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8

한일관계 - 민족주의 아닌 국제주의로 보기 - 3. 제국주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22 p




한일관계 - 민족주의 아닌 국제주의로 보기

한미일 공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내친 윤먹열은 퇴진하라

  • 강제동원 자전 배상
  • 일제강점기부터 위안부•
  • 강제동원 합의까지 

김승주, 하세가와 사오리 지음, 노동자연대

김승주

좌파 주간 신문 <노동자 연대>의 기자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국 정치 문제를 다뤄 왔고, 《세월호 참사, 자본주의와 국가를 묻다》(2018, 책갈피)를 쓰고 엮었다. 

이메 일 주소는 tmdwn9108@gmail.com이다.

하세가와 사오리

한국에 거주 중인 일본인 사회주의자로, 한-일 통번역사이자 인하대학교 의대 박사후연구원이고,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2020,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의 공역자이다.

머리말

이 소책자는 2021년 2월에 발행했던 <위안부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을까>를 윤석열 정부하에서 변화한 상황에 맞춰 개정·증보한 것이다. 특히 강제동원 (징용) 문제, 한국 지배계급의 형성 과정과 한일 관계, 반제국주의 운동의 대안 문제 등을 새로 썼다.

또, 1부에는 하세가와 사오리 씨가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 100년을 맞아 쓴 새로운 글이 실렸다.

소책자를 쓰면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노동자 연대> 신문의 글들에 많이 의존했다. 특히 김하영, 김영익, 이현주 기자의 동아시아•제국주의 분석들은 소책 자의 뼈대가 됐다. 김문성, 강동훈 기자의 한국 정치•경제 분석에도 많은 빚을 졌다. 이 중 여러 기자들과 임준형 기자가 바쁜 와중에도 소책자의 초안을 읽고 소중한 조언을 해 줬다. 모두에게 깊이 감사하다.

국제 정세가 갈수록 위험해지는 오늘날, 제국주의에 맞설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독자들에게 이 소책자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23년 8월 김승주

목차  [40% view page No]

들어가며: 윤석열은 왜 친미•친일 외교를 할까?7 p

1. 위안부•강제동원 문제란 무엇인가8p
  • 위안부 제도: 일본 국가가 저지른 전쟁 범죄9p
  • 위안부 제도의 배경 - 제2차세계대전10 p
  • 강제동원 - 일본 제국의 노예가 되다11 p
  • 더 알아보기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관동대·••12 p

2. 한•일 과거사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을까15 p
  • 전후 일본의 전쟁 범죄는 어떻게 처리됐나16 p
  • 한일협정: 경제 개발 자금과 맞바꾼 책임 묻기18 p
  • 고노 담화와 한일위안부합의19 p
  • 외면당한 배상 판결20 p
  • 더 알아보기 과거사 문제에서 독일은 일본과 다르...21 p

3. 제국주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22 p
  •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와 한국 지···23 p
  • 제국주의 문제란 무엇인가25 p
  • 반제국주의 운동,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까27 p
  •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28 p

3. 제국주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22 p
a]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와 한국 지배계급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 한국에서는 흔히 정부가 "굴욕 외교"를 했다는 규탄이 나온다. 여기에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생긴 정당한 감정이 반영돼 있 다. 일본은 한때 한반도를 강점해 놓고 사과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식민 지배 정당화 망언과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문제,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등으로 한 국민을 자극한다. 그러니 일본에 대한 한국민들의 민족적 감정이 남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에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대도, 감정과 객관적 현실은 구분해야 한다. 즉, 한•일 과거사 문제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이 유는 여전히 한국이 일본에 민족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때 식민지 지배국-피지배국의 관계였던 일본과 한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주도하에 경제적·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관계로 거듭났다.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이 여전히 일본 정부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 중국, 유럽 강국들처럼 강대국 대열에 끼지는 못해도 경제 규모(GDP 기준) 세계 12위, 군사력(GPI 기준) 7위의 중간 규모 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이 경제 규모 3위, 군사력 4위인 것과 비교해 보면 격차가 여전히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의 한•일 관계는 식민지 종속 관계였던 100년 전이나, 경제 규모가 20~30배 차이 나던 50년 전에 견줘 크게 달라졌다.

미국·일본과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계급의 역사적 뿌리와 성장 과정, 오늘날의 제국주의 질서 속 이해관계 때문에 정의로운 한•일 과거사 해결은 한국 지배계 급의 이익과 조화될 수 없었다. 우파 정부든 민주당 정부든 그 이익을 중시했기 때문에, 역대 모든 한국 정부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같은 민족인 과거사 피 해자들의 손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손을 잡았다.

이번 장에서는 한국 지배계급의 형성•성장 과정에서 미국•일본과의 관계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또 오늘날에는 어떤 양상으로 이어져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 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 미약했던 토착 자본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인 토착 자본가들도 억눌렸다. 물론 땅과 쌀을 빼앗기고 가혹하게 착취당한 농민•노동자들처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제하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은 자유롭게 이윤을 축적하고 그것을 외세로부터 보호해 줄 국가를 가질 수 없었다.

