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1

배춘희 할머니 빈소 애도 물결…`좋은 곳 보내달라` : 국제신문

배춘희 할머니 빈소 애도 물결…`좋은 곳 보내달라` : 국제신문


배춘희 할머니 빈소 애도 물결…'좋은 곳 보내달라'
분당차병원 영면기원 목탁소리, 각계 조문 발길 이어져
10일 발인·나눔의 집 노제…유골 합천 해인사에 안치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4-06-08 



8일 운명하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배 할머니를 위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피해 배춘희(91)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경기도 성남시 야탑동 분당차병원 장례시장 7호실에는 8일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는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하루종일 울려퍼졌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배 할머니의 영정 앞에는 생전에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 담긴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화보와 평소 할머니가 사용한 1천알 짜리 염주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생하게 '그 날'의 기억을 화폭에 옮겨놓은 배 할머니의 그림은 영정 속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의 모습과 대조를 이뤄 조문객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1930년대 뜻하지 않게 정신대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하게 된 배 할머니는 광복 후 1980년대가 돼서야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오랜 시간 홀로 살았다.

 1997년이 되어서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들어와 같은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게 됐다.

 박재홍 나눔의 집 과장은 "그나마 하나뿐인 오빠도 오래전 세상을 떠나 혈혈단신 혼자 남았던 것으로 안다"며 "유독 외로움이 많았던 할머니였다"고 기억했다. 그는 "최근 3∼4년 동안 매년 나눔의 집에 계시던 할머니들을 한분씩 떠나보냈다. 그러면서 당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되내이셨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배 할머니의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생전 불교에 귀의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다'는 배 할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다.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을 틈틈이 모아 3천만원이라는 큰돈을 김포시 중앙승가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을 정도로 '불심'이 남달랐던 그다.

 배 할머니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눔의 집 부원장 호련 스님은 "어제는 나보고 가지말라고 그렇게 붙잡으셨다. 평소 자는듯이 가고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뜻대로 되셨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와 13년을 함께 생활해온 이옥선(87)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빈소를 찾아 헌화와 분향을 한 뒤 두손 모아 영면을 기도했다 .

 이 할머니는 "좋은 곳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며 "조선 민요나 일본 엔카를 자주 부르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떠올렸다.

 나눔의 집 박 과장은 "할머니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대사관 직원을 나눔의 집에 있는 역사관에 데려가 사실을 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답답해했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추모가 이어졌다.

 김미희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김재남 정의당 국회의원, 조태용 외교부 1차관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기렸다.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도 방문할 예정이다.

 온라인에도 추모 물결이 계속됐다.

 한 네티즌(west*****)은 "이제 남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54분이 생존해 계십니다. 일본에 제대로 된 사죄도 못받으시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며 애통해했다.

 배 할머니의 발인은 10일 오전 7시 30분에 치러진다. 나눔의 집에서 노제를 한 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할 예정이다. 고인의 유골은 합천 해인사에 모셔진다. 디지털뉴스부


여야,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애도… 日에 사과ㆍ배상 촉구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여야,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애도… 日에 사과ㆍ배상 촉구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여야,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애도… 日에 사과ㆍ배상 촉구

임문식 기자 (usk@newscj.com)
승인 2014.06.08 20:57


▲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8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성남시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을 방문해 분향 하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여야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의 별세 소식에 명복을 빌며 한목소리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다.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며 “고령으로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후손으로서 멍에를 풀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무겁게 다가온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은 부끄러운 역사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며 “이제라도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통렬한 반성, 책임 있는 후속 조치로 평생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새정치민주연합 금대섭 대변인도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겪은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면서 “더 늦기 전에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정당한 배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당 김제남 원내대변인도 이날 현안논평에서 “일본 아베정부는 오히려 고노담화를 수정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끊임없이 내보이면서 문제 해결은커녕 역사 왜곡과 진실 회피에만 혈안이 돼있다”며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눈물과 상처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BTN불교TV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49재

BTN불교TV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49재
뉴스일자 : 2014-07-26



일본군 위안부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 피해할머니들이 미국을 방문하고 유엔 시민권리위원회가 일본정부의 공개사과와 배상 권고안을 낸 가운데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49재와 추모비 제막식이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봉행됐습니다. 독실한 불자였던 할머니는 중앙승가대학에 8000만원을 보시하는 등 큰 울림을 주고 가셨습니다. 남동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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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나눔의 집 법당에서 독경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독실한 불자였던 배춘희 할머니 49재와 추모비 제막식이 어제 봉행됐습니다.

박옥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저승에 가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갈 때 까지 행복한 생활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런 줄 알고, (저승에)가서 잘 그저 먼데로 먼데로 가서 편안하게 계시길 바랍니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살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성노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입대했습니다.

중국 만주에서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하다 광복 후 일본을 거쳐 1997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지난 6월 별세한 뒤 할머니의 이름으로 중앙승가대학에 교육불사 후원금 5000만원을 보시한 것이 알려지며 큰 울림을 줬습니다.

할머니는 생전 정부 지원금을 틈틈이 모아 지난 2012년에도 중앙승가대학에 장학금 3000만원을 희사했으며, 나눔의 집 법당 탱화 불사에도 800만원을 보탰습니다.

호련스님/ 나눔의 집 부원장
(이 땅에 남겨진 후손들은 일본의 공식 사죄를 끝까지 받아내어 고 배춘희 할머님과 먼저 가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님들의 원한을 풀어...)


생전 할머니의 별명은 ‘예술가’.

그림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노래와 장고에 능해 만능재주꾼으로 통했습니다.

못다 핀 할머니의 꿈이 서방세계에서라도 활짝 피길 기원합니다.

BTN뉴스 남동우입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여성신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여성신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김수희 / 여성신문 기자
승인 2014.06.08 11:59

위안부 피해 생존자 54명으로 줄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2007년 3월 7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751차 정기수요시위에 참석한 배춘희 할머니. ⓒ뉴시스·여성신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향년 91세로 8일 새벽 별세했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은 배 할머니가 8일 오전 5시쯤 노환으로 운명했다고 밝혔다. 배 할머니의 운명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54명으로 줄었다.

1923년 경북 성주 출신인 배 할머니는 19세였던 1942년 취업사기를 당해 중국 만주에서 4년간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살았다. 광복 후 일본에서 엔카 가수 생활을 한 할머니는 1980년대 초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으나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을 다 잃어버린 후로는 사람을 못 믿게 됐다고 한다. 1993년에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고, 1996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배 할머니는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장구,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나 만능 재주꾼으로 불렸다.


