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욱
a day ago ·
12.3 내란 쿠데타 특별기고를 한겨레신문에 실었습니다.
*
지난 12월 3일의 비상계엄 상황을 ‘소동’, ‘소극(笑劇)’, ‘해프닝’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일 뿐 아니라, 그것의 엄중한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가 이번에 ‘저력’과 ‘회복력’을 보여줬다거나, 이제는 군이 헌법에 충성하는 ‘시민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등의 평가는 성급하며 과도하게 낙관적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벼랑 끝에 내몰려 있음을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어리석고 난폭한 대통령 한 명이 홧김에 어설픈 계엄 선포를 했다가 정당, 언론, 시민사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저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집권세력은 오래전부터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으나, 군 지휘체계의 여러 지점에서 비동의, 항명, 불이행, 혼란, 우연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생긴 작은 기회공간 안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라는 헌법적 명분이 가까스로 성립된 것이다.
12․3 쿠데타는 1987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공고화’ 사례로 꼽혔던 한국이 민주화 37년 만에 공고화 이전 단계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고화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한 나라들이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할 위험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심각한 실질적 시도의 존재 여부다. 12월 3일에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12․3 비상계엄은 ‘실패한 쿠데타 시도’일 뿐인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와 헌법체제는 현재까지 ‘계엄 해제’만 성공했을 뿐, 쿠데타 세력에 대한 체포, 수사, 처벌을 시작도 못했다. 집권세력은 헌정질서 파괴를 하고도 여전히 공적 직위와 헌법적 권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상황이 극복되기 전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말할 수 있는 ‘회복’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우리의 질문은 “왜 윤석열은 그렇게 했는가?”가 되어선 안 된다. 야권이 대통령 퇴진을 압박해 온 데에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에는 큰 위험이 있다. ‘
정치의 갈등’과 ‘헌정의 준수’는 완전 별개의 문제다. 어떠한 정치적 불만이 있더라도 그 불만의 표출은 헌정질서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직 헌정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만 헌정파괴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다.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전복이 정치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한국 보수정치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12․3 쿠데타의 배경이다.
장기적으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 퇴행과 독재화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문화적 토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남용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이루는 일이다. 또한 쿠데타를 용인하는 정치인들이 대의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며, 그들의 사회적 기초인 극우 세력을 소수화할 수 있는 거대한 민주적 시민사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긴 미래의 경로가 결정되는 갈림김에 있다. 깨어있어야 한다.
언제든 독재로 회귀 가능한 사회
수정 2024-12-10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일 밤 10시30분께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발령했다고 선언했다.
지난 주말 국회의사당 앞과 여의도 일대는 윤석열 정권의 ‘비상계엄 쿠데타’에 항의하고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군사독재 시대를 경험한 중·노년층부터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 청년들과 중고등학생들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한 자리였다. 놀라웠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인파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불과 며칠 전에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기와 자신감이 넘쳤다.
오랜 세월 독재와 싸운 경험이 있는 중·노년 시민들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민주화 투쟁가를 불렀고, 콘서트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야광봉과 방석을 장착하고 함께 노래하고 외치며 춤췄다.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의 통치 원리가 시민적 덕성이라면 전제정의 원리는 공포라고 했는데, 오늘날 이처럼 자유분방한 문화가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 독재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통치 형태인가?
그러나 역사는 종종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병존으로 인한 충돌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은 당대의 가장 자유로운 모더니즘 도시 문화와 가장 진보적인 헌법 조문이 있었지만, 불과 몇년 뒤 나치 독재체제의 수립을 막지 못했다. 정치와 국가의 영역에서 불행한 구도가 형성되면, 설령 많은 사회구성원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해도 역사가 비극으로 다가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독재로 가느냐, 민주주의를 지키느냐가 결정되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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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3일의 비상계엄 상황을 ‘소동’, ‘소극’(笑劇), ‘해프닝’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일 뿐 아니라, 그것의 엄중한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가 이번에 ‘저력’과 ‘회복력’을 보여줬다거나, 이제는 군이 헌법에 충성하는 ‘시민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등의 평가는 성급하며 과도하게 낙관적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벼랑 끝에 내몰려 있음을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어리석고 난폭한 대통령 한 명이 홧김에 어설픈 계엄 선포를 했다가 정당, 언론, 시민사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저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집권세력은 오래전부터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으나, 군 지휘체계의 여러 지점에서 비동의, 항명, 불이행, 혼란, 우연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생긴 작은 기회 공간 안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라는 헌법적 명분이 가까스로 성립된 것이다.