일제는 1905년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해 외교권과 사법권을 접수하고, 1910년에는 강제 합병 조약을 맺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조선의 주권, 즉 조선의 영 토와 그 주민들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조선 경제를 철저하게 일제와 일본인 기업의 필요에 따라 재편했다.

조선총독부는 필요에 따라 기업을 허가하거나 분해•합병하고 문도 닫게 만드는 막강한 명령권을 가졌다. 1910년 조선총독부는 일본 자본 보호를 위해 토착 한국 회사 설립을 선택적으로만 허용했다. 1920년대에는 그런 규제가 완화됐지만 여전히 조선 자본가는 일본 경쟁자들과 겨룰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기업에만 전폭적인 특혜를 주며 개입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일본 기업들은 저렴한 생산비의 이점을 누리면서도, 일본 국내에서보다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며 높은 초과 이윤을 거둘 수 있었다.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기 시작한 1930~40년대에 한반도는 병참기지로서 본격적으로 산업화됐다. 모든 생산 활동이 일제의 전쟁 수행 필요에 맞춰졌 다. 조선총독부는 물자동원계획, 국가총동원법, 기업허가•정비령, 임금통제령, 국민징용령 등으로 기업과 노동력을 통제했다.

그 결과,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 자본은 거의 모두가 일본인 회사 자본이었다. 1942년 초 조선 내 자본 중 조선인이 소유한 부분은 약 5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b] 해방 이후 식민지 처지를 벗어난 한국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한반도는 해방됐다. 그러나 이내 냉전에 돌입한 미•소의 점령 아래 놓이며 분단됐고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개입한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미군정에게서 권력을 이양받아 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자신을 권좌에 앉히고 한국전쟁을 치러 준 미국의 충실한 하위 파트너가 됐다.

그럼에도 이제 한국은 (형식적 겉모습 수준에서가 아니라) 외국의 정치적 예속 상태를 벗어난 독립 국가가 됐다. 그것은 상당한 차이를 낳았다. 한국의 자본 가들은 일제 때와 달리 자국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고 장차 독자적인 자본 축적의 중심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만개한 산업 경제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토지개혁을 추진해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전통적인 지주 계급을 해체하는 한편, 주요 기간 산업 분야에서 국영 기업을 운영하거나 소비재 산업 육성 정책을 펴는 등 한국 자본주의의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구실을 한 것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이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총수입 가운데 6분의 5를 차지할 정도로 컸 다. 1945~76년에 한국이 받은 미국 원조는 81억 3000만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1인당 600 달러에 해당한다. 1950년대 말 한국의 1인당 GNP가

100 달러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한테서 받은 원조 물자와 외환을 특혜의 조건으로 민간 기업에 대여•융자했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에 남겨진 일제와 일본인들의 재산인 '적산 (적의 재산이라는 뜻)을 미군정에 귀속시킨 뒤 이승만 정권에 이양했다.

이승만은 적산 기업 2700여 개를 자신과 연줄이 닿는 기업가들에게 거의 공짜로 나눠 줬다. 가령 삼성 이병철은 이 시기 미쓰코시 백화점을 받아 신세계 백 화점을 만들었다. 일본 기린맥주가 1933년 조선에 설립한 소화기린맥주는 박두병에게 넘어가 오늘날 두산그룹의 발판이 됐다. 일제 시기 조선에서 화약을 독 점 제조•공급하던 조산화약공판을 받은 김종희는 한화그룹을 창업했다. 일본인 소유 기업인 선만주단과 교토(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했던 선경직물은 25세 였던 최종건에게 불하되면서 지금의 SK그룹이 됐다.

이처럼 이승만 시기는 미국 원조와 일제 적산 불하를 통해 재벌의 맹아에 해당하는 민간 자본이 창출되고 육성된 시기였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미국의 대규모 무상 원조가 중단될 것이 분명해지자 한국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1962년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미국의 원조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주로 국내 자금을 동원한 수입대체산업화에 중점이 있었다.

그러나 재원 부족으로 1차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 1964년경 한국의 제조업 수출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진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화되 면서 그 하위 분업 체계로 편입해 들어갈 틈이 생겼던 것이다.

한국의 국가 지배자들은 탁월한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행운에 의해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1964년 2월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수출제일 주의 경향이 그 해 말로 갈수록 뚜렷해졌다. 1965년이 되자 박정희 정권은 "수출이 아니면 죽음을"의 태세로 수출 지원 정책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수출 주도 공업화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경제 성장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투자금의 확보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미국은 한국이 소련•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의 동맹으로서 서방 진영의 보루 구실을 해 주길 바랐고, 한국의 안정적인 자본 축적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 다. 미국은 한국 수출 기업들에게 후하게 미국의 시장을 열어 주는 한편, 일본이 한국에 경제 개발 자금을 지원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가 바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었다. 자금 확보에 안달이 났던 박정희 정권은 국내의 엄청난 저항을 감수하고라도 하루빨리 일본의 자금을 얻어 내고자 했다.

이때 일본이 건넨 무상 원조 3억 달러, 장기간 저리의 차관 2억 달러, 일본 민간 기업의 투자 3억 달러는 식민 지배 역사와 피해자들의 고통에 비하면 헐값 에 불과했지만 박정희 정권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당시 한국의 수출 총액이 고작 2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였다.(당시 일본의 국내총생산 은 한국의 30배가 넘었다.)

