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6

박광홍: 저는 제국시대 일본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 오마이뉴스

저는 제국시대 일본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 오마이뉴스
책동네
책이 나왔습니다 | 166화

저는 제국시대 일본 군인들을 만났습니다[책이 나왔습니다]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전쟁 아래 놓인 개인을 마주하다
22.08.02 
박광홍(marine7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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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송악산 해안의 해안특공진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자폭보트 신요를 제주도 해안에 배치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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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토박이인 나의 삶에서 바다는 떼려야 뗼 수 없는 존재다. 용암의 뒤틀림과 억겁의 파도가 빚어낸 현무암 바위 위에서 푸르게 빛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제주도 바다는 꿈 많은 소년의 희망과 고뇌를 묵묵히 품어줬다.

그 바닷가의 해안 절벽에 나 있는 이상한 구멍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서 다같이 바다로 소풍을 나갔던 어느 날,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구멍들이 '일본군의 인공동굴'이라고 알려주셨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 바다에 미국 함대가 나타나면 자폭공격을 벌이기 위해서 파 놓은 구멍이 저 동굴들이라는 설명이었다(관련 기사: '소년 자폭공격' 추진한 일본 군인의 기막힌 결말).

스스로의 생명마저 포기하고 적을 향해 돌진해 자폭한다니, 어린 나는 그저 아연실색했다. 피와 살로 뭉쳐진 육신을 무쇠와 화염 속에 내던지는 그 끔찍한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들이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그들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일본군의 자살특공대는, 나의 세계로부터 아득하게 괴리된 비현실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관련 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일본의 전쟁체험 세대, 고통을 껴안고 살다


그리고, 차차 성장하면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특공이, 그들의 전쟁이 지금 내가 딛고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직접 군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정신론은 여전히 이 세계의 이면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류탄을 들고서 '공산군'의 전차나 토치카에 돌격한 육탄용사들의 사례를 예찬하며 필승의 신념을 논하는 정신전력 교육을 접할 때면, 나는 어린시절 보았던 제주도 해안의 구멍들을 떠올리게 됐다.

정신주의로 점철된 정신전력 교육의 뼈대에 위화감을 느끼며, 무엇이 어떻게 얽히고 섥힌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다소 늦은 나이에, 그것도 군 생활 중 짬을 내서 일어 공부를 시작하려니 이래저래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어렵사리 일본행을 추진했지만, 직접 일본에 건너와보니 상황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암울했다.

전쟁체험 세대가 이미 초고령에 접어든 시점에서 살아 계신 분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나는 신원을 선뜻 믿을 수 없는 외국인 유학생, 그것도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유학생이었다. 인터뷰 기회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부고 소식이나 거절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면서 인터뷰 진행은 더욱 곤란하게 됐다.

그 난관 속에서, 나는 간신히 3명의 인터뷰 대상자 분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교과서의 메마른 활자 그리고 감정적인 반일이나 혐일이 판을 치는 현실을 넘어서, 그때의 역사를 살아냈던 분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되니 정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인터뷰이 중 한분인 히로토 아키라 씨와 함께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동원되었던 히로토 씨는 올해 6월 1일에 101번째 생일을 맞았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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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어린이가 천황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황도주의 국체론' 교육 아래서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과정,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강요하는 군대교육 아래서 군인으로 빚어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전쟁에 나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동요하고 방황하던 이야기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각 개인들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들을 옥죄던 '국민'의 올가미를 끝내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쟁 당시 이뤄진 사상 통제의 그림자가 패전 후의 삶에서도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끔찍한 전쟁에 동원된 그들에게, 국가는 그 어떤 책임있는 설명이나 사죄를 남기지 않았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아래서, 개인은 전쟁체험의 고통을 홀로 외롭게 껴안아야 했다.

폭력·부조리 속에서도 말살되지 않은 '인간'

이 인터뷰 조사를 통해, 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폭력적인 집합의식의 존재에 대해서 보다 더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폭력과 부조리 속에서도 끝내 말살되지 않은 인간의 감정선을 인터뷰 곳곳에서 확인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나는 지난해 <총력전 체제하 내셔널아이덴티티의 형성과 동요 -전 일본군인·군속의 구술사를 중심으로>(総力戦体制下の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形成と動揺 -元日本軍人・軍属のオーラル・ヒストリーを中心に)라는 제목의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았다.


▲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표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군인과 군속으로 동원된 일본인 전쟁체험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책으로 내게 되었다.
ⓒ 도서출판 오월의봄

논문을 쓰고 보니, 그 내용을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이뉴스에 관련 내용들을 [일본史람]이라는 시리즈로 조금씩 연재하며 일본어 논문을 한국어로 재구성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출판의 기회가 찾아왔다. 참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은 <오마이뉴스>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며, 원고를 다듬고 또 다듬으며 숨가쁘게 달려온 끝에 드디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책의 출간 소식을 마주하고서 지난 일본 유학 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부디 많은 분들과 이 깨달음을 나눠보고 싶다.

[관련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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