정의당 김제남 의원은 이날 논평을 내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김 의원은 “배춘희 할머니는 ‘예술가’라는 별명이 있으실 정도로 그림과 노래에 탁월하셔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고통과 한을 위로하고 그 실상을 알려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셨다”며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과 생전에 그 한을 풀어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너무나 크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어 “이제 쉰 네분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서 편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루빨리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피해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며 “지난 4월부터 한·일 당국 간 대화가 정례화되는 등 최소한의 해결 창구가 열린 상태니 만큼 양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10일 배춘희 할머니의 영결식이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노제와 함께 엄수됐다. 고인의 유해는 경남 합천 해인사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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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희 / 여성신문 기자 ksh@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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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불교포커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불교포커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스님 되는 게 꿈" 승가대에 장학금 지원도…10일 영결식

여수령 기자
승인 2014.06.09 11:24

▲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해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9월 배 할머니가 공익법인 아름다운동행에 중앙승가대 장학금을 전달하는 모습.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원장 원행스님)에서 생활해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91)가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춘희 할머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정신대에 자원, 1942년 중국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됐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마추어 가수 생활을 했다. 이후 1980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을 다 잃고 곤궁한 생활을 했으며, 1993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고 1996년부터 나눔의 집에 입소해 생활해왔다. 지난해 9월부터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투병 생활을 해 왔으며, 올 3월 초 감기로 자리에 누운 후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배 할머니는 지난 2012년 9월에는 생활안정지원금을 꼬박꼬박 모아 중앙승가대학교에 장학금 3천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당시 “내 꿈은 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못다 이룬 내 꿈을 대신해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지 않은 돈이지만 보태게 됐다”고 기부 동기를 밝혔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국내 49명, 해외 5명)으로 줄었다. 빈소는 성남시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10일 오전 나눔의집장(葬)으로 엄수된다. 유해는 해인총림 해인사에 안치될 예정이다.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

[현장] 일본군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 떠나보내던 날
서어리 기자(=광주) | 기사입력 2014.06.10. 19:57:50 최종수정 2016.05.12. 16:05:45


짙은 눈화장에 보랏빛 조끼 차림. 영정 사진 속 할머니의 모습은 화려했다. 부러 '수수한 차림'으로 꾸미지 않은, 즐겨 차려 입던 화려한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영정 속에서 그 고운 자태를 뽐내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앞마당에서는 지난 8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의 영결식이 열렸다. 영정 사진이 담긴 액자 앞으로 상이 차려졌다. 100세 상수(上壽) 맞이 잔칫상이었으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망백(望百)의 나이인 91세로 생을 마감했다.(관련 기사 :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생존자 54명")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8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영결식이 열렸다. ⓒ프레시안(서어리)

고된 삶이었다. 배 할머니는 열아홉 살이던 1942년, "돈을 벌게 해준다"던 말에 깜빡 속아 친구 '봉순이'와 함께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4년간 지옥 같은 성노예 생활에 시달렸다. 광복 뒤엔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본에서 엔카 가수로 전전하다 1980년대에야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 땅에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어렵사리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몽땅 잃어버렸다.

가진 것도 없고,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도 자식도 없는 혈혈단신의 몸, 할머니는 결국 겨우 용기를 내 1997년 이곳 '나눔의 집'에 들어왔다.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의지하고, 때론 싸우고 다시 정들고, 그러다 몇몇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렇게 남은 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배 할머니의 마지막 배웅을 해주는 것도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었다.

영정을 마주 보고 앉은 할머니들의 눈가가 붉었다. 배 할머니와 평소 투닥거리던 김군자 할머니가 "친구가 먼저 가니까 서운하다"며 "과거지사 다 잊고 극락왕생하라"고 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농담투로 "먼저 가서 좋은 자리 많이 잡아놓으라"는 말을 던졌다. 시종 흐느낌을 멈추지 않던 유희남 할머니는 "먼저 가고 나중에 가고 차이지만 한을 풀고 가지 못해 마음이 섭섭하다"면서 "갈 길 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가"라며 고인의 마지막 길에 축복을 빌었다.



▲배춘희 할머니 영정 사진을 만지며 흐느끼는 정복수 할머니. ⓒ프레시안(서어리)
나눔의 집 식구들은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할머니를 위해 영결식에서도 노래를 준비했다. 상주 역할을 맡은 나눔의 집 박재홍 과장이 본인 휴대전화에 저장된 할머니의 육성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위한 '소녀 아리랑'이라는 곡으로, 지난 1월 설 명절에 나눔의 집을 방문한 정홍원 총리 앞에서 할머니가 직접 부른 노래다.

노래 제목처럼, 할머니는 소녀 같았다. 아기자기한 장신구를 좋아하고 텔레비전에서 아기나 새끼 동물이 나오면 화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특히 고양이를 좋아해 주먹만 한 고양이 모양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니며 방문객들에게 "이 '네코짱(일본에서 고양이를 부르는 애칭. 편집자.)'이 막내딸"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영결식에 참석한 스님들은 '소녀 아리랑'이 끝나자, 이런 생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만년 소녀였던 배춘희 보살, 편히 오소서"라고 했다.



▲배춘희 할머니의 생전 모습. 왼쪽은 2010년 가을, 오른쪽은 2014년 설 무렵. ⓒ프레시안(최형락)


과거 상처로 마음의 빗장 걸어 잠근 할머니…한 못 풀어

이제 곧 배 할머니가 나눔의 집을 떠나야 할 시간. 17년 간 할머니가 살았던 나눔의 집 곳곳을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기 위해 박 과장이 영정 사진을 들었다.

박 과장 손에 들린 영정 사진이 마당을 지나 생활관 내 할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때 묻은 이불보 위에 놓인 영정 사진을 보고 조문객들이 통곡했다. 박 과장과 안신권 소장은 사진을 향해 재배를 올린 뒤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는 구석진 곳을 좋아했다. 거실에 마련된 자리도, 방 위치도 할머니의 자리는 늘 구석이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던 할머니에겐 늘 비밀이 많았다. 겉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얘기는 어두운 곳에 꽁꽁 숨겨뒀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 중 상당수가 과거에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적극 나서지만, 할머니는 아팠던 과거를 꺼내놓지 않았다. 살을 부대끼며 살다시피 하는 상근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종종 타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쓰린 것을 알기에, 나눔의 집 식구들은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배 할머니를 안쓰러워했다.



▲배춘희 할머니 방. 이날 상주 역할을 한 박재홍 과장(왼쪽)과 안신권 소장이 영정 사진을 향해 재배를 올리는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뭐든 감추고 속에 쌓아두는 할머니는 물건도 방에 쌓아두길 좋아했다. 내용물을 빼고 남은 빈 상자,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은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한 번 청소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관련 기사 : "빼앗긴 청춘"…명절도 눈물 쏟는 '아흔 소녀' 아리랑)

그러나 이날, 할머니의 방 안은 깨끗했다. 온 벽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올려졌던 잡동사니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별안간 '대청소'를 지시한 것.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생활을 돕는 한 직원은 "갑자기 왜냐고 물어도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아마도 임종 때가 된 걸 아신 것 같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올해 들어 임종을 예감한 듯 나눔의 집 식구들에게 미리 '이별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감기에 걸려 몸져누웠던 3월, 직원을 불러 "이것만은 꼭 말해야 할 것 같다. 이제 틀린 것 같다"며 "모두에게 신세 많이 졌다. 다른 할매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떠날지 모르니 30분 간격으로 들여봐 달라"고 했다.

