 경우에는 정신이 가슴과 얼굴 사이의 통신수단 노릇을 하고 있다. 갑자기 우리들을 덮치는 기쁨이나 슬픔은 가슴에서 얼굴로 타전되므로 얼굴의 표정을 보면 곧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정신은 다른 임무를 띄고 있다. 우선 그 첫째 임무는 가슴과 얼굴간의 통신을 두절시켜서 둘 다 각각이게 한다. 말하자면 얼굴에는 다만 거짓 표정을 짓거나 필요에 따라 무표정해 진다. 조선인은 아내나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 거의 냉담한 태도에서 철저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감정에 충실한 서양인은 가슴이 느끼는 것을 목소리나 얼굴의 표정으로 나타낸다. 우리들은 동양에 잠깐만 머물러도 가슴과 얼굴이 통신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며, 상상조차 못한 심연과 저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임금님의 거동
인간은 실체를 겉모양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자주 고통을 느낀다. 진실은 진실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겉모양에 필요한 것이다. 정신은 진실의 어떤 면이 가장 일반적인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왕이 행차하면 온 시민이 동원돼서 그 허식에 이바지하게 된다. 어가(御駕)가 불결한 흙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붉은 흙이 뿌려지지만 그것은 아일랜드 스튜우에 뿌려지는 소금이나 후추보다도 적은 소량이다.
야단법석에는 굉장한 허식이 있다. 바빠서 쩔쩔매는 병정들은 사방으로 다름박질친다. 심지어는 조랑말들이 그 틈에 끼어 닥치는대로 사람을 물어 뜯는다. 화살깃들과 깃발들. 5백 년 전부터 물려 내려온 제복을 입은 관리들의 무질서한 행렬, 거기 없어서는 안 될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굉장한 막대기를 가진자들. 때로는 두들기고 , 때로는 뽐내기만 하는 북들, 수천 벌의 헐렁헐렁한 바지들과 짚신들, 붉은 저고리들과 번쩍이는 화살 깃들, 말 안장 위에 높이 앉아서 팔장을 낀채 건들거리며 언제라도 앞으로 고꾸러지거나 뒤로 자빠질 태세를 갖춘 멋들어진 관리들. 한자가 쓰여 있는 위풍당당한 깃발들. 연기를 내뿜는 담뱃대와 소리 나는 대통들. 갖가지 총들. 활과 화살과 향료들.부적들, 웅담과 뱀의 껍질, 근대식 모자와 고대식의 모자. 혼란, 무질서, 웅장, 위엄과 지천, 먼지와 구름과 수레바퀴 고리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여 움직이는 수만 명의 인파. 그 무질서하고 다채로운 깜짝 놀랄만한 군중.
서양인은 깜짝 놀래지만 조선인은 그 전체적 조화가 심히 웅장한데 도취돼서 환희에 젖는다. 그래서 조선인은 그 행렬의 구성 요소가 어떤 것인지, 과연 참된 것인지, 또는 소용있는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역자주-이조 때 왕의 거동은 사직이나 종묘에서 제향할 때의 대가식, 무과 전시 등의 법가식, 능에 갈 때의 소가식 등 여러가지인데 으례 호화로운 의장이 행해졌다. 고종 때에는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거둥 때 한 번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을 뿐 그 밖에는 그런저런 것을 갖출 여유가 없는 초라한 거둥이었음에도 외국인의 눈엔 놀랍게 보였던 것 같다.

겉치레와 빈말
식객(食客)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생활 체제속에서 하인이 주인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인을 한, 두 명 가량 더 고용하게 하여 부엌에서 빈둥빈둥 놀고 먹게 하거나, 아니면 찾아오는 사람들 한테서 돈을 더 짜내게 하는 것이다. 그 집은 패가망신하게 돼서 안밖의 모든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모든 벽이 궁상맞게 갈라질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든 의식과 소동은 계속되고 주인의 ‘나으리’라는 위치도 확보된다. 즉 실체 아닌 겉모양이 생활지침으로 된다.
사람이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않을 때에 모든 도덕상의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은 서양의 진리이다. 동양에 이런 통칙을 적용하면 동양의 대륙 전체를 절망시하게 된다. 우리들이 남의 말을 우리들 멋대로 몹시 중시하는 이유를 조선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인들은 생활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을 신성시하기 바라는 것은 우리들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정의를 이룩하려는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또 그들의 한결같은 대화-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숙고-에 실질적으로 간섭하는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의 의사소통은 이해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므로 말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안녕하시오?”라고 말하고 “안녕하시오?”라는대답을 들을 때에는 누구나 그순간 그런 질문에 의해서 명백한 대답을 듣게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숙녀가 반갑지 않은 초청자한테 자기 형편이 좋지 않다고 말할 때에는 으례 이성과 본심간에 불쾌한 갈등이 따른다. 그러나 조선인은 자기 형편이 좋지않다거나 몸이 불편하다고 말할 때 이렇게 적당한 핑게를 대서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젊잖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갔을 때에는 나의 친구들(조선인들)한테 굳이 충실해지기 위해서 그들이 초대할 때마다 꼭 참석하였다. 가장 흔히 쓰이는 헤어질 때의 인사말은 “내일 또 오리다”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 왔다. 꼭같은 약속을 하고 돌아갔던 사람들인데 ‘다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안가서 나는 그 좋은 친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후, 그들의 말이나 약속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나는 안전한 곳에서 나의 동양인 친구와 제법 화목하게 그리고 서로 신뢰하며 행동을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과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지적탐험과 재치있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과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되고, 또 정신이 어느 정도는 일치될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제임스 게일 저 <코리언 스케치> 장문평 역 현암사 간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제임스 게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 뉴스앤조이

제임스 게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 뉴스앤조이



제임스 게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학자적 성실, 용기, 새 관점 필요

옥성득 (sungoak@hotmail.com)
승인 2013.02.19 11:36



▲ 토론토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게일의 일지 한 면. (사진 제공 옥성득)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선교사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최근 연동교회에서 기념식을 열고 논문집 배포와 게일 목사 기념관 개관 행사에 이어 게일학술연구원을 발족하여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게일을 비롯한 초기 선교사에 대한 연구가 심화,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최근 게일에 대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게일의 글을 편집한 권혁일 역, <제임스 게일>과 이상현 저, <한국 고전번역가의 초상-게일의 고전학 담론과 고소설 번역의 지평>이다. 국문학 분야에서 후자와 같은 괄목한 만한 성과가 나옴으로써 교회 사학자들은 그 직무유기를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초기 선교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로서 이 직무태만에 대한 일종의 회개 행위로 향후 게일 연구에 도움이 될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이 글이 학자에게는 도전이 되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교회사 연구의 한 단면과 과제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자료 문제