군이 일단 대세를 장악하면 상당 기간 독재하의 자유 상실을 막을 힘이 없다. 1961년 5·16 쿠데타에서 박정희 소장은 단 3700명의 군인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18년 독재를 개시했고, 1979년 12·12 쿠데타는 정치권과 사회 각계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군이 얼마나 신속히 테러 지배를 구축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1세기 한국에서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참수부대의 국회 점령이 21세기 한국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번 비상계엄이 ‘친위 쿠데타’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중대한 함의가 있다. 그것의 학문적 원개념은 ‘셀프쿠데타’, 스페인어로 ‘아우토골페’다. 그것은 합법적으로 권력을 얻은 통치자가 그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헌정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례는 고대부터 많이 있지만, 최근 대표 사례는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다. 그는 199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국회와 갈등이 계속되자 1992년에 군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했고, 그 후 전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며 2000년까지 통치를 지속했다.
지금 그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12·3 쿠데타는 1987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공고화’ 사례로 꼽혔던 한국이 민주화 37년 만에 공고화 이전 단계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고화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한 나라들이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할 위험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심각한 실질적 시도의 존재 여부다. 12월3일에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민주주의 공고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는 ‘정치의 탈군부화’와 ‘군부의 탈정치화’다. ‘보수 정치인’ 김영삼은 과감한 하나회 척결로 신군부의 광범위한 사조직을 해체하여 그 과업을 달성했다. 그런데 윤석열은 군 내에 ‘충암파’를 중심으로 사조직을 만들어, 단 2년 만에 ‘검찰-군부 복합체’라는 군민통합 독재 기구를 구축했다. 국민의 신뢰를 받아온 군은 이 치욕스러운 현실로부터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12·3 비상계엄은 ‘실패한 쿠데타 시도’일 뿐인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와 헌법체제는 현재까지 ‘계엄 해제’만 성공했을 뿐, 쿠데타 세력에 대한 체포, 수사, 처벌을 시작도 못 했다. 집권세력은 헌정질서를 파괴하고도 여전히 공적 직위와 헌법적 권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상황이 극복되기 전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말할 수 있는 ‘회복’이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내란 세력과 집권당의 담합으로 통치되는 권위주의 체제의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 주말 국회의사당 앞과 여의도 일대는 윤석열 정권의 ‘비상계엄 쿠데타’에 항의하고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군사독재 시대를 경험한 중·노년층부터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 청년들과 중고등학생들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한 자리였다. 놀라웠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인파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불과 며칠 전에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기와 자신감이 넘쳤다.
오랜 세월 독재와 싸운 경험이 있는 중·노년 시민들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민주화 투쟁가를 불렀고, 콘서트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야광봉과 방석을 장착하고 함께 노래하고 외치며 춤췄다.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의 통치 원리가 시민적 덕성이라면 전제정의 원리는 공포라고 했는데, 오늘날 이처럼 자유분방한 문화가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 독재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통치 형태인가?
그러나 역사는 종종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병존으로 인한 충돌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은 당대의 가장 자유로운 모더니즘 도시 문화와 가장 진보적인 헌법 조문이 있었지만, 불과 몇년 뒤 나치 독재체제의 수립을 막지 못했다. 정치와 국가의 영역에서 불행한 구도가 형성되면, 설령 많은 사회구성원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해도 역사가 비극으로 다가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독재로 가느냐, 민주주의를 지키느냐가 결정되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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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3일의 비상계엄 상황을 ‘소동’, ‘소극’(笑劇), ‘해프닝’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일 뿐 아니라, 그것의 엄중한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가 이번에 ‘저력’과 ‘회복력’을 보여줬다거나, 이제는 군이 헌법에 충성하는 ‘시민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등의 평가는 성급하며 과도하게 낙관적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벼랑 끝에 내몰려 있음을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어리석고 난폭한 대통령 한 명이 홧김에 어설픈 계엄 선포를 했다가 정당, 언론, 시민사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저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집권세력은 오래전부터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으나, 군 지휘체계의 여러 지점에서 비동의, 항명, 불이행, 혼란, 우연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생긴 작은 기회 공간 안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라는 헌법적 명분이 가까스로 성립된 것이다.