늘 "잠든 것처럼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배 할머니는 지난 8일 새벽 5시경, 소원대로 잠을 자듯 숨을 거두었다. '위안부' 성노예 경험의 한을 풀지 못한 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조용히 저물었다.



▲배춘희 할머니에게

모든 절차가 끝나고, 운구차가 나눔의 집 마당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김군자 할머니는 차량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극락왕생하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바람처럼 배 할머니가 저 세상에선 극락왕생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이제 남은 생존자는 54명. 일본 정부는 이날도 여전히 지독하게 고요하다.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쓰던 화장 도구들. ⓒ프레시안(서어리)
▲배춘희 할머니가 나눔의 집 식구들과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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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7892?no=117892#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생존자 54명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생존자 54명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생존자 54명
등록 :2014-06-08 11:08

 
19살 때 중국 만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경기도 광주시 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은 배 할머니가 오전 5시께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운명했다고 밝혔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국내49명, 해외 5명)으로 줄었다. 나눔의 집에는 생존자 중 9명이 머물고 있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살 때 절친한 친구 봉순이네 놀러 갔다가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친구 봉순이와 함께 정신대에 자원했다가 멀고 먼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했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홀로 살며 엔카 아마추어 가수 생활을 했다.
1980년대 초 친척의 도움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을 다 잃고 나서 사람을 못 믿게 되었다.
1997년 5월 15일 같은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나눔의 집으로 들어와 지내왔다.
하지만 ‘성노예’의 아픈 상처와 사기 피해를 겪은 탓에 자신을 쉽게 드러내려고하지 않았다.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 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등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나눔의 집에 봉사활동을 온 외국어고교 학생들과 각국 언어로 대화하며 현지인 수준의 실력으로 어학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노래를 잘하고 장구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그림 실력도 뛰어나 만능 재주꾼으로 통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화보에 실린 ‘중국에서’, ‘고행생각’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배 할머니의 그림은 사실묘사에 뛰어났다고 나눔의 집 측은 설명했다.

이런 재주 덕에 배 할머니의 별명은 ‘예술가’였다. 나눔의 집에서 함께 할머니들이 미술 치료를 받을 때 뛰어난 그림 솜씨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위한 수요집회에 어김없이 참석했지만 3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해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해 9월부터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침상에서 누워 생활해왔다.
고인의 빈소는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10일 오전 나눔의 집 장(葬)으로 엄수된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하루속히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가 이뤄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평생의 한을 풀고 마음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연합뉴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1272.html#csidx11273d817eb0bcdac11b8d86295c71e 

[NocutView] 소녀 아리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 video daily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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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utView] 소녀 아리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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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아리랑'을 즐겨 부르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녀 같은 분이셨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가 향년 9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지난 8일 오전 5시쯤,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배춘희 할머니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의 사과는 끝내 받지 못한 채 말이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세 꽃 같은 나이에 친구의 말에 속아 일본군 정신대에 자원했다. 이후 중국 만주로 끌려가 끔찍한 위안소 생활을 겪었다.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주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일본행을 택했고 오랜 타향살이 끝에 지난 1997년 광주 '나눔의 집'을 통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군 위안부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나눔의 집 닉네임이 '예술가'다. 평소 '소녀아리랑'을 즐겨 부르고, 트로트도 좋아하시고 또 가수도 다 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는 아주 소녀같은 분이셨다"며 "어학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도 뛰어나서 나눔의 집에 외국인이 방문하면 능통하게 대화하셨다"고 생전 고인의 모습을 기억했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줄었다. 배 할머니의 영결식은 10일 오전 나눔의 집 장으로 거행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현장소식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 현장소식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별세


기자명 조정훈 기자
입력 2014.06.08 18:34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가 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1세.


▲ 고 배춘희 할머니.[사진제공-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고 배춘희 할머니는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42년 취업사기로 강제동원, 중국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생활을 강요받았다.

이후 1980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1996년부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해왔다. 고 배춘희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매년 참석해왔다.[??]
고 배춘희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공식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237명 중 54명으로 줄었다.

고인의 장례식장은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됐으며 오는 10일 발인, 나눔의 집에서 추모식을 연 뒤, 합천 해인사에 안치될 예정이다.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 신동아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 신동아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허문명의 SOUL] 15년 전부터 정대협 비판한 박유하 세종대 교수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0-06-13
  • ● 정대협 비판하다 ‘마녀사냥’ 당해…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 낙인
    ● 정대협 운동, ‘돈’ 아닌 ‘인맥 30년’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비난하고, 자신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대변해
    ● 할머니들, 정대협 비판한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 사죄보다 보상 원한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양심적 지식인과 연대 막아…위안부 운동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윤미향 사태’로 시끄럽습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전신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회계 처리 부정 의혹이기도 하지만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시민단체가 오히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왜곡해 왔다는 점일 겁니다. 그것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말이죠. 이번 일이 벌어지기 15년 전부터 정대협의 운동 방향에 문제를 제기해 온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할까요.

윤미향의 일탈과 ‘인맥 30년’

-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다 

“심경이 복잡하다. 연락이 많이 오는데 입장 표명을 자제해 왔다. 나까지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이 정치나 진영 싸움으로 흐르지 않고 진정 할머니들을 위한 쪽으로 결말이 나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나.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할머니들로부터 들은 말들과 다르지 않았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내가 만난 할머니들 중 나눔의 집과 정대협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할 때 그런 생각이 알려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나타낸 분들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교류한 배춘희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이용수 할머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끝내 혼자 가슴에 묻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분위기를 잘 알기에 나는 이용수 할머니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가늠이 된다. 그런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형태의 역공을 받고 계시다. 내부 고발을 한 나눔의 집 직원들의 신변까지 위태롭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보호하고 싶다. 어렵사리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이대로 묻혀버려서는 안 된다.” 



-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것은 ‘돈’보다 ‘인맥’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는데 무슨 뜻인가. 

“돈 문제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겠지만 정의연이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대의’에 주목했으면 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의’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정대협 운동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넓고 깊게 관여한 많은 사람이 있다. 나눔의 집 내부에서는 고발자가 나왔는데 정대협에서는 내부 고발이 없는 것을 넘어 정권까지 나서서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용수 할머니를 향해 서슴없이 비난 발언을 내뱉는 사람들은 그 인맥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인들일 것이다.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단지 윤미향 한 사람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 인맥 30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당사자’는 정대협 생각에 따르는 할머니들로 한정

그가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수천 명을 ‘동원’해 치러진 김복동 할머니의 거대한 장례식은 바로 그런 정황의 상징이었다. 고인은 정대협이 가장 가까이에서 보호한 분이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분이었다. 윤미향 전 대표는 김 할머니 장례를 위해 대대적인 시민위원회를 조직했고 기부금도 많이 모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조차 존재조차 모르는 할머니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대협이 대변한다고 말해왔던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정대협 생각에 따르는 이들로 한정됐다.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할머니들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걱정해 온 건 ‘수요집회’에 많은 청소년이 참여했는데 ‘정의연 사고방식’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였다.” 

