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 - 나무위키
한국독립운동
최근 수정 시각: 2020-07-31 22:34:09
분류
한국의 독립운동
1. 개요2. 시대별 독립 운동
2.1. 경술국치 이전의 국권 수호 운동2.2. 1910년대2.3. 1920년대
2.3.1. 국외 무장 투쟁2.4. 1930년대 ~ 광복 직전3. 분야별 독립 운동
3.1. 무장 투쟁 운동
3.1.1. 의병 운동3.1.2. 독립군3.2. 애국 계몽 운동3.3. 경제적 구국 운동3.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3.4.1. 국문 연구 및 작품 활동3.4.2. 예술 활동3.4.3. 한국사 연구3.5. 사회 운동
3.5.1. 농민 운동3.5.2. 노동 운동3.5.3. 소년 및 여성 운동3.5.4. 학생 운동3.5.5. 형평 운동4. 각종 단체
4.1. 단체 목록
4.1.1. 무장 단체4.2. 언론사4.3. 교육 단체4.4. 숭모/연구단체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의 독립운동을 설명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의 자료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조선은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의 한국과 밀접한 열강 국가의 군대들은 조선을 밥 먹듯 드나들게 된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을 독점하게 되고, 급기야 1905년의 을사늑약 등을 거쳐 기어이 1910년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함으로써 한국,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열강들 대다수는 조선의 식민화는 물론 그 후의 악행들 역시도 눈감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시대적 상황은 이토록 암울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자유와 해방, 민족국가의 회복을 갈구하며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래의 내용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 쓴 이름 없는 민중들과 애국 선열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이 만든 각종 독립 단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 시대별 독립 운동[편집]
2.1. 경술국치 이전의 국권 수호 운동[편집]
일본이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여러 강대국들과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맺었고, 이에 일반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게 된다. 또한 신분제가 잔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민중 운동은 반외세적 성격 뿐만 아니라, 민권 신장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1880년대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나 조일통상장정등이 체결됨으로써, 외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내륙에 진출하여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국내의 상인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고, 각종 상회사나 단체를 설립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였다. 대표적으로 시전 상인들이 조직한 황국중앙총상회가 있었고, 세곡 운반을 일본인들이 독점하자 수도권의 경강 상인들은 증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방곡령 사건이 일어났는데, 방곡령이란 지방관들이 곡가 폭등이나 식량 부족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 지역의 곡물을 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조일통상장정에 따르면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선포하기 한 달 전에 일본에 통보하도록 되어있었고, 함경도와 황해도 등지의 지방관들은 이 절차를 지켜 방곡령을 실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방곡령을 철폐시키고 보상금까지 뜯어갔다.
이 시기 대표적인 반외세 운동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을 꼽을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원래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으로 인해 일어난 반봉건적인 성향이 강한[1] 봉기였으나,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분노한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면서 반외세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2].
1896년에는 독립협회가 창설되어 1898년 초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의 힘을 모아 러시아의 이권 요구[3]를 저지시키고, 민권 의식을 신장시켰으나, 대신 영국, 일본 등의 요구에는 수용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 후 강대국들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은 후 을사늑약(1905)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무관 민영환[4]은 항의의 뜻으로 자결하였다. 또한 장지연은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하여 황성신문에 실었다가 일제에 체포당하였다. 나철은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피습하였으나 치명상만 입히고 처단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한 더럼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 의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1908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실패에 따른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시행 이후 살아남은 단체는 해외로 이주, 이후 1945년 광복까지 국내 의병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5]
2.2. 1910년대[편집]
1910년대에는 일제의 무단 통치 때문에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 결사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성학교는 자립단을, 숭의여학교에서는 송죽회를 조직하였다.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서북 지방 일부에서 1915년까지 전개되다가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호남 지방에서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은 임병찬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의병 전쟁을 준비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대구에서는 박상진과 김좌진 등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친일 부호 처단, 일제의 조세 탈취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조직망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이후 간도로 넘어가 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법정사항일운동이 있었다.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3.1운동 5개월 전에 일어난 1910년대 종교계 최대 단일 항일 투쟁이자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서간도에서는 경학사와 부민단이 조직되었고 신민회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과 대한국민회 등이 조직되었고, 명동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이상설은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북간도 등지에서 조직된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를 이끌게 된다.
연해주에서는 이상설이 권업회와 성명회를 결성하였고, 일제의 간섭으로 이들 단체가 해체되자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919년에는 손병희가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상하이에선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한국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 통합운동이 일어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복벽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잔존한 마지막 시대가 1910년대이다.
