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7

17 제55회 KPI평화포럼 자료집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제55회 KPI평화포럼 자료집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일시 : 2017년 10월 31일(화) 16:00~18:30 장소 : 서울대병원 함춘회관 가천홀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포럼일정



등 록 15:30-16:00



개회사 윤덕룡 박사(KPI 원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 16:00-16:10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사회 전우택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부 : 주제발표




발제① 예언자들의 회복적 정의와 사회적 치유 사상 김회권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16:20-16:50


발제② 용서와 화해, 그 불가능에서 가능성으로 가는 길 이해완 교수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16:50-17:20


Coffee Break




2부 : 지정 및 종합토론




토론① 백광훈 박사 (문화선교연구원) 토론② 박종운 변호사 (법무법인 하민) 토론③ 전우택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7:30-18:00


발제자 및 청중

18:00-18:30


|제55회 KPI평화포럼| 1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목 차

l 목 차 ·························································································3

l 발표문

예언자들의 회복적 정의와 사회적 치유 사상 김회권 ·············5 용서와 화해, 그 불가능에서 가능성으로 가는 길 이해완 ·····23

l 부 록

한반도평화연구원 소개 ·························································60

연혁 ························································································61 조직 및 연구위원 ··································································62 KPI평화포럼(공개포럼) 개최 현황 ········································64

출간도서 소개 ········································································68

|제55회 KPI평화포럼| 3






















I. 예언자들의 중심과제와 신학적 고투

이스라엘 남북조 왕조의 경제적 전성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은 망가지

고 무너진 언약공동체 회복을 겨냥했다. 특히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은 인간 왕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과 탄핵을 연료로 삼아 발진(發進)한 과격한 신정통치적 이상의 견인차였다. 예언자들의 눈에 비친 왕정시대는 사사시대의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 태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전제왕권을 휘두르는 인간 왕들은 하나님의 직접적 통 치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임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나 님의 어전회의에서 의논된 의제(agenda)를 지상의 왕들과 지배층에게 전달하는 거룩한 전령(messenger)이라고 자임하였다(렘 23:18-23). 그래서 예언자들의 신탁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대표하는 예언자들이 지상의 왕국들과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이 고전적 예언자들의 예언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는 보고가 아니라 당대의 역사적 격변들 및 자연재해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청중들에게 회개와 질정을 강청하는 신탁이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점성술에서 주로 시도하는 미래 예측 fortune-telling이 아니라 현실분석이었으며, 동시대 사람들(왕, 관리, 지배계 층, 그리고 일반 백성)의 마음에 모종의 결단을 하도록 촉구하는 신언(神言) 대변 이었다. 그래서 예언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잣대로 볼 때- 급 격한 퇴락과 영적 일탈의 길로 치달을 때 분출하였다. 예언은 위기의 순간에 인간 의 역사를 덮친 신적 언어 기습이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국이 맞이한 주전 8 세기 중후반(750-701년: 아모스 사역 시작 기점-이사야 사역 종료시점)은 위기 의 시대였다. 정상적으로 운용되던 하나님 뜻의 전달 과정(왕을 통한 전달, 제사장 과 선견자, 혹은 성소 중심의 예언자 집단)은 더 이상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회리바람같은 예언운동이 주전 8세기 중후반에 일어났던 것이 다. 물론 이런 예언자들이 질풍노도처럼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진동하기 전에도 많 은 생계유지형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미 3장). 그들은 모두 소비자/고객 중 심의 예언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공적인 담론으로 전하지 못하였고, 지극히 사유화된 “예언”으로 개인들의 길흉화복을 예측하고 그것들에 대 처할 만한 액땜들을 처방하는 정도의 사역에 머물렀다. 이에 비해 8세기 예언자들 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 담론으로 격상시켰고, 자신들을 찾아오는 소비자/고객 중 심의 신탁을 중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계층에게 하나님의 말 씀을 중개하였다. 그들은 당대의 역사적인 재난이나 국내적/국제적인 위기정세들 을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의 빛 하에서 해석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언자들은 철 두철미하게 동시대의 중심과제를 안고 씨름하던 사람들이다.
II. 8세기 예언자들 사이의 차이점들과 공통 메시지1)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의 예언들에서 발견되는 각각의 특징적인 요소들은 이 네 예언자들을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알려준다. 그러 나 이 네 선지자들이 그들이 상속한 구원사 전승을 어떤 예언자들보다 더욱 급진적 으로 과격하게 상대화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면밀하게 관 찰해 보면 그들의 신학적인 스펙트럼은 다소간 차위점(差位点)을 드러낸다.

호세아와 이사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호세아는 북쪽 왕국 출신이며 왕국 혹은 왕에 의하여 함축되는 모든 사상/제도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참조 6:2). 네 예언자들 중에서 호세아가 제의로부터 도출되는 족장시대의 관념

(patriarchal concepts)에 가장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호세아는 족장전승과 출애 굽 전승을 명시적으로 인용한 듯이 보인다. 그는 성스런 영역들에서 일어나는 문제 들과 제의적인 불법/일탈들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사야는 남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 출신이며 그 자신이 왕족

이거나 귀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다의 궁중정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1) 이 단락의 논의는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2, (trans. D. M. G. Stalker; Louisville: John Knox Press, 2000), pp. 177-184에 빚지고 있다.

대단한 관심을 드러낸다. 이사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들보다 세계정치와 정세의 예 리한 관찰자였다(13-23장). 그는 정치적인 요지경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 을 하나님의 과격한 의도(계획)의 일부로 파악하였다. 그는 어찌하든지 야웨께서 시온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믿었고, 결국에는 의와 공평의 통치를 가져올 한 이상왕 이 시온에 나타나 하나님의 세계적 통치를 매개하게 될 이상 왕 시대를 갈망하였

다. 호세아와는 달리 그는 왕이야말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 한 가운데 배치되어 있는 구속사적인 중심기관이라고 보았다(시편 72, 89, 132편).

이런 특징적인 차이들은 아모스와 미가 사이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모

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호세아의 주요 논제-가나안 바알숭배에 의한 야웨 예배의 순결성 위협-에 의하여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모스는 오히려 공의없는 종교의 위험성과 아무런 의미없는 성지순례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데 힘 을 쏟는다. 그는 또한 이사야와는 달리 잘못 기획된 정책들이나 군사무장 정책, 그 리고 외국과의 동맹정책들에 대하여 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가와 이사야는 시온 함락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다른 생각을 가졌 던 것처럼 보인다. 당대의 예루살렘 권력 엘리트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시온불패

(the invincibility of Zion; 시온의 안전보장에 대한 신적인 확신) 신앙을 가지고 있 었다. 하지만 이사야는 시온이 멸망당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예언하지 않았으나 시 온이 굴욕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가는 시 온이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도말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2)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네 명의 8세기 예언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 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관념들에 비 하면 너무나 과격하고 혁신적이다. 따라서 이 과격성의 일치가 그들의 차이들을 사 소해 보이게 만든다. 여기서부터 8세기 예언자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혁신적이라 고 느껴졌을 법한 요소들을 논해보자.

무엇보다도 8세기 예언자들은 당대의 사람들과 구별된 외톨이들이었다. 그들의 소명경험은 그들에게 야웨에 대한 독특한 앎과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계획들에



2) 위의 책, p. 176.

대한 직접적인 앎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전승(전통)의 창조적인 계승자였다(시내 산 전승; 출애굽 전승; 선택 및 계약 전승; 십계명 전승). 그들은 이 물려받은 구원 사전승을 그들 당대의 시대에 상관성있게 말하도록 해석한 자들이다(예. 암 9:7 블 레셋과 아람의 “출애굽”). 그들은 이러한 과격한 재해석이 야웨의 “계몽” 혹은 “계 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였다(점진적으로 확보한 지식이나 확신이 아님).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비인습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묘사(사 7:20 이발 비유; 호 5:12 이스라엘 몸에 생긴 종기; 성공하지 못한 연인 [사 5:1ff])하였다. 이러한 과격성은 예언자들이 직면한 상황과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틀에 의하 여 정당화되었다. 그들이 외친 가장 새롭고 충격적인 메시지는 야웨가 이스라엘을 심판의 보좌 앞으로 소환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암 8:2). 이런 메시지를 가능케 한 역사적인 상황은 앗수르의 팔레스틴 진출이었다. 거의 상투적인 문체이긴 하지 만 아모스는 그 심판이 포로로 잡혀가는 형식으로 집행될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은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다수의 요인들에 의하여 촉발되어졌 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의 사실로 말하였고 그들 동시대의 사람들의 전적 인 삶-경제적, 정치적 및 종교적 삶의 체계-이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 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적 사상들,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관 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그 예언자들이 옛 야웨 신앙의 전승들을 그들의 출발 점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옛 전승들이야말로 그들의 공격의 주대 상이 되었고 거듭하여 그것들을 그들의 논쟁의 토대로 삼았다. 옛 야웨주의 신앙은 그들과 동시대 청중들이 공통으로 서 있는 근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대인들과 전승 해석상에서 달랐다. 예언자들이 보기에는 그 옛 전승들이 결코 구원을 담보해 주지 못하였다(예. 암 3:1f). 여기가 “율법”-그 용어의 고유한 의미에서-이 처음 으로 설교되었던 경우다(상업적/경제적인 불의의 비판 근거인 율법).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어떤 특정한 사회집단의 혁명적인 대변인으로 자임하지 않았다. 거듭해 서 우리는 그들이 옛 율법을 그들 자신의 당대적인 상황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음 을 알 수 있다.3) 이사야는 시온전승을 이용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 였다. 그는 유다의 군사적 무장이나 외국과의 동맹외교를 통하여 안전보장을 획책



3) 위의 책, pp. 180-182.

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불신앙의 행위라고 보았다. 호세아는 땅의 구원적 가치(saving gift)에서 출발하여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불 신실성을 공격하였다. 이스라엘 동시대인들은 땅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조건 적인 선물인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회의 전형적인 죄 라고 생각되는 모든 행위들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야웨 하나님의 심판 근거로 제 시한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자들은 역사 속에 작용하는 야웨의 의도와 목적들의 존재를

가장 명확하게 인정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작용하는 그 다양한 힘들을 다른 사 람들과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정치적인 무대의 중심무대를 차지하였던 위대한 세 력들(열강이나 토착지배층)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의 눈(관점)을 멀게 하지 못하 였다.4) 그러나 하나의 예상되는 오해는 시정되어야 한다. 예언자들이 현대인들의 실증주의적인 역사이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미래 예언은 그들이 기반하고 있는 옛 전승에 영향을 받고 있다. 다가올 미래의 구원은 옛 전승들에서 경험된 구원에 상응한 구원들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반(反)모형과 모형의 관계다. 예언자들이 미래를 말할 때 그들은 옛 전승의 해석자로 기능하는 셈이다. 결국 예언자들은 구원이 심판의 그림자라는 형태로 온다는 사실을 선포하 였다.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구원의 행위와 상관없이 의도한 것은 아 니라는 것이다. 특별한 계시의 도움이 없이 구원전승자체에 내재된 원리의 확장이 었다.5) 예언자들은 아브라함-모세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역사의 계승자요 회복자들이었다. 그들은 옛 언약전승의 창조적 해석자들이요 당대적 적용자들이었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시내산 언약중재자(言約中哉者, Covenant Mediator)들이었다. 그들은 모세 뒤에 모세적 권위를 갖고 하나 님말씀을 대변했다(신 18:15-18). 그들은 언약공동체에서 이탈된 개인들을 다시



4) 위의 책, pp. 183-184.

5) 이 단원은 폰라드의 위의 책, pp. 176-180, pp. 183-184 혹은 동일 저자의 다른

글, “Eighth Century Prophecy,” in Eds. Ben C. Ollenburger et al., The Flowering of Old Testament Theology (Eisenbrauns, 1992), pp. 120-147에 빚지고 있다.

언약적 의무로 불러들이고 언약관계가 부서져 해체의 길로 질주하는 사회를 하나 님의 언약으로 대면시켰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멀리 추방된 먼 자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왕들과 지배층들과 갈등과 충돌을 자초했다. 예언자는 왕들과 지배층들에 대한 비난 목적이 아니라 언약의 중재자로서 하나님 의 언약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애쓰다가 야웨의 언약백성들 고난의 뿌리에는 왕들과 지배층의 탐욕과 불법과 부당한 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왕들과 지배층을 비판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삶을 자세히 돌보면서 그들의 곤경을 뼛속깊이 공감한 후에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왕들과 지배층에게 이스라엘과 야 웨가 맺은 언약을 상기시킨 것이다. 예언자들의 왕들과 지배층 비판, 그리고 자유 농민 옹호(과부와 고아) 행위는 언약의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처 럼 예언자는 생활 밀착형 언약중재자, 특히 자유농민 친화적 언약중재자였다. 이런 언약중재적인 예언자들의 효시에 모세가 있다. 히브리 노예들이 안식을 박탈당한 채 학대받을 때 그들에게 안식권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파라오에게 가서 “Let my people go”(“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고 외쳤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되찾기 위하여, 언약의 의무사항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권리와 의무 를 되찾아 주기 위해 파라오에게 요구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가서 3일 동안 예배드리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히브리 노예들이 민족 파괴적인 죄의 노예 상태로 전락하기 전에 마땅히 누렸던 예배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세 는 언약중재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신탁)의 대언자인 예언자들 은 하나님 말씀을 육화시키는 언약중재자들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를 유지, 보존, 심화시키는 자들이었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언약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로 창조된 것임을 깨달았다. 창세기 1:26-28, 2:16-17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아담에게 사명 을 주시는 일 자체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언약적 관계 안으로 창조한 것임을 보여준다. 창세기 2장 16-17절의 핵심인, ‘네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는 신명기 30:11-16의 논리와 닮았다. ‘내가 네 앞에 생 명과 죽음을 놓았다. 생명을 선택하라. 만일 이 경고를 어기면 죽는다.’ 이것은 계





약저주 조항이다. 창세기 1-3장에도 ‘창조-문화창조계명-생명과 죽음의 계명 제 시-계명 불순종시 일어날 사태 선포’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안에 바로 모세 오경의 언약신학적인 패턴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6) 아담도 진공상태에서 창 조된 것이 아니라 계약과 의무와 약속의 조건상태에서 창조됐다는 말이다. 하나님 은 아담을 창조할 때 본능으로만 행동하는 하등동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본능과 자유의지를 가져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예측불허적 우발성(자유선택)을 누리는 존재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우발적인 행동 때문에 당황하실 수 있는 사태를 예상

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인간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조바심을 내는 인격적 차원을 가진 언약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 인격적인 하나님 이 되시기 위해 스스로 무력해 지신 것이다. 아담인류가 마음대로 악행을 범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 defenseless God(“자기 보호를 못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7) 속수무책으로 인간들에게 공 격당하고도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지극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들은 유대인 신학자들이었다(엘리 위젤, 존 레벤슨). 이런 하나님의 곤경을 다루는 신학

을 ‘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 이후 신학’(Post- Holocaust Theology)이라고 한다. 유대인 대학살 이후의 신학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악 과 공격에 무차별하게 당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인격성과 자유 허용 때문 에 인간의 악행을 무효화하기 위해 신적 공권력을 임의로 쓰지 못하신다. 하나님이 공권력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전능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전능성과 인격 성의 변증법적인 긴장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다가 부



6) 창조를 언약관계로 다루는 신학적 논의를 참조하려면 G. Vos가 쓴 Biblical Theology (이승구 역,『성경신학』[생명의 말씀사, 1983])와 P. Robertson이 쓴 책 Christ of the Covenants [김의환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를 보라.