- 정의연 사고방식이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혀 사죄를 안 했다는 식의 주장으로 증오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다. 사실 위안부 문제가 글로벌화한 것은 이른바 ‘양심적 일본인’들의 노력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안부 최고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를 비롯해 1980년대부터 유엔에서 인권운동을 한 일본인들이 있다. ‘성노예’라는 단어도 일본인 변호사가 1990년대 초부터 쓴 말이다. 정대협 창립 멤버인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1970년대 일본에서 나온 ‘종군위안부’라는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을 위한 운동이 정대협이 내건 ‘대의’라면 일본 정부를 설득하고 일본 내부에 더 많은 시민적 공감대를 만드는 일에도 매진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일관계가 갈수록 나빠진 게 정대협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사실과 관련한 내용을 조금씩 바꾸고 일본인들이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해온 정대협의 운동 방식이 한일관계 악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위안부 운동 방식 자체를 고민하고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30년 동안 우리 사회에 정착된 인식이 너무 깊고 공고해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기자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서 진한 피로감과 무력감이 스쳤습니다.

민족주의와 여성운동

박유하 세종대 교수(왼쪽)는 “위안부 운동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박유하 세종대 교수(왼쪽)는 “위안부 운동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그는 본래 일본 근대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와세다대)를 받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요. 

“유학 막바지였던 1990년대 초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 할머니 증언 집회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충격을 받아 할머니들의 증언집을 찾아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운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 형태로 진행되는 것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고, 반(反)페미니즘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주의와 여성운동이 합쳐지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내가 공부하던 시기 일본에서는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됐다. 일본의 일반 시민들도 공감하는 바가 컸다. 한일 간 화해의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귀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주축이 돼 1995년 일본 정부의 출자금과 일본 국민 모금을 바탕으로 만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기금’(이하 국민기금)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한계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와 국민의 노력을 인정해줄 만한 대목이 분명히 있었는데 정대협의 무조건적 반대로 어그러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이 너무 민족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반일 감정만 심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그러던 차에 2003년 김군자 할머니 등 나눔의 집의 몇 분이 위안부 문제에 한국 정부가 너무 무관심하다며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내용이 담긴 기사를 보게 됐다. 기사를 읽으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정말 한국 정부의 무관심 때문인가, 일본 내 양심 세력의 노력을 과연 할머니들은 알고 있는가, 정대협 같은 지원 단체의 운동 방식은 문제가 없는가’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단체 이름으로 통제

그는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대표적 페미니스트로 일찍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우에노 지즈코 교수가 마침 한국에 오는 길에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해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함께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박 교수의 뇌리에는 당시 방문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어떤 기억인가. 

“할머니들로부터 솔직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 죽고 난 다음에 보상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거였다. 나눔의 집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나와 살고 있던 분도 만났는데 ‘나눔의 집이 싫다’고 했다. 또 우에노 교수를 비롯해 많은 일본인이 나눔의 집 건립에 많은 기부금을 냈다는 것, 그곳에서 숙식하며 자원봉사하던 이들 대부분이 일본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 그리고 2년 뒤인 2005년 정대협 활동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첫 책 ‘화해를 위해서’를 펴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다. 또 정대협이 언론과 국민에게 내보내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는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국민기금’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부의 대응이 책에 강조돼 있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국민기금’의 긍정적 요소와 한계를 나 나름대로 조목조목 짚으려 했다. 알다시피 일본은 처음에는 군의 관여를 부정했지만 1993년 고노 관방장관, 이듬해 무라야마 총리가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그리고 구체적 실천을 위해 ‘국민기금’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당시 글에 ‘일본 지식인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앞장서 해왔고 국민기금 1대 이사장이 의회 의장, 2대 이사장이 무라야마 전 총리라는 점, 보상금을 전달할 때 총리의 편지를 첨부하기로 한 점’ 등을 들어 국민기금이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썼다. 물론 국회 동의 대신 국민기금이란 형태를 선택한 것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어떻든 ‘국민기금’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엄격한 자기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합쳐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국가 책임을 면하기 위한 꼼수’로만 간주하거나 기금의 존재 자체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 당시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 기금의 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돈을 받으려 한 할머니들 중 일부가 정대협으로부터 ‘화냥년’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묻힌 대표적인 사례다. 기금의 취지나 내용이 전혀 소개가 안 된 상태에서 정대협은 돈 받은 할머니들을 비난했다. 이들은 이후 우리 정부가 지급한 위로금 대상에서도 빠졌다. 나는 이런 과정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단체 이름으로 통제하고 정부로부터 보상받을 권리까지 빼앗은 월권적인 행위였다’고 책에 썼다.”

할머니들 권리 빼앗은 ‘국민기금’ 사태

실제로 2004년 여성학자 김정란 박사의 논문에는 “더러운 돈을 받으면 화냥년 된다”며 정대협 활동가가 돈을 받지 못하게 했다는 석복순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옵니다. 

“아무 거고 몇 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먹게 내버려두지,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정대협이)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 

- 윤미향 의원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나. 

“책 ‘화해를 위해서’를 내고 두 달 뒤 내가 주도해 만든 한일 지식인 모임 ‘한일, 연대 21’ 주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당시 정대협 사무국장이던 윤미향 씨를 초청해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견해차만 확인한 채 심포지엄이 끝났다. ‘국민기금’ 탄생의 중심 인물이던 일본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 와다 하루키 교수의 취지 설명이나 우에노 지즈코 교수의 평가는 완벽하게 무시됐다.” 

- ‘화해를 위해서’가 출간된 이듬해인 2006년 말, 일본에서 번역판이 발간되면서 당신에 대한 비판이 공개리에 나오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긍정적 서평들이 있었고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까지 선정됐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사가 주는 논단상도 받았다. 안도와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내가 일본 우익들의 사주를 받고 썼다는 둥, 전형적 우익 논리라는 둥 근거 없는 왜곡과 단정이 시작됐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많이 당혹스러웠다.” 

- 지금이야 정대협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 입장을 설명하는 글이 던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움츠러들기는커녕 본격적인 연구를 계속했다. 그 결과가 ‘제국의 위안부’ 아니었나. 

“국민기금이 2007년 해산되면서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어갔다. 특히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던 해인데 한일 양국 정부는 이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일본 매체에 칼럼을 싣고 ‘올해 일본이 가장 먼저 할 일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화’라고 했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급기야 2011년 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만들어졌다. 2012년 봄쯤으로 기억하는데 ‘일본이 시도한 사죄와 보상 움직임에 대해 청와대 인사가 피해자 지원 단체가 반대할 것이라며 일본안을 거부했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이대로 가면 위안부 문제 해결은 영원히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문제에만 집중한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2013년에 나온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다.”

