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7

한 '진보적'인 유대인이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전쟁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한 '진보적'인 유대인이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전쟁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한 '진보적'인 유대인이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전쟁

혁명읽는사람
2024/03/05
일란 벤자민이라는 '진보적인 유대인'이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전쟁에 관한 글이다. 비숑님의 네이버 블로그에 번역글이 올라와 있어 번역은 비숑님의 것을 참고하였다. 이 사건을 홀로코스트의 연장으로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공유한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두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무언가 깨졌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야만적인 대량 학살과 토막살인 등 전 세계적 규모뿐만 아니라. 하지만 제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 불과 1년 전, 월스트리트 저널의 탐사 저널리스트였던 제 사촌 형 다니엘 펄이 파키스탄에서 취재 중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에게 납치되어 참수당했습니다. ... 대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에는 "우리 아버지는 유대인입니다.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저는 유대인입니다." 처음에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어떻게 내 사촌이 이런 국제적인 악몽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누구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을까요? 이 경우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요?"

 디아스포라의 연장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몇몇 연구서에서는 현재의 이스라엘을 이루는 주민들은 실제 독일의 유럽지배로 인해 희생된 유대인 공동체와는 관련없는, 동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다고 지적한다. 홍미정은 이를 "그 유대인이 아니야!"라는 말로 이를 정리하였는데(홍미정, <울지마 팔레스타인>을 참고하라) 정작 본인들은 '망각'을 전제로 연속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에르네스트 르낭이었던가,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억하기보다 무엇을 '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이가. 민족형성의 보편적 원리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18살에 이스라엘로 이민을 와서 이스라엘 방위군에 입대했을 때도 저는 여전히 이상에 이끌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이웃과 더 많은 친선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자지구 국경에 위치한 전투 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하마스에 5년간 억류되어 있던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릿이 1,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포로와 맞교환되면서 석방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1,000명당 1명.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저의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때 이스라엘이 모든 군인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깨달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 사람의 '망상'과도 같은 이상주의의 본질이 폭로된다. 앞서 망각을 통해서 민족관념의 형성이 가능했다면, 여기서는 "어째서 팔레스타인 사람 1,000명이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억류되어 있어야 했는가"에 대한 '망각'을 전제로 '평화주의'라는 이상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점이 폭로된다. 다시 말해서 '진보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이스라엘인이란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지배 혹은 탄압이 망각된 상태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글 전체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 어떠한 '구조적'인 분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무지 혹은 망각은 "이스라엘이 모든 군인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깨달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주의로 이어진다. 국가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부재한데 어떻게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칭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사실 한국의 진보진영에 속한 많은 이들도 국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국가의 행위에 대한 비판적 회고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국이 시민권조차 없고 국가조차 형성하지 못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적 존재인 팔레스타인인들을 구금하고 억압하였다는 인식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테러리즘이 왜 발생하는지, 그 원인에 대한 이해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의 해소로서의 평화의 정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처음에는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들은 팔레스타인인이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유대인의 역사와 이를 증명하는 고고학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줄게요." "아, 그들은 우리가 백인 식민지 개척자라고 생각하죠. 미즈라히, 세파르디, 에티오피아 등 유색인종 유대인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줄게요." "아, 무슬림 국가는 50개이고 유대인 국가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이해하겠지." 하지만 제 친구들은 오해를 바로잡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교육의 문제, 잘못된 정보의 문제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의 존엄성과 권리는 '선험적'으로 가정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고 테러를 저지르는 이들만 없다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본인들이 '원주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건설의 정당성은 무조건적으로 상정되어 있다. 건국과정에서 있었던 대량학살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비극사>, 유강은 역, 열린책들, 2017를 참고하라) 역사를 볼 필요도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을 빼앗기는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사람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가령 아래와 같은 인용문을 보자.

