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박유하 - 바다의 마음 닮고 싶어 :: 문화일보 munhwa.com

바다의 마음 닮고 싶어 :: 문화일보 munhwa.com


오피니언살며 생각하며

바다의 마음 닮고 싶어

입력 2024-11-08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삶에서 사랑과 사람 필수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 필요
한달살이로 바닷가 선택한 건

관용의 바다를 닮고 싶기 때문
자연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최고 덕목은 폭력 지양하는 것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풍경도 보여주지만, 그보다는 더 붉고 찬란해서 절로 가슴 뛰는 아침의 태양도 보여준다. 새로움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하는 미래형 단어를 떠올리게도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태양이 그 태양’임을 알면서도 처음 보는 태양인 듯 마주하며 다시 찾아올 내일을 기대하곤 한다. 바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생을 이어갈 수 있는 크고 깊은 심호흡을 허용한다. 그러니 ‘신화처럼 숨을 쉬는’ 바다의 ‘예쁜 고래 한 마리’의 도약에 대적할, 절망은 사실 없어야 맞다.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배다른 여동생을 따뜻하게 품어내는 자매들의 감성이 바로 그런 ‘내일’의 바다가 키워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완만한 언덕 벚꽃길을 자전거로 내려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내가 본 영화 속 벚꽃 풍경 중 최고인 이유도, 삶 자체에 대한 무한 긍정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한다.

최근에 예정에 없던 한달살이를 시작하게 됐을 때, 망설임 없이 동해안의 작은 도시를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보다 앞서 몇 달을 보냈던 일본에서 바닷가 소도시 가마쿠라(鎌倉)에 살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이번엔 우연이 아닌 자발적 선택.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바닷가를 선택한 건 관용과 긍정이라는 바다의 마음을 닮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동했을 때 지체없이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퇴직한 이후 시간을 들여 책을 비롯한 짐들(수십 년 이고 지고 다녔던 물건들)을 대폭 줄인 덕분이었다. 내게 지금은 에드워드 사이드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말을 빌리자면 ‘late style(만년의 양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지난 2년은 내일에 대한 꿈을 아주 버리지는 않아도, 언제 죽어도 상관없도록 그동안의 삶을 정리해 온 시간이기도 했다.

홀가분해진 삶은 수십 년의 기억을 오히려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것은 함께했던 물건과 사람과 시간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순간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일 수 있던 시간들. 누구에게나 허락되었으나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식했기에 소중했던. 그 때문에 허투루 할 수 없었던. 그건 가마쿠라 바다의 핑크빛 조개 귀고리를 가까운 여성들에게 선물할 때의 마음이기도 했다. 부드럽고 투명해서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한, 그러나 떨어지는 벚꽃을 닮아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았던.




이 집이라는 공간과 그 안을 채우는 물건들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편리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 주지만, 집착하는 순간 부자유와 구속의 동의어가 된다. 삶에서 사랑과 사람이 필수이지만, 홀가분한 혼자만의 시간이 때로는 필요한 이유이기도.

그런 시간 속에서, 인생이란 과함과 부족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하곤 했다. 조급해서, 혹은 망설이다 잃은 것들, 반대로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명료하게 보일 때, 나이 먹는 건 축복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썰물 뒤 검게 빛나던 백(흑?)사장이 아름다웠던 가마쿠라만큼이나 동해안은 태양 아래 눈부신 흰 모래가 아름답다. 검은 모래도 흰 모래도 당연한 듯 품는 바다와 달리 인간은 좁은 육지 위에서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물리적 경계와 심리적 경계를 만들고 반목하곤 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경계의 전부였던 토지에 인위적으로 경계(境界)를 만들어 경계(警戒)심을 유발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을 차별하고 박해하고 때로 살해해 왔던 게 인간의 역사이기도 했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그 안에 있는 인간과 동식물의 관리에 각각의 지배자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변방에 있던 이들은 중심이 된 지역에 있는 이들이 정해주는 대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진 후엔 ‘땅따먹기’라는 제국놀음에 너도나도 동참했던 게 근대국가였다. 제국이란 타자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법’을 시행하려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 어리석음과 폐해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같은 방식을 모방하곤 한다. 그래서 개인은 강자를, 국가는 부국강병을 다시 지향한다. 강자가 되기 위해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시간도 기꺼이 희생한다. 경계가 없는 바다에조차 경계를 만드는 건 그런 강자의 마음이다. 그렇게 국가와 정치가 만든 물리적·심리적 경계를, 예술과 종교는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넘어서라고 알려주었지만, 종교는 물론 예술도 문화도 학문조차도 중요할 때 정치를 넘어선 적이 없다.

사면은 아니어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으니 우리도 일본처럼 바다의 날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싶다. 일본처럼 ‘바다가 베풀어 주는 것에 감사하고 해양국가 일본의 번영을 바라’는 대신, ‘바다를 기억하고 바다의 마음을 닮기 위한’ 날로 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남북과 한·일,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만들기를 제국과 내전을 겪어 온 우리의 의무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최고의 덕목은 폭력을 지양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키우는 역할일 터이니.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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