일본 양심적 지식인들의 응원

그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긍정적 평가를 해준 서평이 많았다. 한일 양국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다. 일본에서 내 책을 높게 평가해 준 사람들은 우익들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 책임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해 온 지식인들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과분하리만큼 높은 평가를 해준 곳이 아사히신문이었고, 더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는 도쿄신문, 중도인 마이니치신문이 서평, 칼럼, 사설을 통해 긍정적 언급을 해줬다. ‘제국의 위안부’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을 때 반대 성명을 낸 분들이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전 관방장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전 총리,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이라는 것만 봐도 책의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다.” 

- 어떻든, 책 출판 이후 재판이 시작됐고 한국 사회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우선적으로 시도한 건 체험을 드러내 말하지 못한, 잊힌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거였다. 그런 할머니들 목소리만 진짜라고 말하려 한 게 아니라 당사자를 제쳐놓고 일이 진행되는 건 문제이며, 만약 당사자들 간에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고민해 보자, 오로지 그런 취지였다. 

그러면서 기존 연구 담론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려 했다. 전쟁 범죄로만 다뤄지던 것을 제국주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위안부는 식민 지배가 야기한 문제인데 일본은 그 부분을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다는 것, 이를 명확히 한 뒤 그것을 기반으로 한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또한 업자나 마을 사람, 혹은 부모 등 우리 안의 책임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가 그렇게 불편한 일을 시도한 건 정대협 운동을 방해하고 싶다거나 일본의 죄를 묻지 않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태를 명확히 알아야 일본의 책임을 정확하게 물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다시 직접 들어야겠다고 나선 것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 왜? 

“수요집회에서도 할머니들에게 다가가는 게 금지돼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언론인의 주선으로 할머니 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다시 한번 일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사죄와 보상이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분들은 일본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살아생전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나는 이런 목소리들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것에 또다시 심한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다 한 할머니와 인연을 맺게 됐다.”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2014년 6월 8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
부 피해자 고 배춘희 할머니의 노제가 6월 10일 오
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열렸다. [동아일보 원대연 기자]

2014년 6월 8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 부 피해자 고 배춘희 할머니의 노제가 6월 10일 오 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열렸다. [동아일보 원대연 기자]

- 배춘희 할머니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할머니들을 호텔에서 만난 후 ‘나눔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호텔에서 만난 분을 포함해 또 다른 몇 분과 점심 식사도 했다. 배 할머니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일본말이 유창했다.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내게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했다.” 

- 할머니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는 독실한 불자(佛者)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뭔가 좋은 일 하나 하지 않고 세상을 뜬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도 마음을 나눌 수가 없다고도 했다. 일본 총리가 TV에 나오면 다들 욕하는데 가만히 있는 자기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 일본이 좋으냐’고 몰아붙인다는 거였다. 이런 이야기가 그들 귀에 들어가면 ‘적은 100만, 나는 혼자가 된다’는 말도 했다. 나는 할머니와 진한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 고독과 두려움은 내가 한일관계 책을 낼 때마다 가졌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성금을 직원이 가져간다”

- 이후 계속 만났나. 

“자주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두 번째 만나러 갔을 때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후에는 사전에 할머니와 약속까지 했는데도 면회를 막았다. 나는 배 할머니를 통해 모든 할머니가 일본에 대해 원한과 분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나눔의 집에서의 만남이 무산된 후 노골적 경계를 당하면서 전화 통화가 소통의 중심이 됐다. 할머니는 ‘추운데 커튼도 안 달아준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성금을 직원이 가져간다’는 말도 했다. ‘따로 나가 살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다 병원에 입원한 걸 알고 문병을 갔는데 간호사가 어딘가와 통화하더니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나눔의 집에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곤 통화를 몇 번 더 했지만 할머니 몸이 쇠약해져 길게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 후 할머니가 작고했다는 걸 뉴스를 통해 들었다. 끝내 할머니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눈물이 쏟아졌다. 빈소에도 갔지만 나를 불편해하는 시선이 느껴져 영전에는 짧게 인사하고 복도에 오래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이번 사태가 터진 후 나눔의 집 직원들이 ‘후원금을 수십억 쌓아두고 있었으면서도 할머니들한테는 거의 쓰지 않았다’ ‘후원금으로 구입한 땅 일부를 소장 명의로 해놓았다’ 등의 의혹이 제기됐는데, 배 할머니 생각에 사무쳤고 이런 위선과 기만 위에서 우리 사회가 굴러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괴로웠다.” 

- 재판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을 고발한 건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었다.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열었고 할머니들의 영상 인터뷰를 공개했다. ‘일본에서 돈을 주려면 할머니들 손에 직접 쥐여주어야지, 왜 정대협을 끼느냐’ ‘법적 책임이고 뭐고 우리는 우선 보상부터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공개됐다. 이분들 모두가 세상에 자신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해 얼굴과 목소리는 변조했다. 

당시 심포지엄은 속내를 숨겨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보낸 거였다. 사비를 털어 치렀고 기대 이상으로 한일 양국 언론들이 크게 주목했다. 그리고 한 달 반 후 고발당했다. 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주일 만이기도 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낸 고소장에는 “박유하의 책과 활동을 이대로 놔두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책에 대해서도 무려 109곳이 문제가 된다며 출판 및 판매 금지와 할머니들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한 가처분이 신청됐다. 생애 처음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시작이었다.” 

박 교수는 2015년 11월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의 자발성을 언급했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유죄(벌금 1000만 원)를 선고했습니다. 재판은 현재 대법원에 3년째 계류하고 있습니다. 한편 판매 금지 부분에 대해서는 가처분 심의 법원으로부터 정대협을 비판한 내용 등을 일부 삭제하고 재출판하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라는 낙인

- 법정 싸움을 하면서 뭘 느꼈나. 

“학술 토론에 나올 내용이 법정에서 이야기되는 너무나도 소모적인 싸움에 허망함을 많이 느꼈다. 부분만 갖고 전체인 것처럼 호도하거나 일본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대목을 마치 내 주장처럼 몰아가거나 전체적 의미를 왜곡하는 주장에 넌덜머리가 났다. 

일부에서는 내 저작을 ‘학문의 자유’로 옹호하지만 난 그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 아무렇게나, 이상하게 썼어도 학문의 영역에서는 용서돼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발 물러서서 그 틀로 생각하더라도 가장 슬펐던 건, 학문의 자유를 가장 옹호해야 할 학자들이 할머니들을 앞장세워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내 책은 허위가 아니다. 내가 고발당한 건 책이나 심포지엄 때문만도 아니요, 할머니들과 가까워지는 것, 그에 따라 나눔의 집과 정대협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을 그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윤미향 사태가 터지면서 “처음부터 나에 대한 고발이 정말 나눔의 집 할머니들 뜻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의구심이 더 커졌다”고 했습니다. 