"이런 사건들이 제 이상을 흔들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두 국가 해법을 끊임없이 주장했었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해 이스라엘 친구들과 격렬하게 싸웠죠. ... 저는 정착촌이 불법이고 가자지구가 인도주의적 위기에 있으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독재자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제가 충분히 관심을 갖고, 팔레스타인 사망자를 애도하고, 무엇보다도 뉘앙스를 중시한다면 우리의 이웃과 그 동맹국들도 우리에게 같은 예의를 갖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착촌의 건설로 생활세계가 파괴되고 생활영역이 줄어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가 '진보적인 유대인'으로서 활동한 이유는 타인의 인정, 이해를 바랐기 때문이지, 진정으로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두 국가 해법이 주장되고, 정착촌이 불법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가? 두 정책 간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글을 보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만약 있었다면 유대인이 원주민이고 고고학적인 증거가 어떻고 식의 논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생활세계가 계속해서 파괴되어 왔던 '식민주의'의 연장이라는 맥락을 고려한다면 "유색인종 유대인"의 존재를 알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건지 알기 어렵다. 백인종에 의한 '식민주의'만이 문제인가? 유색인종에 의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 유색인종이 하면 식민주의가 아니고 해방운동인가? 이러한 인식은 종국에 이르러 "유대인 국가는 하나뿐"이기에 넘겨줄 수 없는 내셔널리즘적 욕망에 대한 강한 지지로 이어진다. 이 비틀린 인정욕구가 국가주의의 근간이 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제 사촌을 살해하고 2차 인티파다 기간 동안 매일 버스에서 민간인이 폭파되었지만 저는 허무주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서 저는 불안한 추세를 발견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왜 사회 정의에 앞장서는 제 친구들은 이스라엘을 그토록 불균형적으로 싫어할까요? 왜 교차성이 유대인을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요? 인권을 옹호한다는 좌파가 왜 어린이를 살해하는 하마스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걸까요?"

 이 사람에게는 '고립된' 유대인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연장에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탄압 및 그에 대한 동조가 인식되고 있다. 아래의 표에서 보여지는 압도적인 피해의 차이가 이 사람에게는 어떻게 인식될까?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규군과 조잡한 수제 폭탄에 기초한 테러 조직 간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앞서 지적했던 생활세계의 파괴와 그에 대한 팔레스타인 인민의 보편적인 분노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이정도의 장기간의 저항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310252128001#c2b
"제가 얼마나 틀렸는지요. 지난 주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 대한 가장 잔인한 공격으로 1,300명이 넘는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동안 저는 팔레스타인과 그 동맹국들의 진면목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그들은 축하합니다. 그들은 비웃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조롱합니다. 그들은 하마스에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악을 포용합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전략가 보프르는 전략에 대해 "전략이란 두 개의 상반된 의지가 힘을 사용하여 분쟁을 해소하고자 하는 변증법적인 술(術)"이라 규정한 적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충돌하여 형성된 분쟁상태를 폭력을 사용하여 해소하고자 할 때는 한쪽의 의지의 일방적인 관철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굳이 '변증법적 술'이라 표현한 것은 대립하는 두 의지 간의 '종합'을 통한 해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통해 전략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지', '목적' 등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은 항상적이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전략적 목적의 달성에 실패하여 자신의 의지의 관철조차도 어렵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 지점에서 명백하게 전략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디아스포라'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해외거주 팔레스타인까지 포함한 1,300만 명의 한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물론 70여년의 세월동안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를 늘려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강대국인 미국 등의 서방세계의 지원까지 받아 국가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왔으니 성공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이 사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우리의 이 '진보적인' 유대인 양반이 울분을 토하며 말하듯이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립화는 종국적으로 그 국가적 토대를 취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분명 이스라엘 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이 '진보적인' 유대인의 정신세계를 확실하게 포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전쟁의 정당성이 내부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얻어지는지는 이 '진보적인' 유대인의 사례를 보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 진보적인 유대인이 자신의 주변인들을 적으로 돌리고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고립화를 자처하는 지점에서 실패가 도드라져 보인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내게는 이 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가 명백해 보인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자폐적인 세계관은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유대인들이 다 죽어야만 이 문제가 해결될거라고 생각하는거냐고 화를 내던 이스라엘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그는 너희는 모두 나치라고 소리질렀는데 나치즘이 유대인에게 한 가장 끔찍한 폭력행위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자신을 비판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든 게 아닐까 한다. 자기 동포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한 민족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 눈을 멀게 함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된 것만큼 지독한 저주도 없으리라. 이런 세상에서 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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