첫 과제는 자료 총서의 편찬이다. 게일이 남긴 자료 가운데 현재 초기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일부만 Ann Ruth 와 김인수 편역으로 출간되어 있을 뿐이다. 게일이 남긴 일기, 서신, 설교문과 같은 손으로 쓴 원자료의 수집 편찬은 물론, 신문, 잡지, 서적으로 출판되었으나 여러 자료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독해, 영문 작성, 한글 번역, 역주 편찬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영국, 미국, 일본에서 간행된 영자 신문에 기고한 게일의 글을 수집해야 게일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주요 선교사 가운데 자료 총서로 출판된 것은 필자가 편역한 <언더우드 자료집>뿐이며 <마페트 자료집>은 진행 중이다. <게일 자료집>이 나온다면 한국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학의 여러 분야 연구에 기여하는 역사적인 대작업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음 과제는 게일의 영문 자료를 독해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게일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위치한 토론토대학교 토마스 피셔 희귀본 장서실에 보관되어 있는 24상자의 자료이다. 그 가운데 각 권 약 200면으로 된 19권의 일지가 있는데, 이것은 게일이 평생 한국의 한문 고전을 영어로 번역한 친필 원고이다. 그 외 많은 서신, 설교문, 기고문, 저술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일지와 많은 자료가 펜으로 쓴 친필 원고이다. 게일의 글씨와 필체는 독특해서 다른 선교사의 글보다 몇 배나 읽기 어려운데, 웬만한 전문가도 80% 이상 독해하기 어려운 페이지가 많다. 따라서 게일 자료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친필 원고를 독해하고 번역할 수 있는 소장 학자 양성이 절실하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한 명의 전문가를 기르는 데에는 10년 이상이 걸린다. 교회가 사람을 길러야 한다고 할 때 이런 역사학자의 양성에도 투자해야 한다.

2. 해석 문제

이상현이 말한 대로 게일은 '한국의 근대와 그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의 생활과 풍습을 묘사한 민족지, 한영사전과 문법서와 같이 한국어의 역사와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서적, 경신학교의 학생을 위해 편찬한 국어교과서, 다수의 한국문학에 대한 번역물, 한국 역사서' 등을 남겼다. 나아가 게일은 선교, 근대화, 번역, 문학, 목회, 부흥 운동, 저널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므로, 이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연구 시각을 계발해야 한다. 한 인물의 다양한 분야를 분리하여 연구하다 보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많은 학자가 무시하는 분야가 게일의 정치성, 곧 총독부와의 관계 문제이다. 이 친일의 주제는 거론하는 학자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교사 게일의 업적과 공헌을 이야기하면 게일학술원이나 연동교회, 나아가 한국 교계가 좋아하겠지만, 일제강점기 선교사들(개신교나 천주교를 막론하고)의 친일 행위를 거론하면 교계에서 매장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사 학계는 오랫동안 소위 '민족교회론'이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다른 해석을 막아 왔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한국의 교회들, 특히 서울의 교회들이 총독부의 '동화' 정책에 적극 동조하여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만드는 데 협조하고 도덕적인 '교화'에 앞장섰다고 주장하는 '친일교회론'을 논증하려면 상당한 연구와 용기가 필요하다. 1907~1913년 기간만 보아도 게일은 의병 투쟁, 한일 합병, 105인 사건 등에 대해서 일본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사 학자들이 과연 이 부분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편 한국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석에서 '식민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지난 10년 이상 치열하게 토론하고 많은 연구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사학계에서 이 관점으로 된 연구 성과가 별로 없다. 민족교회론 외에 다른 해석의 틀로서 일단 식민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게일의 문학, 역사, 민족지 연구 등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끝으로 게일 팔기의 문제이다. 얼마 전 전혀 게일과 상관없는 미국인 대형 부동산 개발업자가 게일이라는 성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게일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면서 인천에서 자신의 사업을 도모하기 위해서 연동교회에 접근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게일의 손자와 필자가 나서서 이를 고발, 항의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교계나 학계에서도 게일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자가 나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게일 연구가 자칫 게일의 성인전(聖人傳)을 쓰는 작업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면서 동시에 미래적 가치를 캐내는 게일 연구가 되기를 기대한다.

옥성득 / UCLA 한국기독교학 부교수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 :: pctscwm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 :: pctscwm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권별내용/13집 2011.04.21 15:34 Posted by pctscwm

I. 1차 문헌, 글쓰기 방법, 연구 상황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사이에 한국에서 일한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884년에서 1910년 사이에 한국에 들어온 미국 개신교회 선교사가 약 499명이고 이 가운데서 북(北)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는 165명(약 33.1%)이었다.1)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각각 이해한 한국문화에 관하여 한꺼번에 살펴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을 남긴 선교사들의 글을 가려 뽑아서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 북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 가운데서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2) 제임스 게일(James Scanth Gale,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 1863-1937)3), 그리고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1851-1921,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4)의 기록을 이 글의 ‘제1차 문헌’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선교사는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살면서 같은 선교부에서 일한 공통점이 있고, 그러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한 차이점이 있다. 게일은 주로 목회자로 일하였고 알렌과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의료 선교사로 일하였는데, 그러던 중 알렌은 미국의 외교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이 점을 바탕으로 이 글은 세 선교사의 기록에 담긴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다양성을 살피면서 그 기록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세 선교사의 한국문화 이해에서 다루어진 공통된 주제를 찾아내고 이 주제를 바라보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가려내고자 한다.

이 글은 거대담론 곧 아시아나 한반도 전체를 거론하면서 큰 관점을 잡아 서술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자칫 선험(先驗)적 판단에 근거하여 대충 어림잡아 개괄적으로 섣불리 서술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거시(巨視)적 관점이 아니라 미시(微視)적 관점에서, 선교사들이 개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느낀 한국문화에 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하여 살피려는 우선적인 관심은 당시의 한국사회 상황이나 선교정책이 아니라 세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한국문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알아보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귀납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멀리 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안을 바라보는’(선교현장 안에서 한국의 토착문화를 바라보는) 선교사의 문화이해를 서술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이 글은 
게일의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5) 
알렌의 『알렌의 조선 체류기』(Things Korean),6)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7)를 1 차 문헌으로 선택하였다.