“정대협은 시민권력, 학계와 언론권력, 유엔과 세계여성 시민연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윤미향 씨 이전에 대표를 지낸 한 분은 유수한 학회의 회장을 지냈고, 유수 언론의 전 주필 사모님이고 서울대 교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오랜 세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끈끈한 유대 관계뿐 아니라 장관과 국회의원들을 배출한 인맥이 있다. 나아가 국민, 정부, 기업이 모아준 자금이 있고 재판을 도와줄 사람들까지 있다. 

고발을 당한 이후 나는 오로지 혼자 단체 사람들, 관계자들, 비판자들이 집단으로 내놓는 모든 공격 글을 분석하고 반론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 작업 이상으로 힘들었던 건 그 안에 담긴 왜곡과 적대, 조롱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자기들 생각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국민들을 향해 해온 말들의 수많은 모순을 그저 덮기 위해, 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를 사이비 학자, 매국노, 친일파로 몰아갔다. 

책에 분명히 일본 우파를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내 책이 위안부를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서술됐다면서 ‘악랄’ ‘잔인’ ‘이기적’ ‘악의적’ 이란 모진 단어들을 서슴지 않고 썼다. 이게 마녀사냥 아니면 뭔가. 더 슬픈 것은 지식인들조차 국민의 마녀사냥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 어떻게 버티고 있나. 

“다수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지지해 주고 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페이스북에서 새롭게 만난 옹호자들은 한국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 유일한 수확이라고 할까. 거듭 말하지만 한일관계가 나빠진 것이 정대협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편협함, 강경함으로 한일 상호 간 이해의 동력이 사라지고 정부가 운신할 폭은 좁아졌다. 뻔뻔한 일본, 사죄 않는 일본인들이란 이미지가 정착됐고, 양심적 일본인들과의 폭넓은 연대는 멀어졌다.”



신동아 2020년 7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윤미향·나눔의집, 위안부로 장사” 故 배춘희 할머니 폭로 책 출간 - munhwa.com

“윤미향·나눔의집, 위안부로 장사” 故 배춘희 할머니 폭로 책 출간 - munhwa.com



사회일반
[사회] 게재 일자 : 2020년 08월 25일(火)
“윤미향·나눔의집, 위안부로 장사” 故 배춘희 할머니 폭로 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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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얼굴 팔고 돈 받아서 집 짓고 땅 산 거 다 알아.”

2014년 6월 작고한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나눔의 집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의기억연대’의 전신 격 단체) 등 위안부 지원단체의 위선을 폭로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제국의 위안부’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013년 12월부터 2014년 5월까지 배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풀어내 28일 출간할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뿌리와이파리)를 통해서다.

19세 때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배 할머니는 나눔의 집 기부금 활용 방식과 정대협 대표를 지낸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윤미향, 그거는 얼마나 재미있어. 일본에서 팬들이 돈도 몇십억씩 해서 부쳐주지”라며 “나눔의 집은 나눔의 집대로 할매들 얼굴 팔아 집 짓고 땅 사고 돈 벌지”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할매들을 얍삽하게(만만하게) 보고 장사를 해 처먹는다”며 “위안부 핑계 대고 (운동을) 잡고 있다”고 한탄했다. 나눔의 집 직원들은 겨울에 커튼을 달아달라는 요구를 “할머니 돈으로 설치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조선일보

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조선일보

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뉴시스
입력 2020.08.28 11:41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논란의 야기했던 책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8일 신간을 내놓았다.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고(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 내용을 모은 책이다.

박 교수와 배 할머니와의 통화 날짜별로 정리됐다. 2013년 12월18일 오후 6시19분부터 2014년 5월16일 오전 9시43분까지 스무 차례의 통화를 엿볼 수 있다.

챕터별로 사진, 운명, 귀국, 침묵, 보상금, 아시아여성기금, 추위, 병, 호소, 눈치, 비밀, 불만, 유언, 일본인 친구, 나눔의 집, 남기고 싶은 말 등 그때 통화에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리됐다. 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내용도 담겼다.

"그니까 전부 그래가지고 옛날, 옛날에 집이 입장이 곤란해가지고 간다고 갔는 기(간 것이) 돈 때문… 위안부라 카는 건 뭐냐 카면(하면), 위, 안, 부, 카는(하는) 글자 고대로(그대로) 옛날에 일본 군인들 お世話する(이것저것 챙겨주는), 그 母親たちが(어머니들이), [불명] 일본군 전선에 갈 때 전부 お世話お世話、前掛け 입고 お世話하는(이것저것 챙기고 앞치마 입고 돌보는) 그런 사람들을 위안부라 캤거든(했거든)." -본문 중

배 할머니는 '위안부'에 대해 익히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인식했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에 관한, 나눔의집에 관한 부정적 내용도 등장한다.


저자는 "이 책이 그저 반대나 옹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운동과 정치의 틀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차분히 마주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그런 목소리들, 푸념과 탄식과 기억들이 많은 이들에게 우선은 있는 그대로 가닿기를 바란다. 청자들에게 온전히 닿아 청자가 아닌 발화자의 맥락에서 섬세하게 청취되고, 그녀들이 놓였던 동시대를 상상하기 위한 '또 하나의 목소리'로 읽힐 수 있기를. 그리고 옛날이 아니라 오늘, 당사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랐는지가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저자는 전날 페이스북에, 이 책을 통해 '돌봄과 지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위안부는 (그들이 말하는) 매춘부도 성노예도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책의 수익은 저나 출판사에는 가지 않는다.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책의 표지에는 새 두 마리가 모스 부호로 이뤄진 줄에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는 이 모스 부호가 '위안부 핑계대고 (운동을) 잡고 있는 기라'라는 배 할머니의 말씀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조선일보

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조선일보

윤미향 나눔의집, 위안부로 장사했다!! 배춘희 할머니 폭로 책 출간. 일본대사관 앞 수요

미전국 한인교회 4,454개...1년새 성장세 ‘주춤’ > 톡톡 뉴스 | 아멘넷

미전국 한인교회 4,454개...1년새 성장세 ‘주춤’ > 톡톡 뉴스 | 아멘넷:

미전국 한인교회 4,454개...1년새 성장세 ‘주춤’

2018-01-22   

미국과 캐나다 합하면 4,937개...전세계적으로는 6,147개

미주한인교회 절반이 CA · NY · NJ · TX에 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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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주별 교회 통계표 / 자료출처=www.koreanchurchyp.com <도표1>  ©크리스찬투데이  

 