비록 고종황제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순종황제도 단순 이왕(李王)으로 전락했지만, 국권이 피탈된 지 채 몇 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두 황제 역시 생존한 상태였으며, 아직 사회주의자나 계몽주의 계열로 돌아서지 않은 유자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제왕권, 혹은 입헌군주주의를 목표로 독립운동을 했으나 상기한 무장투쟁 계열 독립운동세력에 비해 그 한계점이 명확했고 또한 세력이 미비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가 대한제국 관료를 지낸 뒤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을 망명시켰고, 또한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의 대동단을 통해 고종황제의 5남 의친왕을 망명시키려 한 대동단 사건이 그나마 유명하다.[6] 아주 넓은 범주에서는 13도 창의군도 복벽주의 계열로 볼 여지가 있다.
상기한 대동단 사건 이후 그나마 식민지 내 여론에 의식해 구 황족에 대해서는 유화 정책을 펴던 일제가 이왕가에 대해서도 강경하고 삼엄한 감시, 관리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복벽주의 계열은 소멸하게 된다.[7]
2.3. 1920년대[편집]
192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이라면 사회주의가 한반도 전역에 급속하게 전파되어 독립운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확산으로 인해 독립 운동 노선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었다. 이때 각종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되어서 학생 운동과 농민 및 노동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사회 운동 부분 참조.
1920년대 초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과 이상재가 주도한 민립대학설립운동, 조만식 주도로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 등이 있다.
1926년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계열, 학생 단체들이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합세한 신간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9년에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다.
2.3.1. 국외 무장 투쟁[편집]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울림으로써 만주 무장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대규모 군대를 만주에 파병하였다. 이에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천주교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8] (청산리대첩, 1920).
청산리 대첩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간도참변).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밀산부로 이동하여 서일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러시아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에서 독립군 부대 간의 지휘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 참조.
이후 남은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統義府, 혹은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1922). 통의부는 서간도 최초의 통합 독립군 단체인 통군부를 확대하여 결성한 것으로 서간도 교육, 산업 및 지역 자치활동과 행정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다시 분열되어 의군부, 참의부(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등으로 조직이 나눠졌다. 이들은 미쓰야 협정(1925)으로 해체되었으나 이후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재편되었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으며, 북만주의 혁신 의회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이후 1930년대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주도한다.
1920년대에 활발한 무장투쟁을 한 단체로는 김원봉이 1919년 만주에서 조직한 의열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내의 경찰서나 관공서,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이후 조직적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2.4. 1930년대 ~ 광복 직전[편집]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국내의 사회 운동은 비합법적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주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 투쟁 또한 격화되었다.
일제는 이 시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민족 문화 보존의 중요성을 깨닫고 민족문화수호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어 학회가 1931년 창립되어 우리말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언론사들도 조선어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역사학자들 또한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 하였다. 또한 예술과 문학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자세한 건 아래의 민족 문화 수호 운동 부분 참조.
1931년에는 김구가 한인 애국단을 창설하였다. 이에 1932년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쇼와 덴노를 저격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사도 같은 해에 훙커우 공원 의거를 성공시켰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국민대표회의 이후 위축되었던 임시정부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국외에서는 무장투쟁 또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국외 무장투쟁은 주로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으로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양세봉은 이후 일제에 의해 매수된 중국인에 의해 순국한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하였다. 지청천과 한국독립군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1930년대 후반에는 간도 지역에서 조국 광복회가 중국의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고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중국 관내에서는 보다 복잡하게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5년 난징에서 김원봉이 좌익과 우익의 5개 단체를 연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김원봉의 독주로 조소앙과 지청천 등의 우익 인사들이 이탈하였다. 조소앙의 한국독립당[9]과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 후 김구가 1935년에 조직한 한국국민당과 연합하여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곧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게 된다. 임시정부는 1940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한편 김원봉은 다시 좌익 세력을 규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였고, 1938년 산하 군대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고,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호가장 전투에서 승리한다. 김원봉은 이때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잔여 세력은 김두봉의 주도 하에 1942년 화북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됨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의 건국 준비 활동도 활발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를 토대로 건국강령을 공표하였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익 독립운동가들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광복을 준비하였다.