7) 위르겐 몰트만,『십자가에 달린 하나님(1967)』은 하나님의 전능성의 일시적이고 자발적 유보를 설명한다. 이 속수무책적인 하나님의 파토스에 대한 심층해설은 아 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책『예언자들』(이현주역, 삼인, 2006)에서 자세히 제시된

다. 가장 자세한 논의는 헨드리쿠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 Christian Theology (『기독교신학개론』, 신경수 역)에 나온다.

활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양심에 호소해서 인간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서 악을 일 망타진하는 방법을 취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약관계를 설정해 놓고 인간을 창 조해 이 언약관계로 초청했고,8) 또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악행의지까지 포함)를 유효하게 만드시기 위해 인간악행을 순식간에 취소시키는 그런 방식의 전능성을 억제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권력 대신에 예언자들을 통해 인간양심에 호소하시고 지극히 자발적인 인간의 순종과 이해를 요청하신다.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 는 신언(신탁) 납득자요 신언대변자였다.

예언자들은 왜 갑자기 주전 750년경부터 떼지어 등장했는가? 앞서 잠시 암시했

듯이 주전 8세기가 언약공동체 해체위기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주전 780년부터 약 30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의 땅에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전 설적인 두 왕이 최장기간 나라를 통치한다. 52년간 유다를 통치한 웃시야왕과 50 여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왕이 각각 나라를 장기 통치하면서 부 국강병의 시대를 열었다. 이 안정된 시기로 인해 관료제도가 발전했고 그 결과 생 겨난 지배층의 기득권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 전쟁 없는 50년간 여로보암 2세 의 북이스라엘과 웃시야왕의 남유다 지배층(지주, 재판관, 거짓 예언자, 종교지도 자들)은 일치단결해서 자유농민의 땅들을 빼앗고 안식년과 희년이 되어도 자유농 민 동포들에게 되돌려주지 않았다. 지주들을 비롯한 지배층 엘리트들은 재판제도 를 통하여 자유농민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의 땅을 다 빼앗았다. 이사야 5장 8-10절, 아모스 3장, 5장에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예언자적 동정이 표 출된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채무 때문에 살림 전체가 어려워졌고, 급기야 노예 로 전락했다. 그래서 주전 8세기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가난한 사람들”이라 는 말이 등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업의 땅을 상실해 언약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 신앙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이스 라엘 자유농민들의 땅을 되찾아주고 그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주기 위하여, 즉 하나 님 마음을 대변하기 위해서 신탁을 전했다. 예언활동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8)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사이는 언약관계적인 상대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담이 최초 의 언약관계 중보자였다.

백성의 언약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언약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물질적 증거는 땅이었다. 맹자가 말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의 원리 와 유사한 모세오경의 땅 신학사상을 내세우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언약 백성의 권 리인 땅을 되찾아주려고 분투했다. 땅은 단지 생존권의 토대 이상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면 땅을 자작자경하는 자유농민의 신분이 요청되었다. 땅은 하나님 의 언약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작할 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 님의 언약에 결박시키는 가시적 언약 자체였다. 경작할 땅이 없으면, 언약을 지킬 필요도 없는 노예로 전락해 버린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 언약관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땅을 경작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에게 백성이 된다”는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이스라엘 언약을 정형화하 공식구문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되어 준다는 말은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땅을 준다는 말이다(창 17:7-10). ‘너는 내 백성이다’라는 말은 땅을 경작해서 언약적 의무를 행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땅이 없다는 말은 언약의무가 없다는 말이다(No Land, No Covenant)(삼상 26:19; 시 104:44-45).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역할을 하려 면 땅을 주셔야 한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회복적 정의는 땅과 신앙의 자유와 권리, 언약의무감을 한꺼번에 되찾아주려는 신정정치적 관여행위였다.
III. 예언자들의 회복적 정의, 치드코트 아도나이(the Righteous Acts of God)

이처럼 8세기 예언자들의 공통메시지는 하나님의 회복적 의다. 그들은 언약공동

체에서 분리되어 잃어버린 자된 농민들을 다시 자유자작 농민으로 재활복구시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언약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언약수호적 의지 를 대변했다. 그들이 외친 정의는 체데크와 미쉬파트로서 전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공동체 안에 결속시켜 주시는 신적 호의와 친절함이다. 그래서 체데크는 항상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 쪽으로 쏠리는 편애이다. 이 회복적 의는 과부에 대한 신 적인 연민이요, 그들의 삶에 자신을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얽어매는 일이다. 일방 적으로 노예백성의 운명과 얽어맨 하나님은 바로 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의 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불의의 방벽을 넘어 무너뜨리는 도전이며, 쉬지 않는 돌 진이다. 메마른 땅에 생명을 주는 강물같이 메시아적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의는 오늘도 힘차게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들의 회복적 의는 서구인들의 헬레니즘적 정의 개념과는 다

른 히브리적 개념이다. 각자에게 제 몫을 돌려주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시행되는 정의는 계급사회를 온존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표현 이외에 다름 아니다. 또는 역사 의 적폐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응징적 처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동안 예언자들의 의사상에 대한 통속적 이해는 냉정함, 정확성, 수학적 평 형상태, 창백한 합리주의와 함께 연상되어진다. 이런 이해는 아마 구약종교를 율법 주의적이며 신약의 은혜스러움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보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들, 치드 코트 아도나이는 정의와 공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들은 정의라 고 번역된 체데크(tsedeq)와 츠다카(tsedaqa)이다. 이 예언자들의 의란 이상적인 관계 혹은 정적인 평형 상태 혹은 지각있는 기준들의 설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 격적 관계에 대한 법률적 규정 이상이다. 예언자들이 외친 의란 창조주 하나님 안 에 있는 인격적 신실성(firmness)이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성 품운동이다. 의는 하나님의 인격 속에 있는 물리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긴 신실성을 가리키며 세계창조의 원천이며 세계보존의 원동력이다. 이 신적 집요성 과 초지일관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되게 만드는 우주적 항구여일성이다. 하 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있는 의의 역동적 관계성을 피조세계에까지 확 장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의에 상응할 존재자로서 계약의 머리인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계약적 우두머리인 인간으로부터 전면적인 반역(불의)으로 하 나님의 의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의 부단한 일탈 을 하나님께서는 지치지 않는 당신의 의로 회복시켰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의의 단절을 일방적으로 메꾸어가셨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이사야 46:12)....” 즉 인간이 저질 러온 창조계약의 왜곡을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수시킴으로써 의의 관계성을 회복 시키려 하신 것이다(창세기 15:6). 결국 하나님의 의는 냉혹한 합리주의와 창백한 공정성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랑의 원천이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혜로운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 이 부조리할 정도로 지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소진되 지 않는 선(善)의지야말로 하나님의 의의 진면목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구약의 여 호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심이며, 이 진심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사랑에서는 인간을 향한 일편단심(丹心)의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의> 의 자기표현인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에 조응하지 못하고 끝없는 의의 왜곡과 일탈로 치달을 때, 하나님의 의는 가변적이고 신실하지 못한 피조물들을 쉴 새없이 붙들었고, 이 세계를 보존해 오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율법의 실천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에 조응할 수 없는 의의 일탈자와 실패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압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그동안 의 의의 채무(죄의 빚)를 다 탕감하셨다. 이 죄탕감을 받은 인간의 보은심의 역동 성 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그 의에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롬 1 :16-17). 의의 실패자들에 대한 불공정한(?) 호의와 친절은 세상 마지막 날 의의 거룩한 요구 앞에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의 심판에 내어주는 십자가의 부조리한 냉 혹함에 의해 상쇄되었다.
IV. 이스라엘과 온 인류에게 전가되고 요구되는 의

의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계창조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인 격의 핵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내면 속에서 유지하고 계시는 수미일관한 올곧음 이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고 신실한 성품이 바로 이 세계를 놀라운 질서와 운 동으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따라서 세계의 기초는 하나님의 의다. 인 격적 신실성이 이 세계의 존재기반이다. 하나님이 어느 날, 당신의 자아동일성을 잃어버리거나, 인격적 통전성(Wholeness)을 상실해 버리면, 이 세계는 혼돈과 파 멸로 치닫는다. 온 인간이 다 혼돈과 불의의 포도주에 취해 있어도 우주의 창조자 시고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인격적 신실성을 거두지 않으면, 이 세계에는 여 전히 구원의 여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사건을 통해 세계 속에 당신의 의를 전가시켜 놓으셨 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계약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의가 훼손된 곳에 당신의 의 를 전가시키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역동적이며 쉴새없이 일하는 의다.

훼손된 의의 관계를 복귀시키는 능력이며 온 세계를 의롭게 하시고야 마는 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강대한 나라(고이 가돌)가 되게 하시려고 작

정했다. 그 강대한 나라는 의와 공도(公道)를 준행하는 나라다(창 18:19; 창 12:2 고이 가돌=큰 민족). 의와 공도는 체데크와 미쉬파트다. 언약공동체의 붕괴와 해 체로 하나님 신앙과 율법준수 의무에서 탈락하는 잃어버린 자들을 재활복구시키는 일에 투신된 나라가 강대한 나라다.

이 의와 공도의 현저한 실현은 다윗왕국에서 잠정적으로 나타났다(삼하 8:15). 다윗왕의 멸망 후, 의와 공도를 기둥으로 건국될 나라는 역사의 중간 시점에서 실 현될 나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출현할 메시야왕국으로 집중되었 다. 메시야왕국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출현할 왕국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역동적 으로 화합하는 나라다. 불의에 대한 진노와 의에 대한 목마름을 비롯하여 모든 하 나님의 마음(Pathos)에 완전히 공명하는 왕은 바로 메시야이며 그가 이룰 왕국은 메시야왕국이다(사 9:1-8; 11:1-10). 이 메시야왕국은 하나님의 의가 왜곡된 곳 에 하나님의 의를 베풀어서 전가된 의를 발생시킨다. 이 전가된 의를 체험한 자에 게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하신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의와 공평을 요구했는데(암 5:24; 사 5:7), 이것은 야훼 하나님의 신학적 의를 체험한 전(前) 역사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가 된다. 하나님의 선행적인 의를 출애굽 구원이래로 계속적으 로 체험해오지 않은 민족에게 갑자기 야웨 앞에 의를 실현하라고 할 수 없다. 이스 라엘 민족은 대제국 애굽의 피억압 노예집단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 손이었다. 아브라함은 의와 공도의 나라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전가된 의 속에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사후 400년만에 그의 후속들은 노예백성의 곤고와 억 압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그의 후 손들을 아무 값없이 구원해주셨다(출 2:24). 더 나아가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 로 삼으시겠다고 더 심층적인 약속까지 하신다(출 19:5-6). 남의 땅에 붙여 살던 땅의 나그네들인 히브리 노예들에게(레 25:23)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전쟁과 시내 산 율법수여 및 계약체결, 가나안 정복전쟁 등 일련의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의 계약적인 신실성에 대한 극치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은 선행적(先行的)인 의(義)의 체험에 히브리 노예를 초청하셨다.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의 형용키 어 려운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와 신실성의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로 거듭 태어났 다.