이후 한국의 핵심 산업들은 일본의 투자, 기술, 기계를 흡수하며 성장했고, 일본도 한국에서 시장을 확보하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69년 일본 은 포항종합제철 건설과 운영을 위해 한국 정부가 요청한 액수보다 더 많은 자금을 댔다. 그 외에도 서울 지하철과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도 일본의

이외에도 일본 정부는 해외경제협력기금oECF을 통해서도 많은 엔 차관을 공여했다. 1970~1980년까지의 청구권 자금을 제외한 엔화 차관은 총 2500 억 엔(당시 환율 기준 약 9억 달러)에 달했다.

이런 과정에서 한•일 간 경제 관계는 급속히 발전했다. 1970년대 초에 일본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입국이자 두 번째로 큰 수출국이 됐다. 또, 미국을 추월 해 한국에 대한 최대의 해외 투자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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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의 경제 관계 때문에 두 나라 정부와 기업 권력자들 사이의 인적 관계도 긴밀해졌다. 당시 한•일의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수많은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각국의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한•일 경제가 긴밀해지는 과정은 한•미•일이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국은 일본에게서 기계와 부품•재료를 수입해 제품을 조 립• 가공해 미국 시장에 판매했다.

이후로도 한국은 미국의 지원 덕분에 막대한 외채를 구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말 외채 위기가 높아 갈 때 한국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세계은행의 공공차 관 (저금리에 상환 기간도 긴)을 많이 받아 낼 수 있었고 1983년에는 미국 정부의 후원 아래 일본 정부한테서 특혜적 조건으로 구제금융 40억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당시 한국 국민총생산의 5퍼센트였고 외채의 10퍼센트에 이르는 액수였다. 덕분에 한국은 외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이 미국•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얻어 낸 자금은, 제3세계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신흥 공업국으로 성공하려 애썼던 다른 국가들 다수는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한국은 1990년대 들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1995년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도 가입했다.

이로써 한국은 제국주의에 의해 발전이 제약당하던 식민지 처지에서 독립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불과 수십 년 만에 자본 축적의 독자적 중심을 이룬, 세 계에서 몇 안 되는 사례가 됐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로 유착돼 있다. 냉전기 미국에게 소련•북한과 지정학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두 동맹국,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일본의 가장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당했던 한국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는 일은 매끄럽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경제 협력에 비해 군사 협력 문제는 양국 모두에서 더 큰 내부 반발을 부를 수 있는 쟁점이었다.

한국 대중의 기억 속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악행들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이 때문에 모든 역대 한국 정부들에서 반일 제스처와 타협적인 대일관계를 왔다갔다하는 행보가 계속 반복돼 왔다.

한편, 일본 지배자들도 자국 대중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일본이 군사적 구실을 확대하려면 패전 후 만들어진 '평화 헌법'을 수정해 전수방위 원칙(오로지 방어 만 한다는 뜻)에서 벗어나야 했는데, 오랜 전쟁과 핵폭탄의 비극을 경험한 일본 대중의 강력한 반전•평화 정서 때문에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한•일 군사 협력은 실질적으로 추진되기보다는, 일본의 경제 원조가 사실상의 '안보' 협력으로 중시됐다.

한•일 군사 협력의 가시적인 발전은 냉전 해체 이후에 조금씩 이뤄졌다.

미국은 냉전기에 자기 진영을 묶어 준 '공공의 적' 소련이 무너진 이후에도 세계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옛 소련을 대신할 '적'들을 찾았다. 이라크, 이 란, 쿠바, 북한 같은 '불량 국가'가 바로 미국이 찾아낸 '새로운 위협'이었다.

미국은 1991년부터 북한 핵 위협'을 과장해 북한을 궁지에 내몰았다. 미국은 북한에 핵 개발 의혹을 거듭 제기하고 19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 등 전 쟁 위협까지 가했다. 1998년 미국은 근거도 없이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혹(결국 빈 터널일 뿐이었다)을 제기하며 다시 한 번 위기를 고

냉전이 종식돼도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손 뗄 생각이 전혀 없으며 동아시아의 안정은 미국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이렇게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을 문제 삼음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미사일방어체계(적국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무기 체계), 즉 MD 시스템 에 일본과 한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2010년대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은 핵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000년대에 경제적 영향력이 급부상한 중국은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경제 규모 세계 2위에 올라섰다. 특히 아시아 지역은 일본 경제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인데 이곳에서 중국이 일본을 기존 지위에서 밀어냈다. 한국만 해도 2000년 이전에는 미국•일본 무역으로 먹고 살았지만, 2000년 이후에 는 중국과의 무역이 훨씬 중요해졌다.

중국은 군사적 영향력도 키워서, 2011년에는 국방비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도달했다. 중국은 급격히 증강된 해군력을 앞세워, 일본과의 영토 분쟁 지 역인 남중국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에서 군사적 충돌까지 불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인도-태평양의 기존 패권자인 미국과 일본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다.