3. 분야별 독립 운동[편집]
3.1. 무장 투쟁 운동[편집]
3.1.1. 의병 운동[편집]
의병 운동은 주로 구한말에 복벽파(왕정복고파)에 의해서 일어났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국외로 넘어가서 여러 갈래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구한말의 의병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호칭은 의병 활동이 일어난 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을미의병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결과인 단발령 시행 등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의병장은 주로 유생층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의 잔여 세력 또한 가담하였다. 고종황제는 의병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에 해산 권고 조칙을 내렸으며 의병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났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도 이 시기의 의병장이었다. 최익현 또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이 진압하러 오자 "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며 자진 체포당한 뒤 쓰시마 섬에서 순국하였다.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이때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의병활동에 참가하면서 의병 활동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이들은 연합 부대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후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호남 지역의 호남 의병을 비롯해 의병이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살아남은 단체는 해외로 이주하는 등, 국내에서 조직적인 의병 운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3.1.2. 독립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독립군(한국)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3.2. 애국 계몽 운동[편집]
애국 계몽 운동은 주로 국권 피탈 이전인 1900년대에 전개되었다. 관료와 지식인들 중심으로 점진적인 실력 향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추구하였으며, 여러 계몽 단체를 조직하고 언론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려 하였다.
러일전쟁 시기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가 있자, 이에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를 중심으로 하여 '직접 사업을 하자'라는 기치로 정부에서 특허를 받아서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립한다. 이에 일본 공사가 대한제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농광회사를 없애려고 하였다. 이후 1904년 전현직 정부관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10] 보안회 역시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이 만민공동회 해산 이후 대규모 집회는 금기시 되고 있었는데, 그 독립협회에 반대했던 정부관련 인사들이 대규모 반대투쟁을 전국적으로 진쟁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에서 뒤를 봐준 단체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후 일제는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면서, 철회조건으로 농광회사에 대한 정부의 허가 취소를 요구해서 농광회사는 해체된다. 보안회는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협동회로 이름이 바뀌고 활동이 줄어들게 된다.
1906년 조직된 대한 자강회는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후 고종 강제 퇴위에 대해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1907년 조직된 신민회는 공화정체의 근대 국가 수립과 무장 독립 투쟁을 추구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교육 분야에서는 각종 학교와 학회 등이 설립되었다.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서우 학회, 호남 학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남강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간도 지역에선 명동학교가 설립되었다. [11]
국문 연구 또한 활발하여 국문 연구소가 조직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해외의 흥망성쇠사를 다룬 책들이 간행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인해 애국심이 고취되고 근대적인 의식이 고양되었지만, 경제와 문화 분야에만 치우쳐서 의병 활동을 비판하기도 하는 한계를 보였다.
3.3. 경제적 구국 운동[편집]
경제적 구국 운동은 외국 상인들이 내지 무역을 시작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 거류지에서만 무역이 가능했던 외국 상인들과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챙기던 보부상 등의 국내 상인들은 외국인의 내지 무역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1883년에는 개항장 객주들의 주식회사 격인 대동상회와 장통상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전 상인들은 독립협회와 연계하여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하고, 보부상들은 황국협회를 조직[12]하며 이권 수호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갑오개혁부터는 정부에서도 열강들에 의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적 능력을 양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896년에는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13]이 설립되었으며, 1897년에는 한성은행(신한은행의 전신),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대한 제국기에는 조선 직조사 등 정부 주도의 상업회사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것을 막고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에 퍼져나갔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경제적 구국 운동은 이후 일제강점기로 넘어가서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3.4. 민족 문화 수호 운동[편집]
3.4.1. 국문 연구 및 작품 활동[편집]
국문 연구에 대한 중요성은 애국 계몽기부터 부각되어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계속 연구되었다. 1907년 지석영과 주시경 등에 의해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어 '국어 문법'을 저술하였다. 이후 1908년에는 국어학 연구소가 설립되어 국어의 발음과 맞춤법 등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에는 박은식과 최남선 등이 조선 광문회를 결성하여 우리나라의 고전들을 정리하고 간행하였다.
1921년에는 이윤재, 최현배 등이 국문 연구소를 계승하여 조선어 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잡지 <한글>을 간행하고 1926년에는 가갸날(한글날의 전신)을 제정하였다. 이후 1931년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어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하였고,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려고 시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해체시켰다.
작품 활동도 활발하였다. 1905년 발표된 신소설 혈의 누를 시작으로 1907년에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최남선[14]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등이 출판되었다. 이후 1910년대엔 이광수[15]가 근대소설의 시초인 무정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들어선 각종 동인지와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이 시기 김소월과 한용운 등이 식민지 현실을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후반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신경향파가 등장해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는 사회주의 문학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붓을 꺾거나 친일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윤동주나 이육사 등은 저항시를 발표하여 더욱 돋보인다.