이스라엘에게 전가되고 기대되어지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요구되어진 의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의 산물(Kant)도 아니고, 인간 상호간의 약정도 아니다. 인간 의 소위 기본적 양심과 이성이 요구하는 최상의 수준의 윤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부조리할 정도로 일방적이고 은혜로운 사랑과 자비의 결정체인 의에 대한 최소치 의 인격적인 응답이다. 아모스가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고 소리칠 때 그 정의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논의되는 4주덕(四主德)중에 하나인 ‘정의’의 덕목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은혜로운 회상과 깨어있음 없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자 체는 딛고 설 땅이 없어진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의 정의 요구는 이스라 엘의 존재기반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역동적 응답으로써 전가된 의의 요구 다. 무(無)에서 시작된 가나안 땅 정복과 그 후의 땅 분배는 완전히 하나님의 계약 적 신의의 관계, 이웃과의 의 관계의 유지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 게 만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집단적 체험을 전가된 의 로 응답치 못했다. 참 포도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맺었다(사 5:1-2). “그들에게 공 평(미쉬파트)을 바랐더니 도리어 포학(미쉬파흐)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 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하나님의 의의 선행적 체험, 즉 전가된 의 관계 속에 건국된 이스라엘이 의 관계 를 유지하지 못할 때 그것은 존재의 소멸을 뜻한다. 한 무더기 중근동 이교도 족속 중의 하나로서는 존재하나, 역동적 의 체험 속에서, 그 의로 유지되고, 성장해가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치 않은 것이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가 일반적 도덕률의 파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에 대한 인격적 배은망 덕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국기(國基)는 하나님의 의와 은 혜스러움에 대한 쉼 없는 각성 위에서 창출되는 후속적인 전가된 의의 실천이었다. 이 전가된 의가 사라진 곳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해체가 뒤따를 수밖에 없

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전가된 의(義)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의의 실패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 인류 또한 실패하였다.
V. 결론: 사회적 치유자로서 구약 예언자들, 그리고 왕같은 제사장들의 공동체

하나님께서는 당신 속에 있는 의의 심층 전부를 과시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창조

하셨다. 하나님 속에 굄 없이 흐르는 의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에너지요, 그것은 의 관계가 훼손된 곳을 향해 하수와 강물처럼 돌진하는 흐름이다. 하나님의 의의 요구는 중립지대에서 발생치 않고 하나님의 의의 은혜스러움을 미리 맛본 자에게 서 발생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약적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이 집중적으로 베풀어진 곳이다. 하나님의 의와 일방적인 구원과 자비의 역사가 강물 처럼, 하수처럼 흘렀던 곳이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이 선행적이고 원천적인 하나님 의 의에 대한 응답으로써 정의를 하수처럼 흘려보내야 한다. 야훼가 히브리 노예에 게 해방자, 기업무를 자(채무를 대신 갚아 주는 친족관계에 있는 계약 당사자)로 행세해 주듯이, 이스라엘은 동료 계약 당사자를 향하여 서로 해방자, 기업무를 자 가 되어야 한다. 야훼의 일방적인 의 체험에 초대받지 못한 이교도들이 ‘만인의 만 인에 대한 이리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때도 이스라엘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해방자’로 살아야 했다. 구약에서 의란 자기의 노동과 공로에 따라 정확히 제 몫을 찾아먹는 헬라적 정의라기 보다는 제 몫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자에게도 은혜를 베 풀어서 같이 사는 은혜로운 의다. 불합리(?)하고 다소 부조리(?)하기까지 한 편애 요 편중이다. 구약의 의는 박애, 친절, 관용을 포함하며, 억압당하는 자에 대한 애 타는 동정이며(신24:10~13) 재판관들의 전문영역이 아니라 계약 구성원 모두의 일상생활에 걸려 있는 의의 창시자 야훼의 초월적 요구이다. 가난한 자의 옷을 담 보로 잡았을 경우라도, 해질 무렵이면 반드시 돌려주는 것이 의다. 구약의 정의는 신적 호의와 친절함이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 쪽으로 쏠리는 편애이다. 구약의 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한 신적인 연민이요, 그들의 삶에 자신을 정서적으로, 의지 적으로 얽어매는 의리(義理)다. 자신을 일방적으로 노예백성의 운명과 얽어맨 하 나님은 바로 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와 자신 을 동일시하시기 위하여 계약을 맺어 얽어매시는 분이시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 항상 계약관계에 있는 의로운 자라거나 그 도덕적 자질이 반드시 의로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편애를 유발하는 그냥 비참한 자들이다. 언약에 속했으나 언약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잠 14:31; 시 41:1). 그래서 하나 님의 의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로 경사된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억압자에게는 시 퍼런 정의의 칼이 되어 기울어진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수와 개울물처럼 온 세계가 하나님의 의로 충만할 때까지 쉼 없이 넘실거리며 투쟁한다. 하나님의 의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불의의 방벽을 넘어 무너뜨리는 도전이며, 쉬지 않는 돌진이다. 메마른 땅에 생명을 주는 강물같 이 메시야적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의는 오늘도 힘차게 작용 한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의의 강물이 터져 나오는 물길이 어디인 가. 세계의 마지막에 터져나온 메시야의 의,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다. 그는 하나님 을 향해 패역과 완악으로 도전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순종과 피로써 하나님의 의를 열어보였다. 율법적 요구로 정죄와 불화로 찢겨진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의 정복되 지 않는 사랑은 용서와 화해를 과시한다. 예수는 의의 절대적 결핍 속에 사는 의의 사막 지대에, 의의 물길을 역사 속에 끌고 온 메시야다. 예수의 메시아적 의는 값없 는 구원이며, 이 값없는 구원 속에는 메시야적 시대에 걸맞는 메시야적 전가된 의 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이 의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는 감격과 기쁨 속에서 값 을 치러야 한다. 곧 메시야가 가져온 구원은 메시야적 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이 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삶이란, 실상 하나님의 의라는 한 도덕적 윤리적 자질이 우 리 속에 스며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또 최후심판 때 법정에서의 무죄선언에 미리 참여하는 것만도 아니다. 의가 결핍된 역사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는 메시야의 의 의 요구에 매일매일 감격과 기쁨으로 응답함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구원 과정의 완료 과정이 아니다. 구원 과정의 첫 진입을 뜻한다. 의는 윤리, 도덕, 법, 규범의 차원에 있지 않고, 삶과 죽음의 차원에 관계한다. 이 땅의 기독자 는 메시야적 의의 수혜자요, 메시야적 의가 전가된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첫 줄 에 소환된 자들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예언행위는 하나님과 이스라 엘이 맺은 언약을 따라 기능하던 언약공동체가 양극화되고 파편화되어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는 집단상담적 치유활동으로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서의 주조음은 “내 백성이 상하였도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에 따라 건설 된 언약공동체 구성원간의 형제우애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에게 요청 되는 하나님말씀 대변활동인 예언은 새아담언약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온 인류를 이 언약에 초청하는 선교적 노력으로 결실되어야 한다.

















I. 용서란 무엇인가?

1. 서언 인간의 삶에서 참으로 귀중한 것들은 관계를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뜻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의 중심에는 관계가 있고, 인간관계는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의미를 안기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 고, 그들이 행하는 폭력이나 악에 노출되어 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 상처로 인 한 고통에 직면한 사람(피해자)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가해자)에게 분노하 고, 더 나아가 원망과 적의, 증오를 품곤 한다. 특히, 가해자의 행위가 명백한 악행 이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참으로 큰 고통을 부당하게 당하고 있다면, 그가 가해자 에 대하여 위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피해자에게 용서를 권할 경우, 용서의 권유 자체가 피해자에 대 한 존중과 공감의 결여로 인식되어 큰 분노를 야기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가해자 를 용서하자고 하는 것은 마치 악의 끄떡없는 득세를 옹호하고, 부당한 희생을 방 치하는 정의롭지 못한 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서는 적어도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일정한 상황에서는 용서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실제로 용서에 관한 문헌들을 보면, 가해자의 악이 대단히 중대하고 고의적인 경 우에는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용서의 한계를 설정하는 입장도 있고(한나 아렌 트의 경우도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피해자의 진정한 뉘우침과 사과 등을 조건으 로 한 용서만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다른 일군의 학자들과 함께, 무조건적 용서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다만 이는 용서가 무엇인지 에 대하여 필자가 취하는 관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용서의 정의가 달라질 경우,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용서를 적절하게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무 조건적 용서’를 불가능의 영역에서 가능성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첫번째 관문이 라 할 수 있다.

2. 용서의 개념요소들 윤리적 개념으로서의 용서는 다음과 같은 개념요소들로 구성된다.

첫째, 다른 사람(가해자)의 행위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피해자)이 있을 것 이 전제가 된다. 사람의 행위가 아닌 자연재해나 동물의 행동에 의하여 피해를 입 은 경우에는 용서 여부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만이 도 덕적 책임의 주체로서 선을 행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칸트 철학의 전제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선을 행할 자유는 그 반면에서 악을 행할 자유를 전제로 하므로, 사람만이 ‘도덕적 악’을 행할 수 있고, ‘도덕적 악’이 행해져야 용서 여부의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사람들이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는 분노를 내려놓지 못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하지만, 자신에게 피해나 고통을 준 다른 사물들에 대하 여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비단 칸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에 대하여 다른 사물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도덕적 지위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 등의 ‘잘못’이 있어야 용서가 있을 수 있다. 상대 방의 언행에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나의 내면적 상황에 따라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상처로 인한 분노를 내려놓는 것을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타인에 대하여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고 분노를 품는 일들 중에 실상 많은 부분은 상대방의 잘못이나 악행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내면의 취약한 자존감 구조나 상대방에 대한 오해 등에 기한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에 올바른 성찰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통해 상처를 씻고 분노를 내려놓아야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거나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노력도 인간관 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 는 감정의 변화를 ‘용서’라고 할 수는 없다. 용서는 단순히 오해를 푸는 것 이상의 윤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하여 품은 부정적 감정들(원한, 분노, 증오, 복수심 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가짐의 변화가 용서 의 본질적 요소이며, 언어적 표현 등 외적인 것에 용서의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 부정적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진정한 용서는 아직 없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용서는 내면의 부정적 감정을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극복할 것을 전제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타인의 사소한 잘못들에 대한 기억은 잊 혀져 부정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한 비의도적인 마음의 변화도 용서가 아니다. 의식적 노력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서의 용서는 때로 쉽지 않아 많 은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노력으로 ‘용서의 성품’을 가꾸어 용서가 쉬워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오랜 노력의 결과를 통해 즉각적인 용 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마땅히 용서의 개념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부정적 감정의 극복에 더하여, 가해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하거나 적어 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수용(internal acceptance)에 도달하 여야 ‘용서’를 했다고 할 수 있다.[1]) 기독교적인 사랑의 윤리이든 칸트적인 인간존 중의 윤리이든 윤리적 관점에 기하여 가해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노력이 담겨 야 윤리적 행위로서의 용서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나 그의 행위를 의 식적으로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이는 것 등 은 일종의 자구적인 노력으로서의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는 있지만, ‘용서’라는 이 름에 값하는 행위는 아니다.

결국, 용서는 “타인의 고의 또는 과실이 있는 잘못된 행위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을 극복하고 이를 내려놓으며, 자비와 연민 등의 선한 감정이나 태도를 통해 그를 다시 수용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3. 용서가 아닌 것들

1) 상대방의 행위를 묵과하거나 처벌을 면제하는 것 용서는 상대방의 악한 행위를 묵과 또는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비판하는 주된 논거의 하나는 상대방이 범한 ‘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 고 그것을 묵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악’을 직시 하면서 그에 대하여 지혜로운 대응을 하는 것이지, 악을 경시 또는 간과하거나 그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한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 로 소통하고, 필요하다면 강한 항의와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 의 사소한 잘못들에 대하여 관용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일일이 지적하는 것을 타당 하다고 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수준을 넘어선 가해행위나 반복적인 잘못에 대하여 필요하고 적절한 범위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소통의 노력을 하거 나 재발방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위에서 본 용서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경제적 형편에 비추어 가혹한 일이 아니라면 민사소송 등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과 용서는 전혀 양립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가해자를 고소하여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어떤가? 이 부분에서 학자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용서는 처벌의 면제를 개념요소로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일부 견 해들이 있고, 그 경우 무조건적 용서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임마누엘 칸 트는 조건 없는 인간존중의 윤리를 제창하면서도 무조건적 용서에 대하여 긍정적 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응보적 처벌의 면제가 용서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각주 보충] 그러나 칸트의 생각처럼 처벌을 면제하는 용 서만이 용서라고 볼 것은 아니다. 개인적 원한을 풀기 위한 보복의 차원으로 가해 자에 대한 형사고소를 하는 것이라면,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하 겠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에서, 사회적 정의의 실현 또 는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와 생명에 대한 위협의 제거 등 다른 정당한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용서와 충분히 양립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논의는 국가등에 의한 ‘공적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이고, 피해자 자신 에 의한 ‘사적 처벌’은 용서와 양립할 수 없다. 만약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하여 “내 가 괴로움을 당한 만큼 상대방도 괴로움을 겪게 하겠다”는 보복심을 간직하고 있다 면, 아직 용서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한 보복심에 기한 보복행위는 일종의 사적 처벌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 개념으로서 의 용서에는 사적 처벌을 배제하기로 하는 선택이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적 처벌은 용서와 함께 사적 보복의 악순환을 막는 길일 수 있지만, 사적 처벌은 보복 의 악순환을 부르는 점에서 용서의 본질에 반한다.2)

2) 상대방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 상대방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관점을 바꾸어 그것을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꾼다면, 용서와 유사해 보이지만, 진정한 용서는 아니다.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만 약 애써 악을 악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용서라고 하면, 악에 대한 보다 정직한 대면 과 진지한 대응을 윤리적이라고 보는 관점으로부터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 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상대방의 잘못을 인정할 것을 필요로 한다.

3) 상대방의 행위와 그로 인한 상처를 잊는 것

피해자가 정신적 괴로움을 덜기 위해 상대방의 행위와 그로 인한 상처를 잊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망각을 용서라고 할 수는 없다. 용서는 상대방이 한 행위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는 망각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관점과 맥락 속에 기 억을 재배열하는 등의 노력으로 마음의 긍정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용서를 하 기 전에 계속 아프게 재생되던 기억이 용서한 다음부터 조금씩 잊혀져 희미해질 수 도 있지만, 그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서 아직 용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볼 것은 아



2) 한나 아렌트는 “용서의 정반대 개념은 복수(復讐)이고, 용서의 대안은 처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렌트가 용서와 처벌의 양립가능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 양자를 선택적인 관계로 본 것은 이 글의 관점과 약간 다르지만, 양자가 근본적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동 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은 그 처벌이 공적 처벌을 뜻하는 한 타당하다고 생각한 다.

니다.