21세기와 더불어 인문학 연구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경향에 발맞추어서 그 당시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진진한 작업이다. 그런데 당시의 한국문화는 오로지 한 가지의 단일형태가 아니라 사회계층별로 적어도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궁중문화, 양반문화, 평민문화 등이다. 이 가운데서 하나를 고른다면, 우리는 평민문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이들의 일상생활 문화인 의(衣), 식(食), 주(住) 문화를 선교사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먼저 살피고자 한다. 그렇게 선택하려는 이유는 1890년 봄에 서울을 방문한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를 통하여 내한 선교사들이 그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받아들여서 선교정책으로 채택하였고,8) 그 이후로 선교활동의 무게중심은 일반평민과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되었기 때문이다.9) 그리고 그 다음엔 선교사들이 이해한 한국의 정신문화가 선교정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지금까지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가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10) 그들의 선교활동이 한국에서 개신(장로)교회의 형태가 잡혀지고 그 성격이 형성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또 그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도 아직도 이렇다고 할만한 학문적 해석과 평가가 아쉬운 실정이다. 이것은 선교학 분야와 교회사 분야가 공동으로 진행해야 할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이 글을 통하여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초창기엔 백낙준의 선교사관아래 머물러 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교회역사를 민족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서 진행하였다. 백낙준의 역사관은 19세기 모더니즘시대의 낙관론을 바탕으로 미국 개신교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표출되었고 더 나아가서 서양의 제국주의 관점도 반영하고 있다. 이 역사관을 극복하려는 1980년대 이후의 교회사 연구는 민족을 중심주제로 잡아서 새롭게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그 중심주제에 집중되느라 한국 교회역사의 초창기에 주춧돌을 놓은 외국(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알게 모르게 소홀히 여겼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1980년대 이래의 연구 줄거리를 따라가면서도 이 소홀히 여긴 점을 극복하려는 연구논문과 단행본이 나오고 있다. 예컨대 서구 중심적 선교에 대한 반성,11) 미국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관 등이다.12) 이 글은 이러한 최근 연구를 살피면서 서술하고자 한다.




II. 선교사들이 이해한 일상생활 문화




미국을 떠나 25일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고 일본 요코하마에 들렸다가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이나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구에 도착한 내한 선교사들이 받은 첫 인상은, 선교현장에 대한 부푼 기대감이 빗나가면서 대체로 그리 밝지 못하였다. 알렌은 “배의 갑판에서 볼 때 조선의 해안은 황량하고 메마르며 대체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고 하였다.13) 릴리아스 언더우드 역시 “제물포 항에 도착하여 해안을 바라보니. . .휑한 풍경(에다). . .황량한 갯벌이 불쾌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고 회상하였다.14) 3월의 항구언덕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고 아직도 눈으로 허옇게 덮여 있었다. 이러한 첫 인상은 이들이 이 땅에 온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할 문화충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토착주민들(한국인들) 역시 -선교사를 단지 서양에서 온 낯선 사람으로 파악하였으므로- 서양인의 허연 피부색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에다 이상한 옷차림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선교사는 이들의 구경거리였고 가끔은 놀림감이 되었고 간혹 겁을 집어먹게 하는 무서운 이방인이었다.15)

이처럼 선교사와 토착주민들이 서로 낯설고 어색한 가운데서 선교사는 낯선 땅의 문화에 충격을 받고 이것으로 말미암은 문화충돌 속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해야 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선교사가 초창기에 겪은 당시 한국 평민의 일상생활 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식문화:

세 선교사는 하나같이 자기네 입맛에 익숙한 미국음식을 기준으로 선교지의 음식문화에 관하여 평가하였다. 고기, 감자, 빵을 먹지 않고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김치)를 날마다 먹는 점을 자주 언급하였다. 이 나라에는 설탕이 없고 그 대신에 꿀을 쓰거나 쌀과 곡식에서 단 것을 얻는 조청이 있다고 말하였다. 미국 음식이외에 다른 나라의 음식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이 나라에 우유가 없다는 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16) 그녀는 또한 미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잔치문화에 놀랬는데,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음식(떡, 과일, 고기 등)이 잔치 상에 오르자 손님들은 -이 음식들을 기대하면서 며칠 동안 일부러 굶었으므로- 엄청나게 이것을 먹어 치우고 또한 남은 음식을 옷소매에 가득히 담아 가는 관습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게일은 한국 토속음식 문화의 특징이 매운 맛에 있다고 말하면서 고추장과 고추 가루가 들어간 음식에 적응하기가 대단히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체구가 작고 말라서 가냘프게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고기를 좀체 먹지 않고 쌀밥과 야채만 먹는데도 큰 힘을 쓰고 무거운 짐을 나른다는 점을 언급하였다.17) 알렌은 김치 담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자신이 “김치를 즐겨먹는 극소수의 외국인”이라 밝히면서 김치냄새의 고약함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하였다.18)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마늘을 넣은 김치를 먹지 못한다고 얘기하였다.

세 선교사의 한국 토속음식에 대한 이해는 이들이 선교현장의 일상생활 문화에 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였는지 엿보게 해준다. 김치의 경우를 놓고 따져 본다면, 알렌은 한참동안 노력한 끝에 이 문화에 훌륭하게 적응해 나갔고, 게일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계속 노력하고 있었고, 이에 비하여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적응해 보려는 노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늘 구경꾼으로서 멀찌감치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릴리아스는 한국인들의 지나친 음주문화(술주정)를 비판하면서, 가난에 찌들어 한숨만 쉬는 이 사람들에게 술 말고는 달리 마실 거리(차, 커피)가 없는 탓이라고 말하며 은근히 일반대중의 음식문화 전반에 관하여 과소평가하였다.19)

2) 의복문화 :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하던 3월의 하늘은 구름으로 잔뜩 찌푸려 있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에는 토착주민들이 간편하게 입은 흰옷이 “더럽고” 추하게 비쳐졌다. 한 달에 한두 번 옷을 제대로 갈아입는지 의아해 했다.20) 이와 달리, 게일은 발목까지 오는 “깨끗한 흰옷”(두루마기, 도포)을 입은 대중들을 언급하면서 흰색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색깔이라고 말하였다.21) 알렌도 흰색이 한국민족의 색깔이라고 평하면서 “백의민족”이라 하였다.22)