2010년대에 장기 집권한 아베 정부가 과거 침략 전쟁 역사를 적극적으로 미화하고 극우가 성장한 배경도 중국 견제에 있었다. 침략 역사 문제는 중국이 일 본을 견제하며 아시아 주변국을 포섭하는 데는 유리한 쟁점인 반면, 일본이 주변국을 중국 포위 전략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모두와 이해관계가 얽혀 난처한 처지로 내몰렸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조심스럽지만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일부 감수하고라도 서방 제국주의 편에 힘을 싣는 도박을 걸고 있다.

미•중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져 두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할 여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 질서 유지에 협력하는 게 더 이득이

그러나 한국이 서방 제국주의 편의 더 적극적인 일부가 될수록 미•중 갈등은 더 빠르게 첨예해질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친제국주의 악행에 반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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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제국주의 문제란 무엇인가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 민족은 단일한 이해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다.

당을 가리지 않고 역대 모든 한국 대통령들은 일본 정부에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다가 일본에게 뒷통수를 얻어 맞은 뒤 '강경대응 쇼'로 선회 하는 등 좌충우돌했다.

그러나 모든 정부들의 '반일 제스처'는 잠깐이었고 최종 선택은 일본(그리고 미국) 정부와의 협력 강화로 기울었다.

가령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고 비판받았던 이명박조차 임기 말에 갑자기 독도를 방문해 한•일 정부 간 관계를 급속히 악화시킨 적이 있다. 당시의 대일 강경 행보는 각종 부정부패와 민심 이반으로 흔들리는 정권의 위기를 '깜짝쇼'로 수습하려는 고육지책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정부는 얼마 안 가서 일본은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민주당 정부가 집권해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부는 집권 직후 독도와 어업협정 문제로 잠깐, 2001년에는 일본 측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으로 대 중의 공분이 일었을 때 잠깐 일본과 충돌했다.

하지만 실천에서는 한.일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훨씬 큰 강조점이 있었다.

그러한 기조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 불리는 한•일 정상 공동선언(1998년)으로 표현됐는데, 이 선언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협정을 긍 정적으로 평가하며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를 약속했다.

이 선언 이후 한•일 간 경제•안보 등 각종 분야에서 광범한 협력이 시작됐다. 한일 FTA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한일안보정책협의회(1998), 한일 공동해난 구조 훈련(1999) 등도 이때 시작됐다.

이런 한•일 협력의 대가로 김대중 정부는 30억 달러를 일본수출입은행에서 2.3퍼센트의 저리로 빌려와 IMF 사태 이후 상황에 대처하는 데 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윤석열 등 우파들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두고 '명분이 아니라 실익을 추구한 사례 라며 높이 평가한다.

노무현 정부도 2005년 3월 독도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일본과 갈등이 심화되자 외교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 그 해 2005년 8월에는 민관 위원회를 만들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한일회담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고 1965년 한일협정에서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잠깐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일본에 다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더 나쁜 것은, 강제동원 문제에서는 일본 측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해석이었다. 정부는 이렇게 썼다. "청구권 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 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며 임기 내 과거사는 공식 의제로 삼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도 위안부 피해자들을 청와대에 초대해 한일위안부합의는 부족한 합의"라고 비판하고, 일본과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로 수출 규제 갈등을 벌 일 때는 반일 언사를 하며 애국주의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말과 달리 실천은 보잘것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한 지 1년도 안 된 2018년 1월 한일위안부합의가 일본과의 공식 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따라서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을 강 제 집행하는 것은 "곤혹스럽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제국주의는 민족 억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통적 우파 정당뿐 아니라 민주당 정부들 또한 일본 정부•기업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 문제에서 진정한 이해관계 대립이 민족이 아니라 계급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족 또한 계급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심지어 조선이 일본에 식민 지배를 당하던 시기에조차 조선 민족 안에는 계급 대립이 있었다. 당시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제 통치에 저항하기보다는 찰싹 빌붙 음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박흥식, 김연수, 김용주, 최창학, 문명기 등 친일파 조선인 자본가들이 그런 자들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 제가 조선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유지하는 억압 질서에서 이득을 봤다.

그래서 일제 시기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제와 일본인 사용자뿐 아니라 조선인 사용자들에 맞서서도 싸웠다. 1929년 2000명 이상이 참가했던 원산 총파업 이 벌어졌을 때 조선인 사용자 단체인 객주조합은 일본인 사용자 단체인 원산상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하기로 한 상황에서조차 노동자들의 요구를 끝까지 반대 했다. 기층 대중운동을 경험한 뒤 조선인 자본가•지주들은 일본 권력과 더욱더 유착했다.

민족 억압 상황에서조차 민족 내 계급의 분화와 그에 따른 갈등이 확연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하물며 한국이 독립 국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국가인 지금, 한미일 동맹과 같은 제국주의 문제에서 모든 한국 민족 (또는 한 줌의 친일 우익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이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관점은 더더욱 현실과 맞지 않다.

오늘날의 한•일 관계 문제를 민족 억압-종속 관계에서 비롯한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제국주의를 그저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나 그러한 강대국 정부의 나쁜 정 책으로 보는 잘못된 개념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를 민족 억압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는다. 비록 제국주의에는 민족 억압 측면이 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가 표현되는 여러 방식중의 하나다. 