3.4.2. 예술 활동[편집]
190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이후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유행하였다.
1920년대에는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 본격적인 극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30년대의 극예술 연구회로 전승되었다. 1926년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0년 조선 영화령을 공포하여 한국 영화계를 탄압하였다.
3.4.3. 한국사 연구[편집]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롯이 남을 수 없는 것인가. - 박은식, <한국 통사> 서문
일제는 식민 통지를 좀더 수월하게 하기 위해 1910년대부터 조선사 편수회와 청구 학회 등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 사학을 만들어서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식민 사관은 크게 타율성론, 당파성론, 정체성론의 3가지로 나뉜다. 자세한 것은 식민사관 문서 참조. 이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역사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연구할 때 이용한 관점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된다.
민족주의 사학은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 및 민족의 정신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 박은식과 신채호가 있으며, 조선학 연구를 주도한 안재홍과 정인보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였으며, 민족의 "혼"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독사신론> 등을 집필하였으며 화랑도에서 비롯한 낭가 사상을 중시하였다. 정인보는 민족의 "얼"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수행했으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회경제사학은 사회주의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아 세계사의 보편적인 문명 발전 법칙이 한국사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대표적 학자로 백남운이 있으며,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의 실증 사학을 기반으로 하여,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사료와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학자로 이병도, 손진태 등이 있다. 이들은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3.5. 사회 운동[편집]
3.5.1. 농민 운동[편집]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상황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이나 산미증식계획 등의 정책으로 인해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대다수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이 쌀을 자국으로 공출해가 조선인들의 쌀 소비가 오히려 감소하기도 하였다. 고율의 소작료와 지주들의 횡포 등으로 당시의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이것이 각종 소작 쟁의로 이어졌다.
또한 농민들은 각종 소작인 조합과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 등을 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었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되어 1927년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쟁의로 전라남도 무안(현재의 신안군)에서 일어난 암태도 소작 쟁의와 황해도 재령에서 일어난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 쟁의 등이 있다. 특히 1923년 일어난 암태도 소작 쟁의는 7할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1년 이상 투쟁을 계속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는 합법적 투쟁을 개량주의로 비판한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로 농민 운동 또한 혁명적 적색 조합을 중심으로 비합법 투쟁을 지속하였다.
3.5.2. 노동 운동[편집]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 또한 노동 운동을 촉발시켰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였으며, 임금 수준은 일본인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여기다 성차별까지 더해 남성 노동자들 평균 임금의 절반 수준밖에 받지 못하였다.
1920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노동 공제회가 창립된 이후 전국에서 각종 노동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22년에는 조선 노동 연맹회가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에서 갈라져 나온 조선 노동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운동으로는, 평양부-경성부의 인쇄 직공 파업, 목포부 제유공 파업, 영흥군 노동자 총파업,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있다. 특히 1929년 일어난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노동 투쟁으로,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이 파업에 참가하여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전국의 각계각층에서 구호 물자 등을 보내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지원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식민통치자들에게 노동운동의 힘을 재고하게 하였다.
3.5.3. 소년 및 여성 운동[편집]
1920년 전개된 각종 사회 운동 속에서 민권 의식이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그동안 천시받았던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어린이를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소년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에는 방정환의 주도 하에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어 어린이날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호주제가 법제화됨에 따라 여성들의 민권은 더욱 침해받았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대우도 매우 열악했다. 이에 대항하여 여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에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 여자 교육회, 1924년에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 여자 동우회 등이 결성되어 여성 인권에 대한 의식을 신장시켰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에 노력하였다.
3.5.4. 학생 운동[편집]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3.1운동,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다양한 항일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930년대에는 비밀결사의 형태로 운영해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다양한 학생운동 조직이 활동했다.
주로 경상북도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초창기에는 학생 자체의 권익이나 공익이 투쟁의 대상이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엘리트 양성기관화 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거의 사회주의 운동에 종속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강화로 사회주의가 위기를 맞으면서 다시 풀려나게 된다.[16]
1941년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학원 통제, 전시체제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지만 일제의 언론에 대한 재해석, 외국 신문, 외국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전이 예측되면서 일제가 실시하는 군사제도를 이용한 무장봉기 또는 자체적으로 부대를 조직해 무장봉기를 시도하거나, 독립할 조국의 지도를 위해 인재양성에 힘쓰기도 하였고, 지원병, 학병, 징병 반대운동을 벌이거나 국내에서 탈출해 국외의 독립군에 합류하려고도 했다.