이처럼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의복문화는 그 색깔이 먼저 보였는데 그것은 흰색이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그 흰색을 “더럽다”고 평가하였고, 게일은 “깨끗하다”고 얘기하였으며, 알렌은 주관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보이는 그대로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3) 주택문화 :

구한말 평민들의 일반 가옥인 초가집은 선교사들에게 대단히 이질적인 문화체험이었다. 규모와 구조 및 실내 생활공간까지 본국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집이었다. 황토로 외벽을 바르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작은 집은 방안의 천장이 낮아 어른은 똑바로 설 수가 없으며, 실내가 매우 어두운데 창문인 듯 아닌 듯 흰 종이로 바른 작은 봉창에 벽지는 흰 종이로 바르고 방바닥은 노란 기름종이로 바르고 또한 방바닥에는 구들을 놓아 온돌로 난방장치를 해 놓았으므로 세 선교사 모두 다 이것을 대단히 신기해하였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여성의 눈으로- 가옥의 구조에 남성들이 거처하는 “사랑방” 공간과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방”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점을 크게 부각하였다.23) 그리고 여성들의 생활공간은 집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있고 가족이나 친척 이외의 남성들은 이 곳으로 들어올 수가 없으며 이 공간에는 여성들의 활동을 위한 작은 뜰이 있다는 점을 얘기하였다.


III. 일상생활 문화와 투쟁한 선교사들

구한말 평민의 일상생활 문화에 대한 세 선교사의 경험은 하나같이 ‘불편함’, ‘불결하고 비위생적’, 그리고 ‘가난함’이었다. 이에 따라 이 문화는 이들에게 일차적으로 ‘투쟁의 대상’이었다. 문화충격과 충돌 속에서 이 문화와 투쟁해야 했다. 투쟁하는 가운데서 선교현장의 문화를 이해해야 했고 또한 이 문화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양(미국)식 일상생활을 그대로 영위하였다.

게일이 얘기한 불편함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24) 본국에서 날마다 빵과 고기를 먹고 커피와 우유를 마시던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인 한국에서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다. 또한 의자와 침대생활에 익숙해있는 서양 사람이 이 곳에서 방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일은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무릎과 엉덩이뼈 그리고 발목뼈가 끊어지듯 아파오기 때문이었다. 온돌방 체험은 더욱더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방바닥이 마치 “빵 굽는 오븐”처럼 달구어져서 잠자는 사람이 “빵으로 구워지는” 느낌이었다.25) 밤새도록 뜨거운 방에서 시달리며 악몽으로 뒤척이고 몸부림치는데, 게다가 방안은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맥박은 뛰고 머리는 곤두서고 숨이 막혀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렌과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구한말의 주택이 지독히도 비위생적이고 불결하다는 점을 자주 언급하였다. 알렌은 이 나라의 주택에 위생시설이 없다고 말하면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내년의 농사에 쓸 오물과 쓰레기를 한데 모아서 발효시키는 퇴비구덩이가 있는데 이 구덩이에서 악취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 이 악취가 -미국 시카고의 강에서 솟구치는 가스처럼- 사람의 건강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26) 릴리아스는 불결함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 관하여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생활하수인 구정물이 사람 다니는 길 양편의 좁은 도랑으로 흘러가는데 이 불결한 도랑에는 해충으로 가득함을 보았다. 이 도랑이 종종 쓰레기로 막혀서 길로 흘러넘치며 더러운 옷을 세탁한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우물이 오염되어 있고 썩어 냄새나는 야채들이 길가와 집의 창문아래 수북이 버려져 있어 불쾌한 냄새를 풍긴다고 하였다. 집 주변에 고여 있는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에서 독성이 있는 수증기가 뿜어 나온다고 하였다.27) 그런데 이 두 사람에 비하여 게일은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생활환경에 대하여 그렇게 예민하게 불평하지 않았다.28)

알렌과 릴이아스 언더우드가 위생환경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예민하게 관찰한 것은 아마도 이들의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예민한 불평은 결코 불필요한 과민반응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당시엔 해마다 여름철이면 전염병이 도져서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앓아눕고 사망하였다. 천연두와 콜레라가 가장 심각한 전염병이었다. 특히 1887년에는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어서 수천 명이 쓰러졌다. 이 전염병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아침에 건강했던 사람이 정오에 사망하였고 또 한 가족 몇 명이 같은 날에 죽기도 하였다. 부모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의료 선교사들은 무력감 속에서 진료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응징(전염병)이 속히 멈추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9)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교사들 자신들도 이 전염병에 걸릴까봐 무서워 벌벌 떨었다. 한 번은 게일이 천연두의 발진으로 온 몸이 부르튼 환자의 가정에 심방하였는데, 그 가정에 머무는 동안에 이 질병이 자기에게 옮을까봐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30)

이처럼 당시의 유행성 질병과 전염병은 선교사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치 죽음에 포위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질병과 전염병이 대체로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 선교사들은 이 환경과 투쟁해야 했다. 따라서 질병퇴치와 청결이 중요한 선교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IV. 선교사들의 일상생활 문화이해와 오리엔탈리즘 논의