제1• 2차세계대전은 아프리카 쟁탈전, 영국의 인도 지배 그리고 일본 제국의 아시아 침략 등 식민지 쟁탈전 성격이 컸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 형성된 제 국주의 질서는 그렇지 않았다.(물론 중국 소수민족이나 팔레스타인 등 여전히 중요한 민족 투쟁들이 소수 존재하지만 말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제치고 최고 강대국 지위에 오른 미국은 기존의 고전적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달리,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으면서도 정치적•군사 적 개입력을 가질 수 있는 '비공식적 제국'을 원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자국 산업이 세계경제 전체로 침투하기를 바랐다.

이런 판단에는 제2차세계대전 말 식민지 세계를 거세게 휩쓸었던 반란의 물결도 영향을 끼쳤다.

이로써 식민 제국의 시대가 종식됐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제국주의 경쟁과 갈등,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문제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의 핵심을 강대국의 약소국 억압이 아니라 강대국들 간의 경쟁이 낳는 위계적인 세계 시스템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경 쟁의 끝없는 추동력이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획득하려고 움직이는 기업들의 경제적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경쟁에서는 1라운드에서 승리해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이윤을 얻은 기업이 2라운드에서는 더 쉽게, 3라운드에서는 더더욱 쉽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대기업이 작은 기업을 잡아먹고 덩치가 커지는 현상이 커진다. 이렇게 대기업들의 덩치가 커지면 거대 자본들과 그들의 국가 사이에 긴밀한 상호 의존 관계가 발전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국 자본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생산망과 원료, 더 넓고 소비력이 풍부한 시장 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애쓴다.

이 단계의 경쟁은 더는 시장적 방식만 따르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와 대자본은 경쟁자들이 원료를 획득하지 못하도록 원료를 지배하고, 운송 시설을 확보하 지 못하게 차단하고, 그들을 업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들을 사용한다. 특히 국가는 군사력을 사용해 다른 나라 지배계급을 무릎 꿇린다.

이 때문에 제1차세계대전기에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특별히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집중의 정도가 심해져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에 비례해," 힘에 비례해" 세계를 분할하는데,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른 분할 방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경쟁이 국가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과 결합하면서 생겨나는 국제 질서인 것이다.

물론 한국이 더는 민족 억압•종속 처지가 아니라고 본다고 해서 미국, 일본 등 강대국의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고 한국이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지 못하게 보조금 등의 수단으로 압박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 대 법원이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출 규제로 압박을 가했었다.

강대국과의 관계가 순수하게 외교적 대화에 기초한 평등한 관계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살벌하고 냉혹한 경쟁적 위계 질서인 제국주의에 대한 헛된 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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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은 애초에 다른 나라를 힘으로 눌러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힘은 경쟁 강대국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당연히 동맹국들에게도 향한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동맹이라는 것은 진정한 신뢰로 맺어지는 것이긴커녕 때로는 지원해 주고, 때로는 협박해 가면서 유 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동맹국에 경제적•군사적 압박과 불이익을 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세계 2~3위 경제 대국인 일본도 미국에게 큰 압박을 당한다.

가령 미국은 1980년대에 일본 경제가 크게 성장하자 일본을 강하게 압박해서 시장 개방과 엔화 가치 상승을 유도했다. 이 때문에 일본 경제는 타격을 입었 다. 또, 미국은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인 영향권을 형성하는 것도 가로막았다. 1990년대 말 일본의 아시아통화기금 설립을 방해한 것이 그 사례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미•일 간에는 갈등이 컸지만, 1990년대 이후 급부상하는 중국에 맞서 연합해야 할 필요 앞에서 일본은 다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적극 지지해 줬다.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에 경제적•정치적 갈등이 군사적 갈등으로 직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미•일 관계를 종속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한•일 관계 또한 종속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한국 지배계급은 친미•친일 외교를 굴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강대국들과의 협력을 지렛대 삼아 자신들의 이익(즉 국익)을 챙기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야만 세계 질서에서 조금이라도 순위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미국·일본이 압박을 가하면 불만을 표하고 충돌하기도 하지만 더 큰 틀에 서는 협력 관계를 기꺼이 유지한다.

즉, 한국 지배계급이 한국의 과거사 피해자들을 짓밟고 일본 정부•기업의 편을 드는 것은 억지로 강요당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한국 지배계급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내린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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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반제국주의 운동,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까

한국 지배계급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국•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해 왔고, 그래서 제국주의 체제의 유지가 그들에게 득이 된다. 이 점을 보지 못하면, 한 국 지배계급 또는 적어도 그 일부가 국익(여기서는 '국민 다수의 이익'을 의미함)을 중심으로 노동계급과 한편이 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를 기대하게 될 수

이렇게 국익 추구의 관점에서 민족 단결을 이뤄 제국주의를 물리치려고 하는 생각을 '좌파 민족주의'라고 한다.

특히 한국민의 민족 의식은 오랜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형성됐고, 해방 이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친미 독재 정 권들의 통치 아래 놓였었기 때문에 좌파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크다.