3.5.5. 형평 운동[편집]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우리의 취지이다. - 조선 형평사 취지문 (1923)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한반도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수 천년을 이어온 신분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가 백정을 호적에 등록할 때 도한(屠漢)이라는 글씨를 추가하여 차별 정책을 유지함에 따라 백정의 자식들은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차별에 대항하여 백정들은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여 형평 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부라쿠민들이 신분 해방 운동으로 수평사를 조직하고 수평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형평 운동도 이에 자극을 받았다.
형평 운동은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언론과 사회주의 진영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철폐를 주장하였고, 교육을 위한 강습소 등도 운영하였다. 결국 1930년대 들어 관청에 기록되었던 백정 표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백정 자녀들의 학교 입학도 허용되었다.
이후 1930년대 일본제국 경찰이 형평 운동을 사회주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하자 급격히 퇴조하여 30년대 중반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4. 각종 단체[편집]
4.1. 단체 목록[편집]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 펼치기 · 접기 ]
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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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동맹
경성 콤그룹
고려공산당
국민부
권업회
근우회
대동청년단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대한인국민회
대한애국청년당
대한 자강회
대한통의부
독립의군부
독립협회
동우회(수양동우회 사건 참조)
만민 공동회
무우단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족혁명당
백의동맹
보광당
보안회
부민단
산악대
순국당
스탈린단
신간회
신민회
신한청년당
신화회(新和會)
안동 콤그룹
조국해방단
조선건국동맹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조선공산당(조공)
조선독립당
조선독립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민족청년회(족청)
조선민족해방협동당(협동당)
조선인민당(인민당)
조선인민위원회
조선혁명당
중광단
참의부
통의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한국국민당
한국 독립군
한국독립당(한독당)
헌정 연구회
혁신 의회
흑백당
흥사단
BKC단
4.1.1. 무장 단체[편집]
남만주 반일유격대
대조선국민군단
대한 광복회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단
대한통의부
반일 인민유격대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의열단
조국광복회
조선의용군
조선의용대
조선인민혁명군
조선 혁명군
참의부
한국 광복군
한국 독립군
한인 애국단
4.2. 언론사[편집]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동아일보
신한민보
제국신문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황성신문
해조신문
4.3. 교육 단체[편집]
대성학교
명동학교
배재학당
배화학당
서전서숙
숙명여학교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오산학교
원산학사
이화학당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4.4. 숭모/연구단체[편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유공자협회
광복회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의열단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
[1] 반외세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핵심은 아니었다[2] 반봉건적인 부분이 사라진 게 아니다!![3] 부산 절영도 조차, 한러은행 설치 등[4] 당시 세도가문이던 여흥 민씨 집안 인물이다.[5] 국내진공작전 등은 해외 의병으로 분류한다.[6] 1919년 11월 9~10일의 일. 기록에 따라 날짜, 체포된 위치(신의주역, 혹은 중국 안동역) 등이 조금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의친왕 문서 참조.[7] 이후, 구라파(유럽)으로 신혼여행길에 오르던 영친왕&이방자 내외가 중국 항에 기항했을 때 상해임정에서 황태자 부부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 발각으로 무위에 그친 바 있으나, 이 사건을 복벽주의로까지 확대해석하기는 어렵다. 2010년대 현재 존재하는 우리황실사랑회 등 복벽주의 단체 역시 이 당시 복벽주의 세력의 오롯한 후신이라 보기 어렵다.[8] 이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9] 만주에 존재하던 한국독립당과는 다른 조직이다.[10] 주요인물인 송수만은 무과출신에 보수파 중추원 의관, 심상진은 참정 심상훈의 인척, 원세성은 황국협회측 인사로 역시 중추원 의관, 회장 신기선은 원래 갑신정변 시기 대신으로 추대된 인물이지만 이후 온건개화파로 돌아서서 주요대신직을 거치는가 하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중추원 부의장으로 중추원의 파행을 고종에게 보고한 인물이기도 하다.[11] 이 중 서북학회, 오산학교, 대성학교는 신민회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12] 고종이 부려 먹기 위해 아래에 명하여 만든 단체이다[13] 현 한국은행의 전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과 다르다!! 이 조선은행은 운영 미숙으로 1901년 폐지되었다.[14] 기미독립선언서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훗날 변절하여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이 되었다.[15]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 중 하나이다.[16] 김희곤 외 4인, <경북독립운동사 5>,청솔,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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