이처럼 일상생활 문화와 투쟁한 당시 선교사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에 따르면,31) 오리엔탈리즘이란 19세기에 서양세계가 자기 정체성에 관하여 의식하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우리”로 표현하고 서양 바깥의 다른 모든 세계를 “그들”로 표현한데서 시작되었다. 이 속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백인, 기독교)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자기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서양은 스스로를 문명으로 파악하고 서양의 바깥 세계를 야만으로 가공(架空)하여 규정하였고, 자기네 멋대로 만들어 낸 가공의 규정을 동양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야만이라 이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동양 사람들은 서양이 만들어 준 가공의 자기를 참된 자기라고 받아들였다. 이 이론을 내한 선교사들이 이해한 토착 일상생활 문화에 반영해 본다면, “우리”인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의 세계인 한국으로 들어와서 받은 첫 인상인 불편함, 불결함과 비위생적, 가난함은 그들이 갖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적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류대영과 이향순은 미국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한국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이미 지적하였다.32) 그렇게 지적하는 근거는 19세기 말 당시 미국에 널리 소개된 한국의 별칭이 “은둔의 나라”(The Hermit Nation)나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인데 이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을 함축한 두 개의 책 제목이라는 것이다. 즉 은둔의 나라는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지은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82)에서 가져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이 지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 1886)에서 가져왔으며,33) 이 두 책에 묘사된 한국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또 많은 점에서 편협하고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한국에 관하여 소개된 책이 미국에 거의 없었고 또한 『은둔의 나라 한국』을 지은 그리피스는 상당한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었으므로 미지(未知)의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진 미국 사람들은 이 책을 정독하였다. 알렌, 게일,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이 책을 읽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이 쓴 기록에 드문드문 “은둔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한 그 책의 내용도 조금씩 인용되었기 때문이다.34) 또한 앞에서 언급한 첫 인상, 곧 알렌과 릴리아스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받은 ‘부정적인 첫 인상’ 역시 이 책에서 받은 영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세 선교사의 서울생활에 대한 기록이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관을 확인하게 해 준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선교사들의 생활환경에 놀랐다. 제물포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서울의 선교사들은 “전통 한옥을 수리하여 내부를 다소 서양식으로 개조하고 벽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융단과 안락한 가구들을 구비하여 잘 살고 있었다.”35) 비문명 세계(‘사막’)의 한 가운데서 문명세계(‘오아시스’)의 생활을 즐기는 문명인처럼 선교사들 대부분은 서울 한 복판에서 토착주민들과 동떨어져 미국생활을 그대로 영위하였다. 알렌 또한 선교사들의 생활이 넉넉하고 부유한 수준을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편리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미국 돈으로 월 3달러에 식생활을 스스로 해결하는 하인들을 구할 수 있으므로” 선교사나 선교사 부인이 적은 비용으로 시간을 절약하며 쾌적하게 살아간다고 하였다.36) 이렇게 기록된 선교사들의 생활은 가난하고 비참한 “그들의 세상”속에서 윤택하고 부유한 “우리의 세상”을 구축하여 “그들과는 별개로” 살아가는 “우리”였다.37)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19세기말의 내한 선교사들에게 적용될 타당성이 충분하다.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에 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선교를 통한 서양문명화 담론 때문이다. 즉 쇄국정책의 종식과 문호개방(1876)이래로 한국(조선)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고 이 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 들어왔고 또 당시의 정부는 이를 위하여 선교사를 불러들였는데, 선교사의 선교활동 속에는 -의료선교와 서양식 학교교육을 통하여- 서양 문명의 이식과 정착도 포함되었다. 그 이후에 한국의 전통문화는 점차 근대화의 이름으로 서양문명에 잠식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게 설득력을 부여한다. 즉 문화란 그 문화가 지니고 있는 힘(force)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38) 서양과 동양의 관계도 힘의 역학관계, 곧 힘센 문명이 힘 약한 문명을 삼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대입시켜보면, 선교사의 활동을 통하여 시대에 뒤떨어져 그 수명을 다한 전통문명이 힘센 서양문명에 잠식되어서 그 자리를 근대화의 이름으로 서양문명이 차지해 버렸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오리엔탈리즘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말미암아 전통문명이 쇠퇴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세 선교사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오리엔탈리즘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부분들이 나타난다. 먼저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태도 변화이다. 그녀의 기록에 보면, 선교현지의 주민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다가 동료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의 “타자를 위한” 선교활동을 보면서 커다란 인식변화가 일어난다.39) 매켄지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서 일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내한 선교사들과 달리 1894년 가을에 서울을 떠나서 오지(奧地)마을인 소래로 들어가서 토착주민들과 함께 살며 토착언어(한글)를 배우고 그들과 꼭 같은 생활방식(음식, 잠자리)으로 살았다. 주민들은 그가 엉터리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감동을 받았으므로 하나 둘 씩 복음을 받아들였다. 매켄지처럼 그렇게 서양식 삶을 포기하고 토착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지내면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한 경우를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게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현지의 주민들을 타자로 파악하고 이들과 동떨어져서 살았는데, 매켄지는 이와 다르게 타자와 더불어 살면서 행위와 삶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 사실이 릴리아스 언더우드에게 커다란 자극과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만약에 충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매켄지에 관하여 이렇게 길게 서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년 뒤에(1895), 매켄지가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대단히 침통해지고 가슴이 저려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40) “7월의 어느 슬픈 날 ... 매켄지가 심하게 앓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편지가 온 후 곧이어 그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뒤따랐다. 천둥번개 치듯 바람이 몰아쳤다. 그렇게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사람을 그토록 빨리 앗아갔는가!”

이어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남편의 사역에서도 타자를 위한 선교가 있다고 기록하였다.41) 앞에서 언급한대로, 1887년에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자 수천 명이 쓰러졌다. 이 전염병에 대처하려고 의료 선교사들은 긴급히 응급조직을 구성하였다. 의사 애비슨(O. R. Avison)이 응급병원과 위생업무의 총책임을 맡았고 그의 지휘아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조별로 여러 지역에 검역소를 설치하여 전염병퇴치에 나섰다. 물론 토착교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자원봉사자가 나섰다. 이들과 선교사들이 하나 되어 검역소에 있는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고 또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전염병 예방교육과 위생교육을 실시하였다.42) 이렇게 희생적으로 진료하자, <환자가 기독교 병원에 가면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내용의 홍보벽보가 성벽에 나붙었다. 콜레라와 목숨 걸고 싸우며 희생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들에게 감동받은 주민들은 “이 외국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이방인을 위해 하는 것만큼 우리는 우리 가족 중 하나(환자)를 위해서 그만큼 희생하려고 할까?”라고 말했다.43) 또한, 어느 날 새벽미명에 서둘러 환자가 있는 천막으로 걸어가는 선교사 언더우드를 본 주민들이 “저기 인간예수가 가는군. 그는 쉬지도 않고 밤낮 환자 곁에서 일한다네!”라며 탄복하였다.44) 이렇게 감동으로 와 닿은 언더우드의 복음실천이 선교의 열매로 맺혔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사람들이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주 예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 더 달콤한 보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감격하였다.45) 이러한 사례는 선교사와 토착주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타자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오히려 양자가 함께 힘을 합쳐 전염병과 싸우는 가운데서 한마음이 되었다. 적어도 이 사건 속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염병과 죽음에 포위되어서 공포에 질린 선교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게일의 입장 변화도 눈에 띈다. 처음에 그는 한국의 일상생활 문화가 불편하고 불결하며 비위생적인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정신문화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문화는 하잘 것 없지만 정신문화가 높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이 본래 “책읽기를 좋아하는 민족”이고 “학문을 좋아하는 심성”을 가져서 매우 “높은 교육열”이 있는 점을 파악하였다. 그는 이어서 한국의 전통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크게 인정하면서 “학문적 성과로 따져 본다면 조선의 (유)학자들의 수준이 예일대학이나 옥스포드대학 또한 존스 홉킨스 대학출신보다 높다”고 하였다.46) 이 말 속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감을 찾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한국문화를 ‘존중’하고 있다.