좌파 민족주의는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에 편승하려고 하고 보수적인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우파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운동 내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지배자들에 맞서 투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민족주의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 또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바로 민족주의는 어 디까지나 자본주의 국가를 성공적으로 조직하려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예컨대 좌파 민족주의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식 경제 개발이 아주 억압적이고 나쁜 것이었다고 보면서도 한국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 자체 에 대한 자부심은 공유한다. 또는 우파적 정책을 비판할 때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에 "실익이 없다"는 논리를 주되게 내세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좌파 민족주의 는 우파의 민족주의에 저항할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민족주의는 어느 경우든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운다. 이 때문에 때때로 계급 투쟁이 민족의 통합을 저해하고 일부 민족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신성한 국익 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좌파 민족주의의 목표는 '한 줌의 반민족 우파를 몰아내고 나머지 민족이 단결해 진정한 민족적 이익 - 남북 통일, 재벌 개혁 등 - 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 고 이런 전략을 이룰 수단은 결국 국가다.

따라서 그 실천적 결론은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과 좌파 민족주의적 개혁 요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정부를 세우는 것이 된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그것을 이 루기 위해 우파를 제외한 나머지 민족 전체, 즉 계급 협력을 중시한다. 그 협력 대상에는 자본가 계급의 일부(가령 남북 경제 협력을 진전시킨 현대 정주영 등) 와 그 정치 세력인 민주당이 포함된다.

그러나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이지 못한 계급 협력적 입장에서 과거사나 한일 갈등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운동의 전망이 매우 어그러질 수 있다.

민주당은 한때 독재 정권의 정치적 경쟁자로서 탄압을 받았고, 그 정권이 무너지자 수혜자가 된 세력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전통적 우파들과 달리 당내 진 보파를 통해 사회 운동의 온건한 경향을 포섭하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에, 우파 정당과 경쟁하거나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지지를 구하려고 할 때 좌파 민족주의적인 언사를 많이 한다. 

그러나 역대 민주당 정부는 입으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균형"을 말하면서도 실천에서는 늘 한미동맹을 우선시했다. 민주당 또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핵심 목표로 삼는 당이라는 점에서 우파 정당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은 때때로 대중 운동 일부와 연계를 맺는다. 가령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은 윤석열의 강제동원 합의 철회를 요구하고 심지어 거리 집회에도 동참했 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는 그들과 공동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잃게 되면 운동의 지평과 전망, 요구와 투쟁 수위, 전술 자체를 훼손시킬 수 있다.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려면 민주당에 대한 필요한 비판을 삼가지 않아야 한다. 가령 강제동원 합의 문제에서 첫째, 민주당은 한일 합의 배후에 미국의 제국주 의적 후원과 압박이 있다는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둘째, 민주당은 한국 측이 일본 측에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점은 맹렬하게 비판해도, 일본 제국주의와 단 절할 생각 자체는 하지 않는다. 민주당도 한국 지배계급에게 낙점받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셋째, 민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의 대일본 외 교도 배신적이었거나 배신에 가까운 기회주의였다는 점에 대해 침묵한다.

정치적 독립성을 잃고 계급 협력을 추진했던 좌파 민족주의 노선은 민주당을 노동계급 운동으로 견인하기보다는, 그 반대로 역대 민주당 정부가 아래로부터 의 불만과 투쟁을 억누르고 자제시키려 할 때 이용되는 처지가 되곤 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는 2000년에 첫 남북 정상회담 분위기를 이용해 좌파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달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고립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에 롯데호텔•사회보험 노동자 투쟁, 2001년에 대량 해고에 반대하는 대우차 노동자 투쟁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노총 안팎의 좌파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김대중 퇴진 투쟁에 나서는 것에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가 흔들리면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를 해칠까 봐서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편에서는 금강산 관광과 6•15공동선언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과 서해에서 교전을 벌이는 식의 모순투성이였는데 말이다. 

2019년 한일 갈등 당시 문재인 정부는 또 다른 사례다. 그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화이트리스트 제외)가 발표돼 본격적인 한일 갈등이 시작되자 이것 이 다른 모든 쟁점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직전까지 학교 비정규직 등 정부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부는 지금은 투쟁할 때가 아 니라 국난 극복과 우리 기업"을 위해 정부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쏟아 냈다. 당시 국무총리 이낙연은 국무회의에서 "노조 파업 자제"를 노 골적으로 요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보계와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세를 폭로하면서도 노동계급의 대정부 투쟁을 강화하기보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일 제스처를 지지하거나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협의회'에 참가하는 등 민족주의적으로 대처해 계급 대립을 흐렸다. 민주노총의 주요 대형 노조인 현대차 노조는 파업 계획을 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에 협력한 결과로 돌아온 정부의 대답은 기업 지원과 노동 개악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 갈등을 핑계로 기업 지원을 확대하고, 산업 안전 규제 를 풀고, 노동시간 연장을 추진했다.

이처럼 민주당을 사회 운동에 이롭게 '활용 하려는 전략은 현실에서 늘 심각한 장애에 부딪혀 결국 활용을 '당하기'가 십상이다.