미주 내에 한인교회가 4,454개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첫 발을 내딘 1903년 1월 13일로부터 정확히 115년이 된 2018년 1월 13일을 기준으로 집계된 수치이다. 4,454개 한인교회 수치는 1년 전인 2017년 1월(4421개)보다는 33개 늘어나 사실상 ‘주춤’한 성장세를 보였으나 10년 전인 2008년의 3,933개에 비해서는 521개가 늘어나 13%의 증가치를 보였다. 이로서 연방센서스국이 발표한 한인인구 143만8,915명을 미주한인교회 4,454개와 대비해 보면 한인 323명당 1개꼴로 교회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미주한인교회의 성장 주춤 추세는 미주내 한인인구가 2016년에 143만 8,915명, 2015년에 146만483명 그리고 2014년의 147만6,577명으로 3년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자료 출처= 연방 센서스국의 2016년 American Community Survey)

 

미주 내에서 한인교회가 가장 많은 곳은 캘리포니아로 1,375개이고 뉴욕(461개), 뉴저지(263개), 텍사스(236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4개주의 한인교회들을 합한 2,335개는 미주 내 전체 한인교회의 50%를 넘을 정도로 한인교회들은 이들 4개 주에 밀집되어 있었다. <도표1>

 

한편 지난 10년간 주별 교회현황을 살펴보면 서부에서는 캘리포니아(87), 텍사스(53), 워싱턴(39) 그리고 동부에서는 매릴랜드(27), 노스캘롤라이나(124), 뉴저지(35), 버지니아(32), 조지아(34) 등에서 교회가 늘어났다. 반면에 델라워어, 미주리, 일리노이스, 메인, 몬타나, 뉴잉글랜드, 로드아일랜드 주에서는 한인교회수가 감소했다. 

 

한편 미국(4,454)을 제외한 해외한인교회는 1,693개로 집계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해외한인교회들을 합하면 6,147개의 한인교회가 한국 아닌 곳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를 합한 북미주한인교회는 4,937개로 전세계 한인이민교회의 80%라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도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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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2018년 북미주 한인교회 성장도 / 자료출처=www.koreanchurchyp.com <도표2> ©크리스찬투데이 

 

이외에 한인교회가 많은 나라들은 483개의 캐나다, 231개의 일본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205), 독일(138), 영국(73), 브라질(60), 아르헨티나(53), 뉴질랜드(37) 멕시코(27), 프랑스(25) 순이었다. <도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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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한인교회 나라별 분포도 / 자료출처=www.koreanchurchyp.com <도표3> © 크리스찬투데이 

 

이번 통계는 본사가 발행하고 있는 <한인교회주소록(www.koreanchurchyp.com)>을 통해 집계되었다. 본사는 이 데이터를 기초로하여 책자 발행과 동시에 미주한인교회들의 주소가 찍힌 레이블을 판매하는 등 미주한인교계에 독보적인 서비스를 20년째 제공하고 있다. 미주는 물론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와 기독교 기관, 언론과 방송, 신학교, 수양관 등과 선교사들은 신규 등록과 변경 등을 주소록 홈페이지를 통해 언제든 무료로 요청할 수 있고, 누구든지 데이터를 찾아볼수 있다.

 

한편 <한인교회주소록> 2018판 책자는 3월에 배포될 예정이다. 

 

서인실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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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 vs ‘연류’

‘연루’ vs ‘연류’

한글 맞춤법 84편 (‘연루’ vs ‘연류’)

http://blog.daum.net/conreport
우리말 좋은말
연루vs연류
by 성실한 행복사냥이 2018. 5. 29.

---
한글 맞춤법 84편 ‘연루’ vs ‘연류’

요새는 기사의 본문을 쓰는 분과 제목을 쓰는 분이 다른가 봅니다.
前 금감원장 채용비리 확인, 주요 경영진 연류 정황... 00금융 “사실과
달라”
이 제목 아래 본문에는 ‘주요 경영진의 연루 정황도 드러났다.’라는 문
장이 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가진 것 없이 빈 손 하나만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분들이 제 주변에도 부지기수로 많은데, 권력을 업고 쉽게 취업문을 여
는 가진 분들의 행태에 분하기도 하고, ‘연류’와 ‘연루’로 독자에게 혼란
을 야기한 신문사에도 화가 났습니다.
어려운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할 바에야 쉬운 말로 고쳐서 쓰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써야 했을까 싶다가도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위안하며 마음의 평정을 위해 숨 한번 들이킵니다.
‘연루(連累/緣累)’는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사의 문맥상 맞는 표현은 ‘연루’라고 써야 하는데, ‘연류’라고 써버렸
습니다.
‘연류’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① 연류(涓流) : 작은 흐름
②연류(連類) : 하나의 무리를 이룬 동아리
이 두 가지 뜻풀이가 나옵니다.

두 가지 중 어떤 뜻도 문맥상 ‘적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연루’라는 표현이 일반 국민들이 잘 쓰지 않는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차라리 ‘연루 정황’을 ‘관련 정황’으로 고치면 어떨까요?
더 이해하기 쉽죠? 그럼 앞으로는 ‘연루’말고 ‘관련’으로 써보자고요.
연루 :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


---
연루시키다
Translation and Meaning of 연루시키다 in Almaany English-Korean Dictionary
enmesh
( 그물처럼 ) 잡다 , 연루시키다 , 말려들게 하다 , 끌어넣다
implicate
연관시키다 , 연루시키다 ( 범죄나 사건 등에 )
incriminate
고발하다 , 책임을 지우다 , 죄가 있다고 하다 ; ( 범죄 등에 ) 연루시키다
involve
포함하다 ; 뒤얽히게 하다 ; 종사시키다 , 열중시키다 ; 복잡하게 하다 ;

박유하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ppt

 


















"靑, 징용배상금 사후 보전 비공식 타진...日, 거절"

"靑, 징용배상금 사후 보전 비공식 타진...日, 거절"

"靑, 징용배상금 사후 보전 비공식 타진...日, 거절"
입력2020.10.31. 
김원배 기자
---
한국 정부가 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기업이 배상에 응하면 나중에 한국 정부가 전액 보전한다'는 방안을 비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타진했으나 일본 측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아사히신문이 오늘(31일) 보도했습니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청와대는 올해 들어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징용 문제 해결 방안을 검토했으며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향을 고려해 사후 보전 방안을 올해 초 타진했다고 한일 양국 정부 관계자가 설명했습니다.

이런 구상에 대해 일본 정부 측은 "기업의 지출이 보전되더라도 판결 이행은 달라지지 않으며 응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습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징용 판결과 관련해 재임 중 강경한 조치를 요구한 것에 대해 당시 관방장관이던 스가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관계를 중시해 온건한 대응을 원했다고 아사히신문에 설명했습니다.

일본 총리관저의 한 간부는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총리는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이니치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스가 총리는 문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전화 회담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참석을 권하자 징용 문제의 해결이 참석 조건이라는 생각을 전했다고 외교 소식통이 밝혔습니다.