게일은 또한 한국의 예절문화는 성경시대의 히브리문화와 아주 친밀하여서 마치 자신이 다윗, 다니엘, 베드로 그리고 바울 시대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47) 이를테면, 다윗이 사울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듯이(삼상 24:8) 한국 사람들도 그렇게 고개 숙이고 절을 한다.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이 ‘샬롬’하며 인사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인사할 때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안녕’이라 인사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성경의 내용들이 “서양 사람들보다도 한국 사람들에게 훨씬 더 명료하게” 들려진다고 보았다.48) 예를 들어,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제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로 명하셨는데(마 9:5-7) 이 말씀을 미국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방금 중병에서 놓임 받은 연약한 사람이 어떻게 다리가 넷 달린 무겁고 큰 침대를 들고 갈 수 있겠는지 의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이 내용을 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의 침상은 서양의 침대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간단히 개고 펼치는 이부자리이기 때문이다. 게일은 한국 사람들의 관습과 언행에 배어 있는 ‘체면문화’까지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체면을 차리는 전형적인 한국적 인물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낮에 찾아오다가는 체면이 손상될까봐 밤이 되어서야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일은 한국사회의 관습과 예절문화가 성경시대의 문화와 친밀하다는 점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복음전파에 활용하였다.

이 같은 한국의 정신문화와 예절문화에 대한 게일의 이해에는 오리엔탈리즘에 채색된 오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한국전통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V. 복음이 토착문화 속으로 성육신(Inkulturation)




1. 한글의 가치를 발견, 사전편찬, 성경번역

1) 선교사로서 한글의 가치를 발견 :

게일이 한국의 정신문화를 발견하고 그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문화를 존중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오랜 세월 감추어져있던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한글이야말로 누구에게나 “배우기 쉽고” 익히기에도 “간단한” 글인데 너무 쉽고 간단하므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도리어 멸시만 당해왔는데 “서기 1445년에 발명되어 조용히 먼지투성이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서” 선교를 위해 “준비된” 아주 훌륭한 언어라고 감탄하였다.49)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점은 내한 선교사들에게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토착언어로 복음을 증거하여서 그 문화 속으로 복음이 성육신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창기의 한국 선교가 선교사 위주의 선교가 아니라 ‘선교현장 중심으로’ 정착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복음이 토착문화 속으로 성육신(Inkulturation)하여서 그 문화 속에서 새로운 형체(Gestalt)를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50)

그러나 한글 배우기는 선교사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고백한대로,51)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토착언어(한글)를 배우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선교사의 한글학습을 위하여 매년 1단계에서 3 단계에 이르는 학습과정이 개설되었고, 모든 내한 선교사는 반드시 일년에 3차례 아주 엄격한 한글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서 게일은 한글문법을 연구하여 『문법책』(Grammatical Forms)을 출판하였고 또 『한영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도 출판하였다.

2) 사전 편찬:

게일의 사전편찬에 앞서서, 선교사 언더우드는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전을 만들었다. 릴리아스는 남편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85년부터 5년 동안- 한글사전을 만들고자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갖 정성과 열정을 기울인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한불자전』(韓佛字典)이 선교사의 한글학습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52) 언더우드는 이 사전의 한계점 곧 한국어를 외국어 발음으로 표기한 점을 뛰어넘는 완벽한 사전을 만들되 『영한(英韓)자전』과 『한영자전』을 동시에 만들기로 하였다. 그는 5년 동안 한글단어를 수집하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다른 선교업무 때문에 바빠서 이 일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으므로 틈틈이 짬을 내어 작업하되 해마다 여름 휴가기간 동안에 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제까지 한글의 맞춤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점을 파악하였다. 사람마다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제각기 표기해 왔으므로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 나름의 한글맞춤법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만 한 자리에 함께 있어도 한글 쓰기규칙이 제각기 서로 달라서 맞춤법 때문에 서로 우기고 싸우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언더우드는 『전운옥편』(全韻玉篇)을 표준으로 삼아 맞춤법을 통일시켜 나갔다. 그러나 옥편에 없는 글자 곧 중국에서 빌어오지 아니한 순 우리말이 대부분이므로 이 단어들을 다른 사전들과(예, 『한불사전』) 참조하면서 맞춤법을 고안하고 만들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송순용(宋淳容)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의 도움이 없이는 사전 만들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는 맨 먼저 모음과 자음의 차례와 받침의 차례를 만들어서 사전에 들어갈 단어 순서를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모음의 순서에 따라(“ㅏ”부터 시작) 단어를 배열하되 한글단어를 먼저 적고 이에 상응하는 한자를 적고 그 다음에 영어로 그 뜻을 적었다. 가령, “아오, 弟, A younger brother of a brother, a younger sister of a sister”로 적었다. 또한 한자(漢字)에서 온 “초목”(草木)이란 단어는 『전운옥편』에 있으므로 그대로 받아썼으나 순 우리말인 “나무”란 단어는 당시에 “나모”라고도 하고 “나무”라고도 했다. 이 경우에 습관적으로 “나모 목”이라 하니 “나모”라 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한문(漢文)에 젖은 사람들이 “의”를 뜻하는 “지”(之)와 “에”를 뜻하는 “어”(於)를 서로 분간하지 못하고 혼용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것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가령, “입어목(入於目) 재어가(在於家)”로 쓰고 나서 “눈에 티가 들었소 집에 있소”라고 말하기고 하고 “눈의 티가 들었소 집의 있소”라고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또, “타인지가(他人之家) 공자지언(孔子之言) 인지수(人之手)”로 쓰고 나서 “타인의 집 공자의 말씀 사람의 손”이라 말하기도 하고 “타인에 집 공자에 말씀 사람에 손”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의”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이런 식으로 언더우드는 -여러 선교사들이 앞서 해놓은 작업을 바탕으로- 사전을 만들면서 맞춤법의 표준도 만들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한불사전』과 대조하여서 권위 있는 표준맞춤법을 만들었다. 이 사전이 완성되자 일 만개의 단어와 동의어가 정리되었다. 물론 이 방대한 작업을 혼자서 해낼 수가 없었다. 게일이 『한-영 자전』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였고, 헐버트는 『영-한 자전』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였다. 드디어, 1890년 4월 26일에 『한영문법』과 『한영자전』이 완성되었고,53) 이것을 일본에서 출판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한글과 씨름하고 한글학습에 구슬땀을 흘리는 선교사들을 위해 사전편찬을 착수한 언더우드는 자기도 모르게 이 땅의 백성을 위해서도 방대한 작업하였다. 선교를 위한 이 작업은 한글의 발전은 물론이고 한국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3) 한글로 성경번역:

언더우드의 사전편찬 작업은 성경번역 작업과 연계되어 있었다. 1887년 2월에 본격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공식기구가 그의 집에서 구성되었다.54) 언더우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4월에 성경번역을 위하여 <한국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가 발족되었고, 이 위원회 안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55) 1900년에 신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다.56) 구약성경은 아직 번역 중에 있었고 앞으로 일년 뒤에 이 작업이 마쳐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이미 『창세기』, 『출애굽기』,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이사야서』는 번역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고 있었다.




2. 토착교회 설립

릴리아스 언더우드에 따르면,57) 그녀가 한국에 도착하던 때에(1888) 의료선교사업이 정부와 왕실의 높은 호감 속에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한해 뒤에 릴리아스의 남편이 될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선교사역은 고아원설립과 학교설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교회설립을 위하여 그는 이제까지 약 30명 정도 세례를 주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기회가 주어지면 종교서적을 팔고 복음을 전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선교사인 그의 신분이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선교사들과 한국 정부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게 되면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본국으로 귀환조치를 당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선교 상황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1894년 무렵의 평양에서는 박해가 여전하였고 선교사들이 이 도시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그의 활동 안에서도 종종 황망한 일을 겪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동기가 아니라 생계와 보수를 위하여 교인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좋은 보수를 바라며 선교사의 조수노릇을 하려고 신앙이 있는 척하는 경우나 혹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려고 지원하면서 많은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는 그를 곤혹 속으로 빠트렸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고 최소한 며칠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신앙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시험해 보고, 그리고 나서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도대체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지 여러 가지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선교에 대한 “대단한 책임감과 더불어 느껴지는 무지함, 무능력, 무경험의 자각” 속에 빠져 있었다.58) 그러면서 그는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네비우스(Nevius)의 저서를 꼼꼼하게 읽으며 그의 선교방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90년 봄에 언더우드 부부는 서울에 온 네비우스 부부를 방문하였다. 곧 이어서 네비우스와 내한 선교사들이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다. 네비우스는 자신의 선교방법을 제시하고 설명하였다. 내한 선교사들이 “오랫동안 기도하며 숙고한 끝에” 네비우스가 제시한 소위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였다.59) 이때 언더우드가 요약 정리한 네비우스 방법은 다음과 같다:60) 1) 모든 사람(토착인) 각자는 그리스도를 위한 교역자이며 자기의 생업을 가지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한다. 2) 토착인들이 교회를 돌볼 수 있고 운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교회조직을 만든다. 3) 자질이 훌륭한 토착인들을 뽑아 이웃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게 한다. 4) 토착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교회당을 짓게 한다. 교회당은 토속적인 건축술과 건축양식에 따라 지음으로써 토착교회의 모습을 띠게 해야 한다.

그 이후에 언더우드 부부는 최초의 토착교회인 소래교회(황해도 장연에 소재)를 자주 찾아갔다.61) 이미 그와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기 전에 토착인 교회지도자 서상륜(徐相崙)이 이 교회를 세웠고(1883),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도입한 내한 선교사들이 이제부터 이 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 선교사 매켄지가 소래마을로 들어와 이 ‘타자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위해’ 선교하는 동안에 소래교회는 토착교회로서 날로 발전하고 번창하였다.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62) 교인들 스스로가 가난한 중에도 힘껏 헌금하여 교회운영비를 -선교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지불하였다. 매켄지의 장례예배를 드린 1895년 여름에는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가득히 모였다. 그 이후에도 언더우드 부부는 자주 소래로 찾아가서, 남편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고 부인은 진료도 하고 여성교인들과 신앙에 관하여 얘기하고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1900년 추수감사절에 이 부부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 마당에 대형 천막을 쳤다. 이 당시에 이 교회의 교세는 세례교인 수만 250명 이상이었다. 또한 성경공부 교실이 확장되었고 주일예배 참석을 위해 멀리서 오는 교인들이 편히 쉴 곳도 마련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첫 번째 토착교회로 정착된 소래교회 교인들의 신앙형태는 엄격한 예배참석, 부지런하고 규칙적인 성경공부 그리고 실천적 신앙이었다. 가령 1899년 주변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왔을 때에 교인들이 주변의 여러 마을을 도와주었다. 또 인도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를 위해 교인들이 헌금하여 50원을 거두었다. 헌금할 수 없는 교인들 가운데는 유일한 장신구인 은반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첫 번째 토착교회가 발전을 거듭하자 선교사들은 다른 교회들도 소래교회를 본받아 따르게 하였다. 이 정책에 응답한 토착교인들은 평신도 가운데서 교역자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토착 지도자를 위하여 스스로 쌀과 논밭과 땔감을 지급하였다. 이 지도자는 선교사에 의해 발탁되는데, 선교사는 신앙에 열심이고 학식이 풍부한 지도자를 선발하여서 그로 하여금 예배를 인도하게 하고 교인들을 돌보며 선교부에 교회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 평신도 교역자들은 정기적으로 농한기에 모여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교회의 역사를 배우고, 교회의 조직을 배우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웠다.