반제국주의 투쟁을 일관되게 건설하려면 민족 구성원 전체가 제국주의와 관련해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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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

한국 국가와 자본주의의 이익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국익'이라는 가치 중심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좌파 민족주의 관점은 우파 민족주의에 맞선 효과적인 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

각국 대중이 국경을 기준으로 저마다의 국익'을 추구하며 갈갈이 나뉘면 결국 자본주의•제국주의 경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 군사력 강화나 제국주의 강 대국과의 동맹 문제에서 일관된 대안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맞선 진정한 대안은 국제주의적이어야 한다.

물론 아마도 국제주의라는 좋은 가치를 대놓고 거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주의는 흔히 '인류애' 같이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또는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잘 교육하는 문제나 그런 일을 수행하 는 국제기구의 활동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생각하는 진정한 국제주의는 다른 국가 사람을 편견 없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 이상이다.

경쟁하는 세계 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는 아무리 개인들이 서로 우호적으로 지내려 해도 필연적으로 국가 간 갈등을 야기한다.

각국 지배계급은 군비 경쟁 속에서 언젠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박살 내 버릴 무지막지한 무기들을 축적하고, 국민들에게 자국의 군사력 강화를 지지하라고 강 요한다.

결국 국제주의는 사람들의 머릿속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즉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를 바꾸는 문제여야 한다.

국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고 그에 맞서 강력한 투쟁을 벌일 잠재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주체이다.

제국주의 전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것 또한 세계 각국의 노동계급 대중이다.

과거 일제의 침략 전쟁에서도 평범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일본 국가나 자본가들보다 조선인 노동자들과 훨씬 더 가까웠다. 1944년에 군함도(하시 마)로 끌려갔던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전영식 할아버지는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인들의 일터는 일본인과는 달랐고 갱 밖에서도 거의 접촉이 없었지만 어느 날 우연히 징역형을 받았다는 일본인들을 만났다. [그들이] '일본 정부가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무 서워서 그 후 만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조차 하시마는 지옥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와 침략 전쟁은 결코 전선의 전방과 후방에서 마른 걸레 쥐어짜듯 착취당했던 일본인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해 식민지 해방과 일본인-조선인 간 연대를 호소하는 운동이 성장하기도 했고, 1945년
10월에는 패전 후 첫 노동자 소요를 조선인과 중국인 광부들이 일으켰을 때, 이 투쟁은 곧 일본인 광부들에게도 번졌다.

엄혹한 억압과 차별,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민족과 국경을 넘어선 노동계급 연대의 가능성은 싹텄던 것이다.

국제주의는 가능하다

더 커다란 규모에서도 노동계급의 국제주의적 연대는 거듭거듭 벌어져 왔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초에 노동자들은 전쟁에 열광했다. 이는 주요국 지배계급이 전쟁 전 여러 해 동안 제국주의적•국수주의적 선전을 해댄 것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참혹했고, 그래서 전쟁을 영광스럽다고 찬양하는 지배계급의 선전은 금세 힘을 잃었다.

전쟁은 국민이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사회가 계급으로 철저하게 나뉘어 있으며 전쟁터에서는 그것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만들었다. 병사들과 민중에게 남은 것은 시신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개죽음, 전쟁 트라우마, 장애, 가족을 잃은 고통뿐이었다. 하지 만 장군들은 전쟁터에서조차 병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좋은 음식과 포도주, 좋은 숙소를 누렸다.

병사들은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에 반대해 적 병사들과 우애를 다지거나, 전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한 저항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관되게 발전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무너뜨린 1917년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기존 지배계급이 수행하던 전쟁을 40일 만에 중단시켰다. 그리고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맺은 전쟁 협정들을 모두 파기하며 국제 노동계급에게 전쟁을 거부하고 제국주의에 맞서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혁명 러시아의 국제적 호소는 이전의 운동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희망을, 전 세계 지배계급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1918년 러시아의 교전국이던 독일에서도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물러나고 서부전선이 사라지면서 제1차세계대전이 끝 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계급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그러므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세계의 진정한 분단선은 민 족(국가)이 아니라 계급이다. 궁극적으로 계급으로 분단된 사회가 사라져야만 국가들 간의 적대적 대결도 사라질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자국 지배계급의 (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운다면, 우리 자신의 평화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나라 노동계급에게 연대를 호소할 수 있다.

지금 윤석열은 압도적 전쟁 준비"를 하자고 하고 기시다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자고 한다. 이들에 맞서 서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주체는 한국과 일본의 노동계급이다.

우리는 미국·일본 제국주의와 그에 협조하는 한국 정부에 반대하고, 두 나라 노동계급의 공통의 이익인 경쟁적 군비 증강 반대, 일본 평화헌법 개정 반대 일군사정보보호협정 등 군사 동맹 폐기 등을 주장하며 싸워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적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지금, 계급투쟁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은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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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와 페미니즘 반제국주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현재적 과제를 일본 국가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성폭력을 양산하는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일본 국가 의 제국주의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항의라는 더 본질적인 문제를 부당하게 반일민족주의적 포퓰리즘과 등치시킨다.