군이 일단 대세를 장악하면 상당 기간 독재하의 자유 상실을 막을 힘이 없다. 1961년 5·16 쿠데타에서 박정희 소장은 단 3700명의 군인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18년 독재를 개시했고, 1979년 12·12 쿠데타는 정치권과 사회 각계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군이 얼마나 신속히 테러 지배를 구축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1세기 한국에서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참수부대의 국회 점령이 21세기 한국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번 비상계엄이 ‘친위 쿠데타’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중대한 함의가 있다. 그것의 학문적 원개념은 ‘셀프쿠데타’, 스페인어로 ‘아우토골페’다. 그것은 합법적으로 권력을 얻은 통치자가 그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헌정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례는 고대부터 많이 있지만, 최근 대표 사례는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다. 그는 199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국회와 갈등이 계속되자 1992년에 군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했고, 그 후 전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며 2000년까지 통치를 지속했다.
지금 그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12·3 쿠데타는 1987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공고화’ 사례로 꼽혔던 한국이 민주화 37년 만에 공고화 이전 단계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고화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한 나라들이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할 위험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심각한 실질적 시도의 존재 여부다. 12월3일에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민주주의 공고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는 ‘정치의 탈군부화’와 ‘군부의 탈정치화’다. ‘보수 정치인’ 김영삼은 과감한 하나회 척결로 신군부의 광범위한 사조직을 해체하여 그 과업을 달성했다. 그런데 윤석열은 군 내에 ‘충암파’를 중심으로 사조직을 만들어, 단 2년 만에 ‘검찰-군부 복합체’라는 군민통합 독재 기구를 구축했다. 국민의 신뢰를 받아온 군은 이 치욕스러운 현실로부터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12·3 비상계엄은 ‘실패한 쿠데타 시도’일 뿐인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와 헌법체제는 현재까지 ‘계엄 해제’만 성공했을 뿐, 쿠데타 세력에 대한 체포, 수사, 처벌을 시작도 못 했다. 집권세력은 헌정질서를 파괴하고도 여전히 공적 직위와 헌법적 권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상황이 극복되기 전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말할 수 있는 ‘회복’이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내란 세력과 집권당의 담합으로 통치되는 권위주의 체제의 상태에 놓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떻게 하다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질문은 “왜 윤석열은 그렇게 했는가?”가 되어선 안 된다. 야권이 대통령 퇴진을 압박해온 데에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에는 큰 위험이 있다. ‘정치의 갈등’과 ‘헌정의 준수’는 완전 별개의 문제다. 어떠한 정치적 불만이 있더라도 그 불만의 표출은 헌정질서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직 헌정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만 헌정 파괴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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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주말마다 극우단체들의 대규모 퇴진 집회가 열렸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반년 동안 수백만이 참여했지만, 그들 중 경찰에 연행된 사람조차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이재명과 민주당도 심했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났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또다시 헌정체제의 전복을 기도할 수 있는 집단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다.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전복이 정치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한국 보수 정치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12·3 쿠데타’의 배경이다.