2020 통일경제포럼

 

익산민주평통 통일시대 시민교실 운영계획

 익산민주평통 통일시대 시민교실 운영계획

목적: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익산시민 의식 고취

일시: 2020.10.23-11.20 (5주간 매주 금요일), 19:00-21:00

장소: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2층 세미나실

주최: 익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일정:


10/23 한반도 주변정세와 우리의 당면과제

      이종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10/30 코로나 이후 세계체제 및 정세 변화와 한반도 평화

      이재봉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11/06 남북한 인권문제와 인도주의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전 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장)


11/13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와 한미-북미-남북 관계 전망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11/20 북한정세 변화와 북핵문제 해결방안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 코로나 상황 변화에 따라 현장 참석 수강자 20-50명 제한하되, 국내외에 화상 (줌) 중계.


* 5강중 4회 이상 수강하면 원광대학교 총장 수료증 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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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오후 6:24]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금요일부터 익산 민주평통 통일시민교실이 시작됐습니다. 개성공단 아카데미에 이어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가 주관하는 통일강연 프로그램인데 코로나 거리두기가 완화됐으니 익산.전북지역 거주자들은 현장에도 많이 참석해주시겠어요? 마침 이번 금요일 저녁엔 "코로나 시대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 주제의 제 강연인데 민주평통에서 지난주 현장 참석인원이 넘 적다고 불만을 터뜨리기에... 30일 금요일 19시 원광대 숭산기념관 2층 세미나실입니다. 감사하며 재봉 드림.

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장정령 중국어] [오후 7:11] https://wku-ac-kr.zoom.us/j/4027601834

오늘 강의 만족도 설문조사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강희석] [오후 10:12] 역시 이재봉교수님 강의 최고 입니다.  통일에 여론조성이 가장 필요하겠네요..   감사합니다.

[최정의팔] [오후 10:21] 열정적인 강의를 듣고 감격했습니다.

[조강 김영애] [오후 10:30] 최고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기말끝난 중3교실에서 수업하기 | 전국역사교사모임

기말끝난 중3교실에서 수업하기 | 전국역사교사모임

기말끝난 중3교실에서 수업하기

자료를 요청하시는 쪽지가 많은 관계로
<함께 만들어가는 수업>에 올렸던 글을 이곳에 다시 올려요.
영상을 보내드리려니 시간이 너무 걸려서
한몫에 해결하려구요.

필요하신 분은 댓글로 메일 주소 달아 주세요~

드릴 수 있는 것은
-위안부 증언록 읽고 한줄 감상문쓰기 학습지 (개인용이 아니라 여러 학급에서 사용)
--평화박물관 김영환 샘이 주신 원폭관련 사진자료들
-일드 <맨발의 겐>중 히로시마 피폭 재연 장면
-원폭피해자 2세 김형률씨 관련 지식채널e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영상
-원폭 관련 글쓰기 학습지



^^
나름대로 일년 마무리를 잘해보려고 노력중입니다.

일단 두 개 주제로 수업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참고하시고 싶은 분은 쪽지 주시면 모든 자료 공유합니다~

1. 위안부 문제 (2차시분)
: 여름방학 전에 서명운동도 했고, 함께 증언록을 읽었습니다.
이미 문제의식은 공유가된 상태죠.

이번에는
- 책읽기 : <꽃할머니><지쿠호오 이야기>
- 영상보기 : 2년전에 정대협에서 제작한 <잊으면 안돼, 절대로 -그녀들의 이야기> 보기
- 활동하기 : 영상을 보고 떠오른 단어 하나 정해 그림문자로 꾸미기
(정의, 책임, 사죄, 보상, 인권, 평화... 등등)
A4 한장씩 주고 꾸미게 한 후 한 학급 것을 이어 붙여서
일종의 협동화를 만들 예정이에요.
- 방학 때 함께 수요시위 가기 : 하루를 정해 가고 싶은 사람만 같이 가려구요.
함께 만든 협동화를 들고요.


2. 원폭 문제(2차시분)
- 원자폭탄이 무엇인가 : 제조부터 투하까지 (세계사 동영상 이용)
- 그 결과는 무엇인가 : 일드 <맨발의 겐> 동영상 클립 보기
원폭 50주년기념 사진자료 보기 (피해자 사진 등)
지식채녈e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김형률> 보기
- 시게루의 자전거 보고 느낌 적기
- 글쓰기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 폭력을 끝내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이랑 현대사 하고 싶어요.
열심히 준비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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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록
윤진희
Reple at 2011-02-17 06:00

늦긴 했지만....지금도 자료 주시는 건가요?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dbdbgy@hanmail.net

이상섭
Reple at 2010-12-06 22:54

저도 좀. 늦게 죄송합니다. wasda@daum.net

배성호
Reple at 2010-12-06 17:15

저도 늦게 부탁드려 미안합니다! wise777@hanmail.net

김지현
Reple at 2010-12-06 12:37

넘 존경스러워요 ㅜㅜ 샘 저도 부탁드릴께요~ 너무 늦은건 아니죠?? dobbal@naver.com

윤은미
Reple at 2010-12-06 11:26

저도 이제서야 부탁드립니다.. ekfhd12@hanmail.net예요....

명성희
Reple at 2010-12-06 09:44

감사합니니다.. 저도 부탁드려요.너무 늦었네요.. ㅠㅠ jalovekt@hanmail.net

김선옥
Reple at 2010-12-04 11:13

마감합니다~ 헉헉. 이거 챙기는 일도 쉬운일은 아니네요. 늦게 받으신 분들은 죄송합니다~

홍세은
Reple at 2010-12-01 18:45

샘...저도 주세요
위안부, 원폭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 눈이 반짝 반짝 빛나더라구요 seeun21@hanmail.net
수요시위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 ^^

남선진
Reple at 2010-12-01 17:35

저도 부탁드릴게요~! njsj85@naver.com이에요~ 감사합니다!

유영주
Reple at 2010-12-01 12:31

저도 부탁드려요. dues83@hanmail.net

남기현
Reple at 2010-11-29 14:10

저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skarlgus99@naver.com

김보영
Reple at 2010-11-28 21:44

저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starqhdud@hanmail.net

임미순
Reple at 2010-11-28 20:46

저도 부탁드립니다. 좋은 자료 공유해주시니 고맙습니다. immisoon@korea.com입니다.

서윤희
Reple at 2010-11-28 20:23

저도 자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syhee1234@naver.com

김태정
Reple at 2010-11-26 13:44

자료가 받아지지 않아 다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tjung79@hanmail.net

최희원
Reple at 2010-11-26 12:44

저도 자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chw7515@hotmail.com

정경아
Reple at 2010-11-26 11:45

자료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jjka2001@hanmail.net

박미영
Reple at 2010-11-26 09:45

저도 자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miru05@hanmail.net

서진숙
Reple at 2010-11-25 13:52

너무 좋은 자료네요. 꼭 보내주셔요.부탁입니다
summerbi@hanmail.net

구자순
Reple at 2010-11-25 12:59

매번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kujas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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