"일본의 사죄•보상의 법적 형식에 집착하면서 현재적 과제가 상대화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는 성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성찰하기보다 일본이 법 적 배상을 하면 해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족 피해를 부각하는 운동방식이 반일감정을 부추겨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화하고 있다.]"('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이유미,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0 가을호》)

그러나 법적 배상 문제는 단지 일본 정부로부터 금전적으로 보상받는다는 것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물론 금전적 보상이 중요치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 때 피해자 1인당 위로금과 이번 위안부 피해 배상 판결 금액이 같음에도 위안부 합의를 거부했던 할머니들이 배상 판결은 크게 환 영한 것을 보면, 돈 문제는 진정한 쟁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적 배상은 일본 국가가 제국주의 전쟁 범죄의 주체였음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피해에 공식적으 로 책임진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일본 측의 위로금 지급이나 사과 표현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우파들은 일본 고위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사죄하고 돈도 줬는 데 아직도 부족하냐고 따진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껏해야 위안부 문제를 일부 군부대의 일탈 행위와 그에 대한 군의 "관여"로 보는 데 그쳤다. 2015년 한일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일본 정부와 우파 정치인들은 뒤돌아서서 또다시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등 막말을 해대고 피해자들을 모욕했다.

이런 일본 정부에 한국 정부는 도전한 적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지정학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고, 어쨌거나 한국 자본주의도 이 관계에서 득을 봐 왔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타협•밀월과 여론 눈치 보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득을 얻으려 했다.

사정이 이러니,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걸어서라도 법적 배상을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 문제를 거세하고 성폭력 구조 문제로 조명하는 관점도 문제다.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나영 교수는 이러한 페미니즘 시각이 뚜렸하다.

"민족주의 담론은 일본의 민족주의와 대립각을 만들어 내면서 국민국가 간의 적대적 경계를 확인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 [한국의] 민족주의 남성들의 언설은 [위안부 문제라는] "기가 막히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제국주의의 문제로 위치시킴으로써 한국 남성과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에 대한 성찰로부터 교묘히 벗어난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 : 포스트/식민국가의 역사적 현재성", 이나영, 《아세아 연구》, 2010)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또한 교묘하게 이용한다.(박유하는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앞세우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차별당하긴 했 지만 실은 애국적 존재로서 일본군 병사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 학자다.)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의 문제라면서 반일 민족주의 적 피해 의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흐려서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물론 반일 민족주의적 관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런 접근법은 오늘날의 한•미•일 관계를 잘못 이해해 한국 정부(주로 민주당 정부)에는 부적절하게 면죄부 를 주고, 반제국주의적 국제 연대의 가능성은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난점은 페미니즘으로 극복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당한 끔찍한 성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이 언뜻 보면 민족을 뛰어 넘는 인류 보편적 연대에 더 도움이 되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예컨대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정대협은 1990년대에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개입해 위안부 문제 관련 결의문을 통과시키려 애썼다. 그런데 이때 유엔 위원들 은 결의문의 초점을 배상(즉, 국가 범죄)에서 전시 성범죄 문제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전시 성범죄에는 군대에 의해 자행되는 성범죄뿐 아니라 전쟁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성범죄도 포함된다."(위키

이 때문에 전시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의 '확장'은 사실상 위안부 문제의 핵심적인 역사적 맥락(일본 국가의 전쟁 범죄)을 다른 문제들과 섞어 버렸다.

또한 정대협은 유엔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 여성단체들과의 협력 도모를 중시했다. 2005년 정대협 공동대표이자 정대협이 유엔에 개입할 때 참여 했던 정진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전시 하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 위치 짓게 된 것은 여성단체들과의 연대가 보다 범위가 넓고 지속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 문제가 결정적이었던 듯하다. 1992년 제1차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일본 측에서 참석한 한 변호사는 한국 측에서 민족적인 문제를 거론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 압도 다수가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 문제를 일반적인 성범죄나 남성 일반의 문 제로 넓히면 누구를 대상으로 싸우고 책임을 물을 것인지가 불분명해진다.

결국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유엔 결의문이 여러 번 나오고 2007년에는 미국 하원 의회에서도 결의문이 통과됐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가령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 직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한국 외교부 장관 출신 반기문은 합의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 또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게 되기 십상이고, 효과적인 반제국주의 운동 건설을 어렵

제국주의 반대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민족 억압 문제다. 이 점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한•일 관계가 더는 직접적 식민 지배 관계가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규명해야 한다.

그 열쇠, 즉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현재적 의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키우고 있고, 일본 정부는 그런 드라이브를 계속 걸기 위해 어떻게든 과거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이 패전국으로서의 제약을 벗어 던지고 다시금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핵심 동맹으로 여기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 제국주의가 있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과거사 '따위'는 잊고 현재의 제국주의를 위해 협력하기를 바란다.

한국 지배계급은 전통적으로 미국•일본 제국주의와 협력하며 성장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정부를 포함하는 역대 한국 정부들도 그 관계를 과거사 해결보다 중 시했고, 결국 위안부 문제 해결은 매번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강조하건대, 한국 국가(여야를 막론하고)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가로막아 온 국제 질서의 일부다. 우리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또 국 제기구나 국제법에 기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한국 정부에 맞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국제주의이고, 반일 민족주의에 대한 진정으로 효과적인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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