윤석열 퇴진, 그 숨막히는 교착과 파국 사이의 좁은 길에서 결국 ‘파국’이 왔다. 그리고 탄핵 불발 이후 우리는 다시 출구 없는 교착으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교착은 12·3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도다. 윤석열은 생명을 부지하려면 정권교체를 허락해서는 안 되며, 국민의힘은 민주헌정을 회복하는 대신 윤석열과 손잡고 정권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공고화할 실질적 이해관계가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국회의 계엄령 해제요구 결의안 통과로 계엄이 해제된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후문에 계엄군 진입을 막기 위해 각종 집기들이 쌓여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무엇을 할 것인가? 즉각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윤석열을 탄핵이든 체포든 한시라도 빨리 직무정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자리에 남아 있으면서 2선 후퇴니, 책임총리니 하는 것은 모두 위헌적 술수들이다. 그가 헌법적으로 군통수권과 검·경, 국가정보원을 포함한 국가기구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있는 한 전쟁이나 계엄 등 돌발행동으로 국가와 국민을 재앙에 빠뜨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처벌만이 민주헌정의 ‘회복’을 완성할 수 있다.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사태 당시 국회 봉쇄를 위해 투입됐던 제707특수임무단 김현태 단장(대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사태와 관련해 말하고 있다. 김 단장은 사령관 이하 모든 부대원이 김용현 전 국방장관에게 이용당했다며, 책임은 지휘관인 자신에게 묻고 죄가 없는 부하 장병들은 용서해달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합뉴스
그러나 윤석열의 위험성보다 더 대응하기 어려운 것은, 윤석열-한동훈 담합과 비민주적 권력승계에 의한 검찰정권의 연장과 선거권위주의 체제의 공고화다. 윤석열의 군사쿠데타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지만, 검찰 지배를 ‘민간 통치’로 오인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검찰은 1987년 독재 종식 후 ‘민간’ 권력의 남용을 상징하는 존재다. 민간 권위주의 체제의 수립을 막기 위해 야권 정당들과 민주적 시민사회는 더 정교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퇴행과 독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문화적 토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남용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이루는 일이다. 또한 쿠데타를 용인하는 정치인들이 대의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며, 그들의 사회적 기초인 극우 세력을 소수화할 수 있는 거대한 민주적 시민사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긴 미래의 경로가 결정되는 갈림김에 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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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다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질문은 “왜 윤석열은 그렇게 했는가?”가 되어선 안 된다. 야권이 대통령 퇴진을 압박해온 데에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에는 큰 위험이 있다. ‘정치의 갈등’과 ‘헌정의 준수’는 완전 별개의 문제다. 어떠한 정치적 불만이 있더라도 그 불만의 표출은 헌정질서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직 헌정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만 헌정 파괴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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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주말마다 극우단체들의 대규모 퇴진 집회가 열렸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반년 동안 수백만이 참여했지만, 그들 중 경찰에 연행된 사람조차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이재명과 민주당도 심했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났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또다시 헌정체제의 전복을 기도할 수 있는 집단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다.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전복이 정치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한국 보수 정치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12·3 쿠데타’의 배경이다.
윤석열 퇴진, 그 숨막히는 교착과 파국 사이의 좁은 길에서 결국 ‘파국’이 왔다. 그리고 탄핵 불발 이후 우리는 다시 출구 없는 교착으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교착은 12·3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도다. 윤석열은 생명을 부지하려면 정권교체를 허락해서는 안 되며, 국민의힘은 민주헌정을 회복하는 대신 윤석열과 손잡고 정권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공고화할 실질적 이해관계가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국회의 계엄령 해제요구 결의안 통과로 계엄이 해제된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후문에 계엄군 진입을 막기 위해 각종 집기들이 쌓여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무엇을 할 것인가? 즉각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윤석열을 탄핵이든 체포든 한시라도 빨리 직무정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자리에 남아 있으면서 2선 후퇴니, 책임총리니 하는 것은 모두 위헌적 술수들이다. 그가 헌법적으로 군통수권과 검·경, 국가정보원을 포함한 국가기구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있는 한 전쟁이나 계엄 등 돌발행동으로 국가와 국민을 재앙에 빠뜨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처벌만이 민주헌정의 ‘회복’을 완성할 수 있다.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사태 당시 국회 봉쇄를 위해 투입됐던 제707특수임무단 김현태 단장(대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사태와 관련해 말하고 있다. 김 단장은 사령관 이하 모든 부대원이 김용현 전 국방장관에게 이용당했다며, 책임은 지휘관인 자신에게 묻고 죄가 없는 부하 장병들은 용서해달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합뉴스
그러나 윤석열의 위험성보다 더 대응하기 어려운 것은, 윤석열-한동훈 담합과 비민주적 권력승계에 의한 검찰정권의 연장과 선거권위주의 체제의 공고화다. 윤석열의 군사쿠데타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지만, 검찰 지배를 ‘민간 통치’로 오인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검찰은 1987년 독재 종식 후 ‘민간’ 권력의 남용을 상징하는 존재다. 민간 권위주의 체제의 수립을 막기 위해 야권 정당들과 민주적 시민사회는 더 정교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퇴행과 독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문화적 토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남용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이루는 일이다. 또한 쿠데타를 용인하는 정치인들이 대의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며, 그들의 사회적 기초인 극우 세력을 소수화할 수 있는 거대한 민주적 시민사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긴 미래의 경로가 결정되는 갈림김에 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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