1896년 8월에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Robert E. Speer)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부산, 제물포, 평양 그리고 서울을 두루 방문하면서 선교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았고 또 그리스도교 교인이 된 한국인들도 만나보았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한국 선교현장 답사에 관한 보고서 47쪽을 작성하였는데,63) 한국의 선교사들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도입하여서 그곳에 “토착교회”(The Native Church)가 정착되어 가는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는 이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지었다:64) “(선교현장에서) 우리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65)… 우리는 모세와 예언자에 관하여 선포하는 자들이며,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관하여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며, 이 교회는 결코 제도로서의 교회 곧 미국의 제도교회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란 어떤 이념이나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며 사랑의 법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를 뜻한다.” 이 말을 나름대로 풀이해보면, 선교는 미국 교회의 제도와 이념(신학)을 선교현장으로 가져가서 그대로 옮겨 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증언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새로운 토양(문화)에서 새로운 형체로 자라나는 토착교회를 뜻한다고 본다.




VI. 정리, 앞으로의 연구과제




이제까지 19세기 말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미국 북장로교회에 소속되어 일한 알렌, 게일, 그리고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한국의 일상생활문화(衣, 食, 住)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세 선교사들의 이해가 각자 조금씩 서로 달랐다. 그런데도 세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불편하고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생활문화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이 문화는 이들에게 대체로 투쟁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해마다 전국적으로 휩쓰는 무서운 전염병(특히 콜레라)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에 둘러싸인 선교사들은 죽음의 공포속에서 위생과 청결을 중요한 선교사역으로 보았다.

한국의 일상생활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인식과 태도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의식이 서양 중심적 문명관에 배여서 한국문화를 낯선 타자로 인식하며 불편하고 불결하여 비위생적인 생활문화를 업신여긴 점, 이들 대부분이 선교현장에서 미국의 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면서 현장의 주민들과 동떨어져 화려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본다. 더욱이 당시에 이들을 통해 뿌려진 서양문명이 싹트고 자라서 열매 맺힌 결과로 오늘날의 서구화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문명들 사이에 패권주의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견해를 수긍할 수 있었다. 선교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복음전파는 곧 서양문명의 확장이란 등식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선교사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면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이 적용될 수 없는 점도 많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선교사 매켄지가 소래마을에서 보여준 ‘타자를 위한 선교사역’이 그러하였다. 전염병(콜레라)과 목숨 걸고 싸운 선교사들의 자기희생적 자세가 선교지의 주민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진 사실은 선교사들이 가졌다는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내한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양극단의 엇갈린 평가를 모두 다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다. 종전처럼 선교사들의 사역을 무조건 좋게 보고 숭배하려는 태도도 버리고, 이와 반대로 최근 오리엔탈리즘의 논의에 따라 선교사들이 서양 제국주의 첨병이었다는 평가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선험적인 전제를 깔고서 ‘선교사들이 이렇게 하였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본다. 이 글을 통하여 파악되는 과제를 거론한다면, 우리는 선입견을 깔고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섣불리 결론짓는 성급함을 버리고 냉철한 눈으로 선교사들의 기록 문서를 꼼꼼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는 모든 선교사의 사역을 모두 하나로 엮고 몽땅 함께 묶어서 집단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 온 점이 흔하였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하여 파악된 점은, 선교사들 각자의 견해와 사역이 크거나 작게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낱낱의 선교사를 각각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 선교사가 한국의 일상생활문화에 관하여 물질문명의 차원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들은 한국의 ‘정신문화’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크게 인정하였다. 굳이 오리엔탈리즘의 용어인 ‘우리, 그들-타자’를 그대로 살려서 말하더라도, 선교사들은(특히 게일) ‘타자 속에서 숨쉬고 있는 정신문화’ 곧 ‘우리와 다르고 또 우리에게 없는 그들의 정신 문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서 예절문화, 높은 교육열 그리고 글 읽기를 즐기는 문화 등이다. 특별히 게일이 한국의 예절문화와 생활관습 속에서 성경시대의 문화를 찾아낸 점은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이러한 문화이해를 바탕으로 선교사들이 한글을 깊이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번역하였다고 본다. 이를 통하여 이들은 한국의 정신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이 아니라- ‘토착문화 속으로 복음이 성육신’(Inkulturation)되었다는 관점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파악해야 필요가 있다고 본다. 1890년 이래로 시행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한국에 토착교회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자랐는지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66) 이 연구를 위하여 반드시 찾아내어야 할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초창기 한국 개신(장로)교회의 토착교회 형성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한 권서(勸書 혹은 賣書)들과 조사들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밝혀내는 일이다.67) 이 점에서 이 글은 ‘미완(未完)의 반 쪽 논문’이다. 왜냐하면 토착교회 형성과정에 관하여 선교사들의 기록만 살펴보았고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토착인 지도자들(권서, 조사)의 목소리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1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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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wood, Lillias H.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신복룡/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서울: 집문당, 1999.Underwood, Horace G.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한영문법(韓英文法)』. Yokohama; Shanghai; Hongkong; Singapore,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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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논문 및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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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Mueller, K. s. v. “Inkulturation.” Lexikon Missionstheologischer Grundbegr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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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게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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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게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임스 스카스 게일(영어: James Scarth Gale, 한국 이름:奇一, 1863년 2월 19일~1937년 1월 31일)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신학박사 및 한국어 학자다.

생애[편집]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하여 1888년 토론토 대학교를 졸업 후, 토론토 대학교 YMCA의 지원으로 조선 선교사가 되었다. 이는 미국의 평신도 설교자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와 아서 태펀 피어선 박사의 주도 만들어진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이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에서 전도하며 대영 성서 공회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1890년 예수교 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8월 31일 선교 지원 중단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선교 단체를 옮겼다. 1892년 성서 번역에 참여, 마태복음서에베소서등 신약성서 중 일부를 번역했다. 1897년, 한국 최초의 <한영 사전>을 간행하였으며 <신·구약 성서>와 <천로 역정>을 한국어로 발간하였다. 한국인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원긍·유성준·김정식과 한국 교육 기관의 효시인 '교육 협회'를 창립하였다. 또 <춘향전> <구운몽> 등을 영역하여 한국의 언어·풍습 등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왕립 아시아 학회 한국부회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1928년 은퇴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이 아는 편이었던 게일은 《천로역정》의 한글 번역, 《구운몽》의 영문 번역을 하는 업적을 남겼지만, 조선의 전통 종교를 선교에 지장이 없도록 존중하기보다는, "조선의 정령들은 악한 것"이라는 말로 비하하는 등 상당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저서[편집]

  • <한양지>
  • <한국 결혼고>
  • <금강산지>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