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宇衍
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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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사도광산 추도식이 열렸다. 한국과 일본은 행사 준비 단계에서 큰 이견을 보였고, 결국 한국은 불참하고 25일에 별도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를 두고 국내 거의 모든 언론에서 사도광산 추도식이 “반쪽 추도식”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이 표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사도광산의 역사는 400년에 가깝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전시노동자로 일한 것은 만 6년이다. 조선인의 역할이 그 정도인데, 행사의 “반쪽”을 차지하는 것이 온당한가?
추도식 준비에 있어서 한국이 일본과 가장 크게 충돌한 것은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하는 이쿠이나 아키코(生稲晃子) 외무성 정무관의 인사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11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이쿠이나의 인사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빛나는 (세계유산 등재: 필자) 성과는 위험이 수반된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에 종사한 광산 노동자들을 비롯한 선인들의 헌신의 산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광산 노동자 중에는 1940년대 우리나라가 전쟁 중에 노동자에 관한 정책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온 많은 분이 포함돼 있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회 상황 하에서라고 해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갱내의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곤란한 노동에 종사했다”
“종전(終戰)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감스럽지만, 이 땅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금이야말로 선인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잘 생각하고 이를 미래에 계승해 간다는 맹세를 새롭게 해야 한다”
“앞 세대의 노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돌아가신 모든 분들께 다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일본 측 입장에서는 조선인 전시노동자 등 광산노동자에 대한 ‘감사’와 그중 희생자에 대한 ‘추도’가 짧은 인사말 속에 무난가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사과였고, 여기에는 조선인 전시이동을 “강제동원”으로, 그 노동을 “강제노동”으로 파악하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 1939년 9월부터 72만 여명의 전시노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같은 시기에 168만 여명의 조선인이 전쟁과 무관하게 그저 단기 돈벌이 노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 72만의 전시노동자 중에서도 50만 여명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본의 전시노동자 동원에 응했다.
- 전시노동자들은 응분의 임금을 받았고, 일본인과의 차별은 기본적으로 없었으며 계약의 범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했다.
- 1939-1945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단기이민이 폭발한 시기였고, 그 주인공들은 단기 돈벌이 이민노동자들이었다.
내년 이후에도 사도광산 추도식이 개최될 것이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한일은 추도식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하게 갈등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일본이 아시오동광(足尾銅鑛)과 구로베(黑部)댐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있다. 전시노동자에 대한 반일종족의 노예사관이 극복되지 못하는 한, 군함도와 사도광산에서 연출된 역사 난동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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