4)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화해하는 것

용서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상대방과 화해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관계 회복이나 화해는 주체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브 개럿과 데이빗 맥 노튼은 그러한 경우로서 1) 원래 관계가 없었던 경우, 2) 가해자가 살아 있지 않은 경우, 3) 관계의 회복이 가해자에게 여러 이유로 좋지 않은 경우, 4) 관계의 회복이 피해자에게 좋지 않거나 위험한 경우 등을 들고 있다.3) 만약 인간관계의 회복이 나 화해가 실제로 있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고 하면, 용서의 불가능성을 수용해야 할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본 용서의 개념에는 관계회복이나 화 해의 ‘결과’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고, 사랑이 나 존중, 인간으로서의 수용 등 긍정적 감정이나 태도를 내적으로 회복한다면, 관 계회복이나 화해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 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용서는 이미 내면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결어 - 무조건적 용서를 위한 일차적 변호

용서를 위와 같이 정의한 것 또는 그러한 정의를 수용한 것은 두 가지의 중요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첫째는 용서가 비록 경우에 따라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는 있 을지라도 피해자의 주체적, 내면적, 의식적 노력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윤리적으로 부적절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 용서의 개념이 자리잡도록 하는 것 이다. 둘째는 용서가 단순히 심리적 치유기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윤리적 의미를 뚜 렷이 가지는 활동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용서의 개념은 위의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용서는 악을 묵과하고 방치하는 일도 아니고,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잘못 되지 않은 것으로 부당하게 변호하고 자기기만을 하는 것도 아니며, 관계회복이나



3) Eve Garrard & David McNaughton, "In Defence of Unconditional Forgiveness",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New Series, Vol. 103 (2003), p. 45.

화해와 같이 상대방의 호응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용서하고자 하는 주체가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내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다른 어떤 조건 없이도 가능한 일이며, 정의에 반한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가페적 사랑이나 인간존중의 윤리와 관련성을 가지는 점에서, 적극적인 윤리적 활동의 하 나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필자의 관점과는 달리, 무조건적 용서의 윤 리적 적절성을 부정하고 조건적 용서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피해자의 진정한 뉘 우침과 사과가 용서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러한 주장의 요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을 취하게 되면, 용서가 피해자의 주체적 노력 밖에 있는 ‘외적 변수’에 의하여 제약되게 되므로, 피해자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유가 부당하게 제약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용서는 아가페 사랑의 무한성이나 인간존중의 무조건성 등 높은 차원의 이타적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면이 있음과 동 시에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 극복하고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미래지향 적인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자기배려적 결정이라고 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조건적 용서의 위와 같은 논리는 피해자가 보다 높은 차원의 윤리적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유를 제약하고, 그것을 가해 자의 태도여하에 속박되게 한다는 점에서 찬성할 수 없다. 상대방이 저지른 악의 정도에 따라 용서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이론도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주고받기의 균등성을 초 월하는 ‘초월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월적 윤리의 초월성을 부정하고 합 리적 균등성 내지 비례성의 잣대로 용서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근대적, 계산적 이성으로 용서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창조적인 힘을 제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 당하지 않다. 물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것은 피해자의 자율적 인격을 침해하고 지나친 희생의 수용을 강요하는 심히 부당 한 일이 될 수 있다. 초월적 윤리로서의 용서의 특성을 감안하여, 피해자에게 이를 강요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만,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윤리적 활동으로서의 용서는 무조건적으로 승인되어야 한다. 무조건적 용서의 가능성과 그 윤리적 타당성을 옹호하는 필자의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은 이후에 다룰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보충할 것이다.
II.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노력들

1. 서언 위에서 정의한 바의 용서는 다른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의 내적인 노력으로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피해자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가 쉽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의 논의를 통해, 용서 를 가로막는 외적인 조건들을 피해 왔지만, 우리 안에 많은 내적인 장애물들이 도 사리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 원초적으로, 그리고 교육을 통해, 사회문화적 적응과 정에서 자연스럽게 장착된 기본적인 신념이나 가치관, 윤리의식 등이 용서를 수월 하게 하기보다 용서를 강력하게 가로막고 나서는 훼방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내면에 장착된 윤리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 덕목인 용서를 실행할 수 없게 하는 이유로 작동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현상 속에 용서의 깊은 아이러니와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용서를 진정으로 우리의 가능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의식이나 가치관 등을 용서를 잘 할 수 없게 하는 것들에 서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들로 갱신해 나가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용서 없이는 사랑이 곧잘 길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 이러한 용서의 훈련은 곧 사랑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성품을 함양해 나가는 훈련은 용서의 훈 련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시험대를 만나게 된다.
2. 아가페/인간존중의 확고한 지향

우리가 아가페적 사랑의 윤리를 수용할 때, 무조건적 용서는 그 자연적인 귀결이 된다. 사랑의 유형 중에서 특히 종교적 혹은 신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는 대상이나 다른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무조건성과 영속성, 무한성을 가진 사랑이므 로, 아가페 사랑의 윤리를 평생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무조건적 용서를 평생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가페 사랑은 지나치게 거룩한 윤리여서 인간이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부관계나 부모-자녀 관계 등 우리의 삶을 둘러싸 고 있는 중요한 관계들 모두가 이러한 아가페 사랑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중요한 관계 들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위험하고 어려운 계기들을 헤치고 그 결속과 유대를 지속 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조건적, 영속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 사랑의 도움이 필요하

다.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받은 상처가 너무 크고 가해자의 행동이 너무 부당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고 용서를 위해 노력해 보라 고 우리를 이끄는 내면의 등불이 된다. 지금 우리의 상태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 지만, 우리의 내면이 아가페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화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지향을 우리 모두는 아가페 사랑의 이름으로 가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만으로 용서가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더 강력하게 장착 되어 있는 다른 가치관이나 신념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이 정의롭고 공평한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가페 사랑의 원리와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데, 그 경우 우리는 아가페 사랑을 선택하기보다, 우리가 ‘정의’혹은 ‘공평’이라고 믿는 바를 선택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용서는 불가능의 자리로 떨어지고, 사랑 도 힘을 잃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가페 사랑은 우리 마음 속의 등불이 아니라 멀리 가물거리는 별빛과 같이 되어 우리의 실존의 구체적 상황과 멀어져 버린다. 그것은 결국 용서와 사랑의 능력을 약화시켜, 중요한 관계들이 폭력의 악순환으로 망가지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무력한 윤리가 되 게 한다. 결국, 무엇이 참으로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아가페 사랑에 부합하는 무조건적 용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 는 새로운 갱신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종교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아가페 사랑’을 강조하지 않고도 거 의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윤리적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칸트가 ‘도덕 형 이상학 기초’에서 제시한 인간존중의 윤리이다.

칸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타당한 명령을 뜻하는 정언명령의 하나(제 2의 정언명령)로서“너는 네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그 인 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사용하지 않도 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존재는 가격(일반적 가치) 아니면 존엄성(숭고한 가치)을 가진다. 가격을 가진 것은 같은 값을 가진 등가물로 대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가격을 초월한 것, 따 라서 어떤 등가물도 허용하지 않는 것에는 오직 존엄성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도 덕적, 실천적 이성 주체인 ‘인격’으로서만이 모든 가격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도덕 적 주체로서 인간은 스스로 세운 목적에 대해서도 결코 수단으로 머물지 않고 언제 나 목적 자체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적 내면적 가치인 존엄성을 가진다. 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그에 대한 ‘존경’을 요구할 수 있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동등한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인간존중에 관한 칸트의 위와 같은 윤리적 명제는 그것이 무조건적, 절대적 타당 성을 가진 정언명령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가페 사랑과 유사하게, 인간존 중의 윤리를 무조건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만들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 로, 아무 다른 조건 없이, 인간의 인격인 한 이를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인간을 모든 가격을 초 월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만이 존엄성을 가지 는 이유는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만이 도덕적 선을 행할 자유 를 (도덕적 악을 행할 자유와 함께) 가지고 있는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인데, 여기 서 말하는 도덕적 주체는 항상 도덕적으로 사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으로 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진 주체라는 의미이므로, 우리가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아니라 이성적 주체로서 그가 가지는 도덕적 가능성 자체를 무한히 존중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 평등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이러한 존중에 대하여 칸트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를 꺼려하였지만, 인간 각자를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 한결같이 존중하는 것은 아 가페 사랑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가치와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조 건적인 인간존중의 윤리에 기하여, 피해자가 가해자를 조건 없이, 존엄성을 가진 인격적, 목적적 존재로 수용하게 되면,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넘어설 수 있고, 앞서 본 용서의 네번째 개념요소까지 충족하는 것이 되어, 가해자를 용서하는 마음 의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칸트적인 인간존중의 윤리를 우리가 온전히 수용 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무조건적 용서의 윤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앞에서 칸트 가 무조건적 용서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용서의 개념 에 응보적 처벌의 면제가 포함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필 자가 정리한 용서의 개념을 전제로 할 경우에는, (그리고 칸트가 정서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조금 더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면) 칸트도 제2 정언명령의 당연한 귀결 로서 무조건적 용서의 윤리를 옹호하였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자신을 울트라 칸트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자크 데리다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주된 논거의 하나로 하여, 무조건적 용서를 옹호하고 있기도 하다.

위와 같은 아가페/인간존중의 윤리는 그 무조건성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 조건적으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단단하고 확고한 윤리적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 는 셈이다. 이러한 윤리의 지향점을 가지는 것만으로 그것을 바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윤리적 지향점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다져 두는 것은 흔들림 없는 용서의 실천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이 기반 위에서 아래에서 살 펴보는 것과 같은 다양한 추가적인 노력들을 기울여 나갈 때 무조건적 사랑으로서 의 아가페나 무조건적 정언명령으로서의 인간존중과 함께 무조건적 용서의 이상도 밤하늘의 별과 같이 먼 것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한복판으로 들어와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지혜로운 자기배려의 선택 아가페/인간존중은 용서의 대상인 가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 한 윤리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용서를 함에 있어서, 이러한 가해자에 초점 을 둔 윤리가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용서하는 피해자 자신 의 삶에 대한 지혜로운 ‘자기배려’의 차원에서도 용서를 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

다. 칸트의 정언명령에서도 “네 자신의 인격”이 존중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바와 일맥상통하게, 성경 속 이웃사랑의 계명에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여 ‘자기사랑’도 사랑의 내용에 포함하고 있다. 이기주의적인 자기사랑은 그 자 체가 아가페 사랑의 원리에 반하지만,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배려하 고 사랑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의 원리에 반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사랑 의 내용에는 정당한 자기존중과 함께 자기배려가 포함된다.

용서는 언뜻 생각하면 상대방이 이득을 보고 자신이 손해를 보는 일인 것 같아서 자기배려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손익계산을 하는 것 자체가 아가페 사랑의 무한성에 반하 는 면이 있지만, 손익계산을 하더라도 용서는 자기배려에 결코 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최선의 자기배려에 해당하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용서는 자기배려를 위한 정당한 문제해결 노력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초점은 상대방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부정적 감 정들을 내려놓고 긍정적인 사랑과 존중의 태도를 회복하는 데 있을 뿐, 필요한 의 사소통을 하고 손해를 배상받거나 심지어 형사고소를 통해 처벌받게 하는 것도 보 복심에 기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용서와 양립가능한 일들이다. 결국 상대방에 대하 여 ‘보복을 위한 보복’을 할 것인지의 문제와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품고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문제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 중 먼저 ‘보복을 위한 보복’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것은 필시 상대방의 또다른

보복을 유도하고, 그에 대하여 내가 다시 보복하여 끊임없는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 를 만들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이러한 ‘악순환의 소용돌이’ 속으로 쉽게 빠져 드는 상황이 지속되면 자신의 많은 중요한 관계들이 크게 파괴되고 손상되는 결과 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관계의 유대를 회복하거나 강 화해 나가려면 용서의 능력을 익히고 발휘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 전환하기’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에 대하 여는 “분노는 마치 산(酸)과 같아서 그것이 쏟아 부어지는 대상보다 그것을 담은 그릇에 더 큰 해를 끼친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상황의 모순성을 정확히 잘 표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해행위를 한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피 해자가 자신이 품은 분노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는 신체적 질병을 얻기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이 순간적으 로 일어나는 것을 모두 예방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계속 품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과 주변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됨을 기억하야아 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용서를 하지 않고 계속 분노를 품 는 경우, 불안증이나 우울증 등 정신적 문제만이 아니라 심혈관계 질환이나 내분비 계 질환 등을 야기하여 면역기능을 약화시켜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인간관계에서의 부정적 감정이 처리되지 않고 남 아 있으면,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특히, 분노 를 가해자에게 표현하고 소통하여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경우에 해결되 지 않은 분노를 다른 주변의 상대적 약자에게 표출하여, 가족관계를 어둡고 힘들게 하는 사례는 너무나 흔하다. 결국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한 삶과 밝은 인 간관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등 감정을 전환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용서는 자기배려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용서는

이타심과는 무관하게 일종의 현명한 자기치유의 한 방법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이 러한 자기배려 내지 자기치유의 방법으로서의 용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러 한 차원의 용서 추구는 윤리적 활동으로서의 용서와는 무관하다고 보고 이를 폄하 하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당한 자기배려도 아가페 사랑이나 인 간존중의 윤리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용서의 노력도 존중하 고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러한 자기배려의 차원만 가지고 용서가 완성

될 수는 없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용서는 본질적으로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푸는 것에 있으므로, 자신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결국 가해자 에 대한 관점을 보다 이타적이고 아가페적인 관점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아무리 노 력해도 제대로 된 용서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많다. 실제, 용서 프로그램 을 개발하여 심리상담 등의 현장에 적용하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가해자를 바라보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내’가 잘 살아가려면 ‘너’를 더 욱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자 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선악(善惡)과 그 행위자의 구별 우리가 용서를 잘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과 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이 용서에 큰 어려움을 야기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곧잘 선과 악을 명료하게 구 별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우리 자신은 어떻든 선(善) 쪽에 있다고 믿고 살아 간다. 물론 때때로 이 부분이 흔들려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곤 하지만, 대체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도덕적 정체성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한편으로 는, 상대방이 부당한 가해행위를 하면 우리는 그를 바로 “나쁜 사람”, “고약한 사람” 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데, 흔히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가지곤 하는 이러한 생각이 실 은 아가페/인간존중의 윤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서 용 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는 없다.

‘나’를 ‘선인’으로 여기고 ‘너’를 ‘악인’으로 여기는 순간 나와 너의 거리는 너무나 멀고, 나는 너와 도저히 어떤 사랑이나 존중으로 만날 수 없는 ‘원수’의 사이가 되 어 버리고 만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규정으 로 멀어진 거리와 그 사이에 가로놓인 담벽을 허물고 다시 온전한 아가페 사랑을 조건 없이 보편적으로 품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나’와 ‘너’가 모두 온전한 선인(善人)도 아니고 악 인(惡人)도 아니며, 우리는 모두 악의 유혹이나 위협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불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그러나 동시에 도덕적 존재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선을 행한다 고 해서 내가 완전한 부동의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어떤 악행을 했다고 해 서 그가 완전한 구제불능의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선 을 한 것일 뿐이고, 그가 어떤 상황에서 악을 행한 것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불완 전하지만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적인 주체로서 존중을 받아야 하며, 나 또한 그러하 다. 이처럼 나와 ‘나의 선행’, 그와 ‘그의 악행’ 사이를 벌려서 나와 그를 다시 동등 한 자리로 되돌릴 수만 있으면, 용서의 능력, 곧 사랑의 능력이 살아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동양과

서양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일 터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행위와 그 행위 자를 구분함으로써 그 행위자를 용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죄나 악만이 아니라, 나의 몇 가지 선행을 이유로 나 자신을 ‘선인’으로 규 정하는 독선도 용서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 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이다.

행위와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푸는 일을 잘 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관점은, 행위자가 악한 행동을 하거나 선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 얼마만큼 외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교육환경, 사회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 등등 외적으로 주어진 영향이 그에게 깊은 상처나 트 라우마를 주어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이 깊어졌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우 리가 다 알기가 어렵지만, 만약 이러한 상황이나 인생사를 모두 알고 있다면, 우리 는 상대적으로 행위와 행위자 사이에 개재되어 영향을 미친 다른 외적인 요소들을 크게 고려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자신과 그의 행위를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대하여는, 행위와 행위자 사이의 연결관계를 부정할 경우

행위에 대한 행위자의 책임을 부정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 다. 그러한 우려에는 일리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이는‘용서의 패러 독스’와 관련된 문제라 생각한다. 용서는 단선적인 논리만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 합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실제로 행위와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모두 해체하고 나면,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은 좋지만, 주체(행위자)의 책임 의식은 약화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가 자칫 내포 할 수 있는 위험성이나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서에 관해서도 너무 극단으로 논리를 밀고 나갈 경우에는 도덕적 주체의 책임성 약화를 가져오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용서의 패러독스를 전제로 하여 보

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고, 다만 그 방향성은 확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유연성을 언급한 것은, 행위와 행위자 사이를 푸는 것과 그 사이를 묶는 것 사이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방향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 유연성의 발휘가 특별한 방향성이 없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아가페/인간존중 의 윤리를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는 확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일관되게 실천하기 위해 악한 행위와 그 행위자를 구별하 기 위한 근거로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성 하에 유연성을 발휘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내면의 도덕적 위계의식이나 우월의식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과 도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그가 한 선행으 로부터 그 자신을 구별하는 의식을 가진다면, 그것도 올바른 방향으로 유연성을 발 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악행을 반성 없이 되풀이하면서 외적 인 사정들을 변명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행위와 주체를 구별하 는 일이 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하여 교육을 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경우에 그 상 대방에 대하여도 그 책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하여야지 모든 것을 외적 환 경에 그 원인을 돌리도록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나 아렌트가, 인간들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조건 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인간의 행동이 가지는 예측불가능성과 한번 한 행동을 되 돌이킬 수 없는 환원불가능성 속에서 그 예측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약속하는 능력’과 함께, 인간의 불완전성 속에서 그 환원불가능성이 안기는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용서하는 능력’이 반 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우리에게 참고가 되는 부분이 있다. 아렌트는 약속하는 능력을 ‘묶는’ 능력으로, 용서하는 능력을 ‘푸는’ 능력으로 보았다. 아렌트 의 그러한 논리를 행위와 행위자의 구별에 관한 위 논의에 적용해 보면, 우리가 우 리의 행위의 주체로서 책임을 지는 의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와 우리의 행위 사이를 묶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용서할 일을 만나 그 행위자를 용서 할 때 그 행위와 행위자의 존재를 구별하는 것은 그 사이를 묶어 놓은 것을 푸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나 자신에게 도덕적 우월의식이 있다면, 이를 내 혀놓기 위해 내가 기억하는 자 자신의 몇 가지 선한 행위와 나 자신의 존재 사이를 묶은 끈을 푸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다만 책임이 우리와 우리의 행위 사이를 묶는 것이라고 할 때, 한 가지 유의할 점 이 있는데, 그러한 책임의 윤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 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책임윤리를 강조한 칸트의 입장에서는 동등한 인간 존중의 무조건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고 하여, 그 부분에 해당하는 만큼 존재의 가치가 열등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하여 그 존재의 가치가 우월하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 므로, 위에서 말한 유연성과 방향성 중에서 방향성이 더욱 중요한 윤리적 과제와 원리를 담고 있고, 유연성은 우리가 종국적으로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사유 의 과정에서, 자칫하면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주의 정도를 담고 있다 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일부 학자가 행위와 행위자의 구별의 조건으로 가

해자의 뉘우침과 사과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조건부 용서론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행위와 행위자의 구별을 가해자가 직접 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위 와 행위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므로 책임의 원리에 비추어 피해자의 용서가 적절 하지 않게 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적인 이성의 산식으로는 완전히 정당화되기 어렵고, ‘초월의 논리’라면 굳이 그러한 조건에의 얽매임을 유지할 필 요가 없는 것이다. 가해행위와 그 행위자를 묶고 있는 것을 푸는 것이 바로 피해자 자신을 분노와 증오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피해자에게는 주지 않고 가해자에게만 주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 따 라서 행위와 행위자의 구별은 피해자가 아가페/인간존중의 윤리에 기해 자신의 주 체적인 선택으로 조건 없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가해자로서는 피 해자의 그러한 선택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하기 위해 진심 어린 뉘우침과 사과의 표현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그러한 뉘우침과 사과가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피해자에게 받아들여질 경우, 가해자의 과거 행위와 현재의 가해자 사이의 연결고리가 벗겨진 것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으나, 그 판단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여야 한다. 피해자로서는 그러한 뉘우침이 없어서 관계회복에는 상당한 위 험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여 관계회복을 시도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그렇게 한 사정 과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등의 생각으로 그를 그 행위로부터 구별하여 존중하고 수 용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5. 정의에 대한, 그리고 정의와 용서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이제 드디어, 용서에 대한 가장 큰 내적인 장애물과 대면할 때가 되었다. 많은 학 자들이 무조건적 용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정의에 관한 문제인 것 이상 으로, 실제 우리 내면에 원초적인 정의와 공평의 관념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용 서 선택을 가로막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내면에 일반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원초적인 정의관념은 이른바 Give and Take의 계산적 공평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간단히 말해“내가 상대방에게 100을 주 면, 상대방도 나에게 100을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판 단 및 적용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일 쑤지만, 아무튼 자신이 보기에 공평한 주고받기가 이루어져야 정의롭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100을 주면 나도 상대방에게 100을 주어야 한다”고 하는 역방향 의 논리까지 감안해 보면, 이러한 정의관념이 나름대로 윤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 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점에서 공평성과 정의에 관한 강렬한 윤 리의식이 장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은혜를 타인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보은의 태도로 이어지는 점에서는 미덕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원초적 공평의식만으로는 여러 가지 트러블이 발생하기가 쉽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빈번하게 부딪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례1>

A가 어느 회의 장소에서 오랜만에 친구인 B를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나 누었는데, B가 어느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갑자기 그 장소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A에게 심한 모욕적인 이야기를 하고 욕설까지 한 다음에 휙 나가버렸다. A는 몹시 화가 나서 B로부터 받은 모욕을 B에게 되갚아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B에게 그를 비난하 고 모욕하는 내용의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그랬더니 B가 다시 A에 게 더 심한 모욕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고 A는 다시 비슷한 메시지를 보낸 다. 이후 둘 사이에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A는 위와 같은 일을 당한 당 일 몹시 화가나고, 문자를 보낸 다음에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자녀들에게 공 연히 심한 야단을 치면서 분풀이를 하였다. A는 지금도 B가 처음에 왜 그렇 게 화를 냈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

위 사례에서 A는 자신이 B에게 두 차례 모욕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그것을 조금 도 부당한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B가 먼저 부당하게 모욕하고 욕설을 하였으 니, 그것을 갚아 준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A의 행위는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A의 행위는 일종의 ‘사적 처벌’을 한 것으로 서 어떤 근거로도 정의로운 행위를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B의 갑작스 러운 모욕행위에 대하여 A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그것은 그들의 원 초적 정의관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모욕을 받았으니, 나도 너에게 모욕을 되갚아 주는 식의 보복의 악순환은 일정한 수준의 분쟁에서 거의 조건반사 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고, 그 이면에는 원초적인 응보관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한 형사처벌은 그러한 원초적 정의 관념과 상통하는 응보적 측면을 내 포하고 있긴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개인 피해자들에 의한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공 동체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다. 아무튼 중범죄 의 경우 형사처벌을 통해 응보적 정의가 어느 정도 구현될 수 있으나, 응보적 정의 가 구현될 수 없는 수많은 크고 작은 가해행위들이 도처에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위 A의 경우와 같은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들이 실로 많을 것이다.

용서는 바로 그러한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A와 B가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례 2>

위 사례를 조금 변형하여, 앞부분 B의 행동은 그대로지만, A가 평소 가능한 한 무조건적 용서를 선택하여 실천하기로 결심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A는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지만 꾹 참고 조용히 다시 생 각을 정리하여, B가 과거에 자신에게 잘 했던 일들과 좋은 기억들도 생각하면서 B 를 자신과 같은 불완전하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B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의 행위를 용서하고 그를 계속 존중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취하기로 결심한 다음 마음을 잘 정리하여, 아직 B로부터 특별한 연락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그를 용서하기로 하는‘마음의 변 화’를 이루었다고 가정한다. 이후 어떻게 될까? 아마도 아래와 같은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아주 크진 않더라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A는 이미 B를 마음으로 용서하였지만, 더 나아가 B에게 있을 수 있는 몇 가지 오 해를 풀고 B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A는 B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 였는지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몇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A는 B에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한번 만나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결국 둘이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A는 B가 말하는 것을 최대한 공감적으로 경청하면서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전제 위에서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본다. 그랬더니, 결국 B가 자신에게 대단히 큰 오해를 하여 그러한 행동 을 했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잘 소통하여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B는 A가 요청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A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모 욕적인 말을 하고 창피를 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 을 것이라고 말한다. A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이해한다고 말해 준다. 이후 A와 B는 다시 친한 친구 사이로 회복되어 이후 다른 어떤 친구들보다 더 신뢰하는 친구 사 이로 잘 지내고 있다.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다른 높은 차원의 윤리에 대한 복종 없이, 원초 적 정의 관념을 그대로 발현할 경우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 관계가 파괴된다는 것 (<사례1>)과 아가페/인간존중의 윤리를 일관되게 실천하여 무조건적 용서를 실 천하였을 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랑과 우정의 관계가 잘 회복될 수 있다는 것(<사례2>)을 확인할 수 있다. <사례1>에서, 실제로 A는 자신에게 무슨 잘못 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겠지만, 객관적으로 악을 악으로 갚은 것으로서 아가페/인간 존중의 윤리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사례2>에서 A는 처음에 다소 억울하게 여긴 순간이 있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 여 상대방이 자신에게 안겨준 고통을 되돌려 주지 않고 넉넉히 수용하고 악을 선으 로 갚는 행위를 일관되게 하였다. 계산적, 교환적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지만, 아가페/인간존중에 기반한 무조건 적 용서의 윤리에 기한 선을 잘 실천하였다. ‘정의’가 ‘바르고 옳은 것’을 뜻하는 것 이라면, 불공평을 감수한 <사례2>의 A가 바르고 옳은, 정의로운 일을 한 것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사례2>의 A는 B와의 관계를 쉽게 파괴적으로 몰아가지 않 고, 그를 일관되게 존중하는 태도로 소통함으로써, B와의 관계를 잘 회복하였는데, 이것은 이른바 ‘회복적 정의’를 이룬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례1>의 A는 원초적 정의 내지 공평의 관념에 기하여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 들어가 결국 관계를 파괴하였으니,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인정할 만한 정 의의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원초적 정의 관념의 역할은 관계를 파괴하는 데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이것을 정의라고 한다면, ‘회복적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파괴 적 정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위의 경우 A가 그 태도를 달리 하여, 일단 인내하고 있다가 B를 형사고소하

여, B를 처벌받게 하였다면 어떨까. (이를 <사례3>이라 한다)

그 경우 A는 정당한 권리 행사를 한 것이고, B가 국법에 따라 처벌받는 것은 B 자신의 책임이다. 이 경우 우리는 A를 전혀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A와 B의 관계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이 때 처벌에 의하여 구현되는 정의는 응보적 정의 인 측면이 강하다.

이 경우 우리가 A를 비난할 수는 없다. A는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서 응보적 정의가 구현되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친구 사이를 한번의 잘못을 이유로 진지한 소통의 노력 없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몰고간 것은 회복 적 정의의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무거운 범죄가 아닌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고, 무거운 범죄의 경우

에는 처벌을 받게 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이 병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응보적 정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으로 구축된 권리체계에 기한 것으로서, 구약 성경에도 등장하는‘눈에는 눈’의 동해보복(同害報復)에서 출발한 정의이고, 그것 을 공적 질서로 한 것은 사적 보복의 남용을 방지하는 취지를 강하게 내포한 것이 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적 보복의 심리에 그러한 응보적 정의의 관념 이 스며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동등 보복의 정의만으로는 결코 참된 관계 적 정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예수는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 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 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 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 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 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여(마태복음5:38-44), 동해보복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 은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동일한 것의 교환을 넘어서서 상대방이 받 을 자격 있는 범위를 초과한 ‘잉여’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였다.

<사례2>의 A는 그러한 잉여의 윤리를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정 의를 버리고 아가페 사랑을 취한 것이 아니라 보다 온전한 정의인 회복적 정의를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회복적 정의는 행위 중심, 권리 중심의 정의가 아니라, 관계 중심의 정의, 곧 관 계적 정의라 할 수 있다. 성경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올바른 관 계를 수립하는 것을 정의로 여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중심은 관계적 정의, 곧 회복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는 비단 기독교 내부의 윤리인 것만은 아니고, 오늘날 사법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 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새로운 정의의 개념이다.

이러한 ‘관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의의 개념에 무조건적 용서의 윤리가 잘 부합하는 이상, 동해보복을 넘어선 ‘잉여의 윤리’라고 해서, 정의에 반하는 것은 결 코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적 용서는 아가페 사랑의 원리만이 아니라 관계적 정의, 회복적 정

의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일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다.

응보적 정의의 실현 메커니즘으로서의 형사사법도 사적 처벌에 의한 파괴적 정

의와 달리, 개인간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사회적 정의 및 범죄로부터의 사회방위 등에 기여할 수 있는 등의 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만이 정의 를 오롯이 대변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 결국 앞서 용서의 패러독스에 대하여 말한 바와 같이,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의 상호관계도 패러독스적인 면을 가지고 있 고, 어느 한 방향의 극단을 취하기보다, 아가페/인간존중의 근본적인 방향성 하에 유연하게 이 두 가지 정의를 적절히 선택하여, 올바른 정의의 구현과 관계의 회복 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응보적 정의와 용서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응보적 정의나 배분적

정의가 모두 각자에게 그의 마땅한 몫을 돌려준다는 면에서 근대적, 합리적, 계산 적 이성이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정의의 관념은 국가 법률체계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서는 그러한 법적 정의를 뛰어넘는 ‘잉여’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잉여’의 요소 때문에 폴 리쾨르, 로버트 엔라이트 등 여러 학자들은 용서 를 ‘증여’ 또는 ‘선물’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선물은 강요할 수는 없지만 선물을 주 고 받은 것을 통해, 사회적 유대와 결속을 높이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완충하며, 관 계의 유지와 증진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일 수 있다. 용서는 그러므로 아주 좋은 ‘윤 리적 선물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가관계를 넘어선 선물의 요소, 은혜의 요 소로 인해, 용서는 합리적 윤리의 차원을 초과한 ‘초월적 윤리’라 할 수 있고, 대가 관계로 묶인 약속의 준수가 마땅한 것보다 더욱 더 정의롭고, 더욱 더 윤리적인 것 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그렇게 평가될 수 있는 범위는 용서의 주 체가 자율적으로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과 타인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인간관계를 위하여 주체적, 윤리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경우에 한한다. 물론 정 치적 필요에 의한 집단적 용서의 경우에 다소간 강요되는 듯한 분위기가 있어도 그 것이 공동체 전체의 절실한 필요에 의한 경우일 때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만, 그렇지 않은 한, 이는, 철저히 피해를 당한 개인이 자율적 사고과정을 거쳐 충 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정한 자신의 선택으로 하는 것이어야만 정의롭고 윤리적인 행위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는 단지 자신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여 자신의 참된 뉘우침과 재발방지의 약속의 진정성과 진실한 사과를 전달함으 로써 용서룰 구할 수 있을 뿐 용서를 할 것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 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 용서가 관계적 정의 또는 회복적 정의를 지향하 는 윤리적 활동으로서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업그레이드 버전에 해당한 다는 것, 나아가 응보적 정의를 초과하는 요소도 그만큼 더 윤리적인 것일 뿐이라 는 것을 우리가 내면의 깊은 신념으로 확립할 경우, 용서에 대한 내면적 장애물을 제거하여, 용서의 과정을 원활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6. 내재적 자존감과 겸손의 미덕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자존 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상처를 입었다고 표현하는 것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존감 의 손상이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주로 심리적인 차원에만 초 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칸트적 인간존중 윤리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칸트의 제2 정언명령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인격을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과 동등하게 단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존중할 절대적이 고 무조건적인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칸트는 자기존중(self-respect)의 근거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을 수 있으면 우 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처럼,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 는 내재적 자존감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존감은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성을 가진 한 인간존재로서 다른 동료인간들과 함께 동등하면서 가격표를 매길 수 없는 내재적 가치(존엄성)을 가진 존재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자존감은 확고하게 안 정적이라는 것, 어떤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도 배제되는 면에서 윤리적인 요청에 부합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장점은 바로 그것 이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인 자존감이 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자존감의 상당 부분은 특정한 조건들에 의존하여 유동성을 가 지며, 위계적 평가를 전제로 하여, 열등감이 아니라면 우월감과 연결되기 쉽고, 타 인의 평가에 많은 영향을 받아, 그 평가가 부정적일 경우 상처를 입기 쉽다는 등의 취약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칸트적 자기존중을 확 고하게 내면화하여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경우란 이상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일 뿐이 고, 실제로 그러한 상태에 완전하게 도달한 경우는 많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 이 크든 작든 자존감의 일정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우리가 성경의 원리나 칸트적인 자존의식을 내면화하여, 세

간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내재적 자존감을 확고히 해 나가는 것은 용서의 능력을 키우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내재적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일단 타인의 부적절한 말에 상처를 덜 받고, 상처를 받더라도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위와 같은 자존감은 위계의식을 극복한 자존감으로서 겸손의 미덕과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가지는 면이 있다. 겸손을 위계의식을 전제로 한 자기비하의 태도라고 잘못 이해할 경우에는 위와 같은 자존감과 겸손은 상호 충돌을 일으키지 만, 그것은 가짜겸손이고,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과 인간적 한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위계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이 본질적으로 그 어느 동료인간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자리에 있지 않다고 여기면서 사랑과 섬김 의 윤리에 따라 현상적인 면에서 동료인간들을 높여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위와 같은 내재적 자존감 과 서로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겸손의 마음가짐은 화해의 기초가 되는 바람직한 용서를 할 수 있는 중요

한 바탕을 이루게 된다. 그러한 겸손의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 또한 도덕적인 불완전성으로 인해 타인에게 부당한 고통을 안기곤 하는 취약 한 존재라는 인식 하에, 가해자를 자신과 같은 취약성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존엄성 을 가진, 자신과 동등한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진정한 용서의 마음을 품 을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있고,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를 그렇게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 므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다. 다른 어떤 이유로 가해자를 향하여 “용서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용서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므로, 상대방과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진정한 회복이나 화해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겸손, 특히 도덕적 겸손을 위해서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행위(선행)와 행위자의 구별을 위한 의식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겸손과 선의지(또는 도덕적 책임) 사이에 패러독스적인 면이 있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묶어서, 자신 의 삶의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강한 책임감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 아가고, 한편으로 그것이 도덕적 교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과 ‘자 신의 행위’를 묶은 줄을 풀어서 자신의 모든 것이 ‘은총’으로 주어진 것일 뿐, 본래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음을 겸허하게 시인하고 물러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패러독스적인 성격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미 덕이 온전히 안정된 미덕이 되기 어렵고 늘 출렁이는 유동성 속에 있을 것이라는 점, 따라서 그 역시 인간의 도덕적 불완전성의 필연적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7. 인류 연대의식과 ‘인간에 대한 용서’ 위와 같이 인간의 도덕적 불완전성과 그 내재적 가치에 대한 양면의 인식을 가지

고, 동시에 인간이 정서적, 신체적, 감각적으로 고통에 예민한 존재로서 상처입기 쉬운 존재라는 것, 다른 동물과 달리 삶의 의미와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고, 군중 속 의 고독을 느낄 수 있으며, 곧잘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곤 하며, 생로병사의 한계상 황에 직면하여 고통받는 존재로서 사랑하는 능력이 서툴긴 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에 대하여 깊은 연민과 연대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류 연대의식에 기하여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용 서’를 하는 의식을 가진다면, 우리의 개별적인 용서의 과제들이 조금은 더 수월해 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에 대하여 한 말, 즉,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고 만지고 환대하는 바로 거기에 사랑이 있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을 용서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깊은 고독과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결국 용서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인간’을 여러 가지 위계 로 나누는 노력을 많이 하기보다, ‘인간’됨에 대하여 기본점수를 존중과 연민의 양 면에서 전체적으로 넉넉하게 주는 것이 필요하다.

8. 큰그림 보기 지금부터는 좀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용서 과정에 도움이 되는 노력들

을 생각해 본다. 용서는 상대방의 행위에 걸맞는 것을 돌려주는 비례성, 대가성을 초월한 ‘잉여’의 윤리라는 것을 위에서 보았지만, 비례성에 걸맞지 않은 그 만큼 우 리의 내면에서 소화하고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다. 그러므로 특히 자신에게 중요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의 유지와 회복을 위해 용서를 할 경우, 상대방과 그 행위에 대한 평가를 어차피 하게 될 경우, 어떤 기만(欺瞞) 없이 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하는 노력은 현실적으로 용서를 수월하 게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쟈크 데리다 같이 무조건적 용서 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는 필자의 이와 같은 제안을 용서를 용서답지 않게 만 드는 것이라고 말할 터이지만, 필자는 무조건적 용서의 순수성 유지보다 그것의 현 실적 실현가능성을 최대화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 에 대한 평가의 합리적 공정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은 상대방과 그의 행위를

볼 때 현재 문제가 된 그 장면만을 하나의 단면으로 잘라서 본다는 것이다. 상대방 이 나에게 분명하게 부당한 행동을 하였고, 나는 그로 인하여 현재 고통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하는 그 상황만 잘라서 보는 것은 상황의 전체 그림을 보는 것이 아 니고,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진실의 작은 한 조각만을 보는 일로서 용서를 하는 데 가장 불리한 시선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가페/인간존중의 윤리에 대한 확고한 지향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에 대한 큰그림, 즉 전체그림을 바라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과거의 기억 중에서,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들, 감사한 일들을 떠올려 나가다보면, 그가 지금 범한 그 잘못이 아주 작아지 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야기한 고통과 그가 나에게 안겨준 기쁨과 의미 등 좋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서로 상쇄하여, 그 고통에 대한 원망을 없 애는 것을 ‘대체원리’라고 하는데, 지속적인 좋은 관계가 조그마한 일을 계기로 큰 다툼으로 번지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체원리의 적극적 활용이 필요하 다. 과거의 행복한 기억을 불러와서 활용하는 것은 폴 리쾨르도 ‘기억의 능동적 활 용’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추천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의 문제에 대 하여 모두 회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대체원리를 통해 정서적 연금 술에 성공하여 용서의 마음으로 평화와 사랑을 내면에 채운 다음, 적절할 때 적절 한 소통의 노력을 기울일 경우, 관계의 유지, 발전에 훨씬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본 <사례2>의 경우에도 A가 B와의 좋았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무조 건적 용서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큰그림 보기’는 위와 같이 과거의 많은 기억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 대방의 미래에 대하여 그 긍정적 가능성을 바라보는 희망 품기의 관점도 포함하는 것이다. 과거의 행복한 기억의 환기와 함께, 미래의 더욱 성숙한 모습을 상상력의 힘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특히 부모-자녀 관계 등 중요한 관계가 강한 유대를 유 지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칸트가 모든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서 존 엄성을 가진 존재로 보자고 한 것이 선의지를 잘 실행해 왔기 때문이 아니라 실행 할 가능성을 누구나 품고 있다는 데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상대방에게 어떤 긍정 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깊은 믿음과 희망을 품는 것을 곁들일 때 ‘큰 그림 보 기’가 용서를 보다 수월하게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해(理解)의 노력 상대방의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가할 때, 우리는 상대방이 왜 그러한 행 위를 하는지, 무엇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인지 잘 모 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튼 상대방의 행위가 나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바로 즉각적인 분노를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 노가 일어날 때마다 이 분노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에 대하여 차분하게 성찰하는 노 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 성찰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 여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행위가 충 분히 이해되고 나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행위가 그리 부당하게 평가할 만 한 행위가 아니거나, 상대방에게 고의가 없었다는 등의 사유로, 그 행위의 비난가 능성이 크게 감소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용서는 대단히 수월해지게 된다. 이것 역시‘큰그림 보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행위와 그에 대한 반 응 사이의 비례성의 면을 고려한 것이다. 용서가 비례성을 초월한 윤리이긴 하지 만, 비례성의 면에서 용서에 유리하게 조정될 경우 용서를 함에 있어 수반되는 정 서적 부담이 크게 줄어들 수 있으므로, 최대한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용서과정을 촉진하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한 결과 상대방의 행위에 어떤 부당성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때는 상대방의 행위가 정당화되어, 용서의 대상이 소멸되는 것으로 보아 야 한다. 나는 상대방을 잘 이해한 것이지 용서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그 경우 상 대방에게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이해의 노력은 한편으로 용서를 촉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용서 의 선행단계가 되어야 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해와 용서가 모두 인간관계의 장 애물을 제거하고 사람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고 사랑과 화해, 관계의 유지, 발전 또는 회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므로, 이 둘은 논리적인 선후관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는 손잡고 함 께 가는 것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상대방이 나에게 고통을 준 행위나 그와 관련된 소통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100% 잘못이 없다고 판단되기보다, 상당한 정도 이 해될 수 있다는 정도가 많을 것이므로, 그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소통할 때는 이해 하는 취지만 전달하더라도 내면에서는 작은 용서라도 실천해야 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상대방에 대하여 이해가 되는 범위 내에서만 용서가 가능하며, 이해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고, 그것도 일리가 있으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용서의 무조건성과 ‘잉여적’, ‘초월적’ 성 격을 전제로 할 때, 이해가 안 되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그 지점부터 용서의 역할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위에서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구체적인 동기 등을 이해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

였는데, 용서에 있어서 의미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이해는 이른바 ‘전기적(傳記的)’ 이해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 가 행하는 특정한 행동의 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 았다고 하여, 오늘 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어린 시절 또는 청소년기의 상처 등을 우리가 안다면,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윤수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에 대하여 관객들이 그러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일종의 전기적 이해를 가짐으로써 그를 용서하는 데 어려움을 덜 겪을 수 있다.

10. 공감의 노력 이해의 노력이 해당 상황에 대하여 논리적, 이성적으로 이해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감의 노력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왜 그러한 행동을 하였는지 입장을 바꾸 어서 깊이 느껴보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어떤 두려움에 빠져 있었거나 그 밖에 어떤 다른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러한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껴봄으로써 상대 방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정서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 을 내려놓고 자비의 마음으로 용서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잘못 을 범한 가해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가 느낀 고통들을 느끼는 일이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아가페/인간존중의 확고한 지향점 하에 무조건적 용서를 실천하기로 결심한 사람으로서는 그러한 윤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건강이나 행복 등을 이 루는 ‘자기배려’의 노력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11. 감사와 궁극적 긍정의 태도 마지막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적인 자원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타인에게 용서의 선물을 포함하여 사랑의 선 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하여, 근원적 감사와 긍정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 받은 사람만이 잘 줄 수 있는 이치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대가 없이 받아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에 대하여 한없는 기쁨과 감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타인에게 용서의 선물을 할 수 있는 근원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수량이 풍부하고 끊임없이 계곡물이 흘러들어오는 저수지를 자신의 논밭 가끼이에 둔 사람은 가뭄으로 논밭이 말라갈 때, 저수지의 물을 대어 다시 논밭을 필요한 수분으로 적실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느 날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에 목말라 하게 될 때, 생명, 삶, 구원의 깊은 은혜를 받은 것을 그 냥 버리지 않고 저수지보다 더 크게 마음에 쌓아 둔 사람은 그 은혜를 생수처럼 마 시고 다시 힘을 내어 상대방에 대한 원망을 하는 대신 기꺼이 용서의 선물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긍정적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자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정치적 차원의 용서에 대하여

정치적 차원에서도 회복적 정의를 일구어 나가는 용서의 중요성이 점점 크게 인

식되고 있음.

정치적 차원에서도 용서의 정신이 가지는 윤리적 의미와 그것이 가지는 회복적

정의, 화해와 협력의 증진 등 가치가 긍정되고 존중되어야 함.

다만, 정치적 차원의 집단적 용서의 경우, 피해자 개개인의 용서에 대한 자율성

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

그와 관련하여, 정치적 차원의 용서는 가해자의 진실 고백과 뉘우침을 조건으로 하는 조건적 용서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나 그것은 집단적, 공식적 차원의 일이고, 피해당사자의 일원인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율적 선택으 로 무조건적 용서를 할 수 있을 것임.
IV. 화해의 동학

앞에서 본 용서는 화해의 중요한 기반이 되나, 그것은 내가 화해의 준비를 한 것

에 그치고, 상대방의 그에 대한 호응이 있어야만 화해가 가능함. 상대방이 스스로 피해자라 여기고 분노를 품고 있다면, 내가 그 분노를 풀어야만 화해를 이룰 수 있 는데, 상대방의 분노를 푸는 중요한 열쇠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태도와 진실한 사과에 있음.

위에서 한 용서 논의는 피해자의 자율적 선택이라는 것을 주된 전제로 한 것이었

고, 그러한 전제 위에서 무조건적 용서의 가능성과 그 윤리적 정당성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임.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에서 무조건적 용서를 요구하거나 거 기에 기댈 수는 없고, 상대방의 부정적 감정들에 대하여 존중하는 전제 하에, 자신 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 진실한고 진정성 있는 구체적인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의 제공 등을 통해 상대방이 과거에 대한 부정 적 감정을 떨칠 수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 여야만 화해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일련의 잘못이 범해진 경우에 나는 나의 책임에 대한 것에

초점을 두어 먼저 적극적으로 사과하여 상대방의 분노를 풀어 나가는 노력을 기울 이는 것이 화해를 열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음.
V. 맺음말

(추후 전체적으로 보완 예정)



















부 록

한반도평화연구원 소개·········································· 60

연혁············································································· 61

조직 및 연구위원···················································· 62

KPI평화포럼(공개포럼) 개최 현황······················· 64

출간도서 소개·························································· 68

연구원 소개
한반도평화연구원소개

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한반도 평화

와 통일을 위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정책대안을 연구, 교육, 전파함으로써 교회와 한국 사회 및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단체입니다.
비전

평화와 공동체적 나눔이 충만하며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하나된 한반도를 열어 가는 기독교 싱크탱크 사명

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가 비전 및 전략 제시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비전과 전략을 연구하고 이를 교회와 사회에 전파하며 국가가 나 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② 정책 대안의 연구 개발 서비스 제공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정부, 교회, 사회단체 에서 필요로 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연구 서비스를 제공한다.

③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교회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통일 관련 교육과정 및 교재의 개발을 지원하고, 지성과 영성을 겸비하고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는 기독교 인재를 양성한다. 원칙

- 선택과 집중 : 교회와 사회에 복음주의 통일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 새터민 정책, 대북정책, 북한경제재건, 북한인권 등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 중요하게 제기될 이 슈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 책임 있는 연구 : 책임 있는 연구를 위하여 공개적 출판이 필요하고, 엄격한 심사 를 통해 연구의 질을 높인다.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한 한반도 평화의 비전제시 : 현안 이슈에 대한 연구 원의 연구와 주장은 검증된 사실에 입각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분석에 기초함으로 서 자의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지양한다.

- 실천적인 정책대안 및 프로그램의 제시 :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평화와 통일준비 프 로그램을 개발한다. 새터민교육기관, 새터민정착지원기관, 대북지원단체 등 현장 의 문제를 포착하고 심도 있게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순환구조를 형성한다.

60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연혁

1993 남북나눔운동 창립과 함께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 조직(위원장: 이만열, 부위원장: 윤영관)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월례세미나 134회 실시, 북한방문, 분단국 방문연구

2006 남북나눔운동에서 독립된 연구원을 설립하기로 결정

2007 2월12일 한반도 평화연구원 창립총회 및 개원식 (원장: 윤영관) 제1회 ~ 제7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새터민 전문사역자 교육프로그램(1기)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허가(통일부)

2008 제8회 ~ 제12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새터민 전문사역자 교육프로그램(2,3기)

『북한문제와 한반도평화정착』 발간 (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2009 제13회 ~ 제19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새터민 전문사역자 교육프로그램(4기), 새터민 담당자 교육 (부산) 통일부장관 표창 (우수법인)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 경제와 사회 : 계획에서 시장으로?』 발간

『남북경제협력 정책과 실천과제』 발간 (2010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오바마 행정부와 한미전략동맹』 발간

2010 제20회 ~ 제24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새터민 전문사역자 교육프로그램(6기), 취업지원팀 사업 종결 『통일실험, 그 7년 :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살이 패널연구』 발간

『북한인권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 : 평화적 개입 전략과 국제 사례』 발간

2011 제2대 이장로 원장 선출 제25회 ~ 제32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2012 제33회 ~ 제36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발간

『체제전환국의 경험과 북한교육 개혁방안』 발간

2013 제3대 전우택 원장 선출 제37회 ~ 제40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평화와 반평화 – 평화인문학적 고찰』 발간

2014 제41회 ~ 제43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발간

『통일한국의 교육 비전』 발간

2015 제44회 ~ 제49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남북한 경제통합』 발간

2016 제50회 ~ 제51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제1차, 2차 CBS와 공동기획 특별포럼 포함 5회의 특별포럼 개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발간

2017 한반도평화연구원 10주년 기념행사 (3.20, 그랜드앰배서더 호텔) 제4대 윤덕룡 원장 선출

|제55회 KPI평화포럼| 61

연구원 소개
한반도평화연구원구성원

고 문

고 문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이 사 회

이사장 김지철(소망교회)


이 사

강경민(일산은혜교회) 김동호(높은뜻연합선교회) 손달익(서문교회) 우창록(법무법인 율촌) 이문식(광교산울교회) 이재훈(온누리교회)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윤영관(초대원장/서울대) 이장로(2대원장/고려대) 전우택(3대원장/연세대) 김창수(한국국방연구원)

임성빈(장신대)

윤덕룡(원장/KIEP) 이해완(부원장/성균관대) 김병로(부원장/서울대) 장혜경(부원장/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감 사

민경윤(동우약품)

이천화(가립회계법인)




62




연 구 위 원

고재길(장신대/신학) 김근식(경남대/북한정치) 김두식(경북대/법학) 김병로(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북한사회) 김병연(서울대/북한경제) 김선욱(숭실대/철학) 김성건(서원대/사회학) 김연희(대구대/사회복지) 김영윤(남북물류포럼) 김중호(수출입은행/정치경제) 김창수(국방연구원/군사안보) 김창환(한국교육개발원) 김회권(숭실대/신학) 김흥규(아주대/중국정치) 나희승(철도기술연구원/남북․대륙철도) 남성욱(고려대/북한학) 박명규(서울대/사회학) 박명림(연세대/한국정치) 박상은(안양샘병원/의료) 박상진(장신대/기독교교육학) 박원곤(한동대/정치학) 박영철(성결대/도시개발) 박정란(타루트대학교/북한학) 박정수(성결대/신학) 박종운(변호사/법학) 박재적(한국외대/국제정치) 박형동(서울대/지질) 배종석(고려대/경영) 백종국(경상대/비교정치) 신범식(서울대/러시아) 신성호(서울대/국제정치) 신효숙(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 연구) 심상달(KDI(전)/한국경제) 심혜영(성결대/중국) 안창남(강남대/세무학) 양운철(세종연구소/북한정치경제)
섬기는 사람들 (2017)

윤덕룡 원장 이해완 부원장 김병로 부원장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양호승(월드비전/대북지원) 오준근(경희대/법학) 원재천(한동대/인권) 유시은(고려대/북한학)

윤덕룡(KIEP/북한경제) 윤영관(서울대/국제정치경제) 윤환철(미래나눔재단/대북지원) 이국운(한동대/법학) 이기홍(한림대/사회학) 이만열(숙명여대/역사학) 이용욱(고려대/정치외교) 이장로(고려대/국제경영) 이종철(빛과생명교회/통일신학) 이창호(장로회신학대학교/기독교와문화) 이춘근(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북한과학기술) 이해완(성균관대학교/중국 및 법제) 이흥용(건국대/법학) 임성빈(장신대/신학) 장혜경(한국여성정책연구원/사회학) 전길자(이화여대/과학) 전우택(연세대/사회정신의학) 전재중(변호사/법학) 정경영(한양대/군사학) 정병오(좋은교사운동/교육) 정성철(명지대/국제정치) 정우진(연세대/보건경제학) 조동준(서울대/국제정치) 조봉현(기은경제연구소/경제) 조성봉(숭실대/경제학) 조영아(상지대학교/상담심리학) 조정현(한국외대/법학) 최도성(한동대/경영학) 편주현(고려대/경영학) 황의서(서울시립대/경제학) 허문영(통일연구원/북한정치)

이상 71명

장혜경 부원장 이창현 사무국장 손인배 행정팀장

|제55회 KPI평화포럼| 63




KPI평화포럼(공개포럼)


회 차

주 제

장소

날짜


제1회

1만 새터민, 우리의 '짐'인가, '힘'인가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2007.3.29


제2회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7.6.15


제3회

새터민 청소년 교육, 우리의 미래다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7.7.14


제4회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의미, 쟁점, 성공을 위한 조건들

은행회관 국제회의장

2007.8.14


제5회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7.10.4


제6회

북한경제의 변화와 사회적 영향

한국기독교회관

2007.11.12


제7회

신정부 남북경협의 방향과 정책추진 과제

한국경제신문 다산홀

2007.12.27


제8회

이명박 정부의 새터민 정책 방향 모색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8.4.18


제9회

동북아 민족주의 갈등과 한반도 평화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8.5.23


제10회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프레스센터19층

기자회견장

2008.8.29


제11회

남북한 경제통합전략

다사랑(가나의 집)

2008.9.19


제12회

탈북자,그 7년간의 삶들

- 새터민 적응사례연구 발표

함춘회관

2008.11.7


제13회

갈등의 남북관계 - 해법은 무엇인가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2009.3.18


제14회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한미전략동맹의 대비방향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9.4.17


제15회

한반도 안보위기 해법은 무엇인가

대한상공회의소

중회의실A

2009.6.22


제16회

이 땅에서의 첫해, 500명 북한이주민의 삶과 생각

함춘회관

2009.9.18


제17회

서독의 동독이탈주민 정착지원을 통해서 본 북한이탈주민 지원 방안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09.10.8


제18회

통일과 의료 - 그 가장 따뜻한 만남

프레스센터19층

기자회견장

2009.10.22


제19회

화폐개혁을 통해서 본 북한경제 현실과 사회 정치적 영향

대한상공회의소

의원회의실

2009.12.7





회 차

주 제

장소

날짜


제20회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경제통합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함춘회관

2010.2.25


제21회

북·중 관계와 북한의 미래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10.4.1


제22회

사회주의 체제전환기 교회의 역할

- 독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사례

청어람 소강당

2010.6.4


제23회

한·러관계 20년의 평가와 미래협력 강화방안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2010.9.29


제24회

난민의 심리적 트라우마와 지원방안 :

아동·청소년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종합관 331호

2010.10.16


제25회

2011년 미·중관계 전망과 한반도평화

함춘회관

2011.2.11


제26회

수쿠크 법의 쟁점: 평화를 위한 정부, 미디어, 교회의 역할

청어람

2011.4.13


제27회

체제전환국의 경험과 북한교육 개혁방안

청어람

2011.5.20


제28회

북한에 대한 인권개입과 식량지원

함춘회관

2011.7.15


제29회

남북한 통일담론에 대한 진단과 통일논의의 수렴방안

은행회관

2011.9.28


제30회

평화인문학의 반(反)평화 연구Ⅰ

청어람

2011.11.24


제31회

평화인문학의 반(反)평화 연구Ⅱ

청어람

2011.12.12


제32회

김정일 이후 북한 체제와 한반도 평화의 길

함춘회관

2011.12.27


제33회

4.11 총선으로 드러난 한국정치의 갈등구조와 해소책 모색

함춘회관

2012.4.19


제34회

우리가 꿈꾸는 나라

청어람

2012.8.21


특별

통일시대를 준비하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2012.9.15


제35회

미․중의 리더십 교체와 향후 대북정책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012.11.16


제36회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2012.12.6


제37회

남북간 신뢰구축,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청어람

2013.2.19


특별

제1회 새터민 대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청어람

2013.5.4





회 차

주 제

장소

날짜


제38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청어람

2013.6.17


제39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Ⅱ

한국기독교회관

2013.10.7


제40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Ⅲ

한국기독교회관

2013.12.3


제41회

통일과 기독교의 역할

한국기독교회관

2014.4.3


제42회

통일과 세월호 사건 앞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미래 방향

한국기독교회관

2014.5.23


제43회

평화를 향한 길 - 북아일랜의 경험

열매나눔재단 빌딩

2014.12.18


제44회

평화를 향한 길 - 북아일랜드의 경험 2

연세대학교 삼성학술정보관

2015.3.4


제45회

동아시아의 평화 -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

연세대학교

새천년관

2015.6.18


제46회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Ⅰ - 개인의 삶과 평화

열매나눔재단빌딩

2015.9.17


제47회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Ⅱ - 교회 안의 평화

한국기독교회관

2015.10.19


제48회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Ⅲ - 한국 사회와 평화

열매나눔재단빌딩

2015.11.6


특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숭실대학교 진리관

2015.12.5


제49회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Ⅳ - 국제 사회와 평화

한국기독교회관

2015.12.17


특별

한국교회 목회자 통일인식 조사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

2016.2.25


특별

북한이탈주민 지원 인력의 소진 대처 및 극복 방안

열매나눔재단빌딩

2016.4.7


제50회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연세대학교 삼성학술정보관

2016.6.3


특별

제1차 CBS-KPI 공동기획 특별포럼

현 정부와 차기정부의 한반도평화 정책 과제

프레스센터

2016.9.5


제51회

사회적 트라우마와 인간 치유

연세대학교 삼성학술정보관

2016.9.22


특별

제2차 CBS-KPI 공동기획 특별포럼

평화통일과 사회통합

프레스센터

2016.11.17


특별

탈북민 2세 청소년의 상대적 취약성 연구

열매나눔재단빌딩

2016.12.20





회 차

주 제

장소

날짜


제52회

신정부의 대북정책과 기독교 통일선교 : 방향과 과제

소망교회 선교관

2017.6.19


제53회

화해와 용서

: 트라우마 치유를 향한 마지막 여정

연세대학교 삼성학술정보관

2017.6.22


제54회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헌법개정의 바람직한 방향과 그 내용

프레스센터

2017.9.28


제55회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함춘회관

2017.10.31





KPI 출간도서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

한울아카데미 / 2008.12.15 발행

윤영관·신성호 엮음 김준석·김흥규·백종국·신성호·이근욱·전재성·조동준

·황지환 지음

차례

제1부 핵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제1장 국제체제의 불안정 요인으로서의

핵확산

제2장 기독교와 핵 제2부 핵무기 제거를 위한 노력: 국제적 사례

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제3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핵화 사례 연구

제4장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

제3부 북핵위기와 국제적 해결노력: 평가와 교훈 제5장 1·2차 북핵위기와 미국의 대북정책 제6장 중국의 북핵외교 제7장 북한의 핵개발과 국제협상 제8장 북한 핵문제의 국내정치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경제와 사회: 계획에서 시장으로?

한울아카데미 / 2009.5.7 발행

윤영관·양운철 엮음 김병로·김병연·남성욱·양운철·윤덕룡·이석기 지음

차례 제1장 북한경제 몰락의 정치경제적 함의 제2장 북한경제의 시장화: 비공식화 가설 평가를

중심으로

제3장 북한 기업관리체계의 변화 제4장 북한의 농산물 가격변화에 따른 식량수급 및 협동농장 체제의 변화

제5장 북한의 대외경제관계 변화와 그 영향 제6장 경제조치 이후 북한의 사회적 변화
남북경제협력 정책과 실천과제

한울아카데미 / 2009.5.7 발행

윤영관·이장로 엮음

김근식·김영윤·나희승·안창남·이상준·조동호· 조봉현 지음

차례

제1부 기존 대북정책의 평가와 새로운 대북정책 추진의 필요성

제1장 역대 대북정책 평가와 향후

"포용정책" 발전 방향 제2장 남북경협 측면에서 본 새로운 대북정책 추진의 필요성

2010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제2부 이명박 정부 남북경협의 목표와 추진

전략

제3장 이명박 정부 남북경협의 목표와 추진 전략

제3부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제4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Ⅰ: 남북한 상생을 위한 신경협 6대 분야

제5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Ⅱ: 개성공업지구에 역외금융센터를 설치 운영하는 방안 연구

제6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Ⅲ: 남북·대륙 철도개발구상과 단계별 발전방안
오바마 행정부와 한미전략동맹

한울아카데미 / 2009.11.30 발행

정경영·신성호·김창수·조동준 지음

차례 제1장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과 한미전략동맹 / 신성호

제2장 한미전략동맹의 비전과 구체화 방안 / 김창수

제3장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유엔사의 미래 /

정경영

제4장 지구적 쟁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협업 /

조동준

통일 실험, 그 7년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살이 패널 연구

한울아카데미 / 2010.6. 28 발행

전우택· 유시은·조영아·김연희·민성길·엄진섭· 김현경·김희진 지음

차례 제1부 통일 실험, 7년간의 삶과 생각

제1장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응 7년 추적연구

제2장 북한이탈주민의 종교생활에 대한

7년 종단 연구 제3장 북한이탈주민의 소득수준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제4장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들의 의식 및

생활만족도

제2부 남한살이, 상처를 넘어서

제5장 장기 거주 북한이탈주민의 빈곤특성 연구

제6장 장기 거주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 예측요인

제7장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에서의 삶과 질 제8장 북한이탈주민의 외상 경험 이후 심리적 성장

제9장 북한이탈주민의 삶의 질이 외상

경험 이후 심리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

제10장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들의 의식 및

생활 만족도
북한인권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 : 평화적 개입 전략과 국제 사례

한울아카데미 / 2010.6. 29 발행

윤영관·김수암 엮음 김수암·김학성·마웅저·박명림·서창록·원재천·이남주 지음 차례

제1부 북한인권 접근 시각과 국제사회의 인권논의

제1장 한국의 북한 인권문제 접근에 대한 성찰과

대안 모색/박명림

제2장 인권논의의 세계적 흐름과 북한인권/김수암

제2부 인권개선정책의 국제 사례

제3장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김학성 제4장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한계/이남주

제3부 북한인권 개선과 개입 전략

제5장 북한인권과 다자적 접근/서창록 제6장 북한인권의 국제법적 접근/원재천 나가며 평화적 개입 수준의 설정과 전략의

모색/김수암 부록 미얀마 인권개선의 사례/마웅저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한울아카데미 / 2012.2.28 발행

임성빈 엮음

김회권·고재길·설충수·신범식·이규영·고재성·이기홍·임 성빈 지음

차례 제1장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화의 역사와 전망/

김회권

제2장 독일의 내적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고 재길

제3장 중국 사회주의 체제 전환기 기독교의 역할과 과제/설충수 제4장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기 러시아의 교회-국가

-사회 관계/신범식 제5장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현실사회주의 체제 전환/이규영

제6장 헝가리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고재성 제7장 탈사회주의 전환 과정 중 교회의 역할/이 기홍

제8장 남북한 문화의 만남 이후를 준비하는 교회의 역할/임성빈
체제전환국의 경험과 북한 교육개혁 방안

한울아카데미 / 2012.9.28 발행

이장로·김병로 엮음 김병로·신효숙·김신규·김면·박영진·이성준 지음

차례 제1장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의 교육개혁 경험 제2장 동유럽의 교육개혁 경험과 그 의미 제3장 독일의 교육 통합 경험과 그 시사점 제4장 중국의 교육개혁 경험과 북한에 주는 시사점 제5장 베트남의 교육개혁 경험과 변화 제6장 북한 교육 실태와 남북 교육협력의 경험 제7장 체제 전환 시 북한 교육개혁 방안

평화와 반평화 : 평화인문학적 고찰

프리칭아카데미 / 2013.2.16 발행 김선욱·심혜영·서경석·이해완·전우택·이국운·박정수·김 회권 지음

차례 제1부 철학과 문학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1장 평화와 반평화 : 평화의 윤리학적 조건/ 김선욱

제2장 반평화적인 삶의 문화와 그 근저/심혜영 제3장 한국문학을 통해 본 이웃 사랑의 철학/서 경석

제2부 제도의 관점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4장 폭력의 내면적 원인과 평화의 내면적 토 양/이해완

제5장 인간의 공격성과 한반도의 평화/전우택 제6장 민주적 연방주의와 평화/이국운

제3부 성서의 관점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7장 초기기독교의 '반-유대주의' 담론과 평화

의 문제/박정수 제8장 역대기의 민족화해 사상/김회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새물결플러스 / 2014.11 발행

전우택 대표저자 윤덕룡·이해완·이문식·조동준·고재길·심혜영 ·임성빈·오준근 공동저자

차례 서문 김지철 소망교회 담임목사 제1장 통일과 통일비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 윤덕룡

제2장 통일의 목적과 방법 및 그 준비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이해완

제3장 하나님 나라와 한반도 평화 / 이문식 제4장 평화협정 논의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조동준

제5장 반공이데올로기의 문제와 화해의 신학 / 고재길

제6장 북한을 이해하는 여섯 가지 키워드와 기독교적 성찰 / 전우택

제7장 하나됨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심혜영 제8장 세대 갈등과 통일에 대한 성찰 / 임성빈 제9장 지방분권과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

오준근
통일한국의 교육비전

한울아카데미 / 2014.11 발행

이장로 엮음 김창환·정병오·신효숙·박상진 지음

차례 제1장 선진국의 교육 가치 및 제도와 정책 / 김창환 제2장 남한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정병오 제3장 북한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신효숙 제4장 통일한국의 교육 비전, 철학, 제도 및 정책

/ 박상진

남북한 경제통합 : 전략과 정책

한울아카데미 / 2015.11 발행

이장로·김병연·양운철 엮음 김병연·박영철·박진·양운철·이상준 지음

차례 제1장 남북 경제통합전략의 기본 방향 / 박진 제2장 체제전환과 경제통합 / 김병연 제3장 남북한 경제통합과 북한 기업소 사유화 방안 / 양운철

제4장 토지 부분의 통합정책과 과제 / 박영철 제5장 인프라부문 - 남북 경제통합과 북한 인프라 개발의 과제 / 이상준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홍성사 / 2016.11월 17일 발행

전우택 대표저자 이창호·이윤주·이해완·임성빈·양혁승·이상민·김병로·김중호·조 동준·정성철·박원곤 공동저자

차례

1부 : 총론

1장 기독신앙과 평화 / 전우택

2장 사랑, 평화를 일구는 삶의 윤리적 기초 / 이창호

2부 : 개인의 삶과 평화

3장 가정의 평화와 그리스도인의 삶 / 이윤주 4장 한국 사회의 평화와 그리스도인의 삶: 피스메이커 의 길 / 이해완

3부 : 교회와 평화

5장 그리스도와 평화! 그리스도인과 평화?: 한국교회 와 평화에 대한 신학적 소고 / 임성빈 6장 교회 내 평화에 대한 구조적 접근 / 양혁승

7장 교회 안의 갈등과 해결방안 / 이상민

4부 : 한국사회와 평화

8장 한국사회의 이념갈등: 평화적 공존의 길 / 김병로 9장 한국사회의 통합과 분열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 김중호

5부 : 국제사회와 평화

10장 전쟁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까? / 조동준 11장 전쟁과 평화: 기독교, 민주주의, 시장경제 / 정성 철

12장 동북아 안보 환경과 평화: 기독교적 성찰과 방안 의 모색 / 박원곤










제55회 KPI 평화포럼 자료집 화해와 용서에 대한 성찰 Ⅰ

낸 날 | 2017년 10월 31일

낸 곳 | 사단법인 한반도평화연구원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층 502호 전 화 | 070-8611-7109 팩 스 | 03030-644-7109 이 메 일 | koreapeace@paran.com 홈페이지 | www.korea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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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용서가 대체로 이러한 개념요소들로 구성된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 는 것은 아니지만(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벌의 면제’가 용서의 개념에 포함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개념정의라 생각한다. 특히 이와 같이 네 가지 개념요소로 분석한 것은 칸트적 관점에 기하여 작성된 마가렛 홀름그렌의 글을 참

고한 것이다. Margaret R. Holmgren, “Forgiveness and the Intrinsic Value of Persons”,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 30, No. 4 (Oct., 1993